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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 중국 정신: 중국의 세계화, 중국인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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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15 ㅣ No.240

[전하라! 땅끝까지] 중국 문화, 중국 정신



수교 전에는 만리장성의 높은 이념의 장벽에 가로막혀 적대시하던 중국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아니, 와도 너무 가까이 왔다. 우리 국민 누구하나 예외 없이 ‘중국 것’들을 떠나 하루를 살 수 없게 되었다. 몸에 두르는 것에서부터 밥상 어느 한 구석까지 예외 없이 ‘중국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서점에 가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중국 관련 코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이 중국에 관한 책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중국이 이 시대의 징표이고 대세이다. 중국을 알아야 한다. 중국에 살든 안 살든, 중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중국은 우리 모두에게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때로는 폄하의 눈으로, 때로는 시기의 눈으로, 그리고 또 불안한 눈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태도들은 정확한 방법이 아니고 또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중국을 제대로 알아야 중국에 휘둘리지 않는다. 중국에 관한 책들은 많다. 그러나 들춰보면 내 눈에는 중국을 한결같이 경제 논리로만 풀려는 생각으로 보인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정신과 연결되듯이 중국을 알려면 중국의 정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정신이 문화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문을 파악해야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분석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 볼 수 있어야 올바른 대처법이 나온다. 미래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치적 안정 역시 중국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중국은 우리에게 이웃인가? 적인가? 중국 바로 알기! 앞으로 일 년에 걸쳐 중국의 문화 현상을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중국인들의 사고와 정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문화를 말하는 데는 두 가지로 다뤄야 한다. 하나는 중국이요, 다른 하나는 문화이다. 중국인들은 ‘중국’과 ‘중화’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중국’은 정치적 의미요, ‘중화’는 문화적 의미이다. 중국문화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을 것이다. 빨간 오성기, 큰 땅덩어리, 많은 인구, 공산당, 짜장면, 만리장성 등등 … 이 모두가 중국의 문화들이다. 삶의 모든 무늬(文)가 어우러진 것이 문화이다. 의식도 문화이며, 정치도 경제도 모두 문화이다. 문화는 총체이기에 모든 것을 다 언급할 수는 없다. 그 문화의 핵, 곧 정신을 말하면 그나마 조금이나마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밖으로 드러난 현상들이고, 그 나라의 문화가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문화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문리(文理)라 말한다.

옥은 옥장(玉匠)이 커다란 옥의 원석을 쪼개고 갈아서 만드는데, 여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옥돌의 결을 따라 정을 움직여야만 원석의 무늬가 살고 아름다운 옥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성되기도 전에 깨지고 만다. 옥장이 옥돌을 다루는 데에 일정한 법칙대로 갈고 자르는 것이 바로 리(理)이다. 따라서 비리(非理)의 본뜻은 원칙을 벗어나 옥돌을 제멋대로 깨는 행위를 뜻한다. 중국문화에도 이같은 결이 있어서 그 결에 맞추어 들여다보고 분석해내야만 올바르게 그 형체를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중국문화의 문리, 곧 중국문화의 열쇠를 몇 개 선정하여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중국문화와 중국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몇 개의 코드가 있다. 중국인들의 중원의식과 중화중심주의, 이와 연계된 중국인들의 만만디 정신, 문혁의 원리인 반인본(反人本)주의적 사고와 공산당의 유물론에서 비롯된 국가의 사본(事本)주의, 중국사회의 종횡구조를 이루는 대전통과 소전통의 구분, 유교와 도교 문화의 위치와 가치관,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정(正)과 사(邪)의 논쟁,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고정화된 대(大)와 다(多)의 관념과 그 폭력성, 현대 신중국인의 국수주의, 중국인의 체면문제와 연결된 ‘꽌시’(關系)주의 등등을 꼽을 수 있다.


