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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인은 결코 만만디(慢慢的)하지 않다: 만만디의 실과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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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3-19 ㅣ No.243

[전하라! 땅끝까지] 신중국인은 결코 만만디(慢慢的)하지 않다 - 만만디의 실과 허



중국을 소개하거나 중국의 민족성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만만디(慢慢的)’라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느리다’ 혹은 ‘답답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바쁘게, 빨리빨리(快快)’라는 말과 상대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중국인이 마음먹고 이 만만디라는 말을 쓸 때는 결코 게으르거나 욕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느리고 천천히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만만디라고 말하면서 느린 체 하는 행동 뒤에는 숨겨진 이유와 책략이 들어 있다. 중국에 살면서 만만디를 중국의 대륙적 기질이라고 이해하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만디의 실체, 그 속을 들여다보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인은 항상 만만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자동차 운전을 해보아라. 어디에 만만디 정신이 있는가? 새치기는 곡예에 가깝고 신호등에서 앞차가 조금이라도 느린듯하면 빵빵대는 악다구니 같은 조급함에 혀를 찰 지경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중국인들이 사는 소위 로컬지역인데 가끔 새벽 한 두시 늦게 돌아온 차가 큰 경적 소리를 울려댄다. 자기 주차 공간에 누가 미리 주차를 했는데 나와서 빼라는 것이다. 몇 번 울리다 그래도 안 나오면 오 분이고 십 분이고 나올 때까지 계속 경적을 누르고 있다. 남이 잠자는 고요한 시간인 것은 아랑곳없이 자기 주차 공간을 비우라는 자신의 요구만 정당한 듯 조용한 아파트에 메아리치도록 울려댄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회를 가로막는 그 무엇에는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는 신중국인들은 단지 필요에 의해서만 만만디라고 말한다. 그러면 언제 그리고 왜 만만디하는가? 만만디는 상대의 역량과 담력을 측정해보면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 만만디라고 말하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기업을 경영한다면서 그 속뜻을 몰라 당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국가 간의 협약이나 각 기업들 간의 계약과정 속에는 분명 상대의 심중을 헤아려보려 할 것인데, 중국인들은 정말 속을 보여주지 않으며 힘겨루기를 할 때 이 만만디라는 특장의 무기를 사용한다. 자신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판단하면 상대방이 안달할 때까지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는데 이것을 만만디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상대가 조금 좋아 보인다 하면 간이며 쓸개며 다 빼주면서 우리는 ‘친구(朋友)’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친구라는 개념을 중국인들에게 적용시키고 나서 얼마나 큰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교민들의 입에서 자주 듣는다. 심지어 한 가족처럼 대해주며 몇 년을 같이 지낸 중국인 가정부들이 어느 날 냉정하게 돌아서 떠나며 하는 말, 다른 집에서는 100위안을 더 준다기에 옮겨 간다는 것이다. 아무런 미안한 감정 없이, 언제 우리가 우정 같은 것이 있었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이고 상처 받는 것은 우리들뿐이다. 중국과 중국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로 대처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이다. 중국인들과의 계약관계 속에서 만만디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적지 않은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된 지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중국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직도 초보 수준이다. 거대한 황하 문명과 만만디라는 대국적 자존심으로 뭉쳐진 중화의식 속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만만디의 행동심리학을 살펴보자. 내가 보는 중국인들의 만만디는 하나의 책략이고 일종의 전술이다. 만만디는 기회를 기다리는 뚝심 같은 것이다. 상대방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보는 것이다. 보아뱀이 염소 한 마리를 삼키고 한 달간 만만디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 기회를 노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 때문이다. 각 생물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특성과 환경에 따라 생존 전략이 다르게 발전되어 왔다. 먹히는 놈은 숨이 가쁘게 뛰어야 하지만 먹는 놈은 바쁠 이유가 없다. 잔인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초원에서 태어난 새끼 노루에게 무슨 만만디의 여유가 있겠는가? 태어난 지 5분도 안되면 일어서 걸을 수 있어야 하고 10분이 지나면 어미의 걸음만큼 빨리 도망갈 줄 알아야 살 수 있다. 그러나 강자는 느긋하다. 강자의 여유, 시간의 횡포, 이것이 중국의 만만디 정신의 실체이다.

