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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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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30 ㅣ No.876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

 

 

국문 초록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는 103위 성인이 있다. 그런데 사실 103위는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순교자 79위와 병인박해(1866) 순교자 24위가 합쳐진 것이다. 원래는 별도의 시복 건이었으며, 79위 순교자는 1925년에 시복되고 24위 순교자는 1968년에 시복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시성을 추진하면서 103위 시성 건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진행되었고,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함께 시성되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교회법은 1983년 1월 25일 개정되었다. 그 결과 그 이전의 교회법은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79위 순교자와 24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 추진은 그 이전의 구(舊) 교회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것은 103위 시성 건도 마찬가지였다. 103위 시성 건은 이미 법 개정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중이었기 때문에 구 교회법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시복시성 수속에 대한 구 교회법 규정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그에 따라 진행된 79위 시복과 24위 시복의 시복 준비, 정보 수속, 시복 건의 개시, 교황청 수속, 예부성의 심의 등 전 과정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일을 맡아 처리한 인물들과 관련 문헌과 증언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103위 복자의 시성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현행 교회법에는 시복시성에 대한 조항이 없다. 교황령과 시행령으로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구 교회법의 규정들은 시복시성의 오랜 관행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현행 교황령과 시행령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 교회법에 따라 추진되었던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순교자의 경우는 시복 수속 과정 전체를 한국 교회가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30년 전인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된 103위 순교자의 경우는 시성을 제외한 두 번의 시복 과정 모두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담당하였다.

 

사실 103위 성인은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순교자 79위와 병인박해(1866) 순교자 24위가 합쳐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래 79위와 24위는 별도의 시복(諡福) 건(件)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24위 시복 후 한국 교회에서는 79위와 합하여 축일도 같이 지냈고 기억도 같이하였다. 시성을 추진할 때에도 두 건을 합쳐 103위 시성(諡聖) 건으로 통합하여 진행하였고 결과적으로 함께 시성되었다.

 

그런데 79위 시복 건과 24위 시복 건의 시복 수속은 현재의 교회법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니고 구(舊) 교회법, 즉 1917년 교회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물론 두 시복 건은 모두 1917년 이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구 교회법은 그 이전에 있었던 시복시성을 위한 여러 규정을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결국 1917년 법전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시성 건도 마찬가지다. 교회법은 1983년 1월 25일 개정되었다. 그 결과 구 교회법은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103위의 시성은 1984년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그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중이었기 때문에 개정 이전의 법인 구 교회법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담당 부서도 지금과는 달랐다. 지금은 교황청에 시복시성을 담당하는 시성성이 있지만 시성성은 1969년에 생겼다. 그전에는 예부성(禮部省)에서 다루었다. 그래서 79위 시복 건이나 24위 시복 건의 시복 수속은 모두 예부성에서 담당하였다. 물론 시성은 시성성에서 담당하였다.

 

103위 순교자의 시복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1) 여기에서는 103위 시복에 대해 연구하면서 먼저 구 교회법의 시복시성 절차를 알아보고 그에 따른 79위 시복 건과 24위 시복 건의 추진 과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103위 시성 경위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소상하게 정리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지면상 꼭 필요한 내용 몇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2)

 

 

2. 구 교회법의 시복시성 절차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 재위)는 1917년 5월 27일 교회법을 공포하였다. 이 교회법전 중 시복시성에 관한 조항이 제4권 제2편 제1999~2141조에 들어 있다.

 

1) 시복 수속 준비

 

구 교회법에 따른 시복 수속은 거의 대부분 재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크게 두 가지 과정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하나는 ‘하느님의 종’의 순교나 성덕(聖德)을 증명하는 것이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순교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증거자의 경우에는 훌륭한 성덕을 지녔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종’에게 전구를 청하여 일어났다고 주장되는 기적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교황청에서 시복 수속을 진행하기 전에 먼저 해당 교구에서 해야 할 절차가 있다.

 

어떤 순교자나 증거자가 신자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고 그를 공경하는 사람이 많을 때 해당 교구의 교구장은 시복 수속을 스스로 시작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 시작할 수 있다. 해당 교구의 교구장이란 그 순교자나 증거자가 세상을 떠난 곳을 관할하는 교구의 교구장을 말한다.

 

교구장이 ‘순교에 대한 평판’(fama martyrii)이나 ‘성덕에 대한 평판’(fama sanctitatis)이 있는 사람에 대해 시복 추진을 결정하면 먼저 ‘정보 수속’(processus informativus)을 진행한다. ‘정보 수속’은 교황청에 정보를 주기 위한 수속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을 또한 ‘교구 수속’(processus ordinarius)이라고도 하는데 교구장이 하는 수속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정보 수속’을 진행하기 위해 교구장은 먼저 청원인(postulator)를 임명한다. 청원인은 교구장을 대신하여 시복을 추진하는 대리인이다. 청원인이 해야 할 일차적 임무는 시복 건의 타당성을 식별하기 위해 모든 과정과 진행 상황을 교구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시복 건의 타당성이 확인되면 교구장은 수속을 시작하면서 재판을 열어 ‘증인 심문’(examen testium)을 하게 된다. 증인을 심문할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판사(judex), 신앙촉구관(promotor fidei), 그리고 공증관(notarius)이 있어야 한다.

 

증인은 원칙적으로 목격한 이들이어야 될 수 있다. 목격자들에게서 들은 증인들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증언은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 증인 심문은 신앙촉구관이 작성한 질문 사항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증언이 더 명백하게 표현되기 위해서 필요하거나 유용한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증인은 맹세하여 자신의 증언이 틀림없다는 것을 공표해야 한다. 맹세를 거부하면 증언할 수 없다. 증인 심문을 통해 ‘하느님의 종’의 생애와 순교 또는 성덕에 대한 평판 사실을 입증하여야 한다(de facto).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 평판이 확인되면 이것이 수속 추진의 기초가 된다.3)

 

청원인은 증인 심문을 한 결과 얻어진 증언들을 조사하고 서류들을 검토한 후 교구장에게 보고한다. 이때 청원인은 ‘하느님의 종’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한다. 즉 긍정적인 의견이나 자료들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의견이나 자료들까지 모두 교구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교구장은 청원인의 보고를 받고 다음 사항들을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첫째, ‘하느님의 종’의 생애를 살펴보고 ‘하느님의 종’의 저서나 글들을 출판된 것이든 아니든 모두 모았는지 조사한다. 그리고 저술 중 신앙과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내용이 없는지를 심사한다.4) 둘째, ‘하느님의 종’의 성덕이나 순교에 대해 조사하고 심사한다. 아울러 성덕이나 순교에 대한 평판도 심사한다. 셋째, ‘하느님의 종’의 시복을 추진하는 데 어떤 장애가 있지나 않은지 그 여부를 확인한다.

 

이때 교구장은 ‘하느님의 종’에 대한 ‘공적(公的) 공경 여부’도 조사하게 된다. ‘하느님의 종’이 사람들에게서 아무리 널리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私的)인 차원에서 끝나야 한다. 즉 시복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공적으로 공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교구장은 바로 이러한 ‘미공경(未恭敬, non culto)에 대한 규정’을 준수하였는지를 조사해야 한다.5)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교구장은 그 과정들을 모두 기록하여 교구 문서고에 보관하고 복사본을 만들어 봉인하여 교황청 예부성에 보낸다(transumptum). 그러면서 시복을 정식으로 청하게 된다.

 

2) 시복 건의 개시

 

교구장은 청원인을 통해 교황청 예부성과 일하게 된다. 이때 청원인은 예부성 소속 변호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변호인은 청원인의 연구와 조사를 토대로 교령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는데 이를 위해 시복 건의 ‘개요’(summarium)와 ‘정보’(informatio)를 작성해 예부성에 보고한다.

