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9 ㅣ No.872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국문 초록

 

초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자신의 임지에 부임하지 못하고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샤를르 달레가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하였던 내용이 통설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즉 당시 중국 교회의 교구 조직 전반을 관할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해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 일로 말미암아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단히 어려운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급기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될 당시에 조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남경 교구장 겸 북경 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였다. 많은 교회사 서술들을 살펴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주교 사이에 모종의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인접 국가들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교황청이 포르투갈 국왕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한, 즉 선교상의 보호권(patronatus)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조선 지역을 독립된 대목구로 선포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내심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1773년 글레멘스 14세 교황이 예수회를 해산한 뒤에 아시아 지역의 선교지 상황은 대단히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통킹, 샴, 중국 사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북경의 북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서만자로 근거지를 옮긴 프랑스 라자로회, 북경의 남당과 남경, 마카오 등지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라자로회, 복건에서 활동하던 에스파냐 도미니코회, 산서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등 여러 선교 단체들 사이의 친소(親疎)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고 하겠다. 심지어 동일한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알력과 갈등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태도를 단지 보호권 수호를 위한 방해 책동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1. 서론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승훈이 북경의 북당에서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동료들에게 대세를 주고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지기 시작한 1784년을 역사적 기점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1776년 무렵 천진암에서 열렸던 권철신 문하 남인 계열 유학자들의 강학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학술적으로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에 이승훈과 그의 동료들이 주축을 이룬 1784년 집회가 실질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라는 견해가 주류적인 입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지만 선종한 최석우 몬시뇰은 1961년에 쓴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1831년 조선 대목구의 설정이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시발점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1) 교회의 설립이란 교계제도의 설정을 전제로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만큼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 대목구를 독립적인 교회 조직으로 선포하고 초대 대목구장을 임명한 사실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초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자신의 임지에 부임하지 못하고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상세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샤를르 달레가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하였던 내용이 통설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즉 당시 중국 교회의 교구 조직 전반을 관할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해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 일로 말미암아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단히 어려운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급기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가로막은 결정적인 장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나아가서 그러한 장애의 근본적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본다. 물론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대목구가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대비책들을 미리 강구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공헌이었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대목구를 관할하도록 파리와 로마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청원서를 보낸 것, 사천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앵베르 신부를 자신의 후임자로 지명한 것, 나아가서 요동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달라고 청원함으로써 향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전진 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 그러한 안배였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 안팎에서 진행하고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기념사업이 미구에 시복시성 청원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의 사망 경위와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비운의 병사를 초래한 요인들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활동과 선종이 한국 천주교회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제대로 밝힌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덕과 공적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본고에서 주목하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될 당시에 조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남경 교구장 겸 북경 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였다. 많은 교회사 서술들을 살펴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주교 사이에 모종의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인접 국가들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교황청이 포르투갈 국왕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한, 즉 선교상의 보호권(patronatus)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조선 지역을 독립된 대목구로 선포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내심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1773년 글레멘스 14세 교황이 예수회를 해산한 뒤에 아시아 지역의 선교지 상황은 대단히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통킹, 샴, 중국 사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북경의 북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서만자로 근거지를 옮긴 프랑스 라자로회, 북경의 남당과 남경, 마카오 등지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라자로회, 복건에서 활동하던 에스파냐 도미니코회, 산서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등 여러 선교 단체들 사이의 친소(親疎)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고 하겠다. 심지어 동일한 선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알력과 갈등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태도를 단지 보호권 수호를 위한 방해 책동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하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여정이 펼쳐졌을 때에 마카오, 남경,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일차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나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 및 기타 주변 인물들의 반응까지도 다룰 것이다.2)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중국을 통과하여 조선으로 가려고 노력하였는지, 이에 대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점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과 선종이 지닌 의의를 규명하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 중국 여정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조선 천주교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선교사와 포르투갈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벌어질 소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이었다.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하던 당시인 1790년에 구베아 주교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예수회가 해산되고 북경교구가 새로 재편되어야 하는 시점에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자주 갈등이 벌어지자 이를 중재하여 북경교구를 안정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리스본 궁정의 제청과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얻어서 북경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북경교구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재건한 뒤에 조선 천주교회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 사실을 로마에 보고하면서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첨부하였다.

