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귀고 2세의 수도승들의 사다리: 관상생활에 대한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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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47

귀고 II세의 수도승들의 사다리


관상생활에 대한 서한

 

 

I. 서문

 

친애하는 게르바제(Gervase) 형제에게,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형제여, 저는 당신에게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먼저 저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4,10 참조). 그리고 지난번 편지에서 제게 회신을 부탁하였기에 저는 답장을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봉쇄 수도승에게 고유한 영적 수행들에 대해서 제 견해를 당신에게 써 보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런 영적 수행들을 체계화함으로써 알게 된 것보다 당신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제 생각들을 판단해 보고 바로잡아 달라는 의도에서 입니다.(히브 4,12 참조). 그러므로 제가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에게 우리 작업의 이 첫 결과들을 모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시편 143,12 참조). 그래야 당신은 파라오의 속박에서 당신이 칭찬받을 만큼 비밀스럽게 캐낸 그 어린 나무로부터 첫 열매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출애 13,14 참조). 그 나무는 파라오한테서 홀로 길러졌지만, 당신은 그것을 질서있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 자기 자리를 잡도록 만들었습니다(아가 6,3.9 참조). 예전에 당신은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정교하게 잘려진 가지를 훌륭한 정원사처럼 그 줄기에 접목시켰었습니다(로마 11,17.24 참조).

 

 

II. 사다리의 네 단계

 

어느날 저는 바삐 손노동을 하는 중에 우리의 영적인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영적인 수행의 네 단계가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그것들은 독서,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입니다. 이것들은 수도승들을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하나의 사다리를 만듭니다. 그 사다리는 계단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길이는 놀랍고도 엄청나게 깁니다. 왜냐하면 그 맨 끝은 땅에 내려져 있고, 그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집회 35,21) 천상의 신비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28,12 참조). 사다리의 계단 혹은 단계들은 분명하게 서로 다른 이름과 번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순서와 특성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단계들의 특성과 역할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예컨대 감각은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것들간의 차이점과 중요한 순서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는 여기에 어떤 수고와 걱정을 쏟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이 얻게 되는 도움과 위로에 비교해 볼 때 그것을 쉽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창세 29,20 참조).

 

독서는 자신의 온 힘을 집중하여 성서를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이성의 도움으로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입니다. 기도는 선을 얻게 하고 악을 멀리하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봉헌입니다. 관상은 그 마음이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그때 한없는 감미로움에 대한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네단계로 묘사한 것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와 관련하여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I. 4 단계들의 역할

 

독서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독서는 음식 자체를 입으로 넣는 것이고(1고린 3,2; 히브 5,12 참조), 묵상은 그것을 씹어 분해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맛보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으로 인해 힘을 얻고 활기를 띠게 되는 감미로움 그 자체입니다. 독서는 외부에서 그리고 묵상은 그 중심에서(시편 80,17; 147,14) 하는 것이며, 기도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우리가 발견한 그 감미로움에 대한 환희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가능한 예들 중 하나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IV. 독서의 역할

 

저는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8)라고 말하고 있는 구절을 듣습니다. 이것은 비록 짧은 성서 구절이지만 크나큰 감미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영혼을 양육하는 여러 감각들로 가득한 입속에 넣은 포도알과도 같습니다. 영혼이 그것을 주의깊게 검토할 때, 영혼은 자기 자신에게 '여기에 좋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중하고 원할만한 것이기에 저는 제 마음으로 돌아가(루가15,18 참조) 이 순수한 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복되다고 불립니다. 그것의 보상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칭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다 완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영혼은 마치 포도 짜는 기계가 포도를 짜듯이 이 포도알을 물고 씹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영혼은 이성의 능력을 일으켜 이 고귀한 순수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V. 묵상의 역할

 

