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베네딕도회에서 무엇을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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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43

베네딕도회에서 무엇을 찾는가?

 

 

베네딕도회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평화롭다, 

기도를 정성스럽게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좋다, 

배우는 데 부지런하다, 

등이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분도회의 생활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속성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으뜸가는 속성 가운데 하나는 평화(Pax)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마치도 베네딕도회의 표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수도원에서도 출입문 안팎에 써 붙여 놓거나 편지나 공문 용지 등에도 이 말을 써넣고 있다. 방문객들도 베네딕도회 수도원 문을 들어서면 거의 몸으로 평화를 그대로 느낀다. 분도성규(Regula Benedicti) 머리말 17절에는 시편 33,14를 인용한 “평화를 구하고 이를 쫓아라.”라는 말씀이 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는 또한 “평화를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역시 분도회 생활의 중심은 전례가 아닐까 한다. 분도회를 방문하여 기도에 함께 참례해 본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간경을 바치는 것을 보면서 놀라기도 한다.

 

과연 “아무 것도 하느님의 일(Opus Dei)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분도회 수도원이 “주님께 봉사하는 학원(배움터)”라고 한다면 전례야말로 일삼아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모셔 섬기는 것이니 전례가 제일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중세뿐 아니라 19-20 세기에 들어서도 솔렘, 마리아 라아크, 몬세랏, 몽세사르 등 분도회 수도원들이 전례 운동의 본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례가 분도회 생활의 전부는 아닌 터이다. 전부일 수도 없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에서도 “거룩한 전례가 교회활동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했으며, “영적 생활이 오로지 전례에 참여하는 데만 있는 것도 아니다.”(12장)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엄률 시토회는 오늘날도 하루에 일곱번 노래로 기도한다. 그런 수도회에 가 보면 처음에는 “저렇게 기도하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보다 기도를 하다가 사이사이 일도 한다고 생각을 해야 옳을 것이다. 분도회 수도자들에게는 일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일이 되기도 하면서 일과 삶과 기도가 하나로 어우러져 균형을 이룬다. 그렇기에, 비록 성규에는 이 표현이 없다고 하지만, “평화”(Pax)와 더불어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가 분도회의 또 다른 표어처럼 된 것이다.

 

이렇듯이 [평화, 기도, 일] 이 세 가지는 베네딕도 수도생활의 기둥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것들이 분도회 정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21세기, 새 천년기에 접어든 오늘, 베네딕도회의 삶은 무엇 하는 삶이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이 시대의 새 복음화에 수도회는 그 나름대로 어떻게 고유하게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으며, 교회는 수도회에 무엇을 기대할까. 또 이 시대 사람들의 기대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기도의 표양, 섬기는 모습, 서로 존중하면서 안으로는 공동체를 이루고 밖으로는 넓은 품으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 한마디로 “살아있는 현존으로서의 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엇을 잘한다, 이러저러한 좋은 사업을 한다는 것보다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공동체, 신앙공동체로서의 현존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그 어떤 것, 스스로 아쉬움을 느끼는 그 무엇을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수도생활을 잘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런 것이구나. 나의 삶도 저런 것이어야 하는데” 하고 느껴지는 그 어떤 것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교회 안에서 하나의 가시적 현존으로서 전례생활과 기도의 표양이기를, 하느님을 만유 위에 받들어 섬기는 증거이기를, 또 고유의 전통 따라 모두를 섬기는 초대의 삶이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교우, 신학생, 사목자, 외인들 모두에게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영신의 생기를 되찾게 하기를, 어지럽게 방황하며 부유浮游하는 현세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 오늘과 내일의 세계를 위한 사상과 문화와 삶의 산실이 되기를, 한마디로 신앙생활의 샘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베네딕도(Benedictus)라는 이름과 연관하여 가족, 가정 공동체, 특히 오늘의 사회에 참으로 아쉬운 안정, 살림, 문화, 환대, 화합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I. Benedictus

 

우선 베네딕도 성인의 이름인 “Benedictus”라는 말마디부터 생각해 보자. 그레고리오 성인께서 쓰신 전기에 보면 “그분[베네딕도 성인]은 은총과 이름으로 복받은 분이었다.”라는 명언이 나온다.

 

“Benedictus”라는 말은 “복 받았다”라는 뜻이다. 시편 번역에도 보면 우리말로 “찬미” 또는 “찬양”(benedicite)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benedictus”를 달리 옮겨 놓은 같은 말이다.