 

교황청 예부성이 시복 청원을 받게 되면 우선 ‘하느님의 종’의 저술을 검증한다.6) 그다음에는 ‘정보 수속’이 제대로 되었는지 심사한다.7) 그리고 미공경에 대해 조사한 것을 심사한다.8) 다음에는 성덕이나 순교의 평판에 대해서 심사하며 장애가 없는지를 확인한다. 이때 ‘총신앙촉구관’(promotor generalis fidei)9)이 ‘지적(指摘)사항’(animadversio)을 제기하게 되는데 변호인은 청원인과 의논하여 여기에 대한 ‘답변’(responsio)을 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긍정적이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담은 책을 만들게 되는데 이를 ‘심문요항’(尋問要項, positio)이라고 한다. 예부성 소속 추기경과 위원 고위 성직자들은 ‘심문요항’을 검토하고 토론하여 판정을 내린다. 판정이 긍정적이면 교황께 품달하게 된다. 교황이 동의하면 ‘시복 건의 개시’(introductio causae)를 허락하는 교령을 내린다.

 

3) 교황청 수속

 

‘시복 건의 개시’ 교령이 나간 후에는 시복 건을 취급하는 주체가 교구장에게서 예부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즉 교황청에서 맡아서 시복을 추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이 해야 할 ‘하느님의 종’의 성덕이나 순교에 대한 평판과 그의 전구로 일어났다고 하는 기적에 대한 조사는 처음 수속을 시작한 주교에게 위임한다. 원래 시복과 시성을 할 수 있는 권한은 교황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조사나 심사는 교황청에서 주도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지만 해당 교구장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황청에서 직접 조사하는 데 따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제대로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교구장은 교황청에서 정해준 지침에 따라 교황청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위임받아서 하는 조사를 ‘교황청 수속’(processus apostolicus)이라 한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위한 지침과 ‘증인 심문 의뢰서’(litterae remissoriales)를 주교에게 보낸다.10) 교황청의 지침에는 ‘총신앙촉구관’의 증인 심문에 대한 일반적 지침과 특별한 지침 그리고 ‘미공경’에 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다. 주교는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이 지침에 따라 조사를 해야 한다. 교구장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증인 심문을 하기 위한 재판을 여는 것이다. ‘정보 수속’ 때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이미 ‘정보 수속’ 과정에서 증언한 증인 외에도 증인들을 더 추가하여 더 많은 증언을 들을 수 있다.

 

4) 예부성의 심사

 

교구장의 ‘교황청 수속’이 모두 끝나면 수속의 전 과정을 기록한 것을 청원인을 통해 교황청에 보고한다. 이때 청원인의 임무는 변호인과 함께 예부성 관계자들이 심사하는 것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다.

 

(1) ‘교황청 수속’에 대한 심사

 

예부성은 먼저 교구장의 ‘교황청 수속’에 대해 심사한다. 무엇보다도 지침에 따라 조사되었는지를 검토하는데 유효하면 수속을 계속해도 좋다는 것을 교령을 통해 선언한다(Decretum super validitatem processus). 이때 심사하면서 의문점에 대해 신앙촉구관이 ‘지적사항’을 제기하면 여기에 대해 변호인이 ‘답변’을 해야 한다.11)

 

(2) ‘하느님의 종’의 생애와 성덕 또는 순교에 대한 심사

 

이후 청원인은 변호인과 함께 ‘하느님의 종’의 생애와 성덕 또는 순교에 대해 체계적이고 분명하게 알리기 위한 ‘정보’를 준비한다. 또한 ‘교구 수속’과 ‘교황청 수속’을 할 때 심문한 증언들을 잘 정리하여 ‘개요’를 만든다. 이때 순교자 시복 건의 경우에는 ‘신앙에 대한 미움’(in odium fidei)으로 인해 박해를 받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순교하였음을 밝혀야 한다. 신앙촉구관은 제출된 서류들을 신중히 검토한 후 ‘지적사항’들을 제시하고 청원인과 변호인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 이런 모든 서류는 예부성 고위 성직자, 고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전달되며 이들이 심의하는 ‘전 예비회의’(congregatio ante preparatoria)가 열린다. 여기에서는 투표로 결정한다.12)

 

‘전 예비회의’ 심의를 토대로 신앙촉구관은 다시 ‘새로운 지적사항’(Novae animadversiones)을 제기하고 여기에 대해 청원인과 변호인은 ‘답변’을 해야 한다. 만일 ‘전 예비회의’ 후 예부성 위원들이 신앙촉구관을 통해 시복 건을 진행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지적하면 이에 대해 변호인은 ‘답변’을 해야 한다. 또한 청원인이나 변호인은 시복 건 전반에 대해 부족한 점이 있으면 ‘보충개요’(Summarium additionale)를 통해 보완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친 후 예부성 고위 성직자, 자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의 ‘예비회의’(congregatio preparatoria)가 열린다.13) 예비회의에서는 시복 건을 더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투표로 정한다.14)

 

이번에도 예비회의 심의를 토대로 신앙촉구관은 ‘가장 새로운 지적사항’(Novissimae animadversiones)을 제기하게 되고 이에 대해 청원인과 변호인은 ‘답변’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내용은 책으로 만들어져 교황이 임석한 가운데 열리는 ‘본회의’(congregatio generalis)에 회부되게 된다. 본회의에서도 추기경들의 투표가 있다.15)

 

(3) 기적에 대한 심사

 

이어서 ‘하느님의 종’의 전구로 일어났다고 보고된 기적도 심사한다. 기적을 심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16) 변호인은 기적 건에 대한 그동안의 모든 서류를 정리하여 ‘정보’와 ‘개요’로 묶어 제출해야 한다. 이 밖에도 전문가의 기적에 대한 심사 보고서가 첨부된다. 여기에서도 신앙촉구관의 ‘지적사항’과 이에 대한 청원인과 변호인의 ‘답변’이 있게 된다. 기적에 대한 심사도 성덕이나 순교에 대한 평판을 심사할 때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다. 기적에 대한 모든 서류는 예부성 고위 성직자, 자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전달되며 이들이 심의하는 ‘전 예비회의’가 열린다.17)

 

‘전 예비회의’ 심의를 토대로 신앙촉구관은 ‘지적사항’을 제기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한 청원인과 변호인의 ‘답변’이 있게 된다. 이번에도 모든 서류를 책으로 묶어 예부성 고위 성직자, 자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전달되며 이들이 심의하는 ‘예비회의’가 열리게 된다.18) ‘예비회의’ 심의를 토대로 신앙촉구관은 또다시 ‘지적사항’을 제기하고 청원인과 변호인은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된다. 이 내용 역시 책으로 묶어 교황이 주재하는 ‘본회의’에 회부된다.19)

 

‘본회의’에서 기적에 대한 심사를 마치고 윤허하는 교령이 반포되면 교황이 임석한 가운데 새로운 심의를 하게 된다. 고위 성직자, 고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이 심의에 참석하며, ‘하느님의 종의 시복을 위해 해온 모든 수속이 완벽하게20)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심의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의견을 들은 후 교황은 최종 결정을 한다. 이 최종 결정을 선포하는 교령을 ‘Tuto’(완벽하게) 교령이라 하며 이를 통해 시복이 결정된다.21)

 

5) 시성 수속

 

시성 수속은 비교적 간단하다. 시복을 준비하면서 성덕 또는 순교평판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였으므로, 시복 이후 복자의 전구로 일어났다고 하는 기적에 대한 심사가 시성 수속의 전부이다. 교황청에 기적이 보고되면 시복 수속 때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의 판단을 먼저 받는다. 그리고 결과가 긍정적이면 예부성 고위 성직자, 자문단 그리고 추기경들의 ‘전 예비회의’와 ‘예비회의’를 열어 심사한다. 그리고 ‘본회의’도 열린다.22) 보다 신중하게 결정하기 위하여 시복 수속 때와는 달리 위와 같은 예부성의 의견 외에, 교황은 ‘자문회의’(consistorium)23)를 열어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는다. 이와 같은 회의를 거쳐 교황이 최종 판결을 내리면 시성이 결정된다.24)

 

이제 이러한 구 교회법에 따라 우리나라 79위와 24위 순교자들의 시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3. 79위 순교자 시복 수속 경위

 

1) 정보 수속

 

(1) 준비 과정

 

시복 수속의 첫 단계는 수속을 밟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79위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은 아직 박해 중일 때 시작되어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병오박해가 일어난 1846년에 우리나라에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Jean Ferreol, 高, 1808~1853) 주교가 입국해 있었다.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였을 때 우리나라 신자들은 《기해일기》를 가지고 있었다.25) 그 《기해일기》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해 여러 신자가 대를 이어가며 적은 것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기해일기》에 병오박해(1846) 때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시켰다. 일종의 ‘증보판 기해일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로 보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증보판 기해일기’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부제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퐁디세리(Pondichery) 대목구의 뤼퀘(J.F.O. Luquet, 1810~1858) 보좌 주교가 이것을 1847년 10월 중에 (15일 이후) 로마에 가지고 갔다. 이것은 교황청 예부성에 접수되었다.