묵상이 이 작업을 부지런히 수행할 때, 묵상은 이 작업 외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는 것들로 인해 사로잡히게 되지 않습니다. 묵상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문제의 핵심에로 다가가서 각각의 요점을 철저하게 파악합니다. 묵상은 성서 본문이 '몸으로 깨끗한 사람들은 복되다'고 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끗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마음이 불순한 생각들로부터 정화되지 않는다면, 악한 행실로부터 손을 씻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이며, 거룩한 그 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가? 그 손이 깨끗하고 마음 정한이니라'(시편 23,3-4)고 말할 때, 우리는 여기에 대해 예언자의 권위를 갖습니다. 또한 묵상은 예언자가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시편 50,12), 또 다른 곳에서 '내 나쁜 뜻을 품었었던들 주님은 아니 들어주셨으리라'(시편 65,18)고 기도할 때, 그가 이러한 마음의 순결을 얼마나 간절히 찾고 있는지 알아냅니다. 묵상은 거룩한 사람인 욥이 '나는 젊은 여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노라고 내 눈과 약속하였네'(욥 31,1)라고 말했을 때, 그가 얼마나 이러한 순결을 유지하려 애썼는가를 생각합니다. 이 거룩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보호했는지를 보십시오. 그는 헛된 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고, 아마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후에 그 자신을 경솔하게 경멸하는 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마음의 순결에 대해 그렇듯 숙고한 후, 묵상은 그 상급에 대해 그리고 그렇듯 간절히 갈망했던 '인간의 아들네보다 짝없이 아름다우신'(시편 44,3)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얼마나 환희에 차고 영광스러운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더 이상 멸시당하거나 퇴박맞지도 않고, 그분의 어머니가 그에게 입혀 준 지상적인 아름다움으로서가 아니라 '주께서 마련하신 날'(시편 17,24)인 그분의 부활과 영광의 날에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부여하신 왕관을 쓰고 불멸의 옷을 입고 계십니다. 묵상은 이 환시가 '나는 당신 영광이 드러날 때 충만해 지리라'(시편 16,15)고 예언자가 말하는 그 충만성을 어떻게 가져다 줄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당신은 하나의 작은 포도알에서 얼마나 많은 즙이 나오는지, 하나의 불꽃에서 얼마나 큰 불이 일어나는지,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니'라는 이 작은 쇳조각이 어떻게 묵상이라는 모루 위에서 망치질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참된 전문가의 손에서 더욱 훌륭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샘이 깊다'는 것은 느끼지만, 여전히 무지한 초심자입니다. 그리고 제가 발견한 것은 그 안에서 이 몇 방울의 물도 끌어 올리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요한 4,11 참조). 영혼은 이 점화를 통해 불이 붙고 그 화염이 이러한 욕망들로 부채질 될 때, 영혼은 감미로움에 대한 첫 번째 암시를 받습니다. 옥합이 깨어졌을 때, 아직 그것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단지 그 향기를 맡을 뿐입니다(마르 14,3 참조). 이것으로부터 영혼은 묵상이 그렇듯 충만한 기쁨으로 보여준 순결을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가 하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시편 33,9 참조).

 

그러나 영혼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혼은 갈망으로 타오르지만, 아직은 자기가 갈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갈망하면 할수록 영혼은 더욱더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묵상을 하는 동안 영혼은 그렇듯 오래 고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묵상이 보여주는 마음의 순결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마음의 순결이 줄 수 없는 그 감미로움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묵상이 보여주는 그 감미로움은 마음의 순결에 속해 있지만, 마음의 순결이 그 감미로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 감미로움이 위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요한 19,11), 독서나 묵상 중에 이 감미로움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 모두 독서와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교 철학자들조차 이성을 사용하여 가장 고귀하고 참된 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하느님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지 않았습니다'(로마 1,21).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찬양하여 노래 부르자. 우리의 말은 우리의 것이다'(시편 11,5). 그들은 자신들이 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은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들로 멸망하였다'(로마 1,21).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지혜는 삼켜져 버렸다'(시편 106,27). 그 지혜는 오직 참된 지혜를 주는 성령의 지혜가 아니라(Jm1,17 참조), 인간의 학문적 연구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지혜입니다. 성령의 지혜는 말하는 것을 뛰어 넘어 감미로움으로 영혼 안에 머물며 영혼을 기쁘게 하고 영혼에 활기를 주는 달콤한 맛을 내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에 대해 영혼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는 간악한 영혼 속에 들지 않을 것이다'(지혜 1,4). 이 지혜는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주님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임무를 맡기셨지만, 세례로서 죄를 사하는 능력과 권위는 오직 당신 자신에게 유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분이 세례를 베푸실 분이다'(요한 1,33)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분의 직무로 그분을 불렀고 또 그 직무를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분이 지혜의 감미로움을 주시는 분이시며, 지식이 영혼에게 감미롭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혼의 지혜는 소수에게 주십니다'(1고린 12,11 참조).

