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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순교자 시성 · 시복과 순교자 연구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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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1 ㅣ No.879

特集 : 한국 순교자 시성 · 시복과 순교자 연구 종합토론

 

 

사회자

조광 명예교수 · 고려대학교

 

토론자

조현범 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류한영 신부 ·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노길명 명예교수 · 고려대학교

 

 

조광 : 오늘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한국 순교자 시성 · 시복과 순교자 연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된 이유는 지난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서 한국 순교복자 124명의 시복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루어졌던 124위 시복을 위한 노력을 정리함과 동시에 한국 교회가 같이 받들고 있는 103명의 성인들에 대한 시복시성 과정을 분명히 하고자 이 주제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이 그 당시를 어떻게 살았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19세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영성적인 측면을 같이 검토해 보았습니다. 모두 세 개의 주제에 대해서 세 분의 토론자가 나와 계십니다.

 

먼저 첫 번째 주제는 “103위 순교자 시복 · 시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로 윤민구 신부님이 담당을 해 주셨습니다. 윤민구 신부님은 103위 순교자 시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담, 그리고 그동안 본인이 여러 가지를 공부해 오셨던 시복시성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또 윤 신부님은 구 교회법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철저히 잘 밝혀주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교수로 계시는 조현범 교수님의 약정 토론을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 주제에 대한 약정 토론이 끝난 후, 다시 발제자들에게 기회를 드려서 혹시 발제 과정에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으면, 같이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플로어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되도록 간단하게 3분 이내로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첫 번째 주제에 대한 약정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조현범 : 우선 2014년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학술회의장을 찾아서 청중석 제일 뒤에 앉아 오늘의 학문적 향연을 구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 교회사학계의 원로이신 윤민구 신부님의 발표에 대한 토론까지 맡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사 연구자 전체로 보자면 제일 말석에 앉아 있어야 할 제가 감히 이런 중책을 맡게 되어 무척 송구한 마음입니다. 저는 생각도 짧고 공부 역시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토론자 역할을 사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에 윤민구 신부님을 직접 뵙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서 여러 번 망설이다가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하더라도 잘 모르고 하는 말로 받아들여 주시고 자상히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1. 옛 교회법에 따른 시복시성의 절차에 관하여

 

천주교에서 특정 인물을 복자나 성인으로 기리고 그 삶을 본받기 위해서 제도적인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를 알기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인 공경이 발생하게 된 경위, 지역 주교의 권한이었다가 교황의 배타적 고유 권한으로 변경된 성인 선포, 16세기 이후 시성 절차의 법제화 과정(식스토 5세, 우르바노 8세, 베네딕도 14세 등이 그 주역이겠지요) 등을 말씀하신 뒤에, 1917년 교회법, 이른바 비오-베네딕도 교회법전이라고 불리는 교회법에 따른 시복시성 절차를 설명하셨습니다. 한국에서 79위 시복, 24위 시복, 103위 시성 모두 이 교회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은 한국의 시복시성 과정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디딤돌이 됩니다.

 

1) 그런데 잘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시복 수속 자체가 1930년에 와서 둘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목격 증인이 있는 경우는 새로운 시복 건이고, 역사 사료를 통해서 다루어야 하는 경우는 역사적 시복 건 또는 옛 시복 건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124위 시복 건은 역사적 시복 건으로 진행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시기에 순교한 분들을 시복 청원 대상자로 올리는 시복 건은 어디에 속하게 되나요? 목격 증인이 살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시복 건인가요? 두 가지 시복 종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절차나 진행 과정이 완전히 다른가요? 아니면 그냥 명칭을 달리할 뿐인가요?

 

2) 시복 수속의 절차에서 제일 처음 시작되는 일은 해당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스스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서 시복 수속을 개신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해당 교구의 교구장 주교는 그 순교자나 증거자가 세상을 떠난 곳을 관할하는 교구의 교구장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순교자나 증거자가 세상을 떠난 곳과 그 시신이 현재 묻혀 있는 곳이 각기 다른 교구에 속하면 세상을 떠난 곳이 소속된 관할 교구의 교구장에게 시복 수속 개시의 우선권이 있게 되는 것인가요?

 

3) 증인 심문은 정해진 질문 사항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항이 79위 시복, 24위 시복, 124위 시복에서 전혀 변화가 없었나요? 그리고 그 문항들은 무엇을 찾아보면 알 수 있나요? 예전에 라틴어로 되어 있는 시복 재판 증언록을 본 적이 있는데, 문항은 없고 대답만 있어서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를 몰라서 우왕좌왕했습니다. 증인 심문 문항들의 역사를 알려면 무슨 책을 보면 좋을까요?