 

북경에는 포교성 소속 선교단과 프랑스 선교단, 그리고 포르투갈 선교단 등 세 선교단이 있습니다. 아마도 포교성에서는 조선 선교를 담당하는 일을 이 세 선교단 가운데 한 곳에 맡길 것입니다. 만일 포교성에서 포교성 소속 선교사들에게 조선을 관할하는 일을 맡긴다면, 평화의 중개자인 포교성 측에서는 저희 교구의 평화가 깨질까봐 두려워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포르투갈 선교단에서는 리스본 당국이 이 새로운 선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저로서는 포르투갈 선교단한테 조선 선교를 맡아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고 또한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만일 포교성에서 조선 선교를 담당하는 일을 북경에 있는 프랑스 선교단에게 맡길 경우 성교회에 해가 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으며, 아울러 포르투갈 당국에서 항의할 것이기 때문에 북경교구의 평화를 자칫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저는 정말로 두렵습니다.3)

 

구베아 주교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구베아 서한의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포르투갈 예수회원과 프랑스 예수회원 사이의 평화가 깨져 버렸다고 말한다. 특히 프랑스 사람들은 포르투갈 교구장의 관할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요동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킨 다음에 북경의 자금성 내에 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과 병합하여 독립된 교구를 설치하고, 그 관할권을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로마에 보낸 것이다. 이 시도에는 루이 16세가 직접 관여하였다.4) 이런 점 때문에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북경교구의 재치권을 축소시키고 그 공백 지대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0년 뒤인 1824년 무렵 정하상과 유진길 등 조선인 교우들이 북경을 거쳐서 로마 교황에게 보낸 성직자 청원 서한의 여파로 조선 천주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서 조선 대목구가 설치되고, 첫 대목구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샴 대목구 소속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된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1829년 5월 19일 파리 본부에 보낸 조선 선교 청원 서한, 그리고 같은 6월 9일 포교성성에 보낸 동일한 내용의 서한 등이 교황청에 조선 선교 문제의 해법을 제시한 덕분이었다.5)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1832년 7월 25일 페낭 신학교에 체류하면서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교황 칙서를 직접 수령한 것이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파리 본부에서 뒤부아(Jean Antoine Dubois, 1766~1848) 신부가 보낸 편지를 읽고 알게 된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조선 선교의 길이 열렸으니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달려가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교황 칙서를 직접 수령하는 일, 그리고 조선 선교지를 담당했던 전임 관할권자와 조선인 교우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는 일이었다.

 

교회법에 따르면 임명장을 받는 것만으로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으며, 우선 법적인 취임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새로 대목구장에 임명된 자는 자신의 임명장을 친히 또는 대리인을 통해서 그 지역을 통할하던 자에게 제시함으로써 법적으로 취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설된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경우에는 그때까지 재치권을 행사하던 북경 교구장에게 임명장을 제시하는 절차가 필요한 셈이다.6) 이러한 절차를 준수하기 위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을 떠나 마카오로 향한다. 물론 함께 조선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샤스탕 신부는 추후에 일이 잘 풀리면 그때 가서 부르겠다는 말과 함께 페낭 신학교에 남겨 놓은 채였다.

 

페낭을 출발하여 싱가포르, 마닐라 등을 경유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상륙하였다. 포교성성 대표부를 찾아간 브뤼기에르 주교는 움피에레스 신부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를 떠나서 포교성 파견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으로 가려 하는 것으로 알고, 파리 본부에서는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Pierre Louis Legregeois, 1801~1866) 신부에게 브뤼기에르 주교를 영접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1832년 10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를 찾아간 브뤼기에르 주교는 르그레주아 신부로부터 관련 칙서들을 수령하고, 파리 본부의 오해를 풀기 위하여 1832년 11월 9일에 로마 포교성성으로 조선 대목구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맡도록 힘써 달라는 청원의 서한을 보냈다.7) 그리고 이튿날인 1832년 11월 10일에는 따로 파리 본부로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가려 하며, 한 번도 파리 외방전교회를 탈퇴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8) 아울러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1월 18일 북경 교구장 피레스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선인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연락원 왕 요셉에게 주면서 북경으로 전달하도록 명령하였다.9) 이제 남은 일은 조선으로 가는 길을 정하는 문제였다.

 

출발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습니다. 산서를 거쳐서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강남을 거칠 것인가? 움피에레스 신부는 이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것을 약속했던 성 요셉 신학교의 신부들은 내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자 약속 이행을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10)

 