 

즉 ‘좋게 말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말한다는 것과 실현한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긴 것이다. 좋게 말하며 그것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곧 “benedicere”의 힘인  것이다.

 

사무엘 상권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주 나리의 하느님 앞에서 나리의 목숨은 생명의 보자기에 감싸일 것입니다.”(25,29)라고 말한다. 이 말로 미루어 우리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은혜에 감싸여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렇게 복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남들에게도 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 단지 복을 주리라, 복을 베풀리라가 아니라 “네 자신이 복이 되리라”고 하셨다(창세기 12,2).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느님의 복으로  사람들 모두에게 구현되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되리라는 말씀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은 서로서로를 존중하며 살라고, 서로서로를  위해 지킬 것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소리를 잠재우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서로에게 순명하고 겸손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benedictus”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날 사람들이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찾아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루가복음 1장에서도 복福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이 [복되시다]는 말은 성모님의 본성을 한마디로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즈가리야의 노래에서도 “주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는 당신 백성을 찾아 속량하시고…(루가 1,42; 1,68)”하며 [찬미받으시라]고, 곧 [복되시다]고 되풀이 노래한다.

 

그런데 이 [복되십니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향하여 드릴 때는 찬양하는 말이 되고, 반대로 강복을 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 된다. 결국 좋게 말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좋은 말씀이 바로 좋게 해주시는 일, 선을 실현하시는 힘과 똑같다. 말씀과 행함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고 했다. 또 “보시니 좋았다”고도 하였다. 말씀하시고 이루시고 강복 하시는 것이 모두 하나이다.

 

이렇듯, 조물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은 다름 아닌 “복 자체”이시라고 일컫는 것이 곧 찬미이다. 복을 두루 베푸시어 강복하시고, 지어내시는 조물들을 좋게 만드시어, 그들 또한 축복할 줄 알게, 하느님을 좋은 분으로 말(찬미) 할 줄 알게, 그 하신 좋은 일을 알리고, 그 내리시는 복을 서로 빌어주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힘쓰고 베푸는 것, 이것이 곧 축복이다.

 

시편 113편은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우리는 주님을 찬미(복되다)하는도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시편 33,1)고 노래한다. 또 축일과 첫 주일 아침기도 때마다 바치는 세 소년의 노래(다니 3)에서도 “찬미하라”(benedicite)는 말이 연달아 나온다.

 

그렇다고 베네딕도 회원들이 하느님의 복을 독점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항구하게 모두 내맡기는 삶을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바로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베네딕도회 수도자라면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은총으로도 복되고 이름으로도 복 받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베네딕도 성인의 이름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은 하느님 은총의 보자기에 싸이듯 복을 받아, 자신이 그 복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는 샘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편에는 “뒤에서도 앞에서도 저를 에워싸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셨나이다.”(139,15)하였다. 이렇게 노래하는 삶, 이런 기쁨의 삶, 이처럼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고, 스스로도 그 사랑을 살아냄으로써 은혜에 보답하는 삶 ― 모든 신자들의 삶이 그러해야 하겠지만 ― 남달리 그 진의를 의식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아닐까 한다.

 

루가복음 6장의 행복 ? 불행 선언 바로 다음에는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6,28)는 말씀까지 나온다. 정말 넓은 가슴, 넓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고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그런 화평의 복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오히려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은 복을 물려받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1베드로 3,9).

 

그렇다면 “너는 복이 되리라”라는 말씀에 따른 베네딕도 정신의 구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대략 세 가지로 기초된다고들 한다.

 

 

1.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선하면 안 된다.

 

우선 베네딕도 성인께서는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선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거듭 하신다. 그런데 이야말로 바로 요즘 세상에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최우선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하며 뜻을 세워야만 한다.

 

일심一心으로 입지立志를 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뜻을 세워 올곧은 마음으로, 이를테면 지사적志士的으로, 평생 살아내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늘 변하는 세상에서 그때그때 민첩하게 반응하고, 잽싸게 자기의 설 터를 마련해 나가면서 요령껏 사는 쪽으로만 선택하고, 그런 능력을 키우는 일에만 바쁘다.

 

절대적 의미에서 아무것도 그 이상의 것이 없다고 하는 어떤 것을 자기 삶에 뚜렷이 세워놓고 그것을 흐트러짐 없이 쫓아 사는 그런 모습이 오늘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아쉽다.

