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광복에서 통일로: 사회 양극화에 대한 처방은 사회 통합이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8 ㅣ No.638

[경향 돋보기 - 광복에서 통일로] 사회 양극화에 대한 처방은 사회 통합이다


한국사회 해방 67년

돌이켜보면 한국사회는 20세기 후반기에 격동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해방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분단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통해 쓰디쓴 아픔과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말 그대로 절대빈곤 사회였으며 거의 모두가 공평하게 못사는 평등사회였다.

1960년대에 들어 가난의 질곡을 딛고 일어서고자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으며 한일협정,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젊은이의 희생을 통해 성장의 밑거름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70년대의 권위주의 정부는 재벌에 대한 특권 부여와 인권 탄압과 같은 부정적 유산을 낳았지만 가난한 한국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1980년의 민주화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중산층은 아직은 좀 더 성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조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7년 넥타이 부대의 변화 욕구는 도도한 것이어서 대통령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정치적 민주화의 첫걸음을 딛게 되었다. 당시 사회학자들은 경제성장을 통해 성장한 한국의 중산층을 중요한 화두로 삼아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화의 일정을 차분히 밟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실제로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선진국을 제외하고는 대만, 스리랑카와 함께 소득불평등지수가 매우 낮았다. 비록 상대적 박탈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국민 모두는 88서울올림픽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연이은 해외여행 자율화는 초기에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부정적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한국사람들이 비로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수입자유화는 외국 물건의 홍수시대를 낳게 되었고 OECD에 가입하면서 마치 한국이 선진국이나 된 양 소비가 미덕이라는 주장 아래 흥청망청하는 모습이 노정되었다. 결국 1997년 한국은 6 · 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이한다. 국가의 부도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30년간 압축적 고도성장을 치달아온 한국사회에 급제동이 걸렸으며 소비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된다.

여러 직장에서의 구조조정은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배출하였으며 ‘IMF세대’라는 명칭 아래 대한민국의 가장들은 심각한 자산 감소와 미래의 불안을 느끼면서 공포를 경험하였다. 금모으기와 같은 시민운동과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내용들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단기간에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내 소득이 없는 청년들에게까지 신용카드가 남발되면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병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러한 변화는 한국사회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제 지구는 하나의 체계 아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더 저렴하게 그리고 양질의 상품을 제공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지역은 도태되었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평생고용과 같은 개념을 낡게 만들었다.

특히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또는 지식사회로의 이행은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20대 80사회의 개념이 등장한다. 곧 새로운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는 일부 계층은 부를 누리지만 국민 대다수는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뒤처지게 되고 결국 낙오자로 전락하여 빈곤의 늪으로 빠지는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때 세계화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값싸고 좋은 품질의 다양한 물건을 구매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은 무자비했으며 패자에게 부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무서운 사회변화였다.

또 다른 위기는 아시아가 아닌 서구사회에서 발생했다. 2008년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선진국의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반세계화의 물결은 가난과 불안정이 이른바 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의 일만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종주국들에서도 현시되는 세계화된 현상으로 수용되었다. 이제 사회의 화두는 1대 99라는 새로운 명제를 낳았다.

몰가치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금융자본주의는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새로운 빈곤층을 양산하였다. 고전자본주의에서 1929년 경제대공황을 통한 케인즈 경제의 출현, 그리고 1970년대 서구사회에서 복지국가의 위기론, 대량생산 방식의 포드주의의 한계가 노정되면서 등장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이제 도덕적 정당성에 심각한 훼손을 경험하게 된다.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다보스포럼조차도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더 이상 명분이 없으며 새로운 철학과 이론이 등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불평등의 전 지구적 확산은 효율과 평등의 변증법이라는 산업사회의 화두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적 효율과 사회적 형평은 양립가능하지 않은 개념인가? 사회 양극화 시대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는가? 만일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오늘날 세계의 지성들은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유레카!”를 외친다면 그는 분명 새로운 선각자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주지하다시피 한국사회는 가난의 질곡에서 풍요로운 사회를 이룩한 예외적인 국가이다. 자의건 타의건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적 주목과 칭송, 그리고 시기를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당한 갈등과 긴장, 그리고 불안이 미래를 엄습하고 있다.

우선 고용의 불안이 두드러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유능한 젊은이가 평생을 그 직장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들 기업에 취업조차 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더욱 우울하다. 이제 대학졸업은 영광일 수만은 없는 듯하다. 세계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부러워하는 한국식 교육이고 고교 졸업자의 80%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고학력사회이지만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도 병존한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1955년에서 1963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은퇴에 처해지고 있지만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노령화사회를 맞이하여 충분한 소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아직도 교육과 혼인 등 자식 뒷바라지에 신경을 써야 하며 퇴직 후에 소득을 얻고자 하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우울한 장년기를 보내고 있다.