여기서 성 요셉 신학교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미오(Louis Francois Marie Lamiot, 1767~1831) 신부가 북경에서 활동하다가 1819년 추방되어 마카오에 왔을 때 포교성성 관할로 세운 신학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 요셉 신학교의 신부들이란 마카오에서 활동하던 라자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을 가리키며, 당시 마카오에는 포르투갈 출신과 프랑스 출신의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하면서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런데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조선 대목구가 설립되고 그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가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애초에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움피에레스 신부가 주선하여 남경을 거쳐서 여행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출발하기 며칠 전에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superieur) 신부가 방문하였다. 당시 마카오에 체류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로는 레테(Joaquim Jose Leite, 1764~1853) 신부, 페레이라 데 보르자(Nicolao Rodriguez Pereira de Borja, 1777~1845) 신부,11) 페레이라 데 미란다(Jose Joaquim Pereira de Miranda, 1776~1856) 신부, 곤살베스(Joaquim Alfonso Goncalves, 1781~1841) 신부, 바로스(Luiz Manoel de Barros, 1776~1845) 신부 등이 있었고, 프랑스 선교사로는 토레트(Jean Baptiste Torrette, 1801~1840) 신부가 있었다.12) 브뤼기에르 주교를 방문한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 신부는 아마도 레테 신부나 페레이라 데 미란다 신부, 두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레테 신부는 1801년부터 마카오에서 활동하였고, 1808년에 교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란다 신부는 1803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성 요셉 신학교의 교수로 때로는 교장으로 줄곧 활동하다가 1833년에 마카오 교구장에 지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1832년 연말 무렵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었던 인물은 레테 신부 또는 미란다 신부였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방문한 성 요셉 신학교 교장 신부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입회하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여정을 허가하였다. 즉 곧바로 남경으로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다만 나중에 올 선교사들은 영국인들이 조선으로 갈 때 선택했던 바닷길처럼 육로가 아닌 다른 길을 개척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면서 교장 신부는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영국인들이 들렀던 강과 항구가 표시되어 있었다.13) 아마 브뤼기에르 주교나 조선으로 갈 다른 동료 선교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여행 정보가 담겨 있었

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가는 경로의 일부를 확정하였다. 먼저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남경으로 간다는 것이다. 직접 갈 수 있는 배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복건 대목구장 카르페나 디아스(Carpena Diaz, 1760~1849) 주교의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복건 대목구장 주교관이 있는 곳으로 간 다음에 다시 배를 갈아타고 남경으로 갈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남경에는 북경에 머물던 남경 교구장 피레스 주교가 1831년에 남경교구 총대리로 임명한 포르투갈 라자로회 카스트로 에 무라(Castro e Moura, 1804~1868) 신부가 있어서 안내인을 소개받는 등과 같은 여행상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어디로 갈 예정이었을까?

 

18세기와 19세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유럽 선교사들은 마카오에서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때에 대부분 육로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마카오에서 그대로 북상하여 광동성을 지나 호남성 또는 강서성을 거쳐서 호북성 무창부나 한양부에 도착한 다음에 사천, 섬서, 하남 등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여로가 아니면 마카오에서 아예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서 통킹에서 육로로 이동하여 운남을 거쳐 사천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해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복건성 복안이나 복주에 상륙한 다음에 다시 육로로 강서성 남창부까지 갔다가 무창이나 한양으로 이동하였다.14) 이러한 이동 경로의 중간 지점에는 대개 중국인 교우 마을들이 있어서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숙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경으로 가기로 한 것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여로에서 상당히 벗어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남경에서 북경을 거쳐서 만주로 가는 여로를 택한 것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움피에레스 신부가 1832년 12월 5일 포교성성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12월 17일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남경을 거쳐 관동(關東),15) 요동까지 대부분 바닷길을 이용할 것이라고 하였다.16) 하지만 실제로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Lyon)에 있던 《전교후원회 연보》(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편집자들에게 보낸 1832년 12월 14일 서한에 따르면, 조선으로 가는 방법에는 육로와 해로가 있는데, 해로를 사용하면 여정은 길지 않으나 거의 실행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조선과 무역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를 전혀 알지 못해서 갈 수 있는 배편을 확보할 수 없고, 또 설사 배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교우들은 내륙에 살기 때문에 해변에 도착하여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육로를 이용한다면 중국 전역을 종단해야 하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지나서야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17)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안전성과 확실성의 측면으로 볼 때 육로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1832년 12월 17일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복건으로 가는 배에 승선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약 3개월 뒤인 1833년 3월 1일 복건 대목구장의 거처가 있는 복건성 복안현(福安縣) 정두촌(頂頭村) 항구에 도착하였다.18) 복건 대목구장 카르페나 디아스 주교는 에스파냐 출신으로 도미니코회 소속이었다. 그는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는 길을 모색할 때에 복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초대하였던 것이다. 함께 복건으로 오는 배를 탔던 선교사 가운데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있었고, 그는 1833년 3월 9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1833년 3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항의서를 한 통 받았다. 그 속에는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행하여 중국 강남 지방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며, 강남 지방을 통과하도록 허락한 것은 오직 브뤼기에르 주교 개인에게만 국한된 사항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여행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아마 어느 포르투갈 선교사가 모방 신부의 결심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19) 오랫동안 유럽인이 한 명도 없었던 지방에 2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활보한다면 큰 사건이 벌어지거나 박해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런 편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하였다.20)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3년 4월 18일 서한에는 상당히 다른 논조의 글이 실려 있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지를 거쳐서 조선으로 가는 여행을 거북하게 여기며, 실제로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인지 더 이상 조선 선교사들을 도와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21)

 

