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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50여 년 수도자의 길을 걷다: 이팔종 토마스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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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30 ㅣ No.229

50여 년 수도자의 길을 걷다...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팔종(토마스) 수사


기도 바치는 주름진 두 손에 사랑과 행복만 남아...

 

 

신학원 내에서 기도 때나 삼종 때면 종을 울리고 일과를 시작한다. 종을 치는 이 수사의 표정이 깊은 계곡 옹달샘처럼 맑고 싱그럽다.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456의 1.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자의 모후 신학원'(원장 허정무 신부)에 들어서자니, 봄이 등을 떠민다. 활짝 피려던 목련이 갑작스런 추위로 얼어붙어 누렇게 변색된 봄 같지 않은 봄이지만, 수도원엔 어느새 햇살이 오글오글 모여있고 봄 기운이 땅을 훑어 숨구멍을 뚫고 있다.

 

수원가톨릭대에서 차로 10분 걸리는 이 신학원은 '특별하다'. 건축가 이일훈(58)씨는 1994년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짓다 만듯한 수도원을 설계했다. 야트막하게 지은 현대식 수도원은 편의성보다는 '느리게' '밖에서' '불편하게' 살자는 건축철학이 담겼다. 수도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들에게 맞게' 고쳐 쓴다. 수도자는 세상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결, 가난, 순명의 삶을 살며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그밖에 것은 그리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팔종(토마스, 70) 수사는 15명이 모여 사는 신학원에서 특별한 처지다. 신학원장도 아니고, 신학생도 아니다. 그냥 평수사로 수도원을 지킨다. 잔디밭 풀도 뽑고, 상추와 쑥갓, 감자, 고추, 호박, 대파를 심은 텃밭도 일군다. 때론 한달에 한 번 신학생들과 살아온 얘기를 나누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이 수사는 신학원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하늘 같은' 신학원장과 신학생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고리' 같은 역할이다. 이 수사는 그러나 "꼭 시아버지 시집살이하는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무래도 20대 초 젊은 신학생과 70대 노수사가 한 집에서 사는 게 불편함이 없을 리 없다.

 

"저희는 6ㆍ25 때 쌀이 없어 밥을 못 먹은 세대잖아요. 그 괴리가 엄청나요."

 

'피자' 사건도 그 중 하나. 비가 오면 이 수사는 지글지글 지저먹는 녹두 지짐이와 막걸리 한 잔이 최고지만, 젊은 신학생들이야 피자가 최고다. 하는 수 없이 피자를 시켰는데, 웬걸 피자 값이 2만 원이 훌쩍 넘더란다. "아이고, 왜 이렇게 비싸! 2만 원이면 자장면이 몇 그릇인데." 그렇다고 시킨 걸 취소할 수도 없다.

 

세대차이도 느끼지만, 와서 살다보니 손자 같은 신학생들 재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1991년에 세워져 올해로 설립 20년째를 맞는 신학원은 그래선지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훈훈해져 간다.

 

지금이야 "늙은 수사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지만, 이 수사의 지나온 50년 삶은 그리 만만한 건 아니었다. 1957년 3월 입회 당시만해도 명동성당 내 사도회관(현 교구청) 옆에 천막 수도원에서 살아야 했다. 그때 수도원 내 공장에서 양철을 덧댄 트렁크를 만들었는데, 그게 히트를 쳤다. 셋방살이를 하던 이들이 옷가지를 보관하거나 이사할 때 딱 적당한 짐가방이었던 것이다. 서울 성북동 수도원도 그때 번 돈으로 지었다. 당시 이 수사는 그 일과 함께 주방 소임을 받았다. 가마솥에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수녀원(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보내준 밑반찬으로 식사를 책임졌다. 매일같이 새벽 5시면 일어나 기도와 수도생활, 야간 작업까지 해야 하는 강행군 일정이었다.