 

1857년 로마에서 출간된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심문요항’(尋問要項, positio) 중 ‘개요’를 보면, 그 전 해인 1856년 7월 9일 ‘총신앙촉구관’이 ‘증보판 기해일기’를 토대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신앙에 대한 미움’으로 인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에 대해 교황에게 보고하면서 ‘순교에 대한 평판’이 확인되었다고 본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시복 건의 개시’를 청원하였다고 되어 있다.26) 교황 비오 9세(1846~1878 재위)는 신앙촉구관의 서면 청원을 받아들여 시복 건의 ‘정보 수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니까 ‘증보판 기해일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으로 ‘정보 수속’의 법적 요건을 채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 총신앙촉구관은 프라티니(A.M. Frattini) 몬시뇰이었고 청원인은 예부성 소속 호헨로헤(G. Princeps de Hohenlohe, 1823~1896) 신부였다. 그리고 시복 건의 변호인은 예부성 소속 미네티(J.B. Minetti) 신부였고 예부성 장관은 나로(C.P. Naro, 1798~1876) 추기경이었다. 예부성 장관도 1856년 7월 14일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때 시복 건의 명칭은 “라우렌시오 주교와 동료들에 대한 한국, 통킹, 코친차이나의 시복 건”(Causa Coreana, Tunchinensis, et Concincinensis Laurentii Imbert Episcopi et Sociorum)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들과 우리나라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현재 베트남 국가 지역인 통킹과 코친차이나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들과 그곳 평신도 순교자들의 시복을 ‘중국 인접 지방의 순교자’라는 이유로 함께 묶어 추진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앵베르(L.M.J.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신부 등 선교사 3위를 포함한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를 포함한 병오박해 순교자 9위 등 모두 82위의 ‘하느님의 종’이 시복 건에 포함되었다.27)

 

(2)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개요’(summarium)와 ‘정보’(informatio)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개요’를 보면 시복 건의 흐름을 알 수 있다.

 

① <한국 교회에 대한 짧은 소식>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1847년에 간행된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 모음집》(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에 들어있는 같은 제목의 글이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교회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28)

 

② 《순교자들의 행록》(Acta Martyrum)이 나온다. 그 내용은 ‘증보판 기해일기’와 같다. 이 순교자 행록에는 부기가 적혀 있다. 그런데 그 부기에서는 옮겨 적는 과정에서 원래의 내용 중에 생략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조선 왕국에서 1839년과 1846년에 일어난 박해 중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를 현(석문) 가롤로와 이(재의)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불어로 번역한 것을 최(양업) 토마스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다.29)

 

《순교자들의 행록》에는 ‘증보판 기해일기’에 또다시 몇 가지를 첨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사를 간단히 적은 내용이 들어있는데 신유박해 이후의 교회 상황과 기해박해 전개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다음에는 형구(刑具)와 순교자들이 당한 형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들어있다. 이어서 ‘증보판 기해일기’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내용도 들어있다. 마지막에는 1846년 9월 22일자 페레올 주교의 서명이 있다.

 

③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 모음집》에 나온 페레올 주교의 편지가 있다. 그것은 페레올 주교가 몽고에서 1843년 2월 13일에 퐁디세리 대목구장에게 보낸 편지인데30)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세 선교사와 신자들의 순교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④ 퐁디세리 대목구장 보나르(Bonnard) 주교가 1844년 12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장상들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 이것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 모음집》에 나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받고 쓴 것으로 조선의 박해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31)

 

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1839년 9월 6일 자수하기 직전에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가 나온다. 이 보고서에는 박해의 발단과 진행 그리고 순교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신자들에 의해 1842년 12월 28일 만주대목구장 베롤(E. Verrolles, 1805~1878)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베롤 주교는 요동에서 1843년 5월 20일 이 보고서를 교황청 포교성으로 보냈다.

 

⑥ 베롤 주교의 편지가 나온다. 이것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 모음집》에 나온 것과 같다.32) 거기에서는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와 평신도 순교자들에 대해 비교적 길고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⑦ 페레올 주교가 병오박해에 대해 1846년 11월 3일 수리치골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장상 바랑(J. Barran, 1797~1855)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 여기에서부터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병오박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편지 중에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8월 26일 감옥에서 쓴 편지도 나온다. 원문은 라틴어인데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어서 페레올 주교가 병오박해 순교자들 각각에 대해 소개한 글이 들어 있다.

 

⑧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가 나오는데 내용은 《파리 외방전교회 회보 모음집》의 것과 같다.33)

 

⑨ 다블뤼(M.A.N. Daveluy, 安敦伊, 1818~1866) 신부가 김대건 신부에 대해 파리 외방전교회 장상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34)

 

⑩ 김대건 신부가 1845년 3월 27일에 서울에서 쓴 또 다른 편지가 나오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지부 대표 리부와(N. Libois, 1805~1878) 신부에게 보낸 것이다.35)

 

⑪ 예수회 고틀랑(C. Gotteland, 南格祿, 1803~1856) 신부가 동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36)

 

⑫ 최양업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르그레주아(L.P. Legregeois, 1801~1866)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37)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쓴 편지인데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0~1840)의 생애와 순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38)

 

⑬ 포교성 고문서고의 자료로서 라자로회 출신 몽고대목구장 물리(J.M.l Mouly, 孟振生, 1807~1868) 주교가 산서(山西)대목구장 주교와 섬서(陝西)대목구장 주교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있다. 그리고 마우라(J.C. Maura) 클라우디오 명의 주교가 1843년 8월 22일 포교성 장관 프란소니(G.F. Fransoni, 1775~1856)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도 들어있다.

 

이것으로 ‘개요’에서 한국 순교자와 관계되는 제1편이 끝난다. 이어지는 제2편에는 코친차이나 순교자에 대한 기록이 있고 제3편에는 통킹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1857년 로마에서 출간된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심문요항’ 중에는 ‘정보’도 있는데 앞에 소개한 ‘개요’를 근거로 박해 일반에 대해 다루고 순교자 한 분 한 분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2) 시복 건의 개시

 

교황은 1857년 9월 24일에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교황청 수속’을 할 수 있도록 교구장들에게 위임하였고, 신앙촉구관을 통하여 필요한 지침을 내리고 ‘증인 심문 의뢰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1864년 12월 23일에 청원인 팔라르(L. Pallard) 신부의 청원으로 ‘증인 심문 의뢰서’가 처음으로 내려졌는데 나로 예부성 장관이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 ‘증인 심문 의뢰서’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1866년 9월 17일에 다시 한 번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내졌다. 베롤 주교를 통하여 한국에 전달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인해 역시 실패하였다. ‘증인 심문 의뢰서’에는 위임된 ‘교황청 수속’을 5년 안에 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 기간을 연장하여야만 했다. 연장은 1869년 4월 15일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5년 후인 1873년 8월 7일에 또다시 연장이 이루어졌으며, 1878년 6월 27일에 다시 한 번 더 연장이 이루어졌다.

 

1879년 5월 8일 예부성은 프랑스의 여러 교구장에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들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1890년 6월 11일에는 모인 편지들을 심사한 결과 시복을 위해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교령을 통해 선언하였다.