게다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1833년 4월 20일 서한에서 자신의 안내인으로 동반하였던 ‘아중’(Ajoung)이라는 인물을 마카오로 돌려보내야만 한다고 적었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말을 너무 많이 하며 부정직하기 때문에 선교지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아중을 데리고 남경으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2)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를 쓰기 하루 전날인 1833년 3월 29일에 연락원 아중을 남경으로 데려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를 위반하면 총대리의 권한으로 자신의 연락원을 배에 억류하여 상륙하지 못하도록 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았다. 아마 이 일은 남경교구 총대리였던 카스트로 신부가 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를 당분간 복건에 머물게 하고, 안내인 아중은 마카오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3. 직예 교우촌 억류 사건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4월 27일 복안 항구를 출발하였다. 마오에서 복안까지 왔던 바로 그 배를 이용한 것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를 만났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복건 대목구장 주교의 편지를 휴대하였다. 복건 대목구장 카르페나 디아스 주교에게 안내인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배는 복건성 해안과 절강성 해안을 지나 절강성 북쪽에 위치한 사포(乍浦) 항구에 도착하였다.23)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이 바로 일본으로 가는 중국 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육지에 상륙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배를 임대하여 운하로 들어갔다. 몇 군데 교우 집을 거쳐서 소주(蘇州) 부근에 이르렀다.24) 1833년 5월 18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막 숙소를 정했을 때 카스트로 신부가 찾아왔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을 한 명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카스트로 신부는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 안내인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나는 산동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짐을 그 지방으로 부쳤습니다만 나와 동행하려는 사람을 하나도 구할 수가 없군요. 그래서 저도 직예에 있는 안내인 한 명을 불러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25)

 

카스트로 신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북경에 있던 남경 교구장 피레스 주교가 그를 북경교구 총대리로 임명하여 산동에서 활동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스트로 신부 자신은 1833년 11월 2일이 되어서야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보면 카스트로 신부 본인도 안내인을 구하기 어려웠으며, 심지어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훨씬 뒤에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방 신부의 동반을 거절한 것이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인 안내자 아중의 남경 체류를 금지한 것 등을 보자면, 복건 대목구장의 바람과는 달리 카스트로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라 하겠다.26)

 

물론 남경교구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과거 마카오의 성 요셉 신학교에 재학한 적이 있던 45세가량의 남자를 안내인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카스트로 신부까지 나서서 설득하였지만 북경 인근의 직예까지 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 거절하고 말았다. 대신에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이 나서서 중국 전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노인에게 길 안내를 맡아줄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그 노인은 승낙하였다.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서 북경으로 파견하였던 왕 요셉이 1833년 6월 26일 강남 지방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찾아왔다. 이리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인 수행원은 2명이 되었다. 또한 왕 요셉이 가지고 온 피레스 주교의 편지에는 자신의 선교사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급해줄 것과 만주까지 갈 수 있도록 안내인을 구해주라는 명령이 들어 있었다. 이에 활기를 띤 브뤼기에르 주교는 안내인이 3명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왕 요셉이 나서서 라틴어를 할 줄 알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40세가량의 남자에게 의사를 타진하였고, 가까스로 승낙을 받았다. 이렇게 3명의 안내인을 구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7월 20일 북경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27)

 

운하와 양자강을 이용하여 이동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남경 부근을 지나서 1833년 7월 31일 배에서 내려 육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28) 그 뒤 브뤼기에르 주교는 약 2주 동안 절강성에서 시작하여 산서성 경계까지 펼쳐진 평야 지대를 도보로 여행하였다. 안휘성과 하남성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여로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여로가 약 3,000리가량이었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에 1833년 8월 13일에 황하를 건너 산동성으로 들어갔다. 결국 1833년 8월 26일 극도로 피로에 지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동과 직예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착하여 어느 교우 마을에 유숙할 수 있게 되었다.29) 그때까지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1개월 동안 교우 마을을 방문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주막을 만나면 외교인의 눈을 피해서 잠시 머무는 정도의 휴식밖에 취하지 못했다.

 