 

한때는 '너무 힘들어' 고향 일죽(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으로 돌아가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수도의 길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땅 위에 기어다니는 벌레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수도자로 살 수 있겠느냐"는 입회 당시 창설자 방유룡 신부 질문에 "신부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고 말했던 것도 성소를 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4년 가까이 살고나서 1960년 12월 9일 첫서원을 했다. 이듬해 군에 입대했다가 3년 만에 제대한 이 수사는 다시 수도회로 돌아왔다. 잠시 주방 일을 하다가 1964년 11월 7일에 종신서원을 한다. 동기 수사 5명과 함께였다. 그 중 3명이 수도회에 남았고, 서울대 음대 출신 교회음악가이자 1979~1983년 총장 대리를 지낸 이존복 신부는 2007년에 선종해 이제 방학길(마르첼리노) 수사신부와 함께 둘만 남았다.

 

종신서원과 함께 받은 소임이 목공 일이다. 이때 그의 평생 스승을 만난다. 1997년에 선종한 권오덕(요셉) 대목이다. "저한테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셨어요. 목공 일은 못해도 좋으니 수도자로서 더 잘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저를 이끌어 주셨지요."

 

주방 일로, 목공 일로 평생 사도직을 살다가 이젠 신학원에 들어와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이팔종 수사의 기도가 간절해 보인다.

 

 

1964년부터 10년간 목공을 배워 이 수사는 인천 고잔성당(1965년), 덕적도성당(1966년), 덕적도 병원(1967년), 옛 금호동성당(1968년), 옛 이문동성당(1969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청량리수녀원(1970년), 제주 서귀포 피정의 집(1973~75년) 등을 지었다. 그리고 서귀포 피정의 집에 눌러 앉았다. 그게 인연이 돼 9년간 서울 본원장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20년 가까이 서귀포에서 살았다.

 

한때는 이 수사도 성직을 지망했다. 그러나 창설자인 방 신부가 그의 삶에 분기점이 된 말을 한다. "도마(토마스 한자 표기)야, 수도원은 신부가 되는 학교가 아니야. 성인이 되는 학교란다. 아주 미소하고 비천한 일도, 또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일도 하느님 사랑으로 실천하면 초월적 보물 같은 일이 되는 거야." 그 말에 이 수사는 두말없이 성직 지망을 접었다.

 

세상 유혹이 없을 리 없다. 50년간 이 수사도 '마음의 보따리'를 여러 번 쌌다. 종신서원을 하고나서 덕적도에서 성당을 지을 당시 낮엔 목공 일을 하고 밤엔 여성이 대다수인 성가대에 성가를 가르치다가 금족령을 당하기도 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세상으로 돌아갈 뻔했다. 정결보다 더 어려운 건 순명이었다. 청빈 또한 철저히 살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건 거룩한 교회로, 수도회로 부르신 하느님과 일생을 함께하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이 수사는 "평생 사랑만 받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이제 신학원에 들어온 지 1년 6개월이 흐르면서 이 수사는 뒤늦게 기도의 맛에 빠져들고 있다. 아침, 낮, 저녁, 밤기도 때면 늘 30분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한다. '수도자란 기도하는 사람이다'는 가르침에 노수사는 충실하게 살려고 애를 쓴다.

 

"수도자라면 기도와 노동, 독서라는 수도생활의 3요소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저는 일에 치여 기도와 독서를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뒤늦게 기도의 기쁨을 느끼니 수도원 내에 관상부를 만들자는 제안에 동참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어요. 수도회에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관상부에서 마지막으로 하느님과의 대결을 하고 (삶을) 끝내고 싶습니다."

 

노후에도 기도에 정진하는 이 수사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남겨달라는 부탁에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뭐니뭐니해도 수도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만 찾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욕심, 내 인기를 위해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 일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제쳐두고 일할 때가 있지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때 순명도, 정결도, 청빈도 가능합니다."

 

한결 따스해진 볕발에 고슬고슬해진 흙길을 걸어 봄이 꼼지락거리는 신학원을 걸어나오는 이 수사의 미소가 싱그럽다.

 

[평화신문, 2010년 4월 25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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