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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당스타일 - 우리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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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16 ㅣ No.58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당스타일 : 우리의 예술


가끔 “국사학을 전공하면서 천주교 신자이면 갈등이 없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즉 천주교는 서양종교가 아니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교회사는 그 나라의 신앙, 문화,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이루어진다. 지난 120여 년 동안 이루어진 성당 건축은 이를 눈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느님의 성스러운 집’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접촉처’인 성당은 신자들이 하느님 면전에서 갖게 되는 기쁨, 슬픔, 고통 등 모든 인간적 관심사를 반영해 왔다. 그래서 거기에는 우리사회의 변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 있다. 

박해시대에는 성당을 지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례를 위한 고정적인 공간을 지니기도 어려웠다. 그때는 병풍, 휘장, 족자 등의 가변적인 내부 치장으로 전례공간을 만들었다. 한옥 벽장이 미사 제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신자들은 첨례 날을 맞으면, 공소집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때로는 벽지도 새로 바르고 벽에 장막이나 휘장을 치고 예수상이나 수난상이 그려진 족자를 걸어 놓았다. 밥상이 제대가 되기도 했다. 초기교회는 이렇듯 창의적이고 실천적으로 전례공간을 마련했고, 이 경험은 이후 교회건축의 구상에 거름이 되었다. 신자들은 절대적 신앙, 물질적 협력, 정신적 유대감으로 성당을 지었고, 자신들의 신앙을 사회에 드러냈다.


십자형 기와집 지붕의 전통

첫 계산성당은 1898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1892년 고딕식의 약현성당이 이미 세워진 뒤였다. 1898년에 완공된 종현(명동)성당과는 거의 동시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산 성당은 처음부터 약현이나 종현성당과는 달리 한옥으로 고안되었다. 또 여느 한옥성당들과도 달랐다. 대구의 계산성당은 십자날개길이가 똑같은 십자형 팔작지붕에 단청을 칠한 한옥이었다. 계산성당을 건축한 로베르(Robert, 1863~1922) 신부는 1895년 9월 성당을 설계할 때 한옥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빌렘(Wilhelm, 1860~1938) 신부는 그에게 성당을 서양식으로 지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그는 한옥성당을 고수했다. 그래도 빌렘신부는 그에게 기왓장과 벽돌 제조법, 석재를 재단하는 법등을 설명했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어느 부인이 기증한 6000달러 상당의 유리창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때도 로베르 신부는 먼저 한옥에도 유리창을 쓸 수 있는가를 진단하고 나서 답할 정도였다. 물론 여러 사정으로 로베르 신부가 그 유리창을 받지는 못했으나, 로베르 신부의 확고한 설계의도를 드러내는 일화이다. 그는 당시 이미 20년 가까이 한옥생활을 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일찍 깨달았던 ‘건축주’였을지 모른다.

로베르 신부는 성당을 한옥의 스타일 중에서 최상의 상태로 지으려 했다. 계산성당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었다고 하는데, 단청이란 한국에서 궁궐, 서원, 사찰 등 특수한 건물에만 사용되던 건축미술이었다. 더욱이 성당 지붕을 십자형 기와집으로 한 점은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도가 남달랐음을 알려준다. 혹자는 이런 십자형 기와지붕을 서양식 건축의 절충형식쯤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십자형 기와지붕은 우리나라에 이미 있어온 형태였다. 창덕궁의 규장각 앞에 있는 부용정이 십자형 기와지붕 건물이다. 숙종이 정자를 짓고 이를 택수재라고 했는데, 정조가 다시 부용정으로 고쳤다. 또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고 공들여 지은 수원성의 방화수류정이 십자형 지붕이다. 물론 부용정이나 방화수류정은 정자이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는 처음 성당을 건축하면서 이 십자형 지붕 양식을 택했다. 이는 로베르 신부의 심미안이 남달랐음을 드러냈다. 이는 또한 그를 돕던 이들이 품격 있는 한국문화를 누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곳 대구는 감영이 있던 전통 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 성당은 일반적으로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 위치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교회’를 지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선교를 유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산성당은 언덕 아래쪽에 있다. 초기 성당 대지를 물색 할 때에는 동산 언덕쪽을 내정했으나 나중에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인 현 위치를 선택하게 되었다 한다. 이 또한 한옥성당을 구상하면서 고을 사람 가운데로 들어가려던 구상의 실천이었다.


땀과 긍지로 지어진 성당

성당은 누구 한사람이 주도적으로 짓는 건물도 아니다. 당시는 신자수도 적고, 또 성당을 지어본 경험도 없으니 이 작업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더구나 성당, 사제관, 학교를 함께 지었기 때문에 공사는 더욱 방대했다.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힘든데,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홍수를 만나 가까스로 마련한 성전건축용 자재들이 반쯤 떠내려갔다. 이로써 1000달러 이상의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공사기간이 지연되었다. 당시 명동성당의 총공사비가 2만 달러였음을 감안할 때 이 피해는 결코 만만치 아니했다. 두 번째 모금은 첫 번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모금을 통해서 성당을 짓다가 돌발사고가 일어나 다시 모금을 해야 한다는 일은 더욱 어렵게 마련이었다. 결국 1897년 봄 성전공사에 돌입했다. 로베르 신부는 잦은 병고에도 불구하고 매일 두세 번씩 공사현장에 나갔다. 그러나 제일 큰 어려움은 재정이었다. 그는 ‘돈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사라져 버린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조선교구에 기대지도 못하고, 다만 주교께 교회 사업을 위해 희생하는 신자들을 치하하는 서신을 부탁했다. 서신에는 회장들 및 여러 남녀 신자들과 특히 서상돈 형제, 김경화, 정규옥 등을 언급해주기를 청했다. 또한 막판에 대비하여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전 재산을 처분할 허락을 얻어놓고자 했다.