한여름에 중국 남부 지역을 종단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 있던 움피에레스 신부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공동으로 보낸 1833년 8월 28일 서한에서야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렸다. 심한 고생과 위험을 겪은 뒤에 가까스로 1833년 8월 26일 산동과 직예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교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30)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쉰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내 병이 나서 3주 동안 몸져누워야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원기를 회복하자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서양인은 아무도 없는 중국 남부 지역을 통과한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이 해당 지역에서 일대 혼란을 야기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하였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이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머물던 교우 마을의 사람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여행을 계속하여 북경이나 만주로 가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큰 위험을 초래한다고 보아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거나 산서, 호광, 마카오로 갈 것을 종용하면서 더 이상 브뤼기에르 주교를 돌보기를 원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하고 1833년 9월 3일 연락원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함께 따라간 왕 요셉은 교우 마을 사람들이 피레스 주교에게 가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돕지 못하도록 만류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결국 1933년 9월 22일에 북경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피레스 주교의 편지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그 속에는 산서로 가라는 피레스 주교의 전갈이 들어 있었다.31)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동과 직예의 경계에 위치한 교우 마을에서 약 1개월 정도 체류하였다. 처음에는 병을 치료하고 몸을 회복하느라 머물렀지만, 나중에는 교우 마을의 사람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이 일은 나중에 피레스 주교의 지시를 받은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강제로 억류하였다는 식으로 와전되었다. 사실 피레스 주교를 비롯하여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의 여정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인 신자들 뒤에서 배후 조종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억류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평가는 의외로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입에서 나왔다. 즉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도착한 뒤인 1838년 11월 24일 마카오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북경 교구장 서리였던 남경 주교(피레스 주교)가 갑사의 주교(브뤼기에르 주교)께서 행하시던 여행을 방해하고, 북경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던 그를 거의 죄수처럼 구금하게 했다고 말하고 글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정신 나간 중국인 신부가 한 달 동안 갑사의 주교를 사제관에 붙어 있는 작은 채소밭에도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자기 숙소에 붙잡아 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중국인 신부는 북경 주교 모르게 중국인 특유의 소심한 공포심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갑사의 주교께서는 북경 주교(피레스 주교)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만약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조정의 허락 없이 몰래 북경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면, 북경 시내의 못된 교우들 때문에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로 우회하여 서쪽 지방과 만주 지역을 거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신 나간 중국인 신부는 몇 달 뒤에 북경으로 소환되어 성무 집행 정치 처분을 받았습니다.32)

 

위의 인용문을 보면 당시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여정에 대해서 피레스 주교를 비롯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비협조를 넘어서 직접적인 방해를 하였다는 식의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그러한 인상을 심어 줄 여지가 있는 언급도 여러 차례 하였다.33)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피레스 주교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에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중국인 관리들의 감시, 박해를 유발할 소지가 있는 요소들에 대한 우려, 선교지의 인적 · 물적 자원 부족 등과 같은 상황적인 요인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므로 결코 노골적인 방해책동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4년 9월 2일 서한에서 색다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브뤼기에르 주교 외에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나서면서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모한 중국 여정,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서 조선으로 가겠다고 나선 두 신부의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크나큰 반감을 초래하였다고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였다.

 

포교성성에서는 선교지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하여 주교님 혼자서 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가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주교님이 떠나기 전에 이미 그 점에 대해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교님의 원정은 중국의 모든 선교지들과 조선에까지 위험 신호를 울렸습니다. 사방에서 어떻게 포교성성과 그 대표부를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주교님의 두 협력자가 파치피코 신부의 입국을 기다리며 복건에 남기만 했어도 그들을 돕기로 한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일이 더 조용하게 그리고 더 안전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34)

 

