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적 기도의 형태들: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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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46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 수도승적 기도의 형태들

 

 

머리말

 

기도는 흔히 '하느님께 이야기함' 또는 '하느님께 마음과 정신을 들어올림'으로 정의된다. 그와같은 것으로서의 기도는 하나의 신앙행위이다. 기도는 단지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기도자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교인의 기도는 두개의 주요한 기초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는 창조주, 주님 그리고 구세주로서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이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분이시라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이 하느님이 바로 강생과 죽음과 부활로써 하느님과의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능케 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395쪽).

 

기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인 기도의 신학적 기초이다(396쪽).

 

 

I. 예수와 사도들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기도의 실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기도 전통을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유대교의 전례적인 삶 안에서 기도하셨고, 당신 동포들과 함께 기도하셨으며, 개인적으로 기도하셨다. 기도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에 있어, 그분은 올바른 자세를 강조하셨고, 과시나 요란한 말은 피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분은 기도에 항구할 것을 요구하셨고, 언제나 기도하고 마음을 잃지 않도록 권고하셨다.

 

제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예수의 개인적인 기도의 모범이었다. 그분은 자주 기도하셨는데 특별히 당신의 전도활동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루의 과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것은 기도에 대한 예수의 모범이었다.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의 기도 실천에 있어 단지 몇가지 변화가 있어났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행하라고 가르친 바대로 함께 빵을 나누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기도하였다. 그들은 자주 성전과 회당에 모였고 규정된 기도시간을 준수하였다. 그들은 홀로 또한 공동으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예수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하였다(사도 2,42-47 참조)(397쪽).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교 창립 50년 후에 변화되었다. 그때까지 성전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단자들로서 회당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분명하고 구분되는 자기 신원을 계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유대적 기원을 배제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따라서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던 관습과 같은 많은 유대적 관습들이 보존되었다. 이 관습은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전달된 기도에 대한 전통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인은 언제 기도해야 하며, 또 항상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II. 교회의 초기 교부들 안에서 기도의 실천


1. 고정된 기도시간

 

기도에 대한 논문들은 2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4세기까지 기도신학의 본질적 내용들이 작업되어 왔다(398쪽).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있어 몇가지 주된 노선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기도의 첫 번째 임무는 찬양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며, 그다음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끝으로 그분께 청을 드리고 중재를 구한다.

 

청원에 있어 '주의기도' 안의 청원의 순서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우선권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청원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켜 달라고 청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청원은 흔히 문자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로 해석되었다. 영적인 의미로 '일용할 양식'은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우리가 이 청원을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가 결코 우리를 그분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하도록 청하는 것이다. 문자적 의미로 '빵'은 물론 육체를 위해 필요한 영양분으로 이해되었다.

 

교부들은 한결같이 항상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해 가장 자주 인용된 본문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1데살 5,17이다. 오리게네스는 사도 바울로가 그것을 권고하였을 때 단순히 예수의 권고들을 따르고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399쪽). 오리게네스 그리고 특히 끌레멘스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떼르뚤리아노와 치쁘리아노는 아마 그들이 예비자들을 위해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그 이상(理想)만을 언급하고 기도의 고유한 시간들에 대한 토론에로 넘어가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에 세 번(아침, 정오, 저녁)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다. 디다케(c.70-100)는 하루에 세 번 주의기도를 바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때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떼르뚤리아노, 치쁘리아노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선례로서 구약성서의 다니엘의 예를 인용한다. 그러나 다니엘 6,11에는 그 예언자가 기도했던 그 세 번의 때가 언제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리게네스는 아침, 정오 그리고 한낮으로 그 때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떼르뚤리아노, 치쁘리아노 그리고 끌레멘스는 3시, 6시 그리고 9시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관습이 된 바를 나타내고 있다. 3시에 성령이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다. 6시에 베드로는 교회의 선교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되었다는 환시를 보았을 때 그 집 옥상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9시에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고, 거기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였다(400쪽).

 

떼르뚤리아노는 두 개의 다른 기도시간을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교인은 하루에 다섯 번(아침, 저녁, 3시, 6시, 9시) 기도해야 한다. 떼를뚤리아노가 권고한 다섯 번의 기도시간은 표준이 되었지만, 어떤 작가들은 또한 밤중기도를 요구하였다. 예컨데 사도전승(c.225)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위에 언급한 다섯 번의 시간에 기도할 의무를 그 규정들 가운데 두었고 기도를 위해 한밤중에 일어날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401쪽).