 

4) 교황청에서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한 후에 시복 후보자에게 ‘가경자’라는 칭호가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124위 시복 준비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종’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 가경자 칭호와 하느님의 종 칭호는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요? 가경자는 비오-베네딕도 교회법에만 들어 있는 용어인가요? 현재는 폐기된 단어인가요? 그런데 79위 시복과 관련하여 예부성의 심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조선대목구에서 진행한 교황청 수속에 관한 심사를 소개하실 때 “비오 9세 교황이 1857년 9월 24일 교령을 통해 가경자로 선포한 한국 순교자들의 목록”이라는 명단 뒤에 가서 순교에 대한 심사에서 ‘하느님의 종’이라는 용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면 이미 비오-베네딕도 법전에도 가경자와 더불어 하느님의 종이라는 용어가 있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5) 시복과 시성 절차에서 기적에 대한 심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기적 하나가 자동적으로 관면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자신의 재량으로 기적 한 가지를 관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적을 관면하는 건가요? 즉 기적이 없어도 된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기적에 대한 심사를 관면하는 건가요? 말하자면 기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에 대한 심사를 관면해 준다는 것인가요?

 

2. 79위 순교자의 시복 수속 경위에 관하여

 

1) 79위 ‘시복 건의 개시’에 대한 ‘개요’에 들어 있는 문서들 가운데 ⑬ 포교성 고문서고의 자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라자로회 출신 몽골 대리감목구 물리 주교”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라자로회란 아마 선교수도회(Congregatio Missionis)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프랑스 선교수도회의 경우에는 그 본부에 파리 북쪽 생 라자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라자리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라자로회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것이 아닐까요? 마치 라자로라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되어 있거나, 수도회로서의 카리스마가 라자로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생 라자르 거리에 본부를 둔 수도회여서 라자리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릴 뿐이지 라자로회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울러 대리감목구라는 용어도 그렇습니다. 현재 교회법전에서는 ‘Vicariatus apostolicus’를 교황대리감목구 또는 줄여서 대목구라고 부릅니다. 대리감목구라고만 하면 감목대리구(Vicariatus foraneus)와 혼동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2) 1882년 조선에서 블랑 신부가 교황청 수속을 시작하였고, 뮈텔 신부가 판사, 로베르 신부가 공증관에 임명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촉구관(promotor fidei)은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블랑 주교가 부대리감목구장에 임명되었지만, 아직 주교품을 받기 전이어서 신부라고 부르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통상 언제부터 주교로 자칭 또는 타칭하게 되나요? 임명 교서의 수령 이후인가요? 아니면 주교 성성식 이후인가요?

 

3) 79위 시복에 관하여 1921년 3월 22일에 예비회의가 열렸는데, 뮈텔 주교가 《승정원일기》, 《일성록》, 《헌종실록》에서 찾은 자료를 번역하여 예부성에 보고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924년 3월 18일 본회의에서 옥사한 17위의 순교 여부가 문제가 되어, 특별회의가 열렸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로마에서는 파리로 연락하여 다블뤼 주교의 기록인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이 이름은 최석우 몬시뇰께서 붙인 것입니다)의 원본과 필사본을 모두 보내라고 했고, 그래서 파리에서는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블뤼 주교의 자료 원본을 확인하여 17위 중 14위의 순교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병사한 것으로 판정받은 3위를 뺀 79위의 순교 사실을 확정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여쭈고 싶은 것은 최석우 몬시뇰께서 그토록 찾고 싶어 하셨던 원본과 필사본은 이때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 뒤 필사본은 로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윤민구 신부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3. 24위 순교자의 시복 수속 경위에 관하여

 

1) 79위의 교구 수속 때와 마찬가지로 24위 교구 수속에서도 르 장드르 판사, 한기근 시복 조사 청원자, 홍병철 공증관만 나오고 신앙촉구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교구 수속에서 재판을 진행할 때 증인 심문을 위한 신앙촉구관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인가요? 그래서 선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요? 아니면 기록이 없거나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랬던 것인가요?

 

2) 24위 시복을 위해 서울대목구가 교황청으로부터 위임받아 진행한 교황청 수속의 결과는 1926년 무렵에 교황청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발표문에는 언제 교황청으로 보냈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1926년 3월 18일로 재판이 끝났다고 하니, 아마 그해에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부성에서 교황청 수속에 대한 심사를 하는 데에 대비하기 위하여 쵸파 변호인이 1951년 3월 30일에 ‘개요’와 ‘정보’를 작성하여 예부성에 제출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52년에 서울대목구에서 대행한 교황청 수속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교령이 나왔습니다. 서울대목구에서 교황청 수속을 완결하여 보고한 뒤로 25년이 걸렸습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일까요? 원래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79위 때는 1906년에 제출했고, 1910년에 교령이 나왔습니다. 25년과 4년의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원인은 당시 유럽의 상황이었을까요? 신부님께서 시성 청원인이셨던 경험으로 볼 때 로마에 거주하는 예부성 소속 변호사들의 밥벌이하고도 관련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3) 1964년 3월 21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의 대표이자 시복 청원인이었던 아노즈 몬시뇰이 요청하여 푸르티에 신부가 시복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요청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울러 프티니콜라 신부의 경우에는 ‘전 예비회의’에서 부정적인 평결이 나와서 제외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박해자 측의 형상적 요소에 심각한 의문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박해자들이 신앙에 대한 증오심에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고 조선의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프랑스 주교와 신부에게도 해당되는 일인데, 그런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해당자에게만 결격 사유를 적용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혹자는 프티니콜라 신부의 정신질환 또는 식복사와의 성추문 등에 대한 증언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신부님께서 읽으신 회의 기록에는 그런 언급이 안 나오나요?

