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세계교회ㅣ기타

중국 신학교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12 ㅣ No.231

중국 신학교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한 나라의 미래는 인재 양성기관의 성패에 달려있다. 중국 천주교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중국 신학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 80년대 개혁개방의 초기에는 20여개의 신학교가 있었지만 통폐합되어 지금은 통상적으로 중국의 10대 신학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실상은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제대로 운영되고 꼴을 갖춘 신학교는 서너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니 중국 천주교회의 미래가 위험하다.

먼저 중국 신학교의 역사적 흐름을 짚어 보자. 1900년에 발생한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 천주교회가 큰 위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그 후 청정부는 외국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해 중국 천주교회는 유례없는 발전을 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유럽의 선진 교육제도의 도입이다. 1903년 중국 최초의 대학인 진단대학(震旦大?)이 상해에 건립되었고 이어서 진길대학(津?大?)과 보인대학(?仁大?)이 설립되었는데 모두 천주교가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들이다. 1914년의 통계에 따르면 천주교가 설립한 학교는 8,034개였고 학생수는 13만 명에 달했으며 1925년에는 학생수가 31만 명을 넘어섰다. 1921년에 제1회 중국 주교회의가 열리게 되면서 명실공이 보편교회의 꼴을 갖추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 신학교는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게 되는데, 1940년대 통계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는 16개 신학교가 있었고 신학생 총수는 4,106명에 달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의 몰락과 공산당의 집권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1949-1956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종교의 반혁명,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1948년에는 전국에 5,780명의 사제(중국사제 2,690명, 외국사제 3,090명)가 있었지만 얼마 후 외국인 성직자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중국인 사제와 주교들만 남게 되었다.