 

 

VI. 기도의 역할

 

그러므로 영혼이 갈망하는 것에 대한 느낌과 앎의 달콤함에 대해 스스로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시편 63,7) 하느님께서 더욱더 들어높여 주시고(시편 63,8), 스스로도 겸손하게 되며 또한 기도에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주여, 당신은 마음의 순결만을 보십니다. 저는 마음의 참된 순수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게 되는지 독서와 묵상을 통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당신을 알고자 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주여, 나는 오랫동안 당신 얼굴을 뵈옵고자(시편 26,8 참조) 마음 속으로 묵상했습니다(시편 76,7 참조). 주여, 제가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당신을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묵상 동안 줄곳 갈망의 불꽃이 타올랐고(시편 38,4참조), 당신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더 커졌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성서의 빵을 쪼개실 때(루가 24,30-31 참조), 그 빵 쪼갬을 통해 당신 자신을 저에게 보여 주십니다(루가 24,35 참조). 제가 당신을 알면 알수록 문자의 껍질인 외적 양식이 아니라 문자 안에 숨겨진 의미 안에서 더욱더 당신을 알고자 갈망하게 됩니다. 주여, 제가 이것을 청하는 것은 제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저의 무가치함 안에서 '아무리 하찮은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는다'(마태 15,27)라고 말했던 성서의 그 여인과 함께 제 죄들을 고백합니다. 하오니 주여, 제가 희망하는 상속의 어떤 보증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최소한 저의 갈증을 해소 할 수 있는 한 방울의 천상적 빗물이라도 좋습니다(루가 16,24; Sg 2,5 참조). 이는 제가 사랑에 불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VII. 관상의 결과들

 

그러므로 영혼은 자신의 욕구를 불태우는 이러한 타오르는 말씀에 의해 그러한 상태를 알게 되며, 이러한 매력에 의해 그는 신랑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시편 33,6; 1베드 3,12 참조) 그들의 기도의 의미까지도 파악하실 수 있으신 주님은 갈망하는 영혼이 모든 것을 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기도 중에 개입하시며,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달려오십니다. 그리고 감미로운 천상 이슬을 뿌리시고 가장 귀중한 향료로 기름을 바르십니다. 또한 그분은 지친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며, 배고픔을 채워 주십니다. 그분은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지상적인 것들을 잊게 하십니다: 주님은 영혼이 스스로 지상적인 것에 죽게 하심으로써 그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또한 영혼을 취하게 하심으로써 영혼에게 그의 참된 감각들을 되찾아 주십니다. 어떤 신체 기능들의 작용에서와 같이 영혼이 육적인 욕구에 정복당하는 그만큼 이성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실상 완전히 육적이 됩니다. 반대로 고양된 관상 안에서 모든 육적인 동기들은 정복당하고 영혼 밖으로 밀려나며, 그 결과 육은 결코 영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인간은 사실상 완전히 영적이 됩니다.

 

 

VIII. 은총이 다가오는 표지들

 

