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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멕시코 땅을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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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3 ㅣ No.220

[목자의 지팡이] 멕시코 땅을 둘러보고


[1] 나는 남미 한인 선교사들의 연례 연수회에 참석하기 위해 2007년 6월 28일부터 7월 15일까지 멕시코를 다녀왔다. 처음으로 가 본 멕시코 여행에서 좀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여행자로서의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여 여기 소개한다.

멕시코시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찰코>라는 곳에는 마리아 수녀회 소속 한국 수녀님들이 책임자로 일하고 계시는 <소녀 마을>이 있다. 마을이라지만 실제로는 학생만 4천 명에다 선생님들, 기타 직원들까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교실, 그리고 생활과 교육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거대한 학교이다. 멕시코 전국에서 가장 후미지고 가난하여 현대 문화의 빛이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에서도 제일 버림받은 소녀들만 모아서 여러 분야의 기술 교육을 시켜 의젓한 사회인으로 길러내는 교육기관인 것이다. 인성과 기술 양면에서 이 학교의 교육이 아주 실제적이고 훌륭하기 때문에 졸업생들의 취직률과 각 분야에서의 성공률이 일반 학교 출신보다 월등히 높다. 그런 만큼 이 학교에 들어오는 일은 큰 행운에 속하고 일단 들어오면 대단히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런데 지난 2월경부터 이 학교에 아주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두 학생이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병에 걸리더니 그 수가 점차 늘어나 20~30명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음식물과 영양 상태를 의심하며 철저히 조사해 보았지만 분명한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에 보고하였고,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단이 와서 한 달 동안 철저히 연구하고 분석하였다. 그런데 그 한 달 사이에 괴질은 오히려 더욱 급속도로 번져서 6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이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퇴출당한 교사들이 각종 악성 루머를 퍼뜨리고 이를 바탕으로 멕시코 국내의 여러 언론 매체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런 소문이 더욱 널리 퍼졌고, 영국 비비씨 등 세계의 주요 매체들도 이 일을 크게 다룰 정도가 되었다. 많은 학부모들이 이 소식을 듣고 자녀들을 데려가 짧은 기간 동안 약 천 명의 학생이 학교를 떠났다.

그런데 정부 측 조사단은 이번 현상이 병균이나 영양상태 등 어떤 물리적인 원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학생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살았던 사회 정신적인 환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최종적 결론을 내렸다. 학교 당국자들로서는 학교의 책임이 아니라는 조사단의 최종 결론만으로도 우선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지만, 이처럼 애매한 표현으로 그 괴질의 뿌리가 판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문제가 내 머리에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계속 남아 모임이 끝나고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고대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줄곧 따라다녔다.


[2] 멕시코시와 그 주변은 아즈테크 문화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관련 유적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시내에 있는 문화인류학 박물관에는 그 유물들이 잘 수집 정리되어 있다. 이런 곳들을 둘러보며 나는 옛날 역사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519년 400명도 채 안 되는 스페인 군대가 3개월이나 걸리는 대서양 횡단 항해 끝에 처음 멕시코 땅에 발을 디디고, 아즈테크 제국의 수도인 떼노츠띠틀란(지금의 멕시코시 지역)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인구 천만에 38개의 소왕국을 거느린 이 제국의 수도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수학, 천문학, 건축, 의학, 철학, 예술, 법제 등에서 당시 유럽에 비견할 만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인간 지식의 여타 분야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뒤처져 있어서, 예를 들면, 그들은 아주 초보적인 물리 법칙도 모르고 있었고, 경험과학 분야에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바퀴의 사용, 동물을 이용한 운반 기술, 원형 아치의 건축법에 관해서 철저한 무지를 드러냈다. 그런 이들에게 스페인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하체는 사자처럼 날쌘 짐승이고 상체는 인간인 괴물로 비쳐졌다는 이야기도 그럴 듯하게 들렸다. 한 가지 점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모든 짐승을 신과 연결시켜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완전무장하고 말을 탄 스페인 군인은 영락없는 귀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즈테크인들에게는 태양, 달, 별은 물론이고, 불, 바람, 물과 같이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온갖 자연물, 옥수수, 콩, 토마토, 선인장과 같이 양식이 될 수 있는 모든 식물들은 그대로 신격화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세계는 자기네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온갖 신들을 잘 챙겨주고 그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신의 힘이 드러난 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이로운 힘은 끌어들이고, 해로운 힘은 몰아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마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피라미드 형 신전이 있었다. 가장 강력한 신들 가운데 하나가 날개 달린 뱀으로 흔히 상징되는 껫짤코아틀이었다. 이 신을 배불리 먹이고 마음을 위무하지 않으면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이 신은 인간의 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기적으로 인간제물을 그에게 바쳤다. 희생자는 보통 노예나 죄수였는데 그들을 바치는 방식의 잔인성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큰 돌 위에 눕혀 놓고 숙련된 솜씨로 심장을 도려내는 방식은 제일 덜 잔인한 것에 속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인육을 먹는다든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사람을 희생시켰다고 한다. 그 규모도 엄청난 것이어서 어떤 때는 하루에 수천 명이 그렇게 희생되기도 했고, 1487년에는 전쟁의 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는 헌당식에서 당시 아즈테크 황제의 명령에 따라 2만 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그 제단에서 희생물로 바쳤다고 한다.