 

 

2. 끊임없는 기도

 

끌레멘스에게 있어 영지주의의 목표인 방해받지 않는 관상은 '항상 기도하는 것'과 동일하다(402쪽). 끌레멘스는 기도에 대해 매우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기도는 단순히 하느님과의 친교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도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을 요구한다(403쪽).

 

 

III. 수도승 생활 안에서 기도의 실천

 

떼르뚤리아노, 오리게네스, 끌레멘스 시대에는 수도승들이 없었다.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라는 의무와 항상 기도하라는 의무와 같이 그들과 다른 작가들이 그리스도교인 생활과 금욕적 수행들에 대해서 기술한 내용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고 구분되는 삶의 양식을 택한 어떤 특별한 그리스도인 계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404쪽).

 

보다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 삶을 살기 위해 사회와 군중으로부터 물러난 세 종류의 수도승들이 생겨났는데, 곧 은둔수도승(隱遁修道僧, anachorita) 또는 은거수도승들(隱居修道僧, eremita), 반-은둔수도승들(半-隱遁修道僧, semi-eremita) 그리고 공생수도승들(共生修道僧, cenobita)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규율과 기도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은둔수도승들은 장상 없이 홀로 살았기 때문에 각 은둔수도승은 매일의 기도와 일을 위해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을 정해야 했다. 반-은거수도생활은 은거생활을 준비하는 훈련이었다. 반면 공생수도공동체들은 고독한 생활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아니라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면 이 세가지 주된 유형의 수도승들에 의해서 준수된 기도의 실천은 어떠했는가?(406쪽).

 

 

1. 공생수도승들에 의해 실천된 기도의 수행

 

바실리오(c.330-79)는 '항상 기도하라'는 성서적 이상을 까빠도키아 수도승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만일 손노동을 할 때 시편과 기도를 부가한다면 일을 할 때에도 기도의 의무를 채울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바실리오는 일 시간을 기도시간과 조화시킨다. 바실리오에 의해서 지시된 공동기도 시간들은 떼르뚤리아노에 의해서 권고된 것들과 사도전승에 제시된 것들과 사실상 동일하다. 즉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3시기도, 6시기도, 9시기도 그리고 밤중기도이다. 바실리오는 여기에다 하루를 마감하고 물러가기 전에 드리는 밤기도를 덧붙였다. 이는 '나는 낮에 일곱 번 당신을 찬양하였나이다'(시편 119,164)라고 시편작가가 말한 바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6시기도를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점심식사 전에 또 다른 부분은 점심식사 후에 바쳤다(407쪽).

 

가시아노는 공생수도승들 가운데서 실천되었던 기도의 순서에 또다른 증거를 제공한다. 그는 팔레스티나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수도승들은 아침과 저녁, 3시, 6시, 9시에 그리고 한밤중에 기도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는 바실리오에 의해 소개된 밤기도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고 하루의 1시에 기도하던 그들의 관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관습이 자신이 머물렀던 베틀레헴에 있는 수도원에서 기원하였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1시기도는 어떤 태만한 수도승들이 아침기도 후 침대로 돌아가 3시 기도 때까지 잠을 자는 습관에 빠져있었다는 말을 들은 장로들이 1시에 공동기도 시간을 제정하였다. 가시아노의 일곱 번은 밤중기도를 포함하는 반면, 바실리오의 수도승들은 6시기도를 나눔으로써 사실상 낮 동안에 일곱 번 기도하였다.

 

RB는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는 실천의 발전에 있어 마지막 단계를 기록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이전에 제정된 기도시간(아침과 저녁, 3시, 6시, 9시 그리고 한밤중)에다 1시에 기도하는 관습을 부가하였고, 바실리오의 밤기도를 하느님의 일에 포함시켜 이것을 끝기도라 불렀다. 이것은 일곱 번의 낮 시간들에 부가되었다. 즉 찬미의 기도(아침기도), 1시기도, 3시기도, 6시기도, 9시기도, 저녁기도, 그리고 끝기도이다. 또한 밤기도는 철야(Vigils)기도라 불렸다. 베네딕도가 이야기 한 앞의 것은 '나는 낮에 일곱 번 당신을 찬양하였나이다'라는 본문을 실천하고 있고, 나중 것은 '한밤 중에 나는 당신을 찬미하러 일어나나이다'(시편 119,62)라는 본문을 실천하고 있다. 베네딕도에 의해 윤곽이 잡힌 그 구조는 동서방 그리스도교 안에 시간전례의 기초로 남아 있다(408쪽).