그러나 주여, 당신이 언제 이러한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사오며, 또한 당신 오심을 알리는 표지는 무엇이옵니까?(마태 24,3 참조) 이 위로와 기쁨의 증거자들과 전령들이 한숨과 슬픔일 수 있겠나이까? 만약 그렇다면 그 위로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위로부터 부어져 넘쳐흐르는 영적 이슬의 풍부함으로 불려지지 않고, 참으로 슬픔으로 불려진다면, 한숨과 더불어 위로를, 눈물과 더불어 기쁨을 갖는 것은 내적 정화의 어떤 표지로서의 외적 정화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씻음에 의한 유아의 세례에서 처럼 내적 씻음은 겉으로 표현되고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외적 씻음은 내적 씻음으로부터 생기게 됩니다. 이것들은 복된 슬픔이며 이것에 의해 우리의 내적 더러움은 깨끗해지고 또한 우리의 죄책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는 이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5). 오 내 영혼아, 네가 그렇게 슬퍼할 때, 너는 네 신랑을 알아보고, 네가 갈망해 온 그분을 포옹하고 이 넘치는 기쁨에 취하여라(시편 35,8 참조). 그리고 가슴으로부터 위로의 꿀과 젖을 빨아들여라(이사 66,11 참조). 네 신랑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상급과 위로는 슬픔과 눈물이다. 이러한 눈물은 그분이 네게 마시라고 주시는 은혜로운 음료이다(시편 79,6 참조). 이 눈물이 네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여라(시편 41,4 참조). 그 양식은 인간의 마음을 굳세게 하며(시편 103,15 참조), 꿀과 벌집보다도 더 달콤하다(시편 18,11 참조). 오 주 예수여, 만일 당신에 대한 생각과 갈망 때문에 생긴 이러한 눈물이 이렇듯 감미롭다면, 우리가 당신을 면전에서 보게 될 그 기쁨은 얼마나 더 감미롭겠나이까? 만일 당신을 위하여 우는 것이 이렇듯 감미롭다면 당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얼마나 더 감미롭겠나이까? 하지만 은밀히 언급되어져야할 것을 우리는 왜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정감을 매일 언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하느님의 은총 자체가 가르치는 체험의 책에서만 그것들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2,27 참조). 그렇지 않으면 독서자가 세속적인 책들 안에서 찾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만일 거기에 내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마음에 기초를 둔 어떤 주석이 없다면, 문자적인 의미에 대한 연구는 감미로움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IX. 은총은 어떻게 감추어져 있는가?

 

오 나의 영혼이여!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신랑의 영광을 바라보며 잠시 그분과 함께 머무르기 위하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2-3개의 초막이 아니라(마태 17,4 참조), 우리 모두가 거주하고 기쁨으로 충만된 하나의 초막을 건설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랑은 말합니다. '지금 동이 트고 있으니 나를 가게 해 주십시오'(창세 32,26 참조). 이제 당신은 은총의 빛과 당신이 원했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환도뼈를 다치게 하시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창세 32,25-32 참조). 그런 다음 그가 물러가는 동안, 이 신랑은 그렇듯 오랫동안 기다렸고 곧 다시 떠나 가셨습니다. 그분은 떠나셨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문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관상의 감미로움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머무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며,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연결시키시기 때문입니다.

 

 

X. 은총이 잠시 모습을 감출 때, 그것은 우리의 선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신부여, 그분이 잠시 당신에게서 모습을 감추시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실망하지 말며, 당신 자신을 경멸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선익을 위한 것입니다(로마 8,28 참조). 당신은 그분의 방문과 떠나가심을 통하여 유익을 얻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오시고 다시 떠나가십니다. 왜냐하면 위로를 너무 많이 받으면 당신이 우쭐해질 수 있으며(2고린 12,17 참조), 신랑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당신이 형제들을 업신여기게 되고, 이 위로를 그분의 은총이 아니라 당신 본성의 능력에로 돌리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신랑은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이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총은 마치 정당한 권리로 소유될 수 있는 것처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친숙하게 굴면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 떠나가십니다. 그럼으로써 너무 친절하심으로 인해 경멸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의 부재(不在)시 우리는 그분을 더욱 갈망하게 되고 우리가 갈망함으로써 그분을 더욱 간절히 찾게 되며, 그분을 찾음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그분을 발견하게 되고 보다 큰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장차 우리가 보게 될 미래의 영광(로마 8,18 참조)에 비해 단지 그림자요 단편일 뿐인(2고린 13,12 참조) 이러한 위로의 결핍이 없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덜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히브 13,14).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세의 유배지를 우리의 참된 고향으로 또 이 은총의 표시를 우리의 전(全) 상급으로 간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랑은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가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위로를 가져오시며, 연약한 이들을 위해 이 모든 상황을 뒤바꾸실 것입니다(시편 40,4 참조). 그분은 잠시 동안 당신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맛을 충분히 보기 전에 떠나가십니다. 그것은 이런 식입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서 날개를 펼쳐 날으시면서 우리가 날도록 용기를 북돋우십니다(신명 32,11 참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보라. 너는 내가 얼마나 감미롭고 매혹적인가를 조금 맛보았다(1베 2,3 참조). 하지만 만일 네가 이 감미로움으로 취하고 싶다면 서둘러 내 뒤를 쫓아 내 달콤한 향기를 빨아들여라(아가 1,3 참조). 그리고 내가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로 너의 마음을 들어 올려라(사도 7,55 참조). 거기서 너는 거울 속에서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1고린 13,12) 얼굴을 맞대고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9). 네 마음의 기쁨은 완전해질 것이며, 아무도 이 기쁨을 너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XI. 은총을 받은 후 영혼은 얼마나 깨어 있어야 하는가?

