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의 소명: 활동과 관상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44

수도승의 소명 - 활동과 관상

 

 

"수도승은 그가 무엇을 행하기 때문에 보다도 그가 존재하는 것 때문에 더 중요하다.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행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우리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 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따라 온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분과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결실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성(子性)이 인정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이다. 인정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소명들에 있어서는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도록 불림을 받는 반면 수도승은 어떤 특별한 일에로 불리지 않는다. 수도승은 어떤 특정하고 한정된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을 제한하는 대신에 전적인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충만하고 완전하게 통합된 복음적 삶을 위하여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떠난다. 이것은 물론 수도승이 한 번에 모든 사랑의 권고를 실천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희사와 가난과 같은 많은 권고들이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승은 하나의 작은 신비체인 수도승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된다. 수도승 공동체 자체가 한 방법으로 혹은 또다른 방법으로 모든 복음적 권고들을 실천한다. 비록 수도승 자신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노동한 결실로 수도원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먹일 수 있다. 비록 각각의 수도승이 환대를 실천하지 않을지라도, 수도원이 그것을 실천한다. 수도원은 가난한 이들에게 노동의 결실 중 한 몫을 제공한다. 비록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신자들에게 설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동체 자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행한다.

 

수도승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하나의 수도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이 되기 위하여 그는 수도원 안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44쪽) 수도승 생활은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온종일 그의 행동과 마음으로 겸손과 순명, 기도와 자비, 지혜와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재현하는 그러한 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와 그의 형제들은 수도승 공동체와 접촉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애덕을 실천하는 '하나의 위격' 즉 신비적 그리스도를 형성한다. 수도승의 일은 '하나의 위격' 즉 신비적 그리스도인 수도승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 그의 형제들과 함께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수도승은 특정하고 제한된 과업들 위에 그리고 그것들을 뛰어 넘어 하나의 수도승이 되도록 불리운다. 만일 수도승이 그의 지평을 좁혀 자신이 수행하는 하나의 특별한 역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또한 그 역할을 자신이 수도원에 오게 된 궁극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참된 소명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수도승이 되고 자신의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대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관심을 하나의 직무로서의 성무일도에 집중시킬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분명히 수도승은 미사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자신의 직무를 더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가 자신의 직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 직무는 단지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삶 즉 하느님을 위한 삶인 사랑의 전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직무가 수도승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 수도승이 직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가대(歌臺)에서만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수도원에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수도원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자신을 그곳에 불러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감사로 충만되기 때문에(45쪽) 그는 더욱더 자유롭고 온전하게 하느님을 찬양한다. 만일 수도승이 하느님께 자신의 시선을 둔다면 그의 경배는 더욱더 순수하게 될 것이다.

 

소위 '관상생활'은 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차도 언제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그것에 대한 제한 없이 수도승 생활을 관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용어의 사용은 법적으로는 틀리지 않다. 교회법은 엄격한 봉쇄 수도회들과 외적인 혹은 교구 사목을 하지 않는 수도회들을 그 회원들이 '활동' 또는 '사도직' 생활에 직무적으로 종사하는 수도회들로부터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수도원의 봉쇄구역 안에 산다는 그 사실이 한 수도승을 관상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RB 안에서 결코 '관상'이란 단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 베네딕도가 그의 시대에 '활동생활'이라고 불리었던 생활을 위하여 규칙서를 제정하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이것이 매우 단순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금욕적인 정화의 삶과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려 그것을 정신의 통제하에 두는 덕의 실천에 대하여 '활동생활'(bios praktiko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의미로 활동생활의 전 역할은 세상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죄의 지배하에 있는 삶의 혼란으로부터 그를 해방하는 것이고 또한 그를 관상적인 영혼에게 부여되는 내적 평정(apatheia)과 평화의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만일 베네딕도가 '활동' 또는 금욕생활의 견지에서 초심자들을 위하여 제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후의 관상에 대한 견해와 더불어서이다. 중요한 점은 베네딕도에게 있어 활동과 관상 모두 수도생활에 있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이며, 그들은 같은 집에서 함께 평화로이 살아야 한다.'