 

토론자의 역할을 못하고 질문자의 역할만 한 것 같습니다. 너무 제 욕심만 차린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최석우 몬시뇰께서 선종하셨을 적에 윤민구 신부님께서 애도사를 하시면서 이젠 공부하다가 막히면 어디다 물어볼 데가 없어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몬시뇰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오늘 저희에게는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신부님이 계셔서 참 좋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앞으로 오랫동안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조광 : 조현범 선생님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먼저 옛 교회법에 따른 시성 절차에서 의문시되는 부분들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03명의 순교성인들의 경우에는 79명의 순교복자와 24명의 순교복자가 한꺼번에 모아져 시성이 되었기 때문에 103명의 성인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나누어서 79명 순교자들의 시복 과정에 대해서 자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24위 순교자 시복 경위에 대해서도 아울러 몇 가지를 물어보셨는데, 여기에 대해서 윤민구 신부님의 대답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윤민구 : 먼저 제 글을 꼼꼼히 잘 읽어주시고 제가 놓친 부분을 지적해 주신 점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 글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논문 제목이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라고 했는데, 이것은 제가 정한 게 아니고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정해 주신 제목입니다. 제목대로라면 내용을 보다 좀 더 심도 깊게 봤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밖에 안 되었습니다. 우선 연대순으로 정리해놓고 난 다음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저에게 기대하지 마시고 여러분 중에서 누가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한국 전쟁 시기의 순교자들이 역사적 시복 건이냐? 새로운 시복 건이냐? 그것을 말씀하셨는데요. 사실은 그분들에 대해서 어떤 사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남아있는 거라고는 증언들인데, 문제는 증인들을 심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될 거라는 겁니다. 증언만 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신 것 같고, 어쨌든 제가 생각하기에는 ‘새로운 시복건’으로 접근을 해야 유리할 것 같은데, 자료가 충분할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아울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교회에서 ‘20세기 순교자’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것을 만든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기존의 법적인 순교 개념으로는 이분들을 순교자라고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경우만 봐도 증언들이 “6 · 25 전후를 해서 그분들을 잡아갔다”고 하는 것이 전부이거든요. 그다음을 본 적도 없고 기록을 찾아서 확인해 본 것도 없으며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라요. ‘그분들이 잡혀가서 어디서 공산당에 의해서 처형되었을 거다’라고 추정을 하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서 ‘교구청에 갔다가 회의하고 오시는 길에 없어졌다’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이분들을 전통적인 개념에서 순교자라고 하기에는 참 여러 가지로 어려우니까 ‘20세기 순교자’라고 해서 ‘종합적으로 그분들을 기억하고 공경하고 존경하자’ 이런 뜻으로 한 겁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6 · 25 때에 순교하신 분들을 시복시성하는 과정은 순탄하지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또한 조선 시대에 돌아가신 분들보다 더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다음에는 순교자 시복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시복을 추진하는 관할권은 순교자가 순교하신 장소를 관할하는 교구장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에는 시성성에서 달리 승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증인 심문의 문항에 대한 것인데, 저도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아직도 못 찾았습니다. 이것이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한데, 모르겠습니다. 혹시 파리 외방전교회 측에서는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뮈텔 주교님이나 이런 분들이 하신 것이니까 혹시 국내에다 놔두었는데 없어졌는지, 아니면 복사를 해서 본부에 보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본부에 가면 찾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하느님의 종’을 계급장 하나 딴 것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복을 추진하는 분들을 부르는 명칭일 뿐이지, 어느 단계에 가게 되면 그다음부터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분이 순교에 대한, 아니면 성덕에 대한 평판이 있어서 그분을 시복시성을 해야겠다고 교구장이 생각하고 시작하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비유하기 좀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피의자가 있지 않습니까? 범죄하고 관계되면 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나중에 범인도 되지만, 처음에는 피의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그냥 부르는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종’은 시복을 추진하는 시작 단계부터 명단을 올릴 때 ‘하느님의 종 누구누구’ 이렇게 올리는 겁니다.

 

‘가경자’라는 말은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왜 없앴을까?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시복 과정에서 선교사 두 분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분들도 올라가는 과정에서 ‘가경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가경자면 영원한 가경자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번 교황령에서는 가경자라는 말을 없앴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선교수도회’의 명칭에 대한 문제인데, ‘생 라자르’ 거리에 그 수도회가 있어서 라자로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수도회가 라자로 마을을 운영했습니다. 거기에 나환자도 있었고 어려운 사람들도 같이 살아서 그것이 파리에서 대단히 유명하게 되었지요. 또 그 밖에도 자선 사업도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수도자들을 라자리스트라고 부른 겁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생 라자르’라는 거리 이름도 생기게 된 것이고, 전철역도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름인 ‘선교수도회’가 다른 선교 수도회하고 구별이 안 돼서 그런지 ‘라자로회’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라자로회’란 이름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만 쓰는 말도 아닌 겁니다. 교황청에서도 역시 라자로회라고 씁니다. 그래서 그냥 써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주교는 언제부터 주교냐’는 문제인데요. 그것은 주교품을 받아야 주교입니다. 왜냐하면 주교품을 받을 때 안수를 받는데, 그 안수에 대해서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안수를 받음으로써 사도들로부터 계속 내려오는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할까요. 그것이 안수를 통해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주교품을 받을 때는 주교들이 세 분 오셔서 하지요. 그만큼 안수가 예식 중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때 안수를 받아야 주교가 되는 것이지요. 임명장만 받고 주교가 못 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주교라고 부르지 않더라고요.