 

성규에는 “절대로 아무것도...”라고까지 하면서 “절대로”라는 말이 거듭 나온다. 장상이든, 동료이든, 나이 어린 사람이든, 병자이든, 손님이든 모두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대하는 그런 철저한 마음이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치 않다”는 마태오복음의 말씀(10,37)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을 더욱더 참되이, 더욱더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오롯한 마음을 세운다는 뜻이다.

 

수도자를 일컫는 monachus, monacha라는 말은monos에서 나왔는데, 이는 “홀로”라는 말도 되지만 “오롯이”라는 뜻도 있다. 오롯하게 산다는 말이다. 그저 입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뜻을 세워 오롯하게 사는 일이다.

 

이것이 요즈음같이 요령으로, 타산으로 사는 세상에 참말로 아쉬운 부분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애써 노력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삶으로 실현하고 세상 안에서 그것을 입증하도록 불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일심으로 뜻을 세우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하다.

 

 

2. 공동체, 규칙, 아빠스

 

수도원은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이고, 그곳에는 규칙이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법이라든가 지켜야 하는 무엇을 제약이라고만 생각하고 아주 싫어한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려면 서로 지켜야 할 것들, 즉 어떤 가풍家風과 법도法度와 예의가 있다.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사람들에게 서법書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붓으로 글씨를 써오면서 체득한 이치를 정리한 도道가 바로 서법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밖으로부터 내게 짐지우는 무엇이 아니다. 성규도 첫 낱말을 “들어라”로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순명하라”고 나오는데, 이 말씀은 맹목적으로 나를 꺾고 남이 예부터 해온 그대로 무턱대고 따르라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도움말로, 지름길로 우리는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시대적으로 누적된 경험의 보고에서 도움을 받을 때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 “듣거라 아들아” 하는 이 말씀은 오래 전부터 복음을 살려고 힘썼던 큰 어른들이 가신 길을 너에게 전해 줄 터이니 거기에서 참 이치를 깨닫고 배우면서 바로 살라는 뜻이다.

 

규율이라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위해 지켜야 삶이 잘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는 책임이 있고, 중심이 있고, 질서에 봉사하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 장상이란 바로 아버지의 현존으로서 남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또 서로서로도 겸허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공동체의 규칙, 질서는 요즘 시대가 아쉬워하며 찾아야 될 좋은 의미의 도리이다.

 

 

3. 순종, 침묵, 겸손

 

그 다음으로 순종을 살펴보자. 순종은 강요당한 한 쪽만 하는 무엇 아니라 ‘서로’ 하는 것이다. 서로 순종하고 서로 섬기라고 하신다. 또 ‘즉시’ 순종하라고도 하셨다. 그런데 순종하려면, 말을 들으려면, 자기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므로 침묵 없이는 순종을 할 수가 없다. 나의 소리가 크면 들을 수가 없고, 들을 수 없으면 순종할 수 없다. 요즈음 자기 본위의 자유를 많이 내세우는데, 자기 소리를 잠재우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하고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노스의 ‘침묵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종을 쳐서 침묵시간이 되었으니 침묵하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참된 침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열왕기 상권에  엘리야에게 들려온 하느님의 음성도 지진이나 천둥 번개소리가 아닌, 침묵 속에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들려왔다고 했다 (19,11-13).

 

우리가 아상我相과 소아小我를 내세우고 있는 한 침묵은 없다. 나를 잠재우고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 또한 우리 시대에 참으로 아쉬운 모습이다. 자고로 말이 모자란 적은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고 싶고, 또 배워야 한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분도 성규에 보면 겸손에 대한 장이 제일 길다. 그만큼 분도성인께서는 겸손을 중요시하셨다. 그렇다고 겸손이라는 것이 그저 기죽어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서 보시듯이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한 데가 많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확신,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참된 순종과 침묵과 겸손은 우러나온다.

 

나를 사랑하는 분의 뜻에  귀 기울이는 침묵, 그 속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민감하게 헤아려 행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겸손의 길이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를 낮춘다거나, 반대로 오만이나 두려움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배워 익혀야 할 수행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수행을 거쳐 마음을 닦아 나아갈 때 차츰 이루어진다.