 

이 사실로부터 어떤 사람이 많은 수고스러운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상 수도원에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자신에게 독방과 책이 주어질 것이며, 하루종일 관상을 하도록 홀로 남겨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청.지원자는 아직 잠이 덜깬 어리숙한 사람이다. 그는 예사롭지 않게 생활이 바쁘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동시에 피해야 할 또다른 오류가 있다. 즉 그것은 고행의 수도생활이 많은 회개의 수행들로 이루어진 삶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또다시 강조점이 '존재하는 것'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행하는 것'에 놓여지고 있다. 수도승은 틀림없이 그리고 본질적으로 '회심자'이다(46쪽). 그리고 인간은 고행을 행함이 없이 회심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내적인 회심을 속죄의 뜻에서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는 쪽으로 물질화시킬때 수도정신은 상실된다.

 

수도승의 참된 고행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수도승다운 생활개선 즉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스럽고 다정한 지체로 변화시키기 위한 항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에 있다. 이것은 만일 수도승이 중요한 수도승적 수단들 즉 순명, 겸손, 사랑, 그리고 단순성 한마다로 다른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생각과 관심사들에 대한 포기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의 활동이다. (수도승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따라서는 안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말하고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고행은 진지하고 타협이 없지만, 그것은 언제나 베네딕도 자신의 중용, 단순성, 그리고 절제의 정신을 전제로 한다. 수도승은 수도원에서 그의 참된 과업 즉 순명, 겸손 그리고 사랑에 의해서 그리스도께 대한 종속으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딴데로 돌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피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는 특히 수도승을 하느님을 찾는 사람으로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적절히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마음에 있어서 이교인들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우리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의미에 눈멀게 한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하느님을 찾는 것과 또는 무의식적인 이교인으로서 하느님을 찾는 것간에는 매우 큰 차이점이 있다. 이교인에게는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아마도 인격적인 하느님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수도적 수행들에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의 의지적인 힘과 용기에 의하여 '초월적 존재('절대자')와의 일치를 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47쪽)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수도승은 그 외의 다른 사람이 가질 수도 또는 이해할 수도 없는 새롭고 비밀스런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수도원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감추어진 지식과 신비스런 내면의 완성에 의해서 보다 열등한 모든 사람들을 뛰어넘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성 베네딕도가 지적하고 있듯이, 교만의 수렁 속에서 그를 황폐케 하고 그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자기-높임(자랑)일 뿐이다. 수도승은 바로 수도원 안에서 평범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는 온 힘을 다해서 그 삶을 산다. 그는 충만하게 그 삶을 산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외의 모든 것들을 옆으로 제쳐두며 다른 모든 관심사들을 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두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도승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수도원에 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맛보고 이해하기 위하여 수도원에 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며,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의 유산을 충만하게 즐기기 위하여 온다. 그는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하기 위하여 온다.

 

이것은 수도승 생활의 참된 비밀이다. 이것은 '수도승이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세 신적 위격이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신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이끄심으로서 더욱더 완전하게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상호양도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움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관상생활은 단순히 평범한 그리스도인 삶에 대한 하나의 깊은 통찰과 이해이다. 우리가 그것을 '평범한'이라고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기적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이다. 즉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생활하신다!는 가장 놀라운 기적이다.

 

이것은 '하느님 찾음'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수도승 생활에 많은 초심자들은 마치 그들이 이미 마음 안에 보이지 않게 그분을 소유하지 못한 마냥 하느님을 잡으려고 또 느끼려고 노력함으로서 방해받고 근심에 싸인다. 즉 그들은 참으로 자신들의 전 영성생활을 망쳐버린다(48쪽). 참으로 절대자에 대한 거친 이교도적인 정복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수도승은 잘못 인도된 상당히 격렬한 노력들에 의해서 그의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몰아냄으로서 끝나버릴 수 있다. 우리는 '작은 자들'이 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양도하시는데 있어서 모든 것들 행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는 것 즉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이 행하신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기 위하여 낮아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것이 필요한 한 가지 것이다.

 

수도승이 행하는 이 한 가지 유일한 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며 동시에 그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도승 생활의 열쇠이다. 수도승 소명의 전 목적인 이 한 가지 것을 행하기 위하여 그는 그렇듯 강하게 인간을 사로잡는 다른 모든 '행위들'(doings)을 옆으로 젖혀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그렇듯 많은 '행위'없이 지내기 위하여 충분히 겸손해져야 하며 또한 단순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가 이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그는 참으로 수도승이 될 수 없다(49쪽). (T.Merton, The monastic journey, CS 133:Kalamazoo,Michigan, 1992, 44-49쪽 부분번역)

 

[글 토마스 머튼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6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