이런 중국인의 만만디 정신과 그 기질은 어디에서 왔을까? 만만디는 한마디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나온 자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부와 행복의 상징으로 삼는 배불뚝이 미륵불은 만만디의 화신이다. 미륵불의 이미지는 뚱뚱하고, 배가 불룩 튀어 나왔으며 언제나 웃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절에 가면 미륵불 옆에 언제나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이 있는데, 만만디의 정신과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笑口常開, 笑盡人間一切可笑之事
大?能容, 容下人間一切不平之事”

곧 “열린 입은 항상 웃고 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가소로운 일들을 웃고 있다. 큰 배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인간 세상의 모든 불평들을 받아들인다.”라는 의미이다. 미륵불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살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배불뚝이 미륵은 원래의 미륵불 이미지가 아니다. 인도에서 전해져 오는 미륵불은 아주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을 지닌 보살이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예쁘장하며, 몸매는 날씬하고 길었다. 왜 이처럼 우아하고, 날씬하며 기다랗던 미륵불이 배가 불룩 튀어나온 뚱뚱이 승려의 이미지로 바뀌었는가?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중국 당나라의 승려 포대화상(布袋和尙) 계차(契此)의 모습에서 빌려온 것이다. 포대화상의 커다란 배 속에는 세상사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고 그가 메고 있는 포대 안에는 사람이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산타클로스처럼 넉넉한 몸집을 하고 큰 자루에서 무엇이든 꺼내 준다는 계차의 모습에서 중국인들은 부와 행복을 찾고자 하여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보살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계차는 재신(財神)으로 신격화되어 미륵불이 되었다. 미륵불은 중국화된 이미지이고, 그 속에는 만만디 정신이 숨어 있다.

냄비같이 쉽게 달아올라 쉽게 식어버리는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의 이 똥고집 같은 만만디를 당해내지 못한다. 처음에는 너도나도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13억의 천 분의 일만 고객으로 삼아도 라면을 몇 개나 팔 수 있는데 하는 식으로 덤벼들었다가 망해 돌아왔다. 그들의 알 수 없는 길고 긴 뱃속의 창자를 헤아려 보려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 중국인에게 물건을 파는 한 한국인 사장이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다. “만만디! 그거 조급한 사람은 나가 떨어져 죽으라는 얘기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데요…” 삶의 현장에서 그 만만디의 처절함을 몸으로 다 받아낸 체험의 소리이다.