 

그다음에 다블뤼 주교님의 기록 원본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문제인데 저도 잘 모르죠. 그런데 추정을 해보면, 몇 군데를 제가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바티칸 비밀 고문서고이죠. 혹시 있다면 그곳이 제일 유력하죠. 여기에서 물론 ‘비밀’이라는 말은 전 세계의 비밀 문제를 다 거기에 감추어놨다는 말이 아니고요, ‘교황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해서 ‘비밀’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많이 들어가 봤는데요. 제가 들어갔을 때는 ‘80년’이라는 규정이 살아있었습니다. 옛날에는 100년이 지나야 문서들을 공개했습니다. 그것이 조금 줄어서 제가 있을 때는 80년이 된 겁니다. 제가 1980년대에 갔었는데요, 83년도, 88년도, 89년도 여러 번 갔었는데, 그때 거기에 들어가서 찾았더니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1909년 이전 것은 봐도 그 이후 것은 못 본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 들어가는 것도 까다롭기는 합니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그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 후 문서 공개 제한이 80년이었다가 50년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월도 흘러갔으니까 아마 1960년대까지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번 샅샅이 다 뒤져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금방 간다고 해서 되는 문제는 아니고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드나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유럽의 고문서가 하루에 세 건밖에 못 보게 합니다. 한국 관련 리스트만 보고는 어떤 것이 내가 찾는 것인가 잘 몰라요. 그런데 그날 보겠다고 세 개를 써냈는데 다행히 자기가 찾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관계된다 해도 한두 페이지짜리일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날은 공치는 겁니다. 겨우 세 개 신청했는데, 전부 다 합쳐서 대여섯 페이지밖에 안 되면 공치는 수밖에 없는 거죠. 어떤 때는 내용이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요.

 

두 번째는 포교성 고문서고 귀중본 보관소를 찾아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인류복음화성입니다. 예전에 1811년 신미년 편지가 다 분실되었다고 알려졌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찾는 과정에서 관계자와 얘기를 하니까 그분이 “그게 원본이냐?” 물어서 제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무슨 글씨로 써졌느냐?”라고 해서, 제가 “한문으로 써졌다” 하니까,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는 본인이 어딘지 가서 찾아서 “있다”고 가르쳐 줬거든요. 그게 어디에 있었냐면, 고문서 중에서 귀중한 원본들을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교황청에서 움직이니까 모은 자료들이 엄청 많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다블뤼 주교님이 쓴 원본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또 하나는 시성성 고문서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아직 확실하게 누가 뒤져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고문서고 담당자하고 친해지면 되겠죠. 처음부터 들어가자 그러면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친해지면 그다음에 “한번 들어가 봅시다” 해서 찾아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죠.

 

네 번째는 예부성에서도 고문서고가 있을 텐데 거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부성에서 시성성으로 이관하는 중에 혹시 그걸 빼놓고 다른 것만 이관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아직 예부성 고문서고 어디 한쪽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못 찾는 것뿐이죠. 어떻든 누가 찾으러 가십시오. 아니면 로마에 계신 분이 하시든지 해서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시간을 내서 천천히 지내면서 해야 될 것으로 믿습니다.

 

다음으로 24위 신앙촉구관 이름이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 나옵니다. 신앙촉구관이 할 일은 처음에 교구에서 심문할 때 질문들을 작성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그냥 뮈텔 주교님이 직접 담당하셨는지, 아니면 그때 인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임명을 안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확인이 안 됩니다.

 

