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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두 개의 갈림길(쥬세페 카스틸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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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863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두 개의 갈림길

 

 

“내 가슴 속에는 평화롭게 다스릴 힘이 있다.” 공부를 마무리하던 무렵인 2007년, 로마 시내 중심에서 열린 한 기획전에 걸린 어느 작품의 이름이다. 문구만 들어선 청의 황제 중 가장 길게 재위(1736-1799)에 머문 건륭제의 초상에 붙은 것이라고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제목이다. 대개의 초상화가 따로 이름을 갖지 않기도 하거니와 여느 중국 초상화들과는 달리 화려한 색상과 선명한 이목구비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막 재위에 오른 젊은 황제답게 아직은 맑고 단정한 얼굴이다.

 

 

이탈리아와 중국

 

작품의 원작자 쥬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는 이탈리아가 중국과 교류를 확대하던 그 무렵 두 문화의 연결고리로 이미 자주 회자되던 마르코 폴로나 마태오 리치와는 달리 아직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작 고향 이탈리아에서보다 중국에서 ‘황실화가 낭세영(郞世寧)’으로 더 유명하다는 것과 리치와 같이 예수회 선교사였다는 사실까지 얹어진다면 단박에 주목을 끌만한 인물이었다. 서구와 동양이라는 이미 낯선 조합에 화가와 선교사라는 더 어색한 조합까지 더해지니 말이다.

 

1707년 중국 선교지로 파견되어 1715년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거점이었던 동당(東堂)에서 잠시 머문 것 외에는 1766년 북경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거의 대부분의 체류기간을 황실화가로 강희제와 용정제, 건륭제의 지근거리에서 보냈다. 특별히 건륭제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생전에 높은 벼슬을 내렸고 죽어서는 황실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줬다. 황제들과 그 가족들의 초상, 원행 행렬과 사냥 모습, 자연풍경, 정물과 동식물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던 그는 서구적 시각과 색채를 중국적 입맛과 조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건륭제의 초상처럼 그림자가 지지 않고 정면을 응시해야하는 황실 초상의 예법을 따르면서도 명암이 아닌 빛의 농도로 볼륨감을 살려내는 식이었다. 재료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기술의 착안에도 뛰어났다. 비단이라는 천의 특성상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번에 그려내던 중국화법의 맹점을 극복하려고 미리 천 위에 치밀하게 밑그림을 그려 넣어 더욱 세밀하고 정교한 화면을 구현했고, 그 덕에 서구화의 장점인 역동성과 입체감까지 더했다. 물론 카스틸리오네 자신도 시간을 더해갈수록 분명한 명암 대조를 기초로 한 초기의 바로크적 화법을 포기하며 온화한 중국적 스타일에 동화되어갔다.

 

 

선교사와 화가

 

‘화가인 동시에 선교사’, ‘자금성에 사는 유럽인’이라는 독특한 조합의 운명을 카스틸리오네만 짊어졌던 것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밑돌을 놓고 마태오 리치가 문을 연 중국선교는 명 · 청 교체기의 무질서에도 큰 부침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강희제 재위시기, 교회의 공자숭배와 조상제사 금지 조치로 이른바 ‘중국의례논쟁’이 점화되었고 그 이후 사실상 중국내 그리스도교는 비합법적 상태를 전전해야했다. 옹정제는 북경에 있는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선교사들의 활동범위를 마카오로 한정했고(1724),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제국 전역에 걸쳐 박해(1746)가 단행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서역의 학문과 기술에 깊은 관심과 나름의 조예를 갖추고 있던 황제들의 취향은 카스틸리오네와 같이 ‘유용’한 기술을 가진 선교사들을 이 폭풍으로부터 구제했다.

 

일찍이 중국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대개 세속학문에도 이미 능통한 이들이었기에 초기부터 지식층을 중심으로 한 선교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왔고, 후일 그리스도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도 다른 선교회 소속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청나라 조정의 적대적 태도가 생각보다 상당 기간 지속되자 포교성성(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을 비롯한 선교회들은 선교사들에게 북경에 입성하기 위해 자유학문 또는 시계공과 화가, 기계공, 수학과 천문학 등 공학에 관련된 자격 중 적어도 하나를 형식적으로라도 갖추도록 요구했고 또 이를 기준으로 선발해야했다.

 

북경 입성에는 어찌 성공했어도 실력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해 추방되는 선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카스틸리오네와 함께 같은 시기 궁정에서 화가로 활동했던 포교성성 소속 선교사 마태오 리파(Matteo Ripa, 1682-1746) 역시 그런 부류였다. 선교지로 파견되기 전 유럽에서 속성으로 그림을 배운 그는 실력이 변변치 못해 1724년 이탈리아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는 그의 자전적 회고록에서 이러한 경험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내 자신을 헌신하고자했던 바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천 염색을 돕고 궁정에 거주해야 것 등은 모두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고 소회했다. 아무튼 동년배에 한때 같은 운명을 짊어졌던 리파와 카스틸리오네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리파는 고향 나폴리에 ‘성가정신학교’를 설립해 귀국길 함께 데려온 4명의 중국 소년을 씨앗으로 약 80명의 중국인 사제를 배출했고 카스틸리오네는 화가로서의 명예와 독특한 작품세계를 남겼다.

 

 

적응과 선포

 

카스틸리오네 자신은 스스로를 무엇으로 정의했을까? 선교사 아니면 화가?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포도밭을 향해 배에 올랐던 수많은 선교사들 누구라도 마지막에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던졌을 법한 질문이다. 인간의 행동이란 결국 자기이해의 반영이기에 이 자의식에 대한 물음은 결국 선교에 임하는 태도 또는 방법에 대한 문제이기도하다.

 

지식층을 비롯한 사회 상층부를 공략해 신자들을 넓혀갔던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노선은 다른 선교회의 견제와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예수회보다 뒤늦게 중국 선교에 뛰어든 선교회들 중, 특히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들 같이 이미 아메리카에서 백지화 정책에 가까운 선교 방법을 경험한 선교회들은 중국 대륙을 예수회와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예수회의 선교 거점이 이미 들어선 주요 대도시를 피해 지방 군소 도시들과 변두리에서 서민들을 주로 만났던 그들에게 중국은 아메리카 대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지에서 비롯된 미신적 행위들과 끔찍한 빈곤, 도덕적 무질서가 만연한 곳이었다. 발아되지 않은 복음의 씨앗을 중국문화 속에서 보았던 예수회와는 달리 중국은 그들 눈에 적응과 대화의 상대라기보다는 교화하고 가르칠 대상이었고 복음이 우선 장엄하게 ‘선포’되어야할 곳이었다. 선교는 과연 선포인가 대화인가? 이 두 개의 사뭇 다른 시선, 아니 불화는 리파와 카스틸리오네의 운명을 나눈 갈래이기도 할 것이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선포다.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장엄한 선포는 인내로우며 겸손하다. 강권이 아닌 대화이며 제거가 아닌 치유다. 단죄가 아닌 자비의 언어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이 복음의 숙명은 오늘에 파견될 우리들의 운명이기도하다. 아무튼, 카스틸리오네 자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 여겼을까? 화가 아니면 선교사, 아니면 그 둘 모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봄호(Vol. 37),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인천 교구 중1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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