 

순종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마음에서 나온다. 본디 순종이란 하느님께서 강요하셔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 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사랑을 알 때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들과 상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요즘 흔히 쓰이는 용어를 빌자면 식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내 뜻을 식별의 결과로 내세우는 자기기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곧 다수결의 위험에 대해서이다. 다수결에서는 100명 중 51명만 손을 들면 끝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큰 비극의 대부분이 이 다수결에서 나왔다. 예수님도 다수결로 처형되셨다.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은 9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고 합법적인 절차를 다 밟아서 생긴 일들이다. 다수가 틀려도 어마어마하게 틀린 것이다. 이러한 예는 역사에서 거듭거듭 나온다. 민족 분쟁, 종교 분쟁 등, 대부분의 참극들이 엄청난 다수의 지지를 업고 나왔다. 다수를 믿었다간 큰일 난다. 우리도 요사이 민주화, 민주화하면서 무어든 다수결로 하자고 하는데, 덮어놓고 다수결만을 부르짖을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겸허하게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이를 찾아 받들어야 한다. 그저 쉰 한 명이 손들어서 되는 일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와 같이 뜻을 세워 일심으로 나아가는 모습, 법도는 제약이 아닌 참 길임을 깨닫는 마음, 나를 비우고 내 상相을 지워 남에게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순종의 모습 ―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너무나 결핍하고 있고 아쉬워하는 면모들이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들을 분도회 수도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II. 가족


1. 함께 사는 것 . koinonia

 

이제 가족 ? 함께 사는 것 ? koinonia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베네딕도 성인은 정신유산을 시공 안에서, 즉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실현하는가 하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규에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하느님의 집에서 누가 혼란을 느끼거나 근심하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당가나 객실담당 또는 원장 등이 “하느님의 집”을 잘 꾸려나가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 하느님의 집 식구답게 이렇게 저렇게 해라, 하느님의 집에서는 이러이러한 일은 있으면 안 좋고,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말씀도 나온다. 그런데 그저 ‘집’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또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고도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신다. 참으로 놀라운 표현이다. 분도회 수도자들이란 이처럼 하느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가족들인데 그렇다면 그 “하느님의 집”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분도회 전통 안에서 그 하느님 집안에서 늘 마음에 새겨 살아온 것들이란 과연 무엇일까.

 

[정주定住] : ‘정주定住’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정주란 시공 안 어딘가에 자리 잡는 것,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 붙어서 사는 것을 말한다. 붕 떠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붙어서 사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어딘가에 뿌리를 못 내리고 부평초처럼 붕 떠서 사는 부유층(浮游層) 사람들이 많다. 이에 반하여 진정한 공동체생활이란 시공 안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일정한 규범 안에서 마음을 닦으며 사는 삶인 것이다. 그런 만큼 스스로도 자신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여기고 남들 또한 같은 가족의 식구로 여길 줄 아는 너그러운 환대의 특성을 가진다.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마음과 몸이 뿌리내린다는 것은 실로 어렵지만 그럴수록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요즈음은 빠를수록 좋다, 자꾸 바뀔수록 좋다면서 도대체 안정이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큰 덕이나 되는 것처럼 떠벌인다. 하지만 생명을 기른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순리 안에서 세월이 걸리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삶의 이치를 보여 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규에서도 소위 ‘사라바이따, 기로바구스’ 따위의 '돌중, 멋대로 중들'은 못쓴다고 하면서, “이런 자들은 다 제쳐놓고 가장 굳센 회수도자들을 다루어 나가자”고 초장에 나온다(1,13). 이것은 영신생활이 아무 곳에서나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이다.

 

어느 “곳”에 대한 사랑 ― 이 “곳”이란 예컨대 그저 광안리라는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다 ― 내 마음의 “곳”, 그것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함께 화합하여 사는 것이 필요하다. 아파트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집이라는 개념조차 없이 살아가는, 그러기에 마음마저 어디에도 붙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수도자들의 정주생활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띤 중요한 징표로 생각된다. 밖으로 활동도 해야겠지만 수도원을 근거로 응집된 힘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그 뿌리내림으로부터 가지 돋듯이  밖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참 생명이다. 노인문제, 부부문제, 아이들 문제 ― 모두 가정 와해에서 일어난다. 마음의 자리를 못 잡은 탓이다. 이렇게 한 곳에 머물러 고요히 뿌리를 내리며 사는 모습을 사람들이 너무나 아쉬워하고 중요하게 느끼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수도원을 찾는 게 아닐까.