1898년 9월 성당과 사제관은 완공되었고, 학교는 한 달 뒤 완성되었다. 이 고생한 사제와 신자들은 주교를 모시고 축성할 일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주교는 설사증세로 오지 못했고, 대신에 당시 당가신부였던 비에모(Villemot, 1869 ~1950) 신부가 축성식에 참여했다. 공교로운 우연이겠지만 그는 최초의 한옥 성당인 전라도 고산의 되재 본당을 설립하고 건축한 신부였다. 1898년 12월 25일 축성식 잔치에는 소를 한 마리 잡고, 막걸리를 내놓았다. 좌석을 1700석 이상 마련했지만 손님이 많아서 신자들은 다 앉을 수도 없었다. 로베르 신부는 희생과 내핍을 견디어 준 신자들에게 감사했다. 모든 사람들이 원죄 없으신 모후의 성전, 사제관, 학교, 복사들이 사용할 사랑채에 감탄했다. 모두들 무슨 수로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이런 공사를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뮈텔 주교와 동창이었던 로베르 신부는 진정으로 주교께 성당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오지 못하는 주교께 일본인 화가를 시켜 성전과 사제관을 스케치하여 우송했다. 그는 축성식이 끝난 후인 1900년에도 성전과 사제관이 잘 찍혔다면서 사진 한 장을 주교께 보냈다. 이것이 요즈음 우리가 보는 사진이다. 어쩌면 성전을 그린 그림도 뮈텔 문서고에 있을지 모른다. 사진이 흔한 때도 아니고, 또 대구교구는 1911년부터를 그 역사의 시작으로 설명하므로 이 한옥성당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신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그 위대한 업적은 1901년 지진으로 불탔다. 당장 성당이 없어진 대구에서는 신부의 거처를 임시 성당으로 개조했는데, 교우 1/10 정도도 수용하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문을 열어 놓고 미사 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곤란했다. 신부는 일요일과 축일에는 하루에 두 번씩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청했다. 그리고 로베르 신부는 화재에 보다 안전한 벽돌 성전을 짓기로 했다. 설계는 프와넬(Poisnel, 1855~1925) 신부에게 의뢰했다. 그는 명동성당을 설계했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이를 이어 맡아 완공시켰고, 계산성당을 비롯해서 이후 30년 동안 모든 성당과 기타 부속건물을 짓는데 관여했던 신부다.

신자들은 3월에는 이미 공사에 착수했다. 각각 벽돌 제조, 장작패기, 돌을 나르기 등 일을 나누어 맡았다. 어떤 이는 기도로 어떤 이는 재물로 동참했다. 모든 신자들이 한 가정의 자녀 같았다. 그러나 그 해는 몹시 가물었다. 신자들 생활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공사하러 온 중국인들까지 책임져야 했다. 모은 돈은 다 소진되었지만 시절이 어렵고, 되풀이되는 모금이니 더욱 곤란했다. 결국 로베르 신부는 서상돈의 전 재산을 담보로 상해 은행에서 4년 상환 조건으로 6000달러를 대출받고자 했다. 그러나 은행은 조선주재 파리외방전교회에 지불보증을 요구했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김경화, 정규옥 등의 재산까지 담보로 하여 주교께 서명을 청했다. 그러나 주교는 이를 거절했다. 자기 재산을 담보로 내놓은 신자들은 2년 내에 전부 갚겠다는 약속을 거듭 드리면서 직접 주교께 편지를 올렸다. 신자들은 여러 번 간청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고, 그들은 결국 연리 30%의 돈을 대출받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전을 지어 긍지가 높았던 신자들의 바쁜 마음들은 서울에 계신 주교의 합리성을 설득하지 못했다.

대구 신자들은 외교인과 개신교인들이 놀랄 만큼 서둘러 새로운 성당을 지었다. 대구에서는 첫 번째 서양식 건물인 새 성당은 1902년 5월에 준공되었다. 2개의 종각이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미와 견고성을 조화시킨 새 성당은 첫번째 성전을 완전히 잊게 하는 충격적 건물이었다. 신자들은 다시 자존심을 살렸고, 이후 신앙공동체의 힘을 체험했다. 이 힘은 오늘날까지 대구 신앙공동체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1902년 겨울 뮈텔 주교는 사목 방문 중에 계산성당을 축성했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성당은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전례운동과 성 미술의 영향을 받아 부분적으로 수정되어 가고 있다.

집은 단순한 칸막이가 아니다. 그것에는 기능과 상징이 있다. 성당은 더욱 그렇다. 성당 건물은 당대 교리의 이해, 신자들의 안목과 능력을 종합적으로 보여 준다. 그것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땀의 결정체이다. 선조들이 남긴 성당은 그들의 마음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번에 짓고 있는 100주년 성당은 또 우리의 신앙과 문화, 과학과 정성의 자취를 그대로 담고 갈 것이다. 최고의 신앙은 최고의 예술을 낳으며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과학을 낳는다고 한다. 우리의 최고를 모을 때이다.(도움 : 로베르 신부 서한, 김정신의 『한국의 교회건축』 외)

[월간빛, 2013년 4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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