 

3) 교황청 수속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제6대 대목구장이었던 리델(F.C.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1878년 1월 28일 체포되어 5개월 동안 옥중에 있었는데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교섭으로 중국 정부가 주선하여 1879년 6월 5일 풀려나 7월 12일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1882년 블랑(G.M.J.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가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블랑 신부는 1882년 5월 11일 ‘교황청 수속’을 시작하였다.39) 그리고 1882년 4월 26일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신부가 판사에,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가 공증관에 임명되었다. 판사로 임명된 뮈텔 신부는 활동하던 중 1885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떠나기 전 뮈텔 신부는 86회차(1885년 1월 27일)까지 증인을 심문하였다.

 

제7대 대목구장이 된 블랑 주교는 1885년 4월 26일 판사를 푸아넬(V.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로 변경하고 87회차부터 담당하게 하였다. 증인 심문의 첫 회기는 1882년 5월 11일에 시작되었고 둘째 회기는 1883년 3월 18일에 열렸으며 1887년 4월 2일에 종결되었다. 그동안 모두 42명의 증인이 나와 심문을 받았다.40)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 된 뮈텔 주교는 1899년 5월 19일 ‘교황청 수속’ 종결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에게 증인 심문을 한 재판 기록을 모두 정리하여 번역하는 임무를 맡겼다. 드망즈(F.J.B. Demange, 安世華, 1875~1938) 신부에게는 필사된 모든 기록과 그 번역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뮈텔 주교는 법에 따라 1905년 7월 26일 번역된 모든 서류를 로마로 보냈다. 로마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 대표(Procurator generalis) 카즈나브(P.X. Cazenave, 1834~1912) 신부는 1906년 3월 14일 한국에서 보내온 모든 서류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카즈나브 신부는 이때 청원인이었다.

 

4) 예부성의 심사

 

(1) ‘교황청 수속’에 대한 심사

 

한국에서 보내온 서류들을 받은 예부성 공증인(cancellarius)은 서류를 정리하여 1909년 7월 한국의 ‘교황청 수속’에 대한 예부성의 공적인 복사물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변호인이었던 미네티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같은 해 11월 12일부터 ‘교황청 수속’이 유효하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미공경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심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변호인 미네티 신부는 12월 19일 ‘개요’를 작성하여 예부성에 제출하였고 12월 30일에는 ‘정보’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예부성에 제출한 ‘개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블랑 주교의 서명과 함께 42명 증인의 서약 내용과 서명이 들어있다. 그리고 뮈텔 주교가 서명한 증언 과정에 대한 보고서와 두 번째 판사였던 푸아넬 신부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어서 “비오 9세 교황이 1857년 9월 24일 교령을 통해 가경자로 선포한 한국 순교자들의 목록”이라는 제목으로 82위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실수를 바로잡아 1856년 시복 건을 개시할 때 두 번 들어간 박큰아기 마리아 이름 중 하나를 빼고 대신 허계임 막달레나를 포함시켰다. 이 목록 뒤에는 1905년 7월 25일자 뮈텔 주교의 서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심문요항’ 중 ‘개요’를 작성하면서 인용된 자료들 목록과 미공경에 대한 신자들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1910년 4월 5일 총신앙촉구관인 베르데(A. Verde) 신부의 ‘교황청 수속’과 교구에서 한 증인 심문의 유효성에 대한 ‘지적사항’이 있었고 변호인 미네티 신부의 1910년 5월 2일자 ‘답변’이 있었다. 예부성에서는 두 가지에 대한 검토를 긍정적으로 마쳤다. 같은 해 7월 12일에는 두 가지가 모두 적법하게 잘 이루어졌다는 총신앙촉구관 베르데 신부의 의견을 교황 비오 10세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 13일 예부성 장관 마르티넬리(S. Martinelli, 1848~1918) 추기경 명의의 교령이 반포되었다.

 

(2) 순교에 대한 심사

 

변호인 미네티 신부가 나이를 이유로 사의를 표해 후임으로 살로티(C. Salotti, 1870~1947) 신부가 정해졌다. 살로티 신부는 1913년 7월 30일 순교에 대한 ‘개요’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41) 588쪽에 달하는 이 문서는 79위 시복 건 서류 중 가장 길며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증언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증언한 42명 모두의 증언을 옮겼는데 증언 내용 중 ‘하느님의 종’의 순교와 관계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번역하였다.

 

제2부에서는 ‘하느님의 종’ 각각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① 증언들을 통해(ex testibus) ‘하느님의 종’ 각각에 초점을 맞추어 재구성한 내용이다.

 

② ‘교황청 수속’ 때 이용된 문헌들을 통해(ex documentis) 정리한 것으로서 먼저 《기해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 들어 있다. 판사였던 뮈텔 신부가 1885년 5월 1일자로 ‘원본과 같은 번역’이라는 공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뒷장 2쪽이 유실되었다는 이유로 민극가(스테파노)까지만 번역되어 있다.

 

③ ‘시복 건의 개시’를 위해 준비한 문헌들을 통해 정리한 것으로 <‘정보 수속’을 위한 ‘개요’>에 첨부했던 자료들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 제3부는 순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먼저 증언을 통해 박해가 일어난 배경과 전개 과정 등에 대해 다루고 순교 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어서 1839년 10월 18일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판사였던 뮈텔 신부가 ‘원본과 같은 번역’이라는 공증을 하고 있다. 공증관 드망즈 신부의 1905년 4월 3일자 서명도 있다.

 

제4부는 ‘순교와 성덕에 대한 평판’을 다루고 있다. 증언에서 평판에 해당되는 내용만 추려서 소개하고 있다.

 

살로티 신부는 1915년 5월 1일에 ‘정보’도 제출하였다. 여기에서는 ‘개요’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정보’는 다음과 같이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하느님의 종’ 각각의 생애와 순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2장에서는 순교 일반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순교를 질료적(materiale)인 측면과 형상적(formale)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 또한 <척사윤음>을 부분적으로 나누어 다루면서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따르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순교와 성덕에 대한 평판’을 다루고 있다. 살로티 신부는 한국의 신자들과 프랑스 신자들 그리고 청원인의 시복을 위한 열정적인 청원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정보’를 마무리하였다.

 

여기에 대한 첫 번째 ‘지적사항’은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다. 총신앙촉구관 마리아니(A. Mariani) 신부가 제기하였는데 여기에 대한 ‘답변’은 두 달 후인 8월 30일에 살로티 신부 후임으로 변호인을 맡은 마렝기(O. Marenghi) 신부가 하였다.

 

1921년 6월 8일 예부성 장관이 벨몬테(G.G. Pignatelli di Belmonte, 1851~1948) 추기경으로 바뀌었는데 새 장관 추기경은 1921년 11월 22일 ‘전 예비회의’를 열었다. 다음 해인 1922년 1월 15일에는 ‘전 예비회의’의 결과에 따라 마리아니 총신앙촉구관이 가경자들의 순교에 대한 ‘새로운 지적사항’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3월 14일에는 마렝기 변호인이 그 ‘새로운 지적사항’에서 제기된 ‘하느님의 종’들의 순교를 논증하기 위한 긴 ‘답변’을 제출하였다.

 

같은 해 3월 22일에는 ‘예비회의’가 열렸는데 예부성 소속의 추기경 5명과 자문위원 13명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때 중대한 일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 문서고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았던 순교자들에 대한 심문 기록과 사형판결문 등 관변 측 기록들이 공개된 것이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승정원일기》, 《일성록》, 《헌종실록》을 번역하여 예부성에 보고하였다.42) 이 보고를 ‘보충개요’로 하였다. 그리고 1922년 12월 2일자 뮈텔 주교와 12월 11일자 공증인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신부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보충개요’에서 뮈텔 주교는 신자들의 증언을 추가 설명함으로써 모든 가경자의 순교를 증명하려 하였다.