끝으로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대해서는 제가 많이 말씀을 드리는데요. 이 부분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현재 시성성에서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하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기본적으로 시성성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또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교황청에서 오랜 세월 시복시성을 하면서 이것을 따지는 이유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백서〉를 쓰신 황사영을 시복시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신중을 기해야 된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에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교회 생활 안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황사영을 시복을 한다 하면 한국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박해자 측의 형상적 순교를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성인이 되신 분들 중에서도 이 문제로 논란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콜베 신부님하고 마리아 고레티 성녀가 순교자로 시성이 되어서인데 그 과정에서 굉장히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황님이 하시겠다고 하니까 시성했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과연 콜베 신부님을 죽인 사람이 신앙 때문에 죽인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고레티 성녀를 죽인 사람도 신앙 때문에 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의 가르침,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하다 보니까 죽음에 이른 것이 확실한데, 그분들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박해하는 사람들 측에서 과연 그런 의미에서 죽였느냐? 아니잖아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죽인 사람이 신앙 때문에 죽인 건 아닌데 어떻든 죽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순교자로 할 것이냐, 그것은 좀 다르잖아요? 또 예를 들어서, 어떤 고위 성직자가 계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를 죽였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순교자냐, 그것은 아니잖아요? 성직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교자인가요? 죽인 사람은 신앙 때문에 죽이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생각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조광 : 감사합니다. 오늘 79명의 순교복자 그리고 24명의 순교복자, 합쳐서 103명의 순교성인들에 관한 연구는 우리나라 시복시성 연구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만약 이분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오늘 발표해 주신 그 정도 수준만 미리 되어 있었다면, 124위 시복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헤매던 혼란과 같은 것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124위뿐만 아니라 103위의 시성이라는 것이 예전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하고도 직결이 되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하느님의 종 124위 선정 과정과 시복 자료 정리에 관한 연구”입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는 차기진 선생님께서 발표를 해 주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24위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계셨던 류한영 신부님께서 약정 토론을 해 주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류한영 : 차기진 선생님께서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복자의 시복식이 있기 전까지의 전 과정을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종 선정과 약전 작성, 전기 자료집에 대해 보고서 형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발표는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대상자들을 선정하는 실무를 담당하고, 시복 재판을 위한 증거 자료를 주도적으로 수집한 전문가의 과정 정리로서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오늘 발표는 하느님의 종들의 선정 과정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발표자가 잘 설명하는 것처럼, “124위의 경우 각 교구에서 대상자 선정과 예비심사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해당 교구가 모두 참여하는 통합 추진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복시성 통합 추진 교구 담당자들의 회의 과정에서 1차로 대상자 선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이어 하느님의 종 선정위원회가 2차로 대상자를 선정했으며, 여기에서 확정된 시복 청원자들을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건의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이 선정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발표자는 하느님의 종들의 약전과 자료집 준비 과정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했습니다. 하느님의 종들의 자료집의 성격은 “‘옛날의 안건’에서 시복을 청원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되는 제반 기록과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는” 것이고, “향후 시복될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공경 운동, 즉 그들의 모범 안에서 신앙 후손들이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증언과 하느님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이요”, “교황청에서의 절차를 뒷받침해주는 필수적인 과정이” 됩니다.

 

124위의 시복 안건은 ‘옛날의 안건’으로서 문헌으로 성덕과 순교 사실을 준비해야 하므로 역사 전문가의 비중이 매우 큽니다. 한 지역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교회법적 역량이 확립되지 않으면 옛날 안건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103위의 시복시성과는 달리, 한국 천주교회가 주관하여 124위의 시복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성장하고 세계 교회사 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상징이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조선왕조의 순교자 문초 기록을 분석하고,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를 해독하여 순교자들의 삶과 성덕, 순교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법적 형식으로 124위 신앙과 성덕에 관한 역사적 증거를 시성성에 제출하였고, 그분들의 신앙과 삶이 신자들의 모범이 되며, 124위가 신앙의 정점인 순교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그 평판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작업에 참여한 역사 전문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 1 : 약전과 자료집 정리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질문 2 : 복자 124위의 시성을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특히 기적적 치유를 위한 전구를 어떻게 하여야한다고 생각합니까?

 

 

