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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묵주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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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15 ㅣ No.46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묵주의 기적

 

 

묵주는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한 개 이상의 묵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한두 번은 묵주를 찾느라고 애쓴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은 묵주기도를 많이 한다. 이는 프랑스나 미국 등 외국 신자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또 그만큼 우리 교회는 묵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을 안고 있다.

 

신앙의 자유가 시작될 때 경상도 사목을 했던 로베르 신부는 영해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1866년 박해 때 어느 신자가 관군을 피해 도망가던 중 조끼를 길가에 떨어뜨렸다. 이것을 주운 여인은 옷 안에서 묵주를 발견했다. 그러나 묵주의 용도를 모르던 그는 그것을 진주 목걸이라 생각하며 감추어 두었다. 1888년 어느 날 이 여인은 교우촌을 지나게 되었다. 공소에서는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여교우들이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신자들 손에 있는 묵주를 보고 여인은 옛날에 자기가 주웠던 물건을 떠올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무언지도 모르고 22년 동안이나 묵주를 간직해 온 여인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이는 묵주에 얽힌 한국교회의 그 많은 감동과 기도에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박해시대 ‘묵주신공’ 혹은 ‘매괴경’이라 불렀던 묵주기도는 15세기 말엽부터 한문서학서에 수록되어 중국교회 안에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묵주기도를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 첫 세례자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교리서와 십자고상,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묵주는 이렇게 조선 땅에 전해졌고, 새로 입교한 신자들은 이 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1801년 순교한 홍낙민은 매일 묵주신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는 공무를 집행하거나 손님이나 친구들과 있을 때에도 묵주신공을 궐한 적이 없었다. 1801년 공주에서 순교한 김광옥도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드렸다. 그들의 순교는 묵주신공이 이루어 준 기적이었다. 물론 박해시대 감옥 안에서 묵주의 기도는 순교자들이 드린 기도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잡히지 않은 신자들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묵주기도는 공동체를 하나로 엮어 주었다.

 

박해시대 묵주기도가 신자생활에서 중요한 기도였음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글로 번역 간행되었던 『천주성교공과』나 1889년 필사된 『사성찰(私省察)』에도 묵주기도를 통한 성찰법이 적혀 있다. 매괴회도 일찍부터 결성되어 박해시대 ‘첨례표(축일표)’에는 매괴회가 기도를 시작하는 날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자 자연스레 박해시대 조정의 기록에는 신자들 집에서 ‘십자가가 달린 염주’를 압수했다는 기록들이 여러 번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창설 직후부터 묵주는 신자임을 상징하는 도구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병인박해 직전에 조선에 들어오던 깔래(Calais, 姜 ; 1833~1884) 신부는 「십자가나 성패(聖牌), 묵주를 소지한 신자들은 이것을 보란 듯이 목에 달고 있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자신이 신자임을 고백하고 자수하려고 할 때 묵주를 내보였다. 허계임과 이정희와 이영희 삼모녀, 이매임, 김성임, 김 루시아 등은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청에 가서 신자임을 고백했다. 포졸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들지 않자, 여교우들은 자기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증거로 묵주를 내보여 포도청으로 끌려갈 수 있게 되었다. 박해기 포졸들도 신자들을 체포하면 그들의 신표와 같았던 묵주부터 내놓도록 요구했다. 포졸들은 순순히 묵주를 내놓을 경우에는 이를 배교로 간주하고 그 신자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질 때에 그들은 묵주와 같은 성물과 교회서적을 땅에 묻고, 신자로서의 형적을 숨기면서 길을 떠났다. 천주학쟁이를 잡기 위해 기찰이 강화된 길에서 짐 뒤짐을 당하다가 묵주가 발각되면, 그 길로 죽음의 시련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뒷날을 기약하며 묻힌 묵주 가운데 일부가 오늘날에도 가끔 발굴되고 있다.