중국문화를 일컫는 말 중에 장독문화(?缸文化)라는 표현이 있다. 된장이 가득 담긴 항아리는 중국문화의 실체를 의미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관념이나 문화적 요소들은 이 항아리 속에서 푹 익어야 중국 문화의 체제 속으로 편입을 해준다. 무가 장독에 들어와 푹 박혔다 나오면 무장아찌가 되고 오이를 집어넣으면 오이장아찌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장독은 느긋하다. 그 속은 덥고 답답하고 구더기가 우글거린다 해도 장독은 오이와 무에게 만만디라고 말할 뿐이다. 중국을 표현하는 이 장독의 볼록한 모습은 미륵불의 뚱뚱한 배와 닮았고 그것은 모두 중원을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중국의 정치 마당에서 뱃심이 있어야 오래 견딘다는 말 속에는 중원을 손에 넣고자 하는 역대 정치인들의 야심이 담겨 있다. 중원은 말 그대로 중국 땅의 가운데이고, 노른자이다. 사실 중원이라는 지명은 황하 강 유역의 곡창지대를 지칭한 단어이지만 패권주의적 사고방식과 결합되면서 중국 특유의 오만한 중화중심주의적 단어가 되어 버렸다. 마치 몸의 모든 장기가 이 똥배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중원은 중국의 핵심이다. 삼국지의 싸움은 바로 이 중원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였다. 바둑에서도 중원이란 말은 중요한 세력 다툼의 장으로 이해되는데 승패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중국에 중원이 있고 이 중심지역을 중국인들이 지배하고 있으니 당연히 중원을 가진 중국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이 중원을 통치하는 자를 그들은 영웅이라고 불렀다. 천하를 얻은 중원의 주인에게 그 무슨 조급한 일이 있을까? 나는 이 ‘중원’이라는 말과 ‘중국’이라는 단어 속에서 중국인들의 만만디하는 거드름과 오만함의 원리를 들여다본다. 그들이 외국인들을 만나서 만만디라고 말하면서 한 손바닥으로 누르는 듯한 거만한 제스처 속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패권주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누가 만만디의 주인공인가? 이 중원을 차지하지 못한 자는 만만디를 쓸 자격이 없고 그것이 현실이다. 만만디의 여유는 중원을 차지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강자의 무기인 거드름을 피우는 것, 그것이 만만디의 실체이다. 기득권을 소유한 자는 빨리할 이유도 없고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아니 오히려 이 기득권이 무기가 되어 다른 이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모습을 가소롭게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인들의 이 만만디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만만디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실력이다. 중국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 ‘시리파이(實力派)’라는 말이다. 상대가 내가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만만디일 수 있겠는가? 실속에 밝고 셈이 빠른 그들은 답을 알고 있는 상대방 앞에 맥을 못 춘다. 그들에게 없는 상품을 만들어 가지고 있어보라. 안달이 나서 달려든다. 나에게는 중국인들을 대할 때 원칙이 있다. 내가 먼저 무슨 계획의 필요함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내가 필요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안달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교만이 아니라 내가 함께 있으면 그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임을 느끼게 해야 중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인격적으로나 실력으로나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담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본 대로 만만디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중국인들의 의뭉스러운 심리와 교묘한 책략과 지독한 자기중심주의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의 이면에는 분명 만만디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민족마다 시간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고 역사를 이루는 폭과 깊이도 각기 다르다. 어느 민족이 오백 년 걸리는 공사를 성취해내었다면 그들은 오백 년의 비전을 본 것이고, 천 년이 걸리는 업적을 이루었다면 천 년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거기에는 위엄과 여유가 배어있고 자부심이 깃들게 되어있다. 몇십 대에 걸쳐 쌓아올린 만리장성, 신장 지역 천산산맥의 만년설수를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로를 1,200개나 뚫고 5,000km의 인공 지하수로를 파서 연결한 칸얼징, 그리고 2,000km가 넘는 경항운하(京杭運河) 등등 중화 문명의 위대함과 장대함은 세계 속에서 천 년의 빛을 발하고 있다. 바보같이 산을 옮긴다고 삽을 들고 나서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행동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바로 만만디의 효력을 체험해본 민족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리라. 중국에는 보잘것없는 물품 같지만 가업 하나가 몇 대에 걸쳐 수백 년을 이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 비결은 바로 만만디 정신에 근거한다.

우리 민족을 되돌아보자. 우리 민족의 문화적 업적 중에 천 년이 걸린 공사가 있었는가? 이백, 삼백 년에 걸친 장고를 하면서 만만디했던 역사(役事)가 있었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세계 속에서 공시적(共時的)으로 바라보면 우리 민족과 문화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위대한 건축물들은 연도가 오백 년, 천 년을 넘지 않는가? 우리 민족은 중국인의 만만디 정신에서 시간을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빨리빨리’주의는 민족의 비애가 서려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마 역사적으로 항상 외부의 침입을 받아오면서 지금의 현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인 조급함이 민족적 유전자로 각인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침략을 자주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미래를 장기적으로 설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만디'는 조금이라도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가치관으로는 한심하게 보이는 특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만사 모든 일이 서두르거나 조급해한다고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원칙과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바로 '만만디' 정신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이다. 그래서 만만디 정신은 마땅히 살펴야 하는 원칙과 절차를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건너뛰는 우리의 일처리 습관을 반성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중국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려면 그들은 왜 만만디를 외치고 또 그 속에 숨겨진 만만디의 전략적 의도는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민족은 신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땅끝까지 제80호, 2014년 3+4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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