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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하느님의 큰 선물인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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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02 ㅣ No.875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준비하며] 하느님의 큰 선물인 가정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서 자신의 어려움을 다시 바라보고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오늘, 밖에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쁜 일이 있다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나요?” 그 젊은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부모님요.”라고 대답했다. “만일 너무나 절망스러운 일을 당해 숨이 막힐 것 같이 고통스러울 때 누구에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내 고통을 진심으로 받아들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응답 또한 바로 돌아왔다. “부모님요.”

“부모와 나, 가족은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부모가 나에게 더 또는 덜 해주는 것, 좋은 배경이 되어주거나 그러지 못하는 것, 이런 것은 본질적이지 않아요. 내가 왜 가장 기쁠 때 또는 가장 힘들 때 가족이 떠오르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가족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본질적인 것이 있어요. 먼저 그것을 깊이 체험하면 다른 것을 해결하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현재는 부모와 본인의 관계지만 훗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혼인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잘 훈련하고 배워두면 좋겠어요.”

젊은이는 처음 표정과는 달리 밝게 웃으며 떠났다.


가정,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연히 서로 매력을 느끼고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기르며 그들만의 울타리를 치는 개인적인 집단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대한 훨씬 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가족은 서로에 대한 신뢰, 서로를 나누는 사랑, 공동의 희망이 아주 진하게 얽혀있고, 이것을 날마다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특별한 관계다.

이는 효율성에 의해 무시되거나 경제지수로 통계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심축이고 힘이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혼인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셨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겨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의 대화(마태 19,3-9; 마르 10,2-12 참조)에서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혼인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신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한처음’(창세 1-2장 참조)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창세 4,1) 하고 고백한 하와처럼 자녀 출산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진 부부의 능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능력이 한데 모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한 인간의 삶은 이렇듯 가정에서 시작되고, 그 가정은 한 인간에게 전 생애를 통하여 특별한 장소로 기억된다.

우리는 ‘나’ 아닌 ‘너’, 곧 ‘당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을 가정에서 처음 배운다. 곧 인간의 갈망이 궁극적으로 한 인격적 존재에 닿아있다는 것, 인간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최고의 행복이 그 인격적 존재와 영원한 관계를 맺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곳이 바로 가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을 이루는 한 사람의 삶은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자유, 인간의 갈망과 하느님의 갈망이 만나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성체성사의 깊은 신비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이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거야.’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 가정은 이 사랑의 신비를 몸살을 앓으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인간의 구원자」, 10항). 인간의 갈망과 행복이 사랑을 향해 있으며, 생명의 원천과 삶의 동력, 그 갈망과 행복을 이어주는 다리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가정, 구원의 장소

가정은 구원의 장소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우고, 신뢰를 얻으며,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해서 혼인했지만, 살을 맞대고 한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며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다르고, 소통방식도 서로 다르며, 완전하지도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다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이 사실을 자주 묵상한다면 서로 다름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너’와 ‘나’가 없는 ‘하나’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더 큰 ‘하나’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 알게 하고, 너와 내가 만져질 듯 말 듯한 경계선에 닿게 하는 것이 바로 몸이 갖고 있는 사랑의 언어다.

“사랑은 한 인간의 어떤 감성이나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의 작용이다”(졸저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 28면).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은 진리와 관계 있고, 진리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때 사랑하는 이도 사랑받는 이도 완전한 행복을 향해 변화의 여정을 걷게 된다. 결국 사랑은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이해하려면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 그것은 신의 영역에 인간이 부름 받은 것이다.


혼인 성소: 세상 안에서의 응답

사랑은 나 홀로 하는 창조행위가 아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원천이고, 너와 나는 그 응답으로써 서로 사랑을 나눈다. 혼인 성소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응답이므로 그들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 가운데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잘 모를 때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사랑을 깨우지 못하고, 그저 무거운 율법의 무게로만 느낄 수 있다.

사랑은 성적 끌림, 충동, 흥분이라는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에 초자연적 무게가 담겨있다. 곧 남녀가 서로 느끼는 욕망에 영원을 향한 욕망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절제와 정화를 거친다면 사랑은 이 두 가지 전망을 다 채워준다. 인간적인 사랑이 자기의 지평에서 나와 영원을 향할 때, 인격과 부르심의 또 다른 전망으로 친교를 향해 열린다. 자신의 완성과 너의 완성이 함께 그려지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제5장은 이 사랑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영원한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혼인의 관계로 새롭게 완성된다.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결합이요 세상에 보여주는 위대한 신비라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남자와 여자가 맺은 혼인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은 초월적 차원으로 승화되면서, 그들이 삶에서 나누는 ‘몸의 언어’(눈빛, 손짓, 미소 등)가 전례의 언어가 되는 ‘위대한 신비’가 연출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창조의 신비에 그 뿌리를 둔 신비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자신의 약함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나를 넘어 너에게로 건너가고자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이 열림은 바로 인간이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이다. 그로써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하는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가정, 교회의 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는 인류의 미래는 가정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인 가정을 통하여 이사회에 현존하며, 그리스도인 가정은 교회의 신비인 ‘육화’(강생)를 세상에 구체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고 강조한다.

지난해의 임시총회에 이어 올 10월에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주교시노드) 정기총회의 주제가 ‘가정’이다. 여러 가지 제안 가운데 화두는 이혼과 재혼이다. 특히 재혼한 이들을 용서해 주고, 그들이 원할 때 축복의 십자가를 그어주고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해주자는 제안도 있다.

이러한 제안은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이 진리 안에서의 응답이 아니라 혼인과 가정이라는 집을 그들의 감정적 사랑으로만 쉽게 지었다 허물었다 한다면, 십자가로 그어주는 교회의 축복이 과연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닐까? 자신들의 사랑을 훗날 자녀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떠한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는 뜻의 바리사이들의 질문에는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는 그들의 속마음이 담겨있다.

사랑은 순간의 기쁨이나 쾌락이 아니라 평생을 잇는 응답임을 가족들의 관계 안에서 배워야 한다. 그 사랑의 진리를 세상에 증언해야 한다고 교회는 교육해야 하고, 교회 또한 그것을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 가정은 교회의 길이다.

* 김혜숙 막시마 -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같은 대학의 한국 책임자로 있다. 「혼인과 가정」,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을 비롯한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8월호, 글 김혜숙 · 사진 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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