 

신부여, 깨어 있으십시오. 그분이 떠나가실 때, 그분은 멀리 가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볼 수 없을 때조차 그분은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에제 1,18 참조). 그분은 앞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계십니다. 당신은 어디로든 그분으로부터 숨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자(使者)들과 함께 당신 주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빈틈없이 보고 드리고, 그분이 거기 계시지 않을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지켜보며 또 만일 당신에게서 어떤 방탕과 타락의 징조를 발견한다면 그분께 당신을 고발하는 임무를 맡은 영들입니다. 이분은 질투심이 강한 신랑이십니다(출애 34,14 참조). 그분은 즉시 당신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분보다 어떤 누군가를 더 기쁘게 하려 하면서 그와 함께 그분을 배신한다면,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 신랑은 꽤 까다로우십니다. 그분은 좋은 혈통을 지니셨고 부유하시며 '모든 인간의 아들네보다도 짝없이 아름다우십니다'(시편 44,3).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신부를 얻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서 어떤 흠이나 티를 보신다면(에페 5,27 참조), 즉시 당신에게서 얼굴을 돌리실 것입니다(이사 1,15 참조). 그분은 어떤 종류의 불결함도 견디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자주 신랑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순결하십시오. 그리고 참으로 얌전하고 온순해지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이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소재의 풍부함과 감미로움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해 왔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오래 끈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감미로움이 제 의지를 거슬러 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XII. 종합

 

이제 우리가 이미 길게 이야기 해 온 바를 요약하는 식으로 함께 정리해 봅시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봄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시야를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여러 예를 들어 제가 이미 설명한 바로부터 이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서 뿐만 아니라 인과관계의 순서에서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섭니다. 독서가 먼저 오는데 사실상 독서가 토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묵상에 사용할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묵상은 찾아야 할 바를 더 주의 깊게 숙고하는 것입니다. 사실 묵상은 그것이 발견하여(마태 13,44 참조) 드러내는 보물을 파헤치는 것입니다(잠언 2,4 참조). 하지만 보물을 꺼내는 것은 묵상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 묵상은 우리를 기도에로 인도합니다. 기도는 온 힘을 다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며 그것이 갈망하는 보물 즉 관상의 감미로움을 청합니다. 그 보물이 주어질 때 관상은 다른 세 가지 노고에 보답을 합니다. 그 보물은 천상적 감미로움이라는 이슬로 갈증을 느끼는 영혼을 취하게 합니다. 독서는 외적 감각들의 훈련입니다. 묵상은 내적 이해와 관련되며, 기도는 갈망과 관련됩니다. 관상은 모든 단계를 능가합니다. 첫 단계는 초심자들에게 적합하고, 두 번째 단계는 진보한 이들에게, 세 번째 단계는 사랑으로 불붙은 이들에게,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축복받은 이들에게 적합합니다.

 

 

XIII. 이 단계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단계들은 동시에 함께 연결되어 있어 각각은 다른 것들을 위해서 작용합니다. 그래서 첫 단계는 마지막 단계 없이는 무익합니다. 반대로 마지막 단계 역시 첫 단계 없이는 결코 효과를 거둘 수 없든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이 음식의 자양분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도록 이 음식을 씹고 소화하면서 그것들로부터 자양분을 뽑아 내지 못한다면, 성인들의 언행록을 넘기면서 지속적인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단지 그들의 모범으로부터 우리 영혼의 상태를 주의 깊게 숙고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읽는 생애들을 우리 자신의 행위 안에서 비추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읽거나 들음으로써 먼저 이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으며 우리의 거룩한 교부들에 의해 제시된 한계들(잠언 22,28 참조)을 벗어날 위험이나 그릇되고 한가한 주제들을 묵상하게 될 위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듣는 것은 일종의 독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읽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책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스승들이 우리에게 읽어 준 책도 또한 읽었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한 이유입니다.