조광 : 그러면 차기진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차기진 : 사실 토론을 맡아주신 류한영 신부님께서는 시복을 추진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먼저 한 가지만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솔직한 얘기로 자료집 정리 작업까지만 했습니다. 현재 124위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들, 즉 교황청 수속 단계 이전까지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홈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의 교황청 수속 단계는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은데, 그 단계를 류한영 신부님께서 앞으로 정리를 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 그런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한테 질문하신 것 중에서, 두 번째 질문 중 하나 즉 “특히 기적적 치유를 위한 전구를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에 대한 답변은 저보다는 시복시성 청원인이신 류한영 신부님께서 직접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또 다른 질문, 즉 “복자 124위의 시성을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것인데요. 저는 우선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교구도 그렇고, 신부님들도 그렇습니다. 124위 복자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어떤 본당 신부님은, 당신 지역에서 복자가 탄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자가 누구인지도, 몇 분이 계신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우리가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아니면 주교회의에서 관심을 촉구해도 되고, 각 교구에서 해도 되고…. 관심이 이루어져야만 그다음에 기도와 공경 운동도 이어지고, 그러한 가운데 그분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본받아서 실천도 하고, 기적도 일어나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이라는 첫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어떠한 희망도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보조적인 역할은 또 다른 분들이 해야 되겠죠. 전기 자료집을 발간한다든지, 요즘 같으면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든다든지…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의 다음 질문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신부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약전과 자료집 정리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역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저나 다른 참여자들이 모두 고유의 업무를 따로 맡고 있던 상황에서 약전 작성과 자료집 정리 작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달리 어려웠던 점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박정일 미카엘 주교님하고 류한영 신부님께서 중간 중간에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여 아까 나왔던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수속 증언록 자료와 관련하여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증언자들에 대한 각 조목별 질문 내용이나 검찰관 혹은 재판관의 의견 등이 빠져 있는데, 이것은 병인박해 24위 시복 재판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두 자료에 빠져 있는 부분은 라틴어로 작성되어 있는 내용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절두산에 소장되어 있는 원문에는 같은 내용들이 모두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틴어 이외의 원문만 한국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 원래부터 라틴어로 작성되어 있던 부분, 즉 절두산 자료에 누락되어 있는 부분은 로마로 그대로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시성성 비밀 문서고나 인류복음화성 문서고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렇게 추정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조광 : 두 가지 질문에 있어서 한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히 답해 주시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지 시성을 이룰 수 있느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직접 신부님께서 의견을 말씀해 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신부님이 먼저 대답을 해 주시면 그다음에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류한영 : 아까 윤민구 신부님께서 발표하실 때 기적심사 관면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기적 비슷한 것이 있는데, ‘기적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교회법적 형식을 밟을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의사들이 협조를 안 한다’ 등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고 저도 동감을 합니다. 그래서 아까 시작하기 전에도 어떤 분이 “최양업 신부님은 왜 복자가 안 됐냐?”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최양업 신부는 지금 성덕의 심사가 내년 말경에 다 끝날 겁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굴러가는 것인데, 증거자로서 기적심사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데 기적심사를 객관적으로 증명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적을 정말 기적이냐고 계속 묻다가, 나중에 도저히 설명이 안 되면, 그때야 거꾸로 기적심사 승인을 한다고….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시복시성이 진행될 텐데, 만약에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 기적 치유심사를 잘 협조해 줄 수 있는 의사가 나오도록 기도하는 이런 것이죠. 아니면 기적심사를 잘할 수 있는 테크닉이나 경험들이 쌓여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앞으로 미래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많은 관심과 기도가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조광 : 그리고 윤민구 신부님께 드리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가경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느냐는 의견이었고, 또 하나는 promotor justitiae가 promotor fidei로 변동이 된 형태가 아닌가 하는 것도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민구 : 현재 보면 검찰관(promotor justitiae)이 있고, 판사가 있고, 서기관이 있고, 저도 그렇게만 생각하고 썼었는데, 1917년 교회법을 보니까, 거기에서는 그렇게 안 되어 있더라고 아까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교회법을 보면, 교구 사람들은 promotor fidei라고 되어 있고, 시성성이 그때는 예부성인데 거기에는 promotor generalis fidei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교구에서는 promotor justitiae라고 되어 있고, 시성성에서는 promotor fidei라고 되어 있죠. 하지만 전에는 promotor fidei는 교구에 있고, 교황청은 promotor generalis fidei 그렇게 되어 있어요.