 

 

2. 살림 . Economia

 

‘Economia’라는 말은 ‘집’(oikos)이라는 말과 ‘규율’(nomos)이라는 말이 합쳐져 된 단어이다. 그대로 옮겨보면 가율(家律)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말도 ‘살림살이’, 줄여서 ‘살림’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쓴다. 서로를 살리면서 함께 살아나간다는 뜻으로 여긴다. 그런데 집이란 세상적인 것과 영신적인 것이 대립되는 장소가 아니라 둘이 하나로 융합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하도록 하는 곳이다. 그러니 순전히 영적인 것만 바라며 감상에 젖어서도 안 되겠고, 또 너무 타산적으로 세속적인 생각에 빠져서도 안 될 일이다. 성한 몸에 성한 정신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오늘날처럼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나머지 이윤추구만이 유일한 원리가 되고 지상의 목적이 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는 정신이 깃들 수가 없다. 이제는 이윤추구가 어떤 정부보다도, 사회보다도, 다른 사람보다도 위이다. 무엇이든 벌이가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한다. 그렇거늘 이런 풍조에 우리가, 전 세계가 어이없이 급속도로 물들고 있다. 대단히 걱정스러운 문제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풍조에 대한 반동은 자칫 신비주의적으로 흘러, 화끈한 기도모임이나 뉴에이지 운동 등 현세부정적인 것들을 쫓는 현상도 한편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하고’라는 구체적인 시공의 자리 안에 참 살림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규에는 “수도원에는 가능한 한 모든 필요한 것, 즉 우물, 방아, 정원이나 여러 가지 작업장의 일들이 수도원 내부에서 이루어지도록 배치되어 있어야 하며, 그래서 수도승들이 밖에서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영혼에 전혀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66,6-7)라고 가르친다.

 

수도원은 오랫동안 자급자족을 추구해 왔는데 그것을 함부로 전근대적이라고 할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앞으로도 분도회 수도자들이 그러한 삶을 꿋꿋이 그리고 꾸준히 살아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우리들이 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베네딕도회 전통 안에서라면 살림을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살림의 종이 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큰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오히려 더 정성스럽게 살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토머스 모어 성인은 가족도 친구도 나라도 모두 끔찍이 사랑했다. 게다가 취미도 남달리  많았지만 안으로는 완전히 자유로웠다. 아니, 안으로 완전히 자유로웠기에 오히려 나라와 친구와 가족을, 현세를, 더욱 극진히 사랑할 수 있었던 그였다. 즉 내면으로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매인 사람보다 오히려 더 애정을 가지면서도 참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살 수 있었고, 그것들을 잘 쓸 줄 알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살림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이해관계에 매이는 일 없이, 길게 내다보고 잘 꾸려나가면서도 안으로는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 것, 이런 모습이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데, 요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허욕의 상승이라고나 할까. 점점 “더! 더! 더!” 하면서 남과 비교하고, 그럴수록 만족할 줄 모르며 상대적으로 불행감을 느껴 점점 더 허기가 지는 소유욕으로 헛살림을 하는 형세다. 우리 시대의 시장경제가 몰아오는 몹쓸 바람이다.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서 분도수도회가 진정한 애정을 갖고, 정성을 기울여, 사심 없이 살림을 하면서도 안으로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그런 조화의 따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생각해 본다.

 

 

3. 문화 . 교양

 

이제 문화, 교양에 대하여 이야기할까 한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시편으로 기도하셨다. 아버지께 바치는 시편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일’(Opus Dei)과 더불어 ‘성독’(Lectio Divina)을 그야말로 당신 삶 자체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문화'라는 말을 라틴어로는 ‘cultura’라고 하는데 ‘경작한다, 농사짓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문화라는 말은 일구고 씨뿌리고 가꾸어 거기서 생명이 솟아나게 하는 일이다. 중국 최초의 추기경님의 성씨는 전田씨였다. 그분이 별호를 하나 쓰셨는데 ‘경심(耕心)’이었다. ‘마음농사’라는 뜻이다. 참 좋은 이름이다. 교양, 문화라는 것은 참으로 마음농사이다. 마음을 가꾸는 일이다. 지식을 얻으려고 겉멋을 부리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속으로 살찌우는 일이다.