 

법에 따라 1923년 6월 25일 총신앙촉구관 마리아니 신부는 ‘가장 새로운 지적사항’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마렝기 변호인의 ‘답변’이 이듬해인 1924년 1월 15일에 이루어졌다.43) 1924년 3월 18일에는 ‘본회의’가 열렸는데 교황과 8명의 추기경 그리고 19명의 자문위원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수속해 오던 82위 중 65위의 순교 사실은 확인되었으나, 옥사(獄死)한 이들을 포함하여 17위에 대해서는 관변 측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어 순교 여부를 문제시하게 되었다.44)

 

마리아니 총신앙촉구관은 문제가 된 17위에 대해 1925년 4월 3일 순교 사실 인준에 대한 ‘추가보고서’(additamenta)를 교황께 제출하였는데 여기에는 ‘직책으로 하는 개요’(summarium ex Officio)라는 문건도 첨부되었다. 이 문건에서 마리아니 총신앙촉구관은 문제가 된 17위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보고된 증언들(testimonia)과 문서들(documenta)을 일일이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시복 건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열기로 하였다. 같은 해 4월 29일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다시 심사한 결과 17위 중 14위의 순교 사실이 증언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래서 5월 9일 3위를 뺀 79위에 대해서만 순교 사실을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

 

(3) 기적 관면 청원서 제출

 

1925년 5월 10일 마렝기 변호인은 청원인 가르니에(E.M. Garnier, 1862~1952) 신부45)와 함께 기적 관면을 위한 청원서(Supplex Libellus)를 제출하였다. 예부성 장관 비코(A. Vico, 1847~1929) 추기경은 교황의 윤허를 받아 같은 날짜로 이 청원을 받아들이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4) 시복 결정과 시복식

 

1925년 5월 11일에는 마리아니 총신앙촉구관의 의견서(sententia)가 제출되었는데 시복을 위한 ‘최종교령’(Tuto)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이튿날인 5월 12일에는 ‘79위의 시복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교령’을 작성할 것인지에 대한 심의가 진행되었는데 긍정적인 답이 나왔다. 그 결과 6월 2일에 시복교령이 반포되었고 마침내 같은 해인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1922~1939 재위)에 의해 79위가 시복되었다.

 

(5) 미사와 성무일도 등 전례문

 

시복 당일자로 교황 비오 11세의 소칙서(Litterae Apostolicae in forma Brevis)가 반포되었다. 소칙서를 보면, 복자 축일에 원산, 서울, 대구대목구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성무일도로 ‘여러 순교자 공통’을 택하되 독서들에 대해서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고유의 것으로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유 미사 경문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인 1926년 1월 17일 귀디(A. Guidi)가 예부성 장관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46) 위에 허락받은 두 가지 외에도 순교록에 새 복자들에 대한 ‘칭송’(elogium)을 넣게 하자는 청원이었다. 그리고 복자의 축일을 9월 26일로 정하고 이날 사용할 고유 미사 기도문, 성무일도, 독서, 순교 칭송 등에 대한 교황청 인준을 받기 위해 먼저 한국의 각 대목구와 파리 외방전교회 경당에서 시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같은 해 4월 22일 파리 외방전교회 총장 드 게브리앙(J.B.B. de Guebriant, 1860~1935) 대주교도 교황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순교 칭송에 대해 인준해 달라는 것이다. 둘째, 복자 축일을 9월 26일로 확정해 달라는 내용이다. 9월 21일이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그리고 샤스탕 신부의 순교일이기는 하지만, 마태오 사도 축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날 대신 첫 방인 사제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김효임 골롬바 동정녀를 비롯하여 9위의 복자들이 순교한 9월 26일이 축일로 타당하다는 설명을 붙였다. 셋째,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79위 복자 축일을 제2등급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넷째, 파리 외방전교회원들이 전교할 때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성당, 소성당 등 여러 장소에서 공개적으로나 부분 공개적으로나 79위 복자 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같은 날 가르니에 청원인은 파리 외방전교회 총장의 청원에 덧붙여 서울과 대구 등 한국의 대목구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과 신학교뿐 아니라 철학과 신학교에서도 79위 복자 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아울러 미사 고유 기도문과 성무일도, 독서 그리고 순교 칭송 내용 등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날짜는 정확히 모르나 이 모든 청원은 허락되었다.

 

 

4. 24위 순교자 시복 수속 경위

 

1) 정보 수속

 

(1) 준비 과정

 

24위 시복 수속 준비 역시 아직 박해 중일 때 시작되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병인박해가 있은 지 10년 후인 1876년에 이미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에 대해 알려지는 대로 수집하였다. 그러다가 1882년에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면서 한편으로는 병인 순교자들의 시복수속을 위한 예비조사도 논의되었다. 1884년에는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인 심문의 판사였던 뮈텔 신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 및 예비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1885년 뮈텔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함에 따라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1887년에 재개되었다. 1890년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자 조사 작업이 본격화되었으며, 1895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877명의 전기가 《치명일긔》(致命日記)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뮈텔 주교는 《치명일긔》가 간행된 후 이를 전국의 본당에 배포하여 더 많은 증언을 확보하고 누락된 순교자들을 더 많이 찾아내려 노력하였다. 《치명일긔》에 수록된 내용만 가지고는 순교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비교적 순교 사실을 증명하기가 용이한 29위를 선정하여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2) ‘정보 수속’ 과정

 

정식으로 ‘정보 수속’이 시작된 것은 1899년 6월 19일이다. 먼저 증인 심문을 위한 법정을 구성하였는데 르 장드르 신부를 판사에,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68~1939) 신부를 시복 조사 청원자에, 홍병철(洪秉詰, 루카, 1874~1913) 부제를 공증관에 임명하였다. 홍 부제는 같은 해 10월 1일 신품성사를 받은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하였다. 70세의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을 위시하여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135회에 걸쳐 재판을 하였는데 증인이 거주하는 지역별로 하였다. 이러한 증인 심문은 1900년 11월 30일에 종결하였다. 그리고 1901년 4월 20일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에 대한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전 10책)을 예부성에 제출하며 시복을 청원하였다. 이때도 수속을 담당한 파리 외방전교회는 79위 시복 건과 마찬가지로 코친차이나의 순교자들과 우리나라 순교자들을 하나의 시복 건으로 묶어 함께 추진하였다.

 

2) 시복 건의 개시

 

시복 청원을 접수한 교황청 예부성은 ‘수속록’을 심사한 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선언하는 교령을 1914년 5월 13일에 반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베네딕도 15세(1911~1922 재위)는 1918년 11월 13일에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7월 29일에는 ‘교황청 수속’을 할 수 있도록 서울대목구장에게 위임하였고, 필요한 지침을 내리면서 ‘증인 심문 의뢰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29위 가운데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천, 이성욱, 송성보 등이 ‘하느님의 종’에서 탈락되어 26위만 시복을 추진하게 되었다.

 

3) 교황청 수속

 

뮈텔 주교는 2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드브레(E.A.J. Devred, 兪世俊, 1877~1926) 보좌 주교를 판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침에 따라 한국 교회는 ‘교황청 수속’을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진행하였다. 그동안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증인 심문을 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증인들이 거주하는 지방에서도 증인 심문을 위한 법정이 열렸다.47)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22년 관변 측 기록들이 공개되어 이에 대한 번역도 하였다.48) 드브레 주교는 그동안 자료를 정리하여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을 완성하였고, 1925년에는 이 밖의 추가 증언 자료들을 모아 ‘병인박해 치명사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교황청 수속’ 결과를 모두 8권으로 만들어 교황청으로 보냈다.

 

4) 예부성의 심사

 

(1) 교황청 수속에 대한 심사

 

통상적으로 ‘교황청 수속’에 대한 심사에서는 이 수속이 지침에 따라 유효하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미공경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조사하게 된다. 그리고 변호인은 이 심사를 대비해 ‘개요’와 ‘정보’를 작성하여 예부성에 제출한다. 요안네스 델라 쵸파(Joannes della Ciopa) 변호인은 순교자들에 대한 ‘개요’를 1951년 3월 30일자로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개요’는 모두 727쪽인데 24위 시복 건 서류 중 가장 길며 크게 2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증언들을 다루고 있다. 먼저 한국에서 ‘정보 수속’을 하기 위해 증인을 심문한 내용을 다루는 데 증언한 90명 모두의 증언을 실었다.