한국의 여성은 더욱 똑똑해지고 있으며 유능하다. 이들에게 삶은 더 이상 출산과 가정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이를 통해 소득을 얻는 더욱 독립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늦게 한 결혼생활에서도 자녀 출산이 최소한도에 그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저출산 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소기업과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화시대에 대자본의 위력에 무기력하기만 하다. 과거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던 분야에까지 진입하면서 이것이 지나치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베이커리, 치킨, 파스타, 피자 등 요식업에조차 대마불사론이 나오면서 안 그래도 소득이 불안정한 다수 계층은 사회적 불만과 저항의식을 갖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폭발할 수도 있는 갈등의 내재화가 일상적 현실이다.

어느덧 한국사회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살현상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지만 소리 높여 그 문제점을 진단하고 부당함을 강조하는 지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학교폭력은 더욱 횡포해지고 있으며, 성폭력도 가일층 증가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한국사회에서 말이다.

정부에서는 동반성장을 검토하고 있으며 대권주자들은 공통적으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그리고 일자리의 창출을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냉소주의가 팽배해진 듯하다. 각종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댓글들에는 폭력적 언어구사가 즐비하며 더욱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대통령의 임기 말 측근이나 인척비리는 고정 메뉴가 된 것 같다. 사람들은 부패에 둔감하며 돈의 힘에 쉽사리 굴복하는 그래서 물질에 정신이 주도권을 내놓는 부정적 현실에 처해있기도 하다.


효율과 평등의 변증법

사회 모델을 말할 때 최근 등장하는 개념이 덴마크식 유연 안전화(flexicurity)형이다. 이는 경제활동에서 기업이 노동자에 대한 해고의 자유를 부여하는 반면에 이로 인해 실업에 처한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체제를 말한다. 여기서 책임은 단순히 실업수당을 금전으로 지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극적 사회복지의 개념 아래 재취업을 위한 교육훈련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일자리로 복귀시키려는 의도를 지닌다.

유럽에서 다른 극단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남유럽국가들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의 과도한 힘으로 기업의 입장에서 해고가 매우 어려우며, 실업상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대우도 일정한 소득을 보전해 주는 소극적 정책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투자가 부진해지고 추가적인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면서 방대한 청년실업과 정부의 비효율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재정위기와 디폴트 사태는 저효율과 불평등이라는 부정적 요소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국사회는 유럽의 경험에서 반면교사를 얻어야 한다. 경제활동의 효율과 수월성의 추구는 반드시 보전되어야 하며, 사회적 소수자와 희생자, 그리고 위험에 처한 자들에 대한 선별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방식으로의 도움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만일 기업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몰아가면서 양적인 평등의 보편적 복지를 외친다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것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복지는 한 번 실시하면 다시 주워 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안을 모색하며

일찍이 사회학자들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올 정신적 폐해를 경고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성장을 통해 풍요, 그리고 뒤이은 방종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팽배 등으로 인간은 합리와 이성을 가장한 이기주의와 책임의식의 부재 현상을 노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극화된 사회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성공적인 통일을 기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야 어려운 북한을 껴안을 수 있을 것이며,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사회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양적 성장에 이은 질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 수준으로 상승하려면 질적인 내용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일상사에서 출발한다. 교통신호 지키기, 외국인에게 친절하기, 공공장소에서 예의 지키기 등 쉽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일들이다.

사회 양극화에 대한 처방은 사회 통합이다. 계층, 이념, 지역, 세대, 성(性), 인종, 다문화 간의 갈등해소는 우리 시대의 핵심적 화두들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가능할 때 사회적 평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덕목을 함양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제도 마련에 힘써야 한다. 사회교리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현실에서 완전한 사회는 구축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형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업적지향(meritocracy)적 사회운영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명문대학일수록 가정환경이 좋은 학생들이 더 많이 진학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곧 아무리 머리가 좋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복잡해진 입시제도와 대학별로 차이가 나는 시험 때문에 실패를 경험하는 반면 많은 돈을 지불하고 학원 등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들이 사회적 우위를 독점하게 된다면 그런 닫힌 사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이동성을 높이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며 정부와 사회는 이를 위한 기반조성, 그리고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경기의 법칙을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월성(par excellence)의 추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회원리이다. 평등을 외치는 자들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건강한 사회에는 우수한 업적과 자질,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들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회자본이 풍부해지며 신뢰에 기초한 인간관계가 착근할 수 있다.

결과의 평등은 너무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인간의 가치를 기반으로 선의를 베풀게 하는 노력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 김시홍 그레고리오 -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 교수. 1990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사단법인 한국유럽학회 회장을 지냈다. 공저로 「유럽의 갈등과 통합」, 「유럽의 사회통합과 사회정책」, 「통합 유럽과 유럽 시민권」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2년 8월호, 김시홍 그레고리오]


1,51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