 

끝으로 ‘가경자’에 대한 문제인데요, 제가 로마에 있을 때 교회법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 누가 질문을 했습니다. “가경자가 있습니까?” 하니까 시성성에서 “가경자는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가경자’란 말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아마 그 이후로 교황령이나 시행령이 수시로 보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시성성에서 가지고 있는 교황령이라든가 시복시성에 관계된 시행령의 내용들은 아주 적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보완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면 뭘 가지고 보완이 될 거냐 하면 구 교회법에 나오는 것들 중에서 다시 많이 삽입해서 보완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도 말씀을 드린 대로 순교의 개념 같은 것들도 과거의 개념들을 많이 받아들여서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광 : 대답이 되셨나요? 원래 124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이 끝나게 된다면 모든 신심 행위도 중단이 되고 연구도 중단이 되지 않겠냐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복 다음에 시성이 또 남아있고, 시복시성을 떠나서 역사를 연구한다는 차원에서도 순교자 그 자체의 삶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구가 필요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현재까지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형태를 본다면, 시복이나 시성에 최대의 목표를 두고 그것이 성취되면 그다음에는 다 지나간 일들로 되어 버리는 인상이 강합니다. 이것이 저 자신의 편견이기를 바랍니다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성인들 내지는 복자들에 대해 제대로 정리된 평전 내지는 성인전 하나 없습니다. 이것은 124위 복자들의 경우에도 약전만이 있지 그들의 전체적인 삶을 드러낼 수 있는 제대로 된 연구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원래 순서대로 하자면, 연구가 축적이 되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약전이 작성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124위의 시복 과정에서는 이러한 방법보다는 우선 약전 정리를 통해서 그들의 성덕을 드러내려고 노력을 해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큰 과제를 남겨두는 것임을 거듭 확인해야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시복시성이 있었다 할 때는 거기에서 이만큼 큰 행사라고 한다면, 반드시 행사 보고서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각종의 의궤를 간행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나오면 그 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 모든 일, 이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시시콜콜 주위로 다 기록을 해낸 책이 의궤이고, 이 의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예정에 있죠. 우리 교회에서도 우리의 우수한 기록문화의 전통을 살려서래도, 바로 124위에 관한 시복 관계 백서라고 할까, 제대로 된 보고서가 철저하게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124위를 기준으로 한 시성 운동도 그 백서가 기초가 되어서 더 잘 진행이 될 수도 있겠고, 앞으로 또 다른 신심 운동을 위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복시성위원회에 관여하고 계시는 류 신부님이 본격적으로 전체의 과정을 다 아우르는 백서를 간행하는 작업을 좀 의논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입니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강석진 신부님께서 이 작업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시고,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으로 계시는 노길명 교수님께서 논평을 해 주시고 이어 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노길명 : 발표자는 영성이란 “‘인격적 하느님’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초월적(超越的) 본성”이고, 영성 생활이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가는 노력’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닮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발표자는 “순교 영성이란 순교자가 박해라는 매개체 앞에서 죽음의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에 따라 신망애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면서 “그 가치는 단지 순교자가 죽음 앞에서 보여준 외적 태도만이 아니라, 순교자가 기꺼이 순교를 결심하도록 이끌어 준 신망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 정의와 설명을 바탕으로 발표자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완덕의 추구, 순교에 대한 열망, 생활과 신앙의 접목이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발표자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부여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두 가지 계명을 실천했으며, 이러한 이중 계명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 순교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발표자는 많은 사료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관점과 논조를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표 내용에서는 큰 결함이나 문제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토론자는 발표 내용을 통해 19세기를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 발표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한국 교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자는 발표자의 논문 내용보다는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논문 형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견해를 개진함으로써 토론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1) 발표자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발표자는 124명 순교복자를 비롯한 “19세기 조선 교회의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인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으로도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졌던 ‘대역죄인’(大逆罪人)이라는 불명예는 바로 잡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발표자는 124위의 시복은 “그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면서, “19세기 조선 교회 신자들 중에 124명의 삶이 교회가 공경할 대상으로 시복(諡福)했다면, 조선 사람으로서 그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신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발표자는 “124명에 대한 시복을 신원 차원에서 고찰하는 작업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한국사의 통합을 의미하며, 일반사와 특수사가 소통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역사관의 형성에 도움을 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는 박해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토론자는 오늘의 시점에서 과연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들의 신앙과 삶은 이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 중 103위가 1984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을 뿐 아니라, 금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그들을 단죄하였던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124위가 복자로 시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복과 시성을 위해 방한하셨던 두 분의 교황을 대한민국 대통령은 정중하게 국빈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교황 방한에 대한 환영사를 통해 순교자들과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순교자들은 ‘대역죄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라고 국가에 의해 인정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시점에서 또 다른 형식의 신원 작업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발표자가 “순교자들의 명예를 궁극적으로 회복시켜주는 일은 그들의 삶을 오늘의 우리들이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또한 토론자는 “124명에 대한 시복을 신원 차원에서 고찰하는 작업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한국사의 통합을 의미하며, 일반사와 특수사가 소통되는 계기가 된다”는 발표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토론자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한국사의 통합은 순교자에 대한 신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사 연구자들의 연구 태도와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는 분명 구세사에 속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사는 한국사의 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사와 한국사가 만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교회사 연구자들이 교회사를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한국 사회가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해 나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사와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려는 입장과 활동을 견지해나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발표자가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을 ‘들어가는 말’에 이어 제2장에서 다룬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 까닭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교회사와 한국사의 통합은 연구자들과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토론자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는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를 먼저 언급하기보다는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고찰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결론 부분에서 그들의 신앙과 삶은 국법을 어긴 범죄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칭송받아야 마땅한 것이라는 점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이고 논문을 명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발표자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완덕의 추구, 순교에 대한 열망, 생활과 신앙의 접목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표자의 정리는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발표자는 2014년 8월 16일 124명의 순교복자 시성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강론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교황께서는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적 유산을 1)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2)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3)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이라고 정리하셨다는 것입니다. 토론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정리한 이 세 가지가 순교자들이 지녔던 삶과 영성의 역동적인 측면을 추출해내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까닭은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순교 행위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내세 구령에 대한 열망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저항적 의미도 담겨 있었고, 발표자가 논문을 통해 강조하듯이 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대성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황의 강론 내용을 굳이 논문에 인용했다면 그에 따라 각각의 차원에서 순교자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 발표자의 논조나 주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됩니다.

 