결국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으로 들어가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1833년 9월 29일 산서를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십여 일 뒤인 1833년 10월 10일 산서 대목구장의 거처가 있던 곳에 도착하였다.35) 당시 산서 대목구장이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요아킴 살베티(Joachim Salvetti, 1796~1843) 주교가 살던 곳은 산서성 태원부(太原府) 기현(祁縣) 구급촌(九汲村)이었다.36) 포르투갈 선교사들과는 달리 살베티 주교와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산서 체류를 환영하였고,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년 정도 산서에 머물면서 조선 교우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에 체류하던 당시에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4년 9월 20일 서한에서 포르투갈 선교사, 특히 피레스 주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관해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조선 대목구장으로서 중국 지역을 여행하면서 중국 교회의 직권자로부터 허락받아야 하는 성사 관련 허가 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타 교구 지역을 다닐 때 미사를 거행하고, 고백성사를 줄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한데, 피레스 주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어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저는 저와 함께 길을 가거나 조선 가까이에서 저와 함께 거주하게 될 사제들과 교우들의 고백을 듣고, 그들에게 성사를 집전할 특별 권한을 청합니다. 또한 제 사제들도 저에 대하여 같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청합니다. 거기에서는 다른 사제들을 거의 찾지 못할 것이고, 때로는 갈 수 있기는 하지만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권한을 지극히 저명한 남경 주교님께 청하였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문제들에는 대답하였지만, 그 청원에는 깊이 침묵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저는 미사를 거행할 허가를 청합니다. 사실 사제를 모시고 있기가 어려워 여러 해 동안 미사에 참석하거나 고백성사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37)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 지역을 여행하면서 주교로서 가장 기본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마저 피레스 주교로부터 허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보다 훨씬 더 엄격했던 트리덴틴 예법의 전례 규범에 따르자면 재치권자의 허가 없이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비협조적 태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로 하여금 피레스 주교가 소극적인 방해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산서에서 조선 교우와의 교섭을 진행하고자 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1834년 10월 8일 북경과 더 가까운 서만자로 옮겨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하였다.38) 당시 서만자는 북경의 북당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개척한 선교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같은 프랑스 사람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만자 체류를 쉽게 허락하였고,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기 위하여 단행한 중국 여정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보통 유럽인 선교사들이 부임지로 가기 위하여 사용하던 육로는 대개 교우 마을들을 거점으로 삼아 연결한 여정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며 또한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택한 길에는 교우 마을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어디에 교우 마을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충분한 정보를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얻지 못한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여행을 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마카오의 성 요셉 신학교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선교사,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 남경에 있던 카스트로 신부 등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대해서 유보적인 입장 내지는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는 입장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로 인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대해서 갈수록 의혹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결론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달레의 저서를 필두로 하여 기존의 많은 연구도 이 점을 거론하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사료를 통해서 그 사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물론 누구의 잘잘못을 규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사태의 전모를 밝히고 그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서 가졌던 생각과 행했던 활동들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적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본론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최초로 조선 선교를 청원한 서한의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고, 또 브뤼기에르 주교가 절강성 북쪽 해안에 상륙할 당시에 이용한 항구의 이름이 사포였다는 사실도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비정(比定)하였다. 뿐만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여정에 대해서 포르투갈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움피에레스 신부, 심지어 르그레주아 신부까지도 불안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음을 사료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온갖 장애를 돌파하려고 노력한 것을 순전히 브뤼기에르 주교 개인의 신념과 의지에서 나온 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여정이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순탄하지 못했다는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태의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 대목구장의 환대를 받으면서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이후로 여정에서 그다지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즉 그에 앞서서 조선으로 입국한 여항덕 파치피코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주선하는 문제에서 석연치 않은 행적을 보인 것이나, 요동 지역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달라는 요청을 피레스 주교가 거절한 것 등은 지속적으로 포르투갈 선교사, 특히 북경에 있던 피레스 주교와 갈등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피레스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한 조선 대목구 소속 선교사들의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에는 일견 이유가 있었다. 루이 16세의 봉천교구 설립 청원 때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은 요동으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요동에 국한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요동과 조선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일본으로 가려는 시도였는지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이 포르투갈의 아시아 영향력이 이미 쇠퇴한 상태에서 더 많은 권한과 더 넓은 활동 무대를 갖고자 원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포교성성 역시 보호권을 축소하고 포교성성이 직접 관여하는, 혹은 포교성성의 방침에 충실한 프랑스 선교회들이 관할하는 영역을 넓히는 데에 어느 정도 이해관계를 함께하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러한 사태의 맥락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가지고 있었던 활동 방침은 철저히 포교성성의 지침을 충실히 실행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즉 자신이 교황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에 대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오히려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언행에 대해서 우려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큰 분란을 초래하지 않고 사태를 풀어가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르그레주아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격이 무모하고 타협을 잘 모르는 유형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때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샴 대목구로 복귀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환영하기도 했던 것이다. 르그레주아 신부는 서만자에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5년 5월 24일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더 이상 무모하게 조선 입국을 감행하지 않고 마카오를 거쳐서 샴 대목구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며, 1834년 3월 30일 플로랑 주교가 선종하면서 후임자가 된 쿠르베지(Jean Paul Courvezy, 1792~1857) 샴 대목구장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부주교로 다시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의향을 전달하였다.39)

 

만약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벌였던 갈등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조선 선교 계획을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거슬러서 그 반대편의 역사를 가정한다는 것이 무리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반대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1831년 9월 9일에 내려진 조선 대목구 설정 및 대목구장 임명 칙서를 이행하려는 노력을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면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앞서서 조선으로 들어간 여항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의향과는 무관하게 본인의 재량에 따라서 피레스 주교를 장상으로 여기면서 조선인 신자 가운데 신학생을 선발하여 국경 지대에 신학교를 세울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북경 교구장의 재치권 아래에 있던 요동 지역도 새로운 대목구로 독립할 가능성이 희박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항덕 신부의 장상 항명 문제나 요동 지역 분할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벌였던 갈등에서 또 다른 쟁점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참고 문헌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t. 6, 1834, n. 35.

Archives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 v. 321 ; v. 577 ; v. 579 ; v. 1254.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OCP, v. 76 ; Fondo Acta C.P. vol. XXII ; Procura(Canton/Macao/Hong Kong), v. 20.

 

수원교회사연구소 엮음,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이석재, 《중국천주교회와 조선천주교회의 연계 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6.

정진석, <초기 한국교회의 교계적 구조의 역사와 그 해설>, 《신학전망》 55, 광주가톨릭대학교, 1981.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 - -,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김성태 신부 고희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피에르 엠마뉘엘 후, <조선 架橋의 재발견 : 16-19세기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진출 전략에 대한 기초연구>, 《연민학지》 16, 201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조선교구 역대 교구장 문서 제1집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Gutzlaff, Charles,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近世 東亞細亞 西洋語 資料叢書 14》, 경인문화사, 2000).