 

제2부는 문헌들을 다루고 있다. 교황청 수속 중 판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문헌들인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① 《박순집 증언록》이다. 먼저 증인 박순집을 심문한 내용을 소개한 후 《박순집 증언록》의 많은 부분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② 한국에서 활동하던 페롱(S. Feron, 權, 1827~1903) 신부와 리델 신부의 자료이다. 먼저 페롱 신부에게 한 증인 심문을 소개한다. 이어 페롱 신부의 1866년 5월 18일자 편지, 1868년 11월 10일 리부와(Libois) 신부에게 보낸 편지, 1870년 파리 외방전교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1866년 8월 27일자 리델 신부의 편지도 있다.

 

③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서울대목구에서 ‘교황청 수속’을 하면서 증인을 심문한 내용이다. 1번부터 39번까지 서울 지역 증인들의 증언들이 소개되어 있다.

 

④ 1922년 11월 14일부터 1923년 2월 15일까지 평양 지역에서 한 증인 심문 내용이다. 40번부터 48번까지의 증인들의 증언들이 소개되어 있다.

 

⑤ 1922년 10월 10일부터 1923년 8월 27일까지 전라도에서 이루어진 증인 심문 내용이다. 49번부터 50번까지의 증인들의 증언들이 소개되어 있다.

 

⑥ 1801년 12월 22일(양 1802년 1월 25일) 반포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이 나온다. 여기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반대하여 임금이 반포한 교서라고 소개되어 있다. 말미에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내용49)과 다르지 않다는 드브레 주교의 1925년 7월 18일자 서명이 있다.

 

⑦ 뮈텔 주교는 《승정원일기》, 《일성록》을 번역하여 예부성에 보고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 문헌이 다루어지고 있다. 뮈텔 주교의 1922년 11월 23일자 서명도 들어있다.

 

⑧ 선교사들의 한국 성(姓)을 소개하고 있다. 드브레 주교의 서명이 있다. 날짜는 없다.

 

⑨ 26위 ‘하느님의 종’의 명부가 적혀 있다. 선교사들은 프랑스 성명뿐 아니라 한국 성명도 적혀 있고 드브레 주교의 서명이 있는데 날짜는 없다.

 

아마도 이 밖에도 요안네스 델라 쵸파 변호인의 ‘정보’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신앙촉구관의 ‘교황청 수속’과 교구에서 한 증인 심문의 유효성에 대한 ‘지적사항’도 있었을 것이며 변호인의 ‘답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예부성에서는 1952년 3월 2일 예부성 장관 서리 미카라(C. Micara, 1879~1965) 추기경 명의로 ‘교황청 수속’과 ‘미공경’에 대한 조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교령을 내렸다(Rescriptum validitatis Processum).

 

(2) 순교에 대한 심사

 

요안네스 델라 쵸파 변호인은 순교에 대한 심사를 받기 위해 1957년 2월 25일 ‘정보’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관례를 따르지 않고 순교에 대한 ‘개요’는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대신 앞에 소개한 ‘개요’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정보’에서는 ‘개요’를 근거로 26위 순교자 각각의 순교 사실을 ‘질료적’으로 또한 ‘형상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개요’를 찾아보기 좋게 도표도 만들었다. 이때 청원인은 파리 외방전교회 미쇼트(R. Michotte, 1884~1965) 신부였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 주교단은 조속한 시복을 청하였다. 그리고 병인 순교자들의 시복 건을 코친차이나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분리하여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이를 청원하였다. 1962년 5월 4일 예부성 장관 라라오나 사라레귀(A.M. Larraona Saralegui, 1887~1973) 추기경은 분리를 허락하는 교령을 내렸다.

 

한국 주교단은 같은 해 11월 10일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종’ 26위가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에 시복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한국 주교단과 뜻을 같이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전교회 창설 300주년이 되는 1964년에 늦어도 1966년까지는 시복식을 거행할 수 있기를 교황에게 청원하였다.50)

 

1964년 3월 21일에는 로마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 대표이며 시복 청원인이었던 아노즈(A. Anoge, 1900~1991) 몬시뇰의 요청으로 26위 중에서 푸르티에(J.A.Ch. Pourthie, 申妖案, 1830~1866) 신부가 제외되었다.

 

1965년 1월 4일 총신앙촉구관 안토넬리(F.G. Antonelli, 1896~1993) 신부는 ‘지적사항’을 제기하였다. 안토넬리 신부는 ‘하느님의 종’들을 9개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특히 형상적 순교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순교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종’ 남종삼의 경우에 ‘의심’(dubia)이 간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대해서는 10위의 ‘하느님의 종’들, 즉 남종삼과 황석두 및 선교사 8위가 모두 의심이 간다고 하였다.

 

1966년 3월 15일 단테(G. Dante) 변호인은 이러한 ‘지적사항’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변호인도 역시 ‘하느님의 종’들을 9개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7년 1월 10일에 예부성 장관 단테(E. Dante, 1884~1967) 추기경 주재로 ‘전 예비회의’가 열렸다. 투표 결과를 포함한 회의 결과가 교황에게 보고되었고 교황은 추기경의 보고를 받고 2월 9일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최종 결정하였다(procedatur ad ulteriora).

 

같은 해 5월 18일 페레즈(Raphael Perez) 총신앙촉구관이 ‘새로운 지적사항’을 제기하였다. 신앙촉구관은 먼저 그동안의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전 예비회의’의 분위기를 전하였다. 즉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16명인데 투표 결과 6명 찬성, 3명 반대, 7명은 부분 찬성 · 부분 반대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를 밝히는 것이었다. 박해자가 처형한 이유 내지는 의도에서 ‘신앙에 대한 미움’이 결여되었거나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참석자는 치프리아노의 “(죽음이라는) 형벌이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이유가 순교자가 되게 한다”(Martyrem non facit poena, sed causa)라는 말을 인용하며 ‘신앙의 증인이나 순교자’(testis Fidei, seu martyrs)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한 ‘의심’이 가는 ‘하느님의 종’ 10위 중에서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신부가 문제시되었다. 증인 두 사람이 프티니콜라 신부가 처형당한 이유가 ‘외국인(유럽인)’이기 때문이고 또 ‘조선의 법을 어기고 조선으로 입국’하였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또한 교황청 수속을 하던 서울대목구의 판사가 “그들은 단지 천주교 전파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Ils ont arretes non seulement comme propagateurs de la Religion, mais encore et surtout comme etrangers)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서울대목구 판사의 판단은 선교사 8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티니콜라 신부의 경우 두 증인의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박해자 측의 형상적 요소에 심각한 의문이 간다”(dubium serium est de elemento formali ex parte tyranni)고 평가되었다. 결국 프티니콜라 신부는 ‘전 예비회의’에서 부정적인 평결이 나와 ‘하느님의 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51)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종’은 24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명단에서 제외되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되는 나머지 9위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 예비회의’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단테 변호인은 표결에서 더 많은 찬성표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우선 6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 10일 단테 변호인은 ‘답변을 보충하는 개요’(summarium responsioni additum)를 예부성에 제출하였다. 그것은 ‘박해자 측의 신앙에 대한 미움’으로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문서였다. 이 서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① 1801년 12월 22일(양 1802년 1월 25일) 반포된 <토역반교문>이 있다. 가톨릭교회를 반대하여 임금이 반포한 교서라고 소개되어 있다.

 

② 뮈텔 주교가 번역한 《일성록》 중 1866년 7월 30일(양 9월 8일), 8월 2일(양 9월 10일), 8월 3일(양 9월 11일)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52)

 

③ 평양에 세워진 ‘순중군정공지용척사기적비’(巡中軍鄭公志鎔斥邪紀蹟碑)를 번역한 것이 있다.53)

 

④ 1881년 5월 15일(양 6월 12일) 반포된 <척사윤음>을 번역 · 소개하고 있다.54)

 

⑤ 박제형(朴齊炯)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상(上)에서 발췌한 글을 소개하고 있다.55)

 

⑥ 교황 비오 9세의 1866년 12월 19일자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56)

 

단테 변호인은 같은 해 12월 1일 ‘새로운 지적사항’에 대한 ‘답변’도 제출하였다. ‘답변’에서 변호인은 먼저 프티니콜라 신부를 제외한 24위 ‘하느님의 종’들의 명단을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총 4부로 나누어 ‘답변’을 진행하였다.