 

물론, 프랑스 선교사들도 묵주기도에 열심이었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는 몹시 가난했다. 어려서 그는 묵주를 만들어서 학비를 조달했다. 학비를 하고 남는 돈은 연로하신 아버지 생활비로 드렸다. 그는 쉬는 시간이나 학교에 가거나 집에 돌아올 때 언제나 철사를 팔에 감고 집게를 손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는 공소사목을 나가면, 밤에 미사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묵주기도를 하거나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면서 보냈다. 특히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더욱 묵주기도에 매달렸다. 깔래 신부 일행이 입국할 때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돗자리로 선실을 가려놓고 나서 선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며 통과했다고 적었다.

 

조선교회에 선교사들이 파견될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었다. 성모님은 1830년과 1846년 프랑스 파리에 살던 여성신자인 라 살레트에게 발현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만든 성패가 이른바 ‘뤼드박 기적의 메달’이다. 또 1858년에는 성모 마리아가 루르드에 발현했다. 이처럼 19세기 중엽 프랑스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드높여지고 있었으며, 묵주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 조선에 건너온 프랑스 선교사들도 모국에서 체험했던 묵주기도의 신비를 선교지 조선에서 실천해 나가고자 했다. 그들은 명동성당 뒤편 스테인드글라스에 묵주 15단의 현의를 새길 정도로 매괴신심이 각별했다. 대구의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도 성모동굴을 세웠다.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던 조선인들도 묵주를 잘 만들었다. 초기의 묵주는 청국에 파견되었던 사행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던 교회의 밀사들이 가지고 들어왔다. 1812년 조선교회의 밀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이여진은 묵주를 가져와 이를 신자들에게 팔아서 여행경비에 충당했다. 또 김대건 신부도 부제시절, 조선입국을 준비하면서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묵주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묵주는 중국에서 수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조선인들이 직접 만들게 되었다. 1857년 최양업(1821~1861년) 신부는 마카오에 머물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조선교우들도 묵주를 잘 만든다면서 묵주는 보내지 말라고 편지했다. 그는 같은 해에 자신의 은사인 리브와 신부에게, 묵주 만드는 집게를 몇 개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서, “할 수 있으면 묵주 만드는 구리철사를 많이 보내 주십시오. 조선에서는 붉은색 나는 철사밖에 만들 줄 모릅니다.”라고 썼다. 이처럼 19세기 중엽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묵주를 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앵베르 주교가 어린 시절 묵주를 만들어 공부했듯이 우리 교회에서 가난한 신자들도 성물을 만들어 생활을 이어갔다. 1836년 김대건·최양업과 함께 선발되었던 최방제의 동생 최형(18114~1866년)은 모방(Maubant, 羅; 1803~1839) 신부의 복사로 여러 해 동안 신부를 보필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을 하며 묵주를 만들고 교회서적을 간행하며 살았다.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 6.25 전쟁 당시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한국정부가 1·4후퇴를 단행하던 때였다. 교회기관도 대구 및 영남지방으로 피란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서울에서 성물제작을 하던 성림사 대표 하양린(河養麟)이 최덕홍 주교의 허락을 받아 대구대교구청 대건출판사 앞마당에 판자로 가설 공장을 차리고 가족과 거처하면서 성물제작을 재개했던 일은 유명하다. 성물은 피난민이 정착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한국교회에서 묵주는 신자들의 상징이고, 위로이며 또한 목숨을 걸 만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전주에서 동정부부로 살다 순교한 이순이의 묘를 이장할 때 그의 묵주가 발견되었다. 십자고상의 얼굴이 다 닳아 없어진 묵주였다. 그 어려운 시절 얼마나 묵주기도에 매달렸는가를 드러내는 묵주였다. 내 묵주에는 나의 어떤 흔적이 새겨지고 있는지 묵주기도 성월을 맞아 질문한다. 묵주에는 역사가 새겨지고 있다.(참고자료 : 『명동성당건축사』, 최양업 신부 서한, 깔래 신부 서한, 조광의 「묵주」)

 

[월간빛, 2011년 10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관덕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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