4) 발표자는 순교자들의 삶을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으로 구분하면서 그러한 삶의 특성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고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요인에 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발표자가 그 요인으로 완덕의 추구, 순교에 대한 열망,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생활과 신앙의 접목 등 여러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녔던 그와 같은 강렬한 신심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보다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따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발표자도 그에 관해 언급은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동생활, 나눔의 실천, 인간 존엄성과 남녀 평등성의 구현, 철저한 교리 공부 등을 지적하였습니다. 토론자는 이러한 발표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따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교자들이 지녔던 신심의 원천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관해서는 적어도 별도로 한 장(章) 정도를 할애하여 보다 분석적인 설명을 곁들였으면 좋왔을 것이라는 바람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의 철저한 신앙 교육과 기도 생활의 실천, 그리고 전통적인 삶의 기반이었던 ‘마을’이라는 지연(地緣) 공동체와 ‘친척’이라는 혈연(血緣)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로서의 ‘교우촌’의 특성은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적 기반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앙과 평등과 우애를 바탕으로 형성된 전인적(全人的)이고 포괄적이며 현실의 삶을 내세로까지 연결시키는 강력한 인간관계의 망(網) 등이야말로 신앙인의 믿음을 지지해 주고 확인해 주며 강화해 줌으로써 현세에서의 삶은 물론, 자신의 신앙을 ‘순교’로 증거하도록 연결시켜주는 ‘설득력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광 : 감사합니다. 모두 네 가지 부분에 대해서 아주 심도 깊은 논평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강 신부님의 대답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강석진 : 주최 측으로부터 주어진 주제를 받고, 그동안 그 주제에 맞춰 논문을 써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제 글이 보다 좋은 논문이 되기 위해서는 논평자를 통해 정확한 비평과 함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는 필연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술대회에서 좋은 논평자를 만나는 것은 논문의 꼴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며, 인간적으로는 행운입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제가 은총과 행운을 동시에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큰 어른이신 논평자 노길명 교수님께서는 제 글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 예리하고 정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다시금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어 제 나름대로 논평에 대해 준비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글에서 교황의 방한과 시복식을 조선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신원의 측면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신원의 결과로 이어지는 순교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은 결국 지금 우리가 순교자들의 삶을 계승하며 살아나가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제 글의 부족함으로 인해 저의 뜻과 취지가 논평자인 노길명 교수님께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우선 논평자께서는 논평을 통해 과연 조선교회의 순교자들에 관한 신원 문제가 오늘날 다시 제기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순교자들의 명예를 궁극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은 그들의 삶을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해 주셨습니다. 사실 제가 준비한 논문은 순교자들에 대한 국가적 신원 문제나 혹은 신원에 관한 형식적이며 절차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삶에 대해서 오늘날 한국 교회 신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함께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편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인 신원의 개념을 매개 요인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지난번 교황님의 광화문 시복 미사를 바라보는 우리 신자들의 마음은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시복 및 시복식 개념이 낯설어서 그랬는지, 그 자체로는 크게 와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들의 생각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온 이유가 어떤 천주교 관련 행사 때문에 오셨고, 광화문에서 신자들과 함께 상징적으로 미사 한 대를 드리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시복 및 전례로 거행되는 시복식에 대한 강조가 주는 영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복식에 대한 강조는 결국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천주교인들끼리의 종교 행사로만 치부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번에 교황으로부터 시복된 분들은 19세기 조선 교회를 지켜낸 신자들, 특히 순교자들이며, 바로 그들의 삶은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강조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시복시성 개념은 천주교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이 쉽게 알아듣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건, 일반인이건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신원의 개념으로 우리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이 지니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광화문의 시복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더라면 많은 이들이 그날 미사가 주는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정리하면 조선 천주교회 순교자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선조이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삶의 모범을 남겨주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사형수였던 그들의 죽음이 오늘날 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숙고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차원에서 글의 방향을 잡아 나갔습니다. 신원의 개념으로 우리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는 노력 또한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삶과 신앙에 관해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조명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노길명 교수님께서는 일반사와 교회사, 즉 특수사 간의 소통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언급해 주셨습니다. 사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작업의 우선적인 일은 교회사 연구자들의 연구 태도와 방법에 있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전달되고, 수용되는 과정에 있어서 교회사 연구자들의 수고와 노력이 깃든 연구물들이 과연 순교지 및 사적지에 계시는 사목자분들이나 담당자분들에게 잘 전달되고, 수용되거나 받아들여지는 것까지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신자 사이에서는 국내 순교지 혹은 순교 사적지에 대한 순례가 조금은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저도 그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주제가 있는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 분들과 함께 전국에 있는 순례지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례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함께 순례하는 신자들에게 순교지 및 사적지에 관련하여 전후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 주고 일반사적인 시대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때 순교지 및 사적지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고, 넓은 마음으로 우리 순교자의 삶을 스스로 굉장히 이해하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나누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우리 교회사와 일반사를 아우르는 연구물들이 일선 현장, 즉 순교지 및 사적지 담당자들에게도 잘 연결되면 좋겠습니다. 특히 일반 신자들에게도 일반사에 대한 관심이 전해져 보다 더 깊이 있게 교회사를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역사와 신앙이 접목될 수 있다면,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서 영적 성장을 향한 깊은 체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논평자의 말씀대로 시복식 때 교황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연구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추후 계속적으로 연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은 노길명 교수님께서 순교자들이 지녔던 강력한 신심의 원천에 대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는 아쉬움과 함께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제시는 저 개인적인 연구 노력의 과정으로 볼 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조언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앞으로 꾸준하게 개인적으로 연구 노력해야 할 부분임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저희 수도회에서는 해마다 격년제로 순교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 심포지엄과 국내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했고요. 내년에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국내 학술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속드린 대로 노길명 교수님께 제가 감히 한번 순교자들에 대한 가족 순교 전통이라든지, 가정 신앙 형성이 순교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등 보다 심층적으로 이 부분을 집중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답변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논평으로 큰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 같습니다.

 

 

조광 : 네 가지 부분에 관한 논평에 대해서 발표자의 입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 생각을 해야 할 것은 교황님의 강론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우리가 별도로 따져봐야 하겠는데요. 거기에서 나오는 이중 개념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중 개념이라고 한다면 달리 해석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식의 표현을 이중 개념으로 번역을 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거든요. ‘경천과 애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입장을 국어로 번역을 할 때에는 ‘이중 개념이 하나다’라고 했는데, 결국은 양면성을 가진 개념, 그런 식으로 파악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과 순교자 연구, 이것은 우리가 순교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 심포지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마 순교자의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그런 점에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103명의 성인의 시복시성 과정, 그리고 124명의 복자들의 시복 과정에 대해서 밝혔으며, 그들의 영성에 대해서도 같이 검토를 해보았습니다. 오늘 이 한 번의 검토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한 더 심도 깊은 연구와 교회 당국에서도 또한 이 자료를 정리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심포지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회사 연구 제45집, 2014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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