[3] 그런데 세상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신이 무시무시한 얼굴과 그에 걸맞은 잔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고 오늘도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멕시코시에서 자동차로 6시간 이상 걸리는 오아하까 지역의 미틀라라는 곳을 방문할 때였다. 원래는 여기가 대규모 공동묘지였던 모양이어서 본래 명칭도 그 지방 말로 <죽은 이들의 땅>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약 사 오백 년 전에 대사제들의 주거지로 바뀌어 지금은 그 폐허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죽은 이들의 땅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죽음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곳이다. 그런데 거대한 돌 건축물의 한구석에 이르렀을 때, 약간 길고 시커멓게 생긴 것이 건물 외벽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개똥이겠지 했는데, 안내자가 그것을 손에 집어 들고 하는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개똥이 아니라 흑 주술을 한 흔적이고, 그 물질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전날 저녁쯤에 누군가가 와서 그 주술을 하고 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술에는 흑 주술과 백 주술이 있는데, 흑 주술이란 신의 힘을 빌려 남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주술이고, 백 주술은 그와 반대로, 같은 힘을 빌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불러오는 주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주술은 지금도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4] 다시 찰코의 <소녀 마을> 이야기로 돌아가자.

음식이나 병균 등 물리적인 원인은 없는데, 한창 나이의 소녀들이 한꺼번에 6백 명씩이나 두통을 앓고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교 책임자들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이 서서히 빛을 주는 것 같았다.