Roux, Pierre-Emmanuel, La Trinite Antichretienne : Essai sur la Proscription du Catholicisme en Chine, en Coree et ay Japon(XVIIe-XIXe Siecles), These de Docteur en Histoire et Civilisations, EHESS, 2013.

van den Brandt, J., Les Lazaristes en Chine 1697-1935, Notes Biographiques, Pei-Ping : Imprimerie des Lazaristes, 1936.

 

松浦章, <淸代浙江乍浦における日本貿易と沿海貿易の連關>, 《東アジア文化交涉硏究》 創刊號, 關西大學校, 2008.

 

-------------------------------------------- 

 

1)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56쪽.

 

2) 이 글에서 사용할 사료들은 주로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와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문서고 한국 관계 문서철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다행한 일은 이미 한국 교회에서 관련 문서 자료들을 복사하여 국내로 반입하였기 때문에 굳이 파리나 로마에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파리 문서고와 로마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한국 천주교 관련 문서들을 한국에서도 손쉽게 볼 수 있도록 해놓은 인물은 바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담당으로 재직한 바 있는 최승룡(테오필로) 신부이다. 그의 공헌으로 말미암아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은 해외 사료들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2000년 12월 6일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 그분을 처음 뵈었다. (내 자료 노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자료 복사를 위하여 방문하셨다가, 추운 겨울 문서고 열람실에서 선교사 서한들을 공책에 베껴 쓰고 있는 필자를 보고 무척 안쓰러웠는지 직접 복사를 해 주기도 하시고, 또 이미 한국으로 복사해 간 서한들을 다시 제본하여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하셨다. 한국 천주교회사 해외 사료의 국내 도입과 관련하여 최승룡 신부께서 이룬 공적은 영원히 기억될 만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얼마 전 최승룡 신부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천주께서 사랑을 베푸시어 반드시 병마를 이겨내고 쾌차하시리라 믿는다.

 

3)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 서한(SOCP 67, 474v),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55쪽에서 재인용.

 

4) 이석재, 《중국천주교회와 조선천주교회의 연계 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6, 117쪽.

 

5)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본부에서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을 망설이고 있거나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를 대어 시간을 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1829년 5월 19일 서한을 통해서 파리 본부의 안이한 태도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면서 자신이 조선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원의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이 서한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샤를르 달레가 자신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소개한 내용만으로 5월 19일 서한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며, 그 서한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을 벌인 적이 없었다. 기존 교회사 연구자들이 달레의 서술을 자명하게 믿었던 탓이기도 하거니와,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의 한국 관계 문서철에 그 서한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도 원본 발견 노력이 미흡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그런데 최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강석진(요셉) 소장 신부의 노력으로 1829년 5월 19일 서한 원본이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고의 샴 대목구 문서철에서 발견되었다. 이 서한 원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달레의 저서에 나와 있다는 서한 내용과 원본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지, 누락된 부분 가운데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이 들어 있지나 않은지 등등에 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게 되리라고 본다.

 

6) 정진석, <초기 한국교회의 교계적 구조의 역사와 그 해설>, 《신학전망》 55, 광주가톨릭대학교, 1981, 2~40쪽 참조.

7)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SOCP, v. 76, f. 23.

8) AMEP : v. 577, ff. 241-246.

9) AMEP : v. 579, ff. 91-93.

 

1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조선교구 역대 교구장 문서 제1집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83쪽. 이하에서는 혼동의 우려가 없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로 약칭함.

 

11) 1841년에 리스본 궁정에 의해서 마카오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12) J. van den Brandt, Les Lazaristes en Chine 1697-1935, Notes Biographiques, Pei-Ping : Imprimerie des Lazaristes, 1936, pp. 18~35.

 

13) 이 말은 귀츨라프 일행이 조선 연안을 방문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프로이센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Gutzlaff, 1803~1851)는 네덜란드 선교회의 도움으로 1820년대 말부터 샴,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3차례에 걸쳐서 동남아시아, 북중국, 한반도 서해안 지역을 탐사하였다. 특히 1832년 2월 25일에 마카오에서 출발한 제2차 탐사에서 귀츨라프는 동인도회사의 통역관 자격으로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에 승선하였고, 1832년 7월 한반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1개월 동안 조선인과 접촉하였으며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아마 귀츨라프 일행의 항해 여정에 대한 정보가 이미 1832년 연말 마카오의 선교사들에게도 알려졌던 모양이다. 귀츨라프가 1834년에 발간한 여행기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여로와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Charles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近世 東亞細亞 西洋語 資料叢書 14》, 경인문화사, 2000).

