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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로마 시민이 된 이방인 카롤 보이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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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559

[교회사에서 배운다] 로마 시민이 된 이방인 카롤 보이티와


2005년 3월 말 전 세계의 매체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그 소식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성 베드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대다수는 젊은이들이었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과연 지구상의 누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교황에 선출된 다음해인 1979년 1월, 교황은 비가 내리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축복하시며 “하느님께서 그대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쓰고 계신 우산도!”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교황직 초기부터 참으로 인간적이면서 영적으로도 깊은 매력을 지닌 카롤 보이티와는 2005년 4월 2일 저녁 9시 37분에 운명했다.

군중은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채우며 ‘수비토 상토(Subito Santo! 바로 성인품으로!)’를 외치기 시작하였고, 그는 임종의 힘든 상황에서도 이 소리를 들었는지 “나는 자네들을 찾아다녔어. 이제 자네들이 나한테 왔구먼. 고맙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교황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려고 몰려온 사람들은 자그마치 300만 명이었다. 운명 후 그의 시신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되고 참배가 시작되자, 불과 수초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은 시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몰려와 밤낮없이 수 시간 동안 줄을 서가며 교황이 생전에 보여주었던 사랑에 보답하였다.

장례 후 몇 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묘소 앞에는 하루 종일 젊은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무엇을 보려고, 무엇 때문에 로마로 모여들었을까? 한 명의 폴란드인? 한 명의 슬라브인? 한 명의 유럽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세계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카롤 보이티와, 요한 바오로 2세가 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456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이탈리아계 교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보이티와는 지나친 민족주의, 국가주의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고, 1942년 크라쿠프 교구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11월 1일 사제품을 받게 된다.

이후 로마의 안젤리쿰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공부하고,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루블린대학교에서 윤리학 교수로 지내며 ‘작은 가족’이라 불리는 모임을 만들어 시각 장애인들과 병자들을 간호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1958년에는 38세의 나이로 크라쿠프의 보좌주교에 임명되었다. 이때 ‘온전히 당신의 것 (Totus Tuus)’이라는 말씀을 사목 모토로 삼고 교황이 되어서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성모님께 봉헌하며 사셨다. 1964년 1월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크라쿠프 대주교로 임명한 데 이어, 1967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은 1968년 회칙 「인간 생명」에서 유산과 인공적인 산아제한 같은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러한 금지를 공식화하는 데 윤리신학자인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 도움을 주었고, 이로써 교황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그가 향후 교황이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바오로 6세의 서거 후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33일 만에 선종하자 곧바로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다. 사실 교황직에 거론되었던 유력한 후보는 제노바의 대주교 주세페 시리와 피렌체의 대주교 조반니 베넬리, 곧 이탈리아 출신의 두 명의 추기경뿐이었다.

그러나 제8차 투표에서 보이티와는 58세의 나이로 교황직에 선출되었다. 보이티와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전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요한 바오로)을 선택함으로써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선임교황의 의지를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전 세계 117개국을 방문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세상을 향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 특별히 가정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던 중 이전부터 시달려오던 병세가 악화되어 2005년 4월 2일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용서와 화해

그의 삶은 용서와 화해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황직 초기인 1981년 5월 13일 교황은 신자들과 만나는 도중 터키인 알리 아그자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다행히 교황의 심장을 살짝 비켜간 덕분에 대수술을 마친 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4일 뒤 교황은 “총을 쏜 우리 형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회복 후 교황은 암살 미수범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20분 동안 비밀대화를 나눈 다음 “그와 나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로 남을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다.”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사면을 요청했다.

교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범그리스도교 일치(Ecumenism)를 위한 노력에서도 화해와 용서에 주력했다. 1982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엘리자베스 2세와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나 가톨릭과 성공회의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고, 1054년 상호파문(필리오퀘 논쟁)으로 갈라진 정교회와의 화해를 위해 루마니아와 그리스 등을 방문하여 정교회 성직자들과 합동 성찬예배를 집전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동 · 서교회 분열에 대해서도 반성하였다.

또한 1999년 10월 독일 루터교와 ‘의화 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양측 간의 구원론을 둘러싼 500년간의 교의논쟁을 끝내기도 하였다. 이에 관한 문서를 발간하면서 그 제목을 「기억과 화해」로 택한 것도 교황의 화해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거니와, 그 부제를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고 택한 것도 화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겸손을 취한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해의 제스처는 비단 그리스도교계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수많은 곳들을 순례하였는데, 5월에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를 방문하였다(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이슬람 사원에 입장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모로코에서 8만여 명의 무슬림 젊은이들을 만나 “우리는 똑같은 하느님, 하나뿐인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평화에 종교가 이바지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86년에는 로마의 유다교 회당을 방문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우리의 맏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모든 이를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한 구체적 노력

교황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종교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포클랜드 전쟁과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황은 수많은 호소와 설교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1986년 10월 27일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시시에서 평화를 위한 세계기도모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89년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공산주의의 몰락! 영국에서 마가렛 대처가 수상으로 선출되고,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른바 제2의 냉전시대가 열렸지만, 그 사이에서 교황은 모국인 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하며 이른바 ‘데탕트 시대’가 열리는 열쇠의 역할을 해내었다.

이러한 그의 역할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회고하기도 하였다. “최근 마지막 몇 해 동안 동유럽에서 일어난 이 모든 것은 교황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큰 역할, 정치적 역할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그는 세계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연출할 줄 알았다.”

교황직에 있는 동안 총 117개국을 방문하였던 교황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열정에는 아시아 국가들도 포함되었다. 특히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하겠다. 군사 정권이 자신의 정당성을 위하여 교황의 방한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한 교황은 광주를 방문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인 금남로로 시가행진을 하며, 군사정권에 대한 인정이 아닌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억압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한국 사회와 교회에 강하게 전달해 주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직은 정말 하나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아니라, 고르바초프가 회고했듯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자리를 알고 철저하게 정의와 평화만을 역설하고 살아왔던 모습을 통해, 신앙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폴란드 - 동유럽 - 유럽 - 세계로 나아간 그의 자리매김은 상승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철저하게 기도하며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낸 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최용감 안젤로 - 광주대교구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최용감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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