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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연도를 노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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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연도를 노래함

 

 

원래 음악은 종교적 제의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종교적 제의에서 음악은 필수적 요소이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다음 그 신앙이 뿌리를 내림에 따라 음악이 나타났다. 교회 창설 직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던 ‘천주가사’는 그 노랫말을 통해 교리와 신앙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이 가사인 이상, 거기에는 음악적 요소도 없을 수 없었다. 또한 일상생활에 교회의 예식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일상의 음악이 교회 예식을 꾸미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장례를 당했을 때 신자들이 바쳤던 연도(煉禱)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난다.

 

 

교우들의 통과의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던 초창기 웬만한 가정에서는 일상의 통과의례로 ‘관혼상제’를 지켜왔다. 이 네 가지 의례에서 관례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은 의식이었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관례의 관행을 준수한 증거가 없다. 당시 여느 양반들이 관례를 통해 자(字)를 갖게 되었듯이, 천주학쟁이들은 세례를 통해서 ‘본명’을 받았다. 세례나 견진성사가 관례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던 측면이 있었으므로 신자들은 관례에 무관심할 수 있었다.

 

한편 제례는 교회 박해가 진행되던 19세기 전반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사회의 보편적 관행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교회에서는 1790년 이후 이를 분명히 금지하였다. 신자들에게 조상제사가 허용된 것은 1939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상황에서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제사를 지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신자들에게 허용되었던 의례는 관혼상제 가운데 혼례와 상례 정도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원래 경사를 뜻하는 홍사(紅事)의 경우에는 편의대로 축하를 하고〔紅事隨意〕, 장례와 같은 흉사에는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白事盡心〕고 여겨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처럼 마지막 길을 떠나보내는 장례에 최대의 정성을 표하였다. 이 같은 문화적 관행이 천주학쟁이에겐들 무관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제례가 금지되었던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자신이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논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제례를 지내지 않았던 신도들을 부모와 조상에게 불효하는 집단으로 매도했다. 이 상황에서 박해시대의 교우들은 더욱 깍듯한 정성으로 죽은 이에 대해 장송(葬送)의 예를 다하고자 했다. 이 정성은 가톨릭의 ‘예규’에 반영되었고, 상을 입게 될 경우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더욱 열심히 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례가 나면 신자들이 함께 모여 밤을 지새우면서 ‘연옥도문(煉獄禱文)’을 비롯한 「성교예규」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시편 등 여러 기도를 바쳤다. 이로써 그들은 죽은 이에 대한 효성스러운 마음과 정성을 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죽은 이를 장송하던 예절을 연옥도문의 준말이었던 ‘연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자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연옥불의 형벌을 하루바삐 면하고 천당에 오르기를 기도했다. 그러므로 연도는 조선의 사후관(死後觀)과는 다른 전형적 가톨릭 의례였다. 이 의례가 당시 조선의 관행과 사회적 조건과 합하여 연도라는 관행으로 재생산되었다. 연도를 통해 신도들은 ‘모든 성인의 통공’을 고백하며 가톨릭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신자들은 죽은 이를 정성스레 보내던 조선의 관행을 어느 누구보다도 존중함을 드러냈다. 이리하여 연도는 가장 조선적이며 가장 가톨릭적 기도로 자리잡아 갔다.

 

 

연도와 전통음악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연도의 관행은 이처럼 뿌리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이 연도는 또 다른 종교음악이었다. 우리는 연도에서 우리 음악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박해시대 서양의 성가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전통적인 선율에 맞추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신이 배운 교리를 잊지 않고 시시로 확인하고자 했다. 이 측면에서 보면 연도는 박해시대 우리 교회의 전통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음악은 서양의 음악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서양음악에서는 음악의 세 요소라고 하여 선율(멜로디)과 장단(리듬), 그리고 화성(하모니)를 들고 있다. 반면에 한국 전통음악은 주로 선율과 장단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한국 음악은 선율(멜로디)에서도 농현(弄絃)을 중시하고 있다. 농현이란 거문고나 가야금에서 선을 흔들어 음을 장식하는 것과 같은 기법으로, 다른 기악이나 성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한편, 한국 음악의 장단(리듬)은 강박이 첫머리에 나온다. 한국 음악은 악기 연주에서 첫 음을 강하게 내며, 성악곡에서도 첫머리를 강하게 소리낸다. 이 장단은 일상생활에도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부를 때에 ‘아∼리랑’으로 불러왔다. 월드컵 축구 경기 때에 삼천리를 뒤덮었던 응원구호 ‘대∼한민국’이나 ‘오∼필승 코레아’의 경우에도 첫 박에 힘이 들어갔다.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연주할 때 약박으로 시작하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우리는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힘찬 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극의 개막을 알리는 데에도 우렁찬 징소리가 있어야 제격이다. 우리 음악의 그 위대한 울림과 떨림은 조선의 혈관에서 뛰놀다가, 축제와 제의의 마당을 만나면 언제나 분출되고 있다.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며 읊조리던 선율에는 우리 음악의 전통이 담겨있다.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박해시대 사람들이 지어 불렀던 ‘천주가사’도 그 음은 바로 이러한 조선 음악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천주가사에서는 동부민요풍의 계면조 메나리 토리가 주조를 이룬다. 이렇게 천주교 신앙은 민요와 결합하여 신앙가요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이 특성이 연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남은 말

 

연도는 우리 전통 교회음악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훌륭한 음악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장례를 큰 잔치로 인식해 왔다. 장례 때 연도라는 종교적 의례는 자신에게 친숙했던 음을 자연스레 표현하는 또 다른 잔치 마당이었다. 계와 응을 주고받는 가톨릭의 연도방법은 우리 민요에서 선후창의 메기는소리와 받는소리를 방불케 한다. 이처럼 연도에는 우리 음악의 원형질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운율을 넣어 바치고 있는 연도의 구성진 가락에 귀기울이다보면 장식음이 튀어나오고 때로는 즉흥적인 자진모리 장단까지도 들릴 때가 있다. 2백여 년 가까이 연도를 구송하던 과정에서 연도는 우리 교회의 귀중한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상장례 예식서」가 새로 나오게 되면 이 귀중한 우리의 자산은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될 듯하다. 그러나 연도에는 휘모리 장단과 같은 근대화의 물결도 이겨내면서 우리 고유의 음을 지켜냈던 저력이 있다. 연도가 가지고 있는 이 질긴 전통을 노래하며 연도의 앞날을 생각해 본다. 연도는 우리 전통음악의 맥을 이은 한국 가톨릭의 무형문화재여야 한다.

 

[경향잡지, 2002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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