 

제1부는 한국의 지리, 역사, 종교 및 사법에 대한 설명이다.

 

제2부는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가게 된 역사와 특히 병인박해에 대한 설명이다. 

 

제3부는 시복 건이 걸어온 길과 증언이나 문헌으로 증명한 내용들이다.

 

제4부는 ‘순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대해 말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종’들의 순교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루고, 이어서 ‘하느님의 종’ 각각의 순교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프티니콜라 신부가 제외된 문제에 대해서는 시복 건이 빨리 진행될 수 있기 위하여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다음 해인 1968년 1월 30일 ‘예비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2월 29일에는 ‘예비회의’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교황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해 3월 7일 페레즈 총신앙촉구관은 ‘가장 새로운 지적사항’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단테 변호인은 같은 달 25일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6일 교황이 주관하는 ‘본회의’가 열렸는데 추기경들의 긍정적인 투표 결과로 24위의 순교를 인정하는 교령이 내려졌다.

 

5) 기적 관면과 시복 결정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 재위)는 기적에 대한 관면을 내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결정하였다. 7월 4일에는 예부성 장관 구트(B.W. Gut, 1897~1970) 추기경이 교회법 2116조 2항에 따라 기적이 관면되었음을 교령으로 공표하였다. 그 교령에는 차관 안토넬리 대주교의 서명도 있다.

 

단테 변호인은 7월 20일 ‘최종교령’(Tuto)을 청하였다. 그리고 7월 30일 페레즈 총신앙촉구관은 시복을 위한 최종교령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서를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이에 시복에 대한 ‘최종교령’이 나왔고 마침내 같은 해인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5. 103위 순교복자 시성 수속 경위

 

시성 수속은 복자를 대상으로 한다. 시복 때 이미 성덕이나 순교에 대해 증명되었기 때문에 시성 수속은 복자의 전구로 일어났다는 기적을 조사하고 심사하는 것이 중요한 수속의 전부이다.

 

1) 시성 수속 개시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거행된 24위 시복식에 참여했던 평신도들이 시복식에 고무되어 103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추진하자고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1971년 1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열렸던 주교회의 추계 총회에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조직하자는 건의를 접수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그 안건은 그냥 연구 과제로 넘겨졌다. 그러다 5년 후인 1976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있었던 주교회의 춘계 총회에서 마침내 103위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성 수속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2) 103위로 통합하여 추진

 

시성 추진을 결의한 주교회의에서 처음으로 해야 했던 일은 시성을 추진한다고 교황청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1925년에 시복된 79위 복자와 1968년에 시복된 24위 복자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시성 건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였다. 1976년 4월 22일 주교회의 춘계 총회 중에 모든 주교가 연서명한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보냈다.

 

시성 추진 담당자였던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1922~2002) 주교에게서 선정된 단테 변호인은 같은 해 첫 ‘심문요항’을 만들었다. 총 15쪽 분량의 이 소책자에는 단테 변호인이 같은 해 10월 15일 제출한 청원서와 ‘개요’가 들어 있다. 청원서에서 단테 변호인은 한국 주교회의가 청한 ‘시성 추진 개시’와 ‘79위 복자들과 24위 복자들을 하나로 묶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교황청의 허락을 요청하였다.

 

‘개요’에는 같은 해 4월 22일 한국의 모든 주교가 연서명한 시성 청원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의 79위 시복 칙서와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 칙서, 1976년 9월 14일자 장 헬레나의 기적적 치유에 대한 보고서, 1976년 9월 27일 미리내에서 있었던 순교자 현양대회에 대한 보고서, 1976년 9월 17일자 순교자 시성을 위한 전국위원회 구성에 대한 보고서 등이 실려 있다.

 

시성성은 한국 교회의 청원을 같은 해 1977년 12월 13일에 열린 시성성 소속 위원 추기경들의 정례회의에 상정하였다. 시성성에서는 1978년 2월 7일에 특별위원회를 열었으며 위원들의 긍정적인 뜻을 모아 교황께 품달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같은 해 4월 13일자로 한국 교회의 청원을 윤허하였으며 이 사실이 공표되었다.

 

3) 기적심사 관면 청원(寄蹟審査 寬免 請願)

 

한국 교회는 기적 검증에 대한 철저한 사전 대비가 부족한 채 시성 수속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시성 수속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1982년 5월 28일 김남수 주교는 한국 주교단 명의로 교황청에 기적 관면을 신청하였다. 하지만 시성성에서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론적인 답을 보내왔다.

 

1983년 3월 10일 시성성 장관 팔라치니(P. Palazzini, 1912~2000) 추기경은 시성 건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한국 교회에 ‘기적심사 관면’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주교가 연서명한 기적심사 관면 청원서를 교황께 올렸다. 기적심사 관면은 기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시성성은 같은 해 4월 20일 서류 보완을 요구하며 기적으로 여겨지는 사건들에 대해 목록이라도 제출하라고 하였다.

 

기적에 대한 보고서는 두 측면, 즉 윤리적 측면의 기적과 물리적 측면의 기적으로 나누어서 같은 해 5월 10일에 제출되었다.

 

(1) 윤리적 기적

 

윤리적 기적으로 내세운 것은 세 가지였다. 그것은 첫째,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가 예외적이라 할 만큼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둘째, 성소자들이 경이롭게 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 평신도들의 눈부신 활동이 교회를 활기 넘치게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었다.

 

이러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먼저 박해 때 순교자들의 신앙생활 모습과 성덕들에 대해 말한 다음, 그들의 모범과 신앙 전통, 그리고 그들의 전구가 오늘날 이러한 윤리적 기적을 낳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 하였다.

 

윤리적 기적을 설명하면서는 우리나라 신자들이 순교복자들을 많이 공경하지만, 그 근본 의도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그들처럼 용감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데 있지 그들의 전구로 병을 치료하겠다는 의도는 매우 적다고 말하였다.

 

(2) 물리적 기적

 

윤리적 기적을 길게 설명한 후에 꼭 해야 한다면 몇 가지 물리적 기적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아울러 심사를 받기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그동안 모두 10건이 기적으로 청원인에게 보고되었는데 그중에서 4건만 추려 시성성에 보고하였다.

 

4) 교황의 윤허

 

시성성 장관은 1983년 6월 7일 ‘시성성 위원 추기경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의 기적심사 관면 건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6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종 결정 내용이 담긴 공문이 시성성에서 나왔다. 그것은 교황이 ‘기적에 대해 통상적으로 해오던 법적 심사를 한국 교회의 시성 건에 대해서는 사목적인 이유가 크기 때문에 관면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시성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시성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5) 시성 결정

 

기적심사 관면이 통과된 후 남은 것은 교황의 ‘자문회의’뿐이었다. ‘자문회의’는 같은 해 9월 27일에 열렸다. 이 회의를 대비하여 복자들의 “덕행과 기적에 대한 소개요”(Compendium vitae virtutum ac miraculorum)를 단테 변호인이 작성하였다. 이 회의에 추기경뿐 아니라 대주교, 주교 및 수도회 총원장들도 초대되었다. 투표 결과는 긍정적이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103위 복자들의 시성을 최종 결정하였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복자들이 시성되었다.

 

 

6. 나오는 말

 

이제까지 한국의 순교자 103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시복되고 시성되었는지 살펴보았다. 현행 교회법에는 시복시성에 대한 조항이 없다. 교황령과 시행령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구 교회법보다 시복시성 과정이 단순화되었다. 교구장이 하던 ‘정보 수속’과 ‘교황청 수속’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미공경’에 대한 교구장의 조사도 한 번만 하면 된다. 시성성에서 하는 수속 과정에서 신앙촉구관의 ‘지적사항’과 변호인의 ‘답변’도 없어졌다. 따라서 변호인이 필요 없게 되었다. 대신 새 교회법에서는 시성성의 ‘보고관’(relator)이 많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청원인의 주요 역할도 담당 보고관이 시복시성 건에 대한 연구와 보고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일로 바뀌었다. 그만큼 교구장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다.