1. 중국의 세계화, 중국인의 야망

십여 년을 중국에서 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자니 중국이 변하는 속도와 내용이 감지되면서 우환의식이 깊어진다. 중국의 엄청난 변화와 발전의 속도 앞에서 나의 정체성이 파악되지 않는다. 중국사회 속에서 한국인인 나는 누구이고, 우리 한국은 중국 옆에서 어떤 운명에 처할지 걱정이 앞서 오기 때문이다. 한중 관계의 역사적 반성에서 나오는 민족적 위기감이 바로 우환의식이다. 내가 파푸아뉴기니와 같은 먼 나라에 파견되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분명 우리에게 과거였고 현실이며 더욱이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이는 교회적 차원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국 선교를 지향하며 중국 대륙에 건너온 나이지만 선교 현장에서 이 민족적 우환의식이 수시로 느껴져 온다. 순수한 선교 사명 속에서 이 민족을 사랑하고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중국을 꿈꾸는 중국인의 야망 앞에서 이런 감정은 귀여운 착각에 불과할 수 있다. 단지 중국을 폄하하기 위함도 아니요, 한국만을 옹호하자는 그런 옹색한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 신앙인으로서 복음의 보편적 가치 이전에 민족적 우환의식이 피부에 와 닿는 상황에서 형성되는 감정이다. 이 모든 사고는 중국의 중화 중심주의와 세계화를 노리는 중국인의 정치, 군사, 경제 정책에 연결되어 있다. 북한과의 관계, 통일의 문제에도 중국은 걸림돌이요, 동시에 문제해결의 열쇠이기도 하다. 중국 지도를 잘 살펴보면 중국의 영토는 한 마리의 닭과 같은 형상이고 그 주둥이에 마치 먹이처럼 달려 있는 것이 한반도이다. 실제로 중국의 네티즌들이 한국을 중국의 닭 모이 정도로 폄하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동북 공정과 발해사, 만리장성의 왜곡 등은 사실 진행 중에 있고 미래에 한반도를 위협하는 근거로 사용될 것이다.

신중국은 대국인가? 강국인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존경받는 대국인지는 의심이 가지만 지금의 중국이 강국인 것만은 분명하다. 통전부(統戰部)가 주도하는 서남공정이나 동북공정 등은 모두 팽창정책을 강화하고자 하는 중국 지도부의 세계화 정책과 직결되어 있다. 중국 내 56개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모두 대중국 건설이라는 논리 하나에 예속된다. 중국은 주변에 16개국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과거 중국의 역사를 보면 중국은 수없이 주변국을 침략했으나 로마가 패전국을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 곧 흡수통합의 방식을 취하였다. 콘밍(昆明)과 리쟝(麗江) 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한 흡수통합은 물론이고 티베트, 내몽골, 신장 지역이라는 큰 민족국가들마저 그 존재 자체를 커다란 중원의 장독에 들이부어 용해시키는 방식을 취해 왔다. 지금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 황하문명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 중국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속뜻 역시 황하지역의 한(漢)족만이 아니라 모든 다수 민족을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강제 흡수된 민족들은 반항하고 분쟁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강국의 이미지, 세계화의 야망에 집착할수록 주변국은 물론 서방 국가들과의 앞날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니 인류의 미래가 불안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국이 떠오르며 세상의 판도를 새로 바꾸고 있다. 그런데 신중국은 과연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국가와 민족이 될 수 있을까? 대당(大唐) 이후 처음으로 맞는 중국의 번영, 그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중국이 세계의 주역이 되지 못했던 것은 지나친 중화중심주의에 있다고 본다. 곧 자아에 충만해 있는 중국은 외부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고, 중화 이외의 것을 ‘싸이 와이’(塞外)라 해서 오랑캐(夷)라고 불렀다. 중국(中?)이라는 말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닌가? 중국의 이러한 보수성과 중화중심주의는 우월감을 낳았고 거기에 폐쇄성이라는 굳은 죽의 장막을 치고 살아왔다. 이러한 닫힌 마음으로는 세계의 공영과 공존, 공익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으니 중국은 그저 중국 땅 안에서만 자신들만의 잔치에 머무르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대국이 될 문화의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세계 경쟁력에 도취하여 “대당(大唐)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치며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국의 평화)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중국인들의 야망을 경계심 속에서 눈여겨보고 있다. 로마의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팍스 로마나는 단순히 로마를 위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과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교류 속에서 로마에 의한 평화로 이해된다. 중국 자신들만의 번영 성장을 위한 배타적인 팍스 시니카는 그 첫 단추부터 배타적이고 자아 중심적이다. 세계를, 주변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공생과 공영을 위한 중국의 평화적 봉사인가? 아니면 세계를 통제하고 군림하려는 팍스 시니카인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시대가 오면 로마가 세계를 흔들었던 것보다, 미국이 전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보다, 더 큰 세력과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근거는 인구의 힘에 있다. 중국인 13억 명 중에 1억 명만 떼어 전 세계로 내보내 장사를 하게 하면 전 세계는 화교의 상권과 중화 문화권에 흡수될 것이다. 중국어는 전 세계의 최대 공용어가 될 것이고, 위안화는 기축통화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오면 세계의 질서는 흔들리게 되고, 가치관 역시 큰 혼돈에 휩싸일 위험이 있다. 중국의 세계화는 대세이지만 그 전망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 중화의 소용돌이 가장자리에 한국이 있다. 한국의 미래는 중국에 의해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중국의 세계화적 대세 속에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고 동시에 가장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될 수 있는 나라 역시 한국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중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세계와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과 미래가 큰 위험에 봉착해 있다. 중국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땅끝까지 제79호, 2014년 1+2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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