 

누가 기도의 도움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면 그가 묵상 중에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안다 해도 그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야고 1,17).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없이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들'(1고린 3,9)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은총이 오시어 우리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릴 때(묵시 3,20 참조)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받아 드리는 것도 그분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분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당신 남편을 불러오시오'(요한 4,16)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여인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바로 이 '받아들임'(승낙)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분이 '나는 당신을 은총으로 채워 주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요한 4,10)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그녀에게 기도를 요구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알고 있고, 마실 물을 달라고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당신은 아마 그에게 생명을 주는 물을 청할 것입니다'(요한 4,15). 그 부인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그녀에게 해주신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녀는 이 물을 얻는 것이 자기에게 좋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속으로 이 가르침을 묵상하였습니다. 그 물에 대한 욕구로 불타오른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도에 호소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그 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가 기도에로 옮겨가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묵상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먼저 묵상을 통해 불타오르지 않고서 어떻게 청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뒤에 오는 기도가 그녀가 바라는 것을 청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묵상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묵상이 열매 맺게 되려면 간절한 기도가 뒤따라야 하며, 관상의 감미로움은 기도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XIV. 몇 가지 결론들

 

이상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고,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관상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없이 관상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며, 이는 기적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무한하며, 그분의 자애는 그분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능가합니다. 때때로 그분은 바로 그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완고한 자들과 거역하는 자들을 제멋대로 하게끔 놓아 두십니다.(마태 3,9 참조). 그분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행동하십니다. 혹은 잠언에 나와 있듯이 그분은 뿔 달린 황소를 주십니다. 그분은 초대받지 않으신 곳에 들어오시며, 당신을 찾지 않는 영혼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가 비록 이런 일이 성 바울로에게 가끔 일어났다(사도 9)는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읽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떠받쳐 주시고(로마 8,26 참조) 우리의 약점들을 어여삐 보아주시도록 그분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가르치시며 말씀하십니다.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마태 7,7). 그동안 '하늘나라는 힘에 눌리고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강탈합니다'(마태 11,12).

 

이러한 정의들로부터 당신은 이 단계들의 다양한 특성들이 어떻게 서로 하나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 단계가 우리 안에서 이루는 효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관심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언제나 이 사다리 위에 자신의 발을 딛고 서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보물이 묻힌 그 밭을 샀습니다(마태 13,44 참조). 그는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주님이 얼마나 감미로우신지 보고 싶어합니다(시편 33,9; 45,11 참조). 그 사람은 이 첫 번째 단계에서 일을 하였고, 두 번째 단계에서 충분히 숙고했고, 세 번째 단계에서 열렬한 사랑을 체험했으며, 네 번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 위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는 마침내 시온에 계신 신들의 하느님(시편 83,8 참조)을 뵈올 때까지 그의 전 마음이 향해 있는 이러한 올라감을 통해서 점점 굳세어 집니다. 복되도다, 이 지고한 단계에 잠시 동안만이라도 머무르게 되는 사람은. 그는 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있다. 지금 나는 산 위의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그분의 영광을 우러러 본다. 지금 나는 야곱과 함께 사랑스런 라헬의 포옹으로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바로 하늘에까지 들어 올려졌던 이 관상 후,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커다란 은총 뒤에 다시 죄스런 세속적 쾌락들과 육적인 기쁨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 마음의 눈은 참된 빛의 광채를 오랫동안 견디어 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 그 영혼은 자기가 올라갔던 방법대로 세 단계 중 어느 한 단계로 차례대로 서서히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한 단계에서 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장소라는 환경이 영혼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비록 영혼이 하느님께 더 가까울수록 더 위에 있다 할지라도 영혼은 첫 단계로부터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아아! 이것이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비참함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복된 삶의 완성이 이 네 단계들 안에 포함된다는 것과 영적인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이 단계들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성서의 증언과 이성으로써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길을 고수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 주십시요. 우리가 그를 칭송하겠습니다'(집회 31,9).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얻는 사람은 적습니다(로마 7,18 참조). 우리가 이 적은 수 안에 들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XV. 이 단계들의 네 가지 장애물들

 