 

 

2. 반 은둔수도승들의 기도 수행

 

반 은둔수도승들의 기도 실천은 공생수도승들의 그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다. 가시아노에 의하면 가장 초기 수도승들에 의해 제정되어 에집트 전역에서 준수되었던 체계는 공동기도를 위해 단지 매일 두 차례의 시간(저녁과 한밤중)을 요구하였다. 기도가 끝난 후 만일 공동작업을 위해 소집되지 않으면, 수도승들은 늦장부리지 않고 즉시 각자의 독방으로 돌아가 거기서 머물렀다. 야간기도(밤기도) 후 그들은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저녁때까지 기도와 손노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지속적인 기도는 한 수도승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로서 수도승은 이 목표에 어렵게 도달할 수 있다(409쪽).

 

 

3. 은거수도승들의 기도 수행

 

반 은거수도생활의 목적이 마음의 순결과 사랑의 완성이었던 반면, 은거수도생활의 목적은 관상과 끊임없는 기도였다. 에집트인들은 마음의 순결을 관상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생각하였다. 수도원의 규율은 수도승을 고독한 삶에로 준비시켰다. 그러나 그 투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도승은 은거수도승으로 살기 위해 수도원을 떠난 후 그가 얻은 마음의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하여 매일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은거수도승은 그의 고독 속에서 수도승의 마음을 산란시키는 광경들과 소음들로부터 해방을 누리지만 이제 기억력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들로 인해 그는 기도하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또한 은거수도승의 평화는 종종 환대해야만 하는 방문객들로 인해 방해받았다. 방문객들이 없을 때 조차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생각과 바램은 그를 산만하게 하였다. 따라서 단식 중에 그 은수자는 자기 자신의 요구와 예기치 않은 손님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음식과 음료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이러한 또는 다른 유혹들에 의해 공격을 받으면 은수자가 기도에 항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참으로 이 단계의 영적 여정에서의 싸움은 더 어렵다. 유혹들은 보다 미묘하고, 영적 사부의 안내 없이는 자기 기만의 가능성이 더 크다(410쪽).

 

 

결론

 

은거수도승들의 이상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를 가능한 한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지속적인 기도에 적합한 생활환경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홀로 살았고 육체적 요구들을 최소화 하려고 하였으며, 많은 생각이나 상상력이 요구되지 않는 단순한 형태의 노동을 하였다(411쪽). 따라서 그들의 손이 분주할 때 조차 그들의 정신은 관상을 위해 자유로왔다. 공생수도승들의 경우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한 공동체의 복잡한 요구들은 재산의 공동소유와 노동의 분화를 요구한다. 바실리오는 자주 수도공동체를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에 비유하였다. 지체들은 스스로를 위해 일하지 않고 전체의 선을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은거수도승들의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생수도승들의 삶에서도 기도가 중심이었다. 공생수도승들은 정해진 시간에 공동기도를 하였지만, 그들은 시간기도를 항상 기도하라는 의무의 수행으로써 간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모든 활동에 관상적인 차원을 부여하고자 시도하였다. 고정된 시간기도는 삶의 참된 방향과 목표에로 정기적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으로써 주창되었다.

 

고정된 기도시간이 없을 때 회수도승들의 위험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시아노는 그러한 소홀함(게으름)을 방지하기 위해 의무적인 기도시간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412쪽).

 

드 보궤 신부는 지속적인 기도와 고정된 시간기도간의 관계를 매우 잘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와의 관련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 안에서만 그 정당성을 발 견한다. 고정된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이상이나 또는 신법이 아니라 현명하고 겸손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또 인 간의 약함을 보호하고자 시도하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승들을 위한 유일한 법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성무 일도는 단지 이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초기 수도승들은 고정된 시간기도의 실천을 항상 기도하라는 그들의 의무를 정기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르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을 지탱해 주기 위해 도입된 체제였다. 시간기도는 수도승의 개인기도를 위한 하나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결코 개인기도의 모음이 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413쪽). (Philip Timko,O.S.B. Pray at Fixed Times, Pray Always: Patterns of Monastic Prayer. ABR 43:4(1992. 12). 395-413 요약번역).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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