 

14) Pierre-Emmanuel Roux, La Trinite Antichretienne : Essai sur la Proscription du Catholicisme en Chine, en Coree et ay Japon(XVIIe-XIXe Siecles), These de Docteur en Histoire et Civilisations(EHESS, 2013), p. 96.

 

15) 산해관 동쪽 지역을 말한다.

16)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Fondo Acta C.P. vol. XXII, 45v.

17) APF, t. 6, 1834, n. 35, pp. 543~551.

 

18) 브뤼기에르 주교가 도착한 복건 대목구장 거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건 체류>,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19)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마카오에서 복안으로 갔다가 3월 말에 남경으로 떠난 포르투갈 선교사가 있었다. 바로 포르투갈 라자로회 헨리케스(Henriquez, 1804~1901) 신부이다. 아마 헨리케스 신부가 남경에 도착하여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를 만났을 때 복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따라서 조선으로 가겠다고 나선 일도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헨리케스 신부는 1833년 연말에 카스트로 신부의 후임으로 남경교구 총대리가 되었다. 하지만 4년 만인 1837년에 병에 걸리는 바람에 마카오로 돌아갔다.

 

2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01~103쪽.

21) SOCP, v. 76, ff. 197-198.

 

22)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oli, Archivio Storico : Archivio della Procura(Canton/Macao/Hong Kong), v. 20, ff. 146-147.

 

23)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 항구의 이름을 ‘Hia pou’라고 적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23쪽). 지금까지 이 항구의 정확한 중국 명칭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Hia pou’라는 글자가 중국어 로마자 표기법 가운데 ‘EFEO’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절강성 북부 해안 지역인 영파부(寧波府) 하포진(霞浦鎭)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김성태 신부 고희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69~72쪽). 그런데 최근 다른 연구 성과를 접하고서 필자의 추정이 오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모두 절강성 북쪽 항구에 기착하였는데, 그곳은 18세기 중반부터 대일본 교역의 핵심 기지로서 절강성 가흥부(嘉興府) 평호현(平湖縣)에 있던 사포(乍浦, Zhapu) 항구라는 것이다(피에르 엠마뉘엘 후, <조선 架橋의 재발견 : 16-19세기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진출 전략에 대한 기초연구>, 《연민학지》 16, 2011, 220~221쪽). 사실 항구에 상륙한 이후에 운하를 이용하여 이동했다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하포진에서 영파부 여요현(餘姚縣)으로 가서 항주(杭州)까지 이어지는 작은 운하를 탄 다음에, 다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이용하여 양자강으로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2013년 7월에 실제로 답사해 보니 너무 먼 거리였다. 대신에 사포 항구에서 운하를 이용하여 소주(蘇州) 부근을 지나서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렇게 많은 시일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안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처음 도착한 절강성 항구는 하포진이 아니라 사포일 가능성이 높다. 청대 절강성 사포상에서 이루어진 일본 무역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것(松浦章, <淸代浙江乍浦における日本貿易と沿海貿易の連關>, 《東アジア文化交涉硏究》 創刊號, 關西大學校, 2008, pp. 143~157).

 

24) 최석우는 왕 요셉의 편지에 근거를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3년 6월 26일 소주에서 왕 요셉과 다시 만났다고 하였다(최석우, 앞의 책, 142쪽).

 

2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31~133쪽.

 

26) 그 뒤 카스트로 신부는 1838년에 북경 교구장 서리가 되었다가 1841년 2월 25일 리스본 궁정에서 그를 북경 교구장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포교성성에서는 그를 클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 명의의 주교 겸 직예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즉 포교성성이 북경교구에 대한 포르투갈 보호권을 취소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던 카스트로 주교는 북경 주교좌에 착좌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총대리 자격으로 계속 북경 교구장 서리직을 수행하다가 1847년 6월 15일 북경교구를 떠나 마카오로 돌아갔다(J. van den Brandt, Op. cit., p. 32).

 

27)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31~133, 141, 145~149쪽.

2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57~159쪽.

29)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69, 181, 193쪽.

30) AMEP : v. 577, f. 253.

31)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97, 201, 203쪽.

32) AMEP : v. 1254[폴리오 번호 불명], 수원교회사연구소 엮음,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239쪽에서 재인용.

 

33) 가령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에서 마카오의 움피에레스 신부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1833년 10월 28일 서한에는 자신이 직예 지방에 있을 때 억류된 적이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AMEP : v. 579, ff. 94-97.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사건을 벌인 장본인이 직예 지방 교우 마을에 거주하던 사제와 여러 교우였다는 말도 함께 전하고 있다.

 

34) AMEP : v. 321, f. 133.

3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03, 213쪽.

 

36) 산서 대목구장의 주교관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찾아서 산서를 떠돌다>, 78~95쪽 참조.

 

37) SOCP, v. 76, f. 408.

3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83쪽.

 

[교회사 연구 제44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종교학 전공 조교수)]



파일첨부

1,93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