일반적으로 이 세 단계들에는 네 가지 장애물들이 있는데 즉 불가피한 요구, 활동 생활의 선업들, 인간적인 약점 그리고 세속적인 어리석음 등입니다. 첫 번째 것은 너그러이 봐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것은 동정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네 번째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난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하느님의 은총을 전혀 몰랐기에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표에서 등을 돌린다면 오히려 그 은총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온 길로 되돌아 가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서 변명할 구실이 있겠습니까?(요한 15,22 참조) 주님께서 당연히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이냐?(이사 5,4 참조) 네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나는 너를 창조하였고, 네가 범죄하여 악마의 노예가 되었을 때 나는 너를 구하여 주었다. 네가 이 세상의 악인들과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고 있었을 때(시편 11,9 참조) 나는 너를 불러 주었다(이사 43,7-11 참조). 나는 너를 내 눈에 들게 하려 하였고, 너와 함께 살기를 원했었다(요한 14,23 참조). 그러나 너는 내게 모욕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네가 거부한 것은 나의 말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시편 49,17 참조). 그 대신 너는 네 욕망을 쫓아 뒤돌아 가버렸다'(집회 18,30 참조).

 

그러나 오 나의 하느님, 이렇듯 좋으시고 이렇듯 포근하고 친절하신 분이시여, 사랑스런 친구, 지혜로운 상담자, 강력한 지지자시여! 당신을 거부한 사람과 그의 마음에서 이렇듯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손님을 내쫓은 그 사람은 얼마나 냉혹하고 또 얼마나 어리석나이까! 자신의 창조주 대신 악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고는, 바로 얼마 전까지 천상 기쁨이 울려 퍼졌던 마음의 그 비밀 장소인 성령의 내적인 방을 그리도 빨리 부정한 생각들에 열어 젖히고 그 곳을 돼지우리로 바꾸어 놓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파멸을 초래하는 거래입니까!(마태 7,6 참조) 불의한 욕망들은 신랑의 발자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마음을 압박합니다. 그 결합은 얼마나 병적이고 또 얼마나 꼴사나운 것입니까! 왜냐하면 음담과 욕설, 비아냥거림과 중상모략에로 되돌아 가기 위해 인간으로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말들을 바로 얼마 전까지 들은 그 귀가 그렇게도 빨리 한가하고 헐뜯는 이야기들에 솔깃해지고(2고린 12,4 참조), 성령으로 그렇듯 새롭게 순결해진 그 눈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 그렇게도 빨리 자기 시선을 돌리기(2디모 4,4 참조) 때문이며, 또 신랑을 환영하는 달콤한 노랫소리가 그칠 줄 몰랐던 그 혀는 열렬하고 간절한 웅변으로 그분과 신부 사이에 거의 평화를 이룩하지도 못했고 그녀를 연회석으로 맞아들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아가 2,4 참조). 주여, 우리에게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또한 우리가 비록 인간적인 약점으로 말미암아 이런 잘못을 범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때문에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 대신 무기력한 사람들을 굴욕의 처지에서 들어 높여 주시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곤경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치유자께로 급히 되돌아 가게 하소서(시편 112,7). 왜냐하면 결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는 그분께서는(에제 33,11 참조) 끊임없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치유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호세 6,2 참조).

 

이제 편지를 끝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함께 주님께 간청합시다. 그러면 이 순간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관상 중에 그분을 뵙지 못하도록 우리를 내리누르는 짐을 가볍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시온에 계신 신들 중의 하느님을 뵙게 될 때까지(시편 83,8 참조) 이 단계들을 통하여 우리를 점차 강하게 하시면서 장차 그 짐을 모두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 선택된 이들은 거기서 신적 관상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그 때에는, 한 방울씩 맛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빼앗지 못할 넘치는 기쁨(요한 16,22 참조)과 변함없는 평화, 곧 하느님의 평화(시편 4,9 참조) 중에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게르바제여! 언젠가 이 사다리의 최고 단계에 오르는 것이 위로부터 당신에게 허락된다면, 이 행복이 당신 것이 되는 그때, 저를 기억하여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장막(출애 26장 참조)이 제거될 때 저 또한 그분을 뵙게 되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께서 나에게도 또한 '오너라'하고 말씀하시게 해 주십시오'(묵시 22,17) (Guigo II, The ladder of monks & Twelve meditations, Edmud Colledge,O.S.A & James Walsh,S.J 역, Kalamazoo Michigan:CS 48, 1981, 67-86)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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