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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 영성: 천주섭리수녀회 - 하느님 섭리를 드높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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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6 ㅣ No.226

[수도 영성] 천주섭리수녀회 - 하느님 섭리를 드높이며

 

 

예기치 않은 고통이나 불행을 당할 때, 사람들은 종종 팔자소관이나 운명을 운운하며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거나 조상이나 개인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마련하시는 좋으신 하느님을 믿는 섭리의 사람은 그러한 고통이나 불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좌절하여 무너지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고 열린 가능성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지쳐 넘어지더라도 거듭 일어나며…. 섭리의 사람은 불변하는 청사진을 펼쳐놓고 지켜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응답과 선택을 존중하여 언제나 우리와 관계하고 나누는 가운데 여정을 이끄시는 섭리의 하느님을 믿는다.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손을 내미신 섭리의 하느님을 신뢰하고 온 존재를 열어놓는다.

 

우리의 창설자들이 그러하였고, 우리를 앞서 간 수많은 선배 수녀님들이 그러하였으며,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도 섭리로 말미암은 창조는 계속된다.

 

 

하느님 섭리의 힘과 인도로

 

1851년 9월 독일 마인츠 교구장이었던 빌헬름 엠마누엘 폰 케틀러 주교(1811-1877년)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테파니 아멜리아 슈타르켄펠스 드 라 로쉬의 만남은 창설을 준비하고 있던 천주섭리수녀회가 확실하게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 정의의 기수’로 알려진 케틀러 주교는 산업혁명의 여파가 미치기 시작한 독일에서 생겨나는 여러 사회 문제에 깊은 우려를 느끼고, 노동자들과 어린 시절부터 노동 현장에 투입될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지녔다. 그리하여 어린이들과 농촌 지역의 여성들을 돌볼 수녀회 창설의 꿈을 실현하고자 여러 모로 애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으나 수도성소를 강하게 느끼고 있던 스테파니를 소개받아 한눈에 그 사람됨과 신앙을 감지하고, 스테파니에게 수녀회 설립의 협력을 요청한다. 사제성소를 받고 또 수녀회 설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섭리의 힘과 인도를 확신한 케틀러 주교는 새 수도 공동체의 이름을 천주섭리수녀회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같은 해 젊은 여성 4명이 수도생활에 뜻을 두고 마인츠 교구 휜튼 본당으로 찾아와 9월 29일 대천사 축일부터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케틀러 주교는 지원자들이 수도자로서 체계적인 수련을 받게 하고자 여러 수도회에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케틀러 주교는 본당 주임 아우치 신부를 이들의 지도신부로 임명하고, 스테파니는 프랑스 리보빌의 천주섭리수녀회(같은 ‘섭리’의 이름을 사용하는 다른 수도회)에서 수련을 받도록 권한다.

 

1852년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스테파니는 천주섭리수녀회 초대원장으로 임명된다. 바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한” 마더 마리(1812-1857년) 초대원장이다.

 

 

세상에 주님의 섭리를 드러내고자

 

우리는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며 시대의 요청에 귀 기울인 창설자들의 정신을 이어 이 세상에서 섭리를 삶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사회 현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노동자들의 권리와 어린이 교육, 농촌 여성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개입한 케틀러 주교. 개신교 귀족 신분이었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가문에서 파문 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새로 창설된 수도회 초대원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성모님과 같은 겸손으로 수락하였던 마더 마리. 이들 두 창설자가 시작한 일은 태초부터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특별히 인간의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창조를 이루어가시는 섭리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케틀러 주교와 마더 마리의 정신은 곧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와 개방성”이라는 카리스마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후예로서 섭리의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와 개방성

 

섭리는 하느님을 부르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로 피조물에 대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보살핌이자 인간과 함께하는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시작된 창조가 한 차례의 사건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발전하듯 우리가 살아가는 섭리 영성도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가운데 계속 발전하고 심화된다.

 

하루를 열면서, 또 모든 활동 안에서 바치는 섭리 기도는 바로 섭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 주님! 저희는 주님의 섭리를 드높이며 그 모든 뜻에 순종하겠나이다.”라고 바치던 기도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오, 주님! 저희는 주님의 섭리를 드높이며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로 바뀌었다.

 

섭리에 대한 신뢰와 개방성이 단순히 섭리의 뜻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섭리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섭리가 실현되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섭리를 살아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응답이자 약속인 것이다.

 

 

섭리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독일 비스마르크 정권 아래 문화투쟁 시기였던 1876년, 6명의 수녀가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 지역 독일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조금씩 활동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한 수녀회는 이후 미국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푸에르토리코까지 나아갔다. 1961년 독일 관구 수녀들이 페루에 진출하여 섭리의 씨를 뿌렸고, 1966년에는 한국에 천주섭리수녀회가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500여 명의 회원들이 아메리카 대륙(미국,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페루)과 유럽(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한국에서 섭리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고 있다.

 

설립 초기 ‘천주섭리 교육 간호 수녀회’라고도 불렸듯이,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주로 하였으나, 현재에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국제 수도회로서의 정체성을 살려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을 이해하는 가운데 더 깊이 연대하고자 모색하며 지역간의 교류와 협력을 장려하고, 다른 문화 체험과 창설지 순례 등 국제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체험하고자 한다. 또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의 국제 공동체는 현지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섭리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 협력회원들과도 수도회 정신과 카리스마를 나누며 사도직과 삶의 현장 등에 함께함으로써 섭리를 펼쳐 나간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섭리 영성으로 살아가는 여러 섭리수도회가 협력하여 ‘섭리의 여성’ 모임을 구성하여 2년에 한 차례씩 섭리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삶의 체험에 바탕을 둔 섭리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130여 명의 서원 회원들이 날마다 섭리를 드러내고 섭리의 사람이 되고자 기도하며 본당, 병원, 사회복지 시설에서, 또 이주민들과 어린이들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섭리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마다의 재능을 다해 책임 있는 청지기로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시대의 악과 불의에 용감히 직면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기쁨과 고통에 온 마음으로 동참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고자 애쓰는 선의의 이웃들과 희망차게 협력함으로써.”

 

* 김영미 마리아 - 천주섭리수녀회 수녀.

 

[경향잡지, 2010년 3월호, 글 김영미 · 사진 천주섭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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