 

하지만 구 교회법의 규정들은 시복시성의 오랜 관행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현행 교황령과 시행령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9위 시복 과정과 24위 시복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24위 시복 과정에 대한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이번 연구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 시성성 고문서고나 다른 곳에서 자료들을 찾아 연구가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103위 시성식이 거행된 지 30년이나 지나고 124위 시복식까지 거행된 상황에, 많이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미흡하게나마 103위 시복시성 수속에 대한 정리를 할 수 있어서 무척 다행스럽다.

 

 

참고 문헌

 

1. 사료

수원교회사연구소,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록》 1 · 2, 2011 · 201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상 · 하, 2004.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역사자료편찬부, 《103위 시복시성자료 I, II, III》, 1983.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 Hongkong, 1924.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66, Hongkong, 1925.

 

2. 저서

윤민구,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 푸른역사, 2009.

정진석, <시성 절차법>, 《교회의 소송법총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시복시성 절차 해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1.

Launay A.Ch., Martyrs Francais et Coreens 1838-1846, Beatifies en 1925, Tequi, 1925.

 

3. 논문

유홍렬, <한국103위성인 시복경위와 그 성화의 유래>, 《순교지와 순교 유물》(신유박해연구논문집2),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윤민구, <103위 시성 수속경위와 새 시복 추진>, 《사목》 95(1984. 9)

윤선자, <1925년의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과 규장각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4,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최석우 역, <빠리외방전교회 연보(Compte Rendu de la Societe des M.E.P.)의 1881년 보고서>, 《교회사연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CCK 회보》 창간호 및 제15호.

Low G., ‘Beatificazione’ in : Enciclopedia Cattolica II, Citta del Vaticano, 1949.

Low G., ‘Canonizzazione’ in : Enciclopedia Cattolica III, Citta del Vaticano, 1949.

Molinari P., ‘Canonization’ in : New Catholic Encyclopedia III, N.Y.,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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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drien Charles Launay, Martyrs Francais et Coreens 1838-1846, Beatifies en 1925, Tequi, 1925 ; 아드리앵 로네, 안응렬 역, 《한국 79위 순교복자전》, 경향잡지사, 1957 ; 윤민구, <103위 시성 수속경위와 새 시복 추진>, 《사목》 95(1984. 9), 39~51쪽 ; 유홍렬, <한국 103위성인 시복경위와 그 성화의 유래>, 《순교지와 순교 유물》(신유박해연구논문집2),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393~413쪽.

 

2) 윤민구,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 푸른역사, 2009 참조.

3) 구 교회법 2040~2041조.

4) 구 교회법 2042~2048조.

5) 구 교회법 2057~2064조.

6) 구 교회법 2065~2072조.

7) 구 교회법 2073~2084조.

8) 구 교회법 2085~2086조.

 

9) 교구에는 신앙촉구관이 있고 예부성에는 총신앙촉구관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차(次) 총신앙촉구관(sub-promotor generalis fidei)이 있어 업무를 돕는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특별히 구별을 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앙촉구관이라고 한다.

 

10) 구 교회법 2089~2091조.

11) 구 교회법 2098~2100조.

12) 구 교회법 2106조.

13) 구 교회법 2109조.

14) 구 교회법 2110조.

15) 구 교회법 2112~2115조.

16) 구 교회법 2116~2120조.

17) 구 교회법 2121조.

18) 구 교회법 2122조.

19) 구 교회법 2123조.

20) 라틴어 Tuto는 ‘안전하게’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 문맥으로 보면 어색하여 ‘완벽하게’라고 하였다.

21) 구 교회법 2124조.

22) 구 교회법 2136~2140조.

 

23) 흔히 ‘consistorium’을 추기경 회의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경우 회의에 추기경들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자문회의’라고 번역하기로 한다.

 

24) 구 교회법 2141조.

 

25) 《기해일기》 총론에서는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가 54명이고 옥사(獄死)한 신자가 60여 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이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본론에서는 78명의 행적만 소개하고 있다.

 

26) Relazione e Voto dell’illustrissimo e reverendissimo Monsignor Andrea Maria Frattini Promotore della Fede per la S.C. dei Riti particolarmente deputata dalla Santita di Nostro Signore Pio Papa IX, Sopra L’introduzione della causa di molti servi di Dio morti nelle persecuzioni per la Fede Cattolica nella Corea, nella Cina, nel Tunchino, e nella Cocincina 참조.

 

27) 82위 명단에는 착오가 있었다. 박큰아기 마리아가 두 번 들어가고 허계임 막달레나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28)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1847, pp. 273~281 참조.

 

29) Acta Martyrum qui, saeviente persecutione annis 1839 et 1846 in Coreae regno, pro fide Christi vitam dederunt, a Carolo Hyen et Thoma Y collecta, et a Thoma Tchoi, diacono, super versionem gallicam Rmi. Episcopi Bellinensis Traducta : Adrien Charles Launay, Martyrs Francais et Coreens 1838-1846, Beatifies en 1925, viii.

 

30)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1844, p. 280 이하 참조.

31) 같은 책, p. 283 이하 참조.

32) 같은 책, p. 146 이하 참조.

33)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1846, p. 584 참조.

34) 같은 책, p. 388 참조.

35)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1847, p. 282 참조.

36) 같은 책, p. 286 참조.

37)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1854, p. 108 이하 참조.

 

38) 이성례는 《기해일기》에 수록되어 있지만 어떠한 이유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처음부터 시복을 추진하는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때 ‘하느님의 종’이 아니었다. 이성례 외에도 현석문의 아내 김 데레사 그리고 조 바르바라, 최 필립보, 이 막달레나, 손 안드레아 등도 《기해일기》에 수록되어 있지만 시복 추진에서 제외되었다.

 

39) 아직 주교 서품을 받기 전이었다. 주교품은 1883년에 받았다.

 

4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상 · 하, 2004 ; 수원교회사연구소,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록》 1 · 2, 2011 · 2012 참조.

 

41) 맨 마지막에는 살로티 변호인과 귀디(A. Guidi)의 서명이 있다.

 

42) 이 번역은 2년 후인 1924년 1월 28일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예부성에 보고된 것은 이 책 내용 전부가 아니고 발췌한 것이다.

 

43) 1924년에 출간된 《가장 새로운 심문요항》(Positio Novissima)을 보면 ‘가장 새로운 지적사항’과 ‘답변’ 앞에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한 내용(Factum Concordatum)이 있다.

 

44) 17위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딸 이 아가타, 김아기(아가타), 이광렬(세례자 요한), 김장금(안나), 김 로사, 원귀임(마리아), 고순이(바르바라), 이영덕(막달레나), 이인덕(마리아), 정 아가타, 김 바르바라, 한 안나, 김 바르바라, 이 카타리나와 그의 딸 조 막달레나, 김 데레사(김대건 신부 당고모)이다. 밑줄 친 3위는 나중에 순교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탈락되었다.

 

45) 1914년부터 로마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 대표로 일하였는데 이때부터 청원인으로 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46) 이때 귀디의 정확한 직책은 모르나 앞의 다른 문건에 마렝기 변호인 밑에 서명한 것을 보아 마렝기 후임 변호인으로 추정한다.

 

47) 제물포, 평양, 풍수원, 원주, 장호원, 전주, 수류, 나바위, 공주, 합덕, 공세리 등에서 열렸다(유종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수속 자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현대문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13~35쪽).

 

48) 이 번역은 1925년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66라는 책으로 발간되었고 교황청에 보고되었다.

 

49)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590~600쪽.

50) 유홍렬, 같은 글, 404쪽.

51) 평결에서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부정적인 의견을 표해 제외되었다(Dante, Responsio ad Novas Animadversiones, 75쪽).

52) G. Mutel ed.,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66, Hongkong, 1925, pp. 35~43.

53) 같은 책, pp. 159~163.

 

54) 같은 책, pp. 164~167 ; 최석우 역, <빠리외방전교회 연보(Compte Rendu de la Societe des M.E.P.)의 1881년 보고서>, 《교회사연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175~176쪽 참조.

 

55) G. Mutel ed., 같은 책, pp. 157~158.

56) 달레, 하, 482~485쪽.

 

[교회사 연구 제45집, 2014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윤민구(손골 성지 전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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