교황청이 대만 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힌 1951년 중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마침내 단절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공산당 정부는 천주교에서 관할하던 모든 의료시설, 학교, 사회기관 등을 정지시키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 와중에 많은 성당이 문을 닫게 되었고 대부분의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1957년부터 시작된 주교의 자선자성(自選自聖)정책, 삼자(三自)애국운동, 중국과 바티칸의 관계 악화 등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애국교회와 지하교회로 양분되었고,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이 감금되면서 중국 천주교회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어 1966년부터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중국 교회는 미사 없는 침묵의 교회로 가라앉게 된다. 많은 신부들이 감옥에 갔고 신학교는 폐쇄되어 모든 종교활동이 일시에 정지되었으며 홍위병들의 등살과 노개(勞改 : 노동개조)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죽어갔다. 1950년부터, 개혁개방으로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는 1982년까지 30년간은 중국 천주교회의 암흑기였고, 신학교는 폐쇄되어 중국 사제단은 단대(斷代 : 세대단절)에 이르게 되는데 지금 중국 천주교회의 대부분의 문제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10년이라는 문혁의 긴 암흑기를 통과해서 보니 성령의 특별한 안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감옥의 문이 열리자 그 속에서 고이 풍파를 견디어 내고 살아남은 주교와 사제들은 다시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문혁 후 전국의 성직자 수는 1,500명이었는데, 1946년보다 4,500명이나 감소했으니 문혁의 폭풍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만약 감옥이 아니었으면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1982년 6월 중국 국무원은 국가 종교 사무국을 통해 종교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제60호 문건). 그렇게 해서 1980년대 중국에는 20여 개의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문혁기간에 교회의 모든 공식 문서(세례대장, 혼인문서, 본당, 수녀원의 재산 목록 등)와 전례서는 불에 탔고 교회 재산은 몰수당했다. 문화혁명은 현대판 분서갱유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교회를 다시 세우려할 때의 막막함과 그 빈약한 상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빼앗긴 교회 재산 외에 잃어버리고 잊혀진 교회의 영적생활과 신앙의 표양들은 신자들의 삶에 영적인 궁핍을 더했다. 본당으로 돌아와 세례대장을 찾아서 잊혀진 본명을 확인하려 해도 불가능하니 남자는 모두 요셉이요, 여자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부르던 시절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미사는 여전히 라틴어로 벽을 보고 드려졌고 신자들은 말 그대로 망(望)미사했다. 사제들은 감옥에서 나와 고백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지만 돌아온 신자 수에 비해 사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학교에서 사제가 배출되려면 아직도 6-7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이 시기(1980-1995년 사이)가 중국교회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어느 사제는 자전거를 타고 몇 개의 도시를 돌보아야 했고 밤새도록 고백성사를 주다가 쓰러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지만 무엇인들 제대로 배울 수 있었겠는가? 어제는 신학생, 오늘은 교수가 되어 가르친다고 하지만 교수라는 사람이 먼저 배운 것이 없으니 신학교의 교육은 가히 최악의 상태였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사제들의 정체성이 흔들렸고 종교국의 유혹에 넘어가 환속하는 사제들이 1990년대에는 적지 않았다. 상해 셔산신학교의 경우를 보면 신학을 마치고 서품이 되었던 당시 31세의 사제가 교무처장이 되었는데 원장 신부는 36세였다. 신학교는 대부분 80년대 초중반에 다시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의 열악한 신학교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쪼개진 널판지에 도서관이라고 써져있는 곳에는 불과 몇 십 권의 라틴어 책이 어지러이 꽂혀있을 뿐, 성서 한권 없었으니 마땅한 신학 서적이나 교과서는 있을 리 만무하였다. 교수진의 부족, 주거환경의 열악함으로 신학교 교육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소는 많았다. (특히 북방에서는 중부나 남부보다 성소가 급증하였다. 한 예로 1988년 6만 명의 신자가 있는 북방의 한 교구에 신학생이 140명이나 나왔다.) 사제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교리와 교회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되면서 중국교회는 보편교회와의 연계속에서 점차 ‘가톨릭’ 교회의 특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80년대까지는 공의회 전의 모습이었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해외 보편교회의 원조와 교수진의 유입으로 신학교와 교회는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된다. 1990년에 이미 300여 명의 새로운 젊은 사제들이 신학교를 통해 양성되었는데 당시 전국의 신학생 수는 7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새 천년 대희년 벽두부터 위기가 다시 닥치게 되는데, 그 첫해가 가기 전에 중국정부와 교황청의 관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1월 6일에 6명의 새 주교가 교황청의 비준 없이 서품되면서 시작된 갈등은 그 해 10월 1일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대축일에 교황청이 중국의 성인성녀 120위를 시성하자 극에 달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중국 공산당의 창립 기념일이고, 시성된 성인성녀들은 대부분 중국 정부가 아직도 폭도들로 규정하는 의화단 사건에 연루된 성직자와 교우들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교황청의 행위를 도전으로 이해하면서 일련의 보복 조치가 내려졌다. 중국정부는 지금까지 묵인해주던 외국 교수진을 다시 추방하고 신학교에서 강의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버렸으며 신학교 신부들의 외국 유학은 물론 외유 학술활동, 보편교회와의 교류 등을 금지시켰다. 이렇게 경직된 신학교의 상황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큰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정을 파악해 본 후에 중국 천주교회의 신학교를 전망해 보고자 하지만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풀기 어려운 여러가지 문제들이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신학교 통폐합의 문제이다. 내가 보건데 중국 신학교는 통폐합하여 5개 신학교로 운영해도 충분하리라 본다. 신학교 운영과 교수진의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신학교가 제 꼴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의 신학교들이 지니는 복잡한 관계는 신학교 간의 불필요한 경쟁과 불목을 낳고 건설적인 통폐합의 길을 가로 막고 있다. 특히 심양과 길림 신학교, 서안과 산서 신학교 간의 통폐합 등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성소자의 급감이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소가 급감하기 시작하는데, 80년대 초부터 시작한 국가의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때문이다. 또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의 젊은이들이 출세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짙어지자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성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청년들이 급감하게 되었다. 앞으로 중국의 신학교는 계속해서 공동화 현상이 더 두드러질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지만 최상의 난제가 신학교의 교육부 편입 문제이다. 중국 신학교는 대학교의 체제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중국 교육부로부터 대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학원이나 연수원 정도로 간주될 뿐이다. 교육부에 소속이 되지 않으니 그 어떤 학위도 인정되지 않는다. 신학교를 나온 중국 신부가 사회 대학에서 더 공부하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신학교의 모든 수학 능력과 과정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신학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교육기관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이 점이 성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회에서 인정 되지 않는 신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적을 수밖에 없고, 또 우수한 신학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도 큰 걸림돌이 된다. 결국 중국 사제들의 학문적 소양과 자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중국 사회의 지식분자들과 유리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 지금 중국의 현실이다. 중국 사회 안에서 천주교는 대 사회적 역량이 극히 미비한 수준에 머무르고, 그 결과 중국 사회에서 복음화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마땅치 않으나, 우선은 대만이나 베트남의 경우처럼 로마나 서방, 한국의 천주교 대학들과 관계를 맺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시급한 상태이다.

나는 한국 사제로서 중국 신학교 교단에 선 지 벌써 8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한 때는 그 막막함에 답답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역시 불과 사오십 년 전에는 지금 중국 신학교처럼 열악한 상태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본다. 중국의 신학교는 정치, 사회적 환경의 열악함에 노출되어 위태롭지만 신학교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오늘도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가고 있으니 보편교회의 관심과 기도가 더 필요하리라 본다.

[땅끝까지 제77호, 2013년 9+10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2,52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