 

옛날에 한 권의 성서를 숙련된 수사가 필사하는 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 드는 양피지만 하여도 양을 들판으로 하나 가득 잡아야 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성서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성서를 외웠다. 글도 못 읽으니 듣고 또 들어서 외운 다음 마음속에서 그것이 완전히 살이 되도록 되새겼다. 성서 말씀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농사를 한 셈이다. 성독(聖讀 Lectio Divina) 묵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성규에도 “형제들이 순서대로 읽거나 노래하지 말고,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형제들이 할 것이다.”(38,12)라고 하였다.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다른 이의 마음에까지 가 닿게 하려면 건성으로 읽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려면 내 안에서의 마음농사부터 우선 잘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주님 섬김의 배움터’라는 말이 다가온다. ‘배워야 한다.’ 삶을 살찌우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는 것, 건실하고 귀한 진정한 문화를 몸에 익히고 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토양에서라야 정신적으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단지 자격증, 학위 ― 뭐 그런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속알맹이의 마음농사를 꾸준히 짓는 것이 배움이고 문화이다.

 

이제는 문화마저 경쟁으로만 이루어 내려 든다. 위정자들을 비롯하여 생존경쟁이다, 약육강식이다 하면서, 발 벗고 경쟁 안 하면 다 찌부러진다고들 외친다. 그렇게 해서 더 힘이 세어져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너나없이 강자의 대열에 들어야만 한다고 세뇌한다.

 

약자는 미안하지만 딛고 잊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건 문화도 아니고 살림도 아니다. 정보화 사회도 그렇다. 더 알아서 남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이 참 앎이 아니다. 앎이란 무엇을 더 알아서 남을 꺾고 좌우하는 힘의 도구가 아니라, 대상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하나 되어 더욱 참되이 그 대상을 사랑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베네딕도회는 다른 어느 수도전통보다도 교육과 교화를 통해 이런 내면의 앎에 마음을 써왔고, 바로 이런 모습을 사람들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4. 손님맞이 . 환대

 

이제 손님맞이, 환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환대는 참 묘한 것이다. 라틴어에 “hospes”라는 말이 있는데 손님도 hospes이고 주인도 hospes이며 낫선 사람도 hospes이다.

 

똑같은 말을 가지고 주객主客과 삼자까지도 다 일컫는다.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까. 진정한 공동체가 깃들어 있는 곳, 서로서로를 들어주는 곳에서 하느님 신비에 자신을 내맡기고 사는 그런 품안에서 환대받기를 희망한다. 초월과 친근이 하나로 드러나는 표징이 되는 그런 삶을 기대한다.

 

성규에 보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온갖 친절을 드러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친절을 라틴어로는 humanitas라고 하였다. 곧 “사람다움, 사람스러움”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온갖 사람다움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정”人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사람다움을 드러낸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하느님께서 강생하셔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진정으로 사람다운 존재, 진정으로 사람다우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을 닮으라는 의미이다. 인정이라고 한다면 비정非情의 반대이다. 타산적인 이기심, 심지어 잔학성과는 정반대의 말이다. 성규에서는 “나보다 남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도록 하라”고 한다. 속세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 그 길을 가라는 말씀이다. 참된 인정은 하느님께서 그 안에 깃들어 사시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다.

 

또 “손님들이 하느님의 집에 손님으로 맞아들여지도록 하라”고도 했다. 하느님의 집에서 살림을 하는 우리이므로 그곳을 찾아오는 손님을 하느님의 손님으로 모시라는 말이다. 게다가 그 손님을 모시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몸으로 대행하는 사람들이 그 집안의 장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서 소임상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장상부터 하느님의 마음을 구현하기 위해 솔선하여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성규에는 또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은 상대방을 그리스도처럼 보라는 뜻도 되겠지만, 맞이하는 측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손님을 맞으시는 것처럼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맞이하시듯 맞으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손님맞이를 대행하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 집의 손님답게  손님을 맞이하라… 그런데 세상 물정은 얼마나 다른가. 그리스도의 입장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용의주도하고 슬기롭고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품격이 있어야 하며 기쁨과 평온과 남을 존경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하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장상을 비롯하여 모든 수도자가 주님을 대신해서 손님을 맞는다는 생각으로, 또 찾아오는 손님을 다가오시는 주님으로 맞이한다는 생각으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드높은 가르침이다.

 

오늘의 사회가 서로를 그런 마음으로 대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확 바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처럼 손님을 맞이해도 내 속셈을 채우기 위해서 맞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돌아가는 이치이다. 전혀 타산이 없는, “나보다 남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런 참되고 순수한 마음의 환대를 이 사회에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크고 아름답고 참신한 표징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굶주리고 갈증을 느껴 수도원을 찾는 게 아닐까.

 

[코이노니아, 제27집, 장익 요한 주교님(춘천 교구장)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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