작년 11월에 반 대항 운동 경기가 있었다. 그렇게 큰 규모의 학교에서 리그전 방식으로 시합을 해서 마침내 마지막 두 개 팀만 남았다. 학생들은 각 반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반이 우승할지를 예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강력한 우승 후보로 올라와 있는 반의 한 학생은 자기 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대 팀이 이기기를 바랐고, 상식적으로는 자기 바람대로 되지못할 것이 거의 분명했기 때문에, 여러 동료들을 모아놓고 흑 주술을 했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주술사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기에서 우승한 것은 놀랍게도 누구나 예상했고 그 학생이 저주한 자기 반이 아니라 그 상대가 되는 반이었다. 이때부터 그 학생은 동료들 사이에 주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 신통력을 지닌 사람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학생은 실제로 동료 학생들에게 그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동료들의 문제에 끼어들어 누구는 누구와 사귀면 저주를 받아 병에 걸리게 될 것이라느니, 무슨 일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등의 예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번은 그런 식으로 한 학생에게 한 말이 현실이 되어 그 학생이 두통에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이 학교 당국에 알려져서 결국 그 학생은 퇴학 처분을 받았지만, 집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정에 그 사실을 알리고 학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거의 두 주간이 걸렸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들으며 이 학교에서 발생한 괴질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학생이 퇴학 통고를 받고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학교에 더 머물러 있는 동안, 그 학생은 몇몇 동료들이 자기를 학교 당국에 고자질했다고 생각하여 원한을 품고 그들에게 흑색 주술을 걸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실제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일이 번져나가 그 학생이 떠난 뒤에도 미리 해 놓고 간 그의 말은 계속 효력을 내어 괴질이 확산된 것이었다. 보통의 다른 환경에서라면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 거기서는 일어난 것이다. 과연 그 소녀들이 태어나 자라난 환경 속에서는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온 정신세계가 거의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신은 걸핏하면 심술을 부려 사람들에게 질병이나 다른 재앙을 내리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그들의 삶 속에는 죽음이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죽음을 아주 친숙하게 느끼게까지 된 것 같았다. 공원이나 시장 바닥에 장신구나 다른 소품들을 펼쳐놓고 파는 모습을 거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그 물건들 속에는 해골을 본떠 만든 모형이 자주 눈에 띠었다. 심지어 예쁜 옷에 최신 유행의 멋들어진 모자까지 씌운 아름다운 여성 인형도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가슴과 머리는 해골인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이 이런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동료 학생의 이상한 말한 마디가 아주 쉽게 정신 속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은 이렇게 약하다. 사람만이 영적 세계와 통한다고 믿는 사람의 말 한 마디가 가서 꽂힐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그런 말이 실제로 들어가면 이렇게 비틀거린다. 그런데 이 약함이 동시에 그의 강점이기도 하다. 사람만이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세계와 통할 수 있는 접점을 가진 존재임이 그런 계기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녀 마을’의 학생들은 대부분 옛날 식 삶이 거의 변함없이 전해 내려오는 곳, 수백 년 전의 정신세계가 비교적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런 지역 사람들에게는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확인되는 세상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이 일상적 경험이었던 시대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해골 인형이 그것을 말해준다.


[5]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현대 물리학의 방향과 우주를 보는 인간의 눈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아인쉬타인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이 우주가 인간에게 호의적인가 아닌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교양 있는 언어로 또 지성적인 표현을 써서 나타내느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실재 전체의 의미를 캐묻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정신적 요청이 있다. 그리고 그런 물음은 그 실재 전체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온 신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에 본 아인쉬타인의 대답은 이렇게도 나타낼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호의적인가, 아닌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 밖의 것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신은 어떤 존재인가? 걸핏하면 심술을 부리는 존재인가? 내 삶을 걱정하고 잘 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내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인가? 인간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주어온 역사였다. 물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이 질문에 주어진 대답은 땅에서 하늘만큼이나 차이가 있지만. 신은 인간의 피를 대량으로 바쳐서 그 갈증을 풀어주어야만 심술을 부리지 않고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믿은 아즈테크 사람들이나, 이 우주에 놀랍고 아름다운 법칙을 주어 제대로 돌아가게 한 어떤 원리로서의 신을 믿은 아인쉬타인이나, 나름대로 신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신을 믿었느냐에 따라 그들이 각기 살았던 우주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인간은 신을 완전히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문제는 그 신을 어떤 존재로 믿고 생각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빠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망가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인간은 악덕과 비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악덕과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분 안에 우리의 모든 덕과 모든 행복이 있다. 이분을 떠나면 악덕, 비참, 오류, 어둠, 죽음, 절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을 떠나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죽음도, 신도, 우리 자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최종 목표로 하고 있거니와, 이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자연 자체는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 사방이 어둡고 뒤죽박죽으로만 나타날 뿐이다.”(빵세 416-417)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아버지를 아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제자 양성 기간이 다 끝나고 이제 죽음을 바로 앞두셨을 때 필립보가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주신 대답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이 언제나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이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6]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그대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한은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고, 그분의 사후에 제일 오래 살면서, 그분과 함께 했던 온갖 경험을 모든 측면에서 되짚어 깊이 숙고한 요한의 이런 발언은 인류가 경험한 하느님 체험의 결론이자 완결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님께서 한 삶을 다해 인류를 위해 해 주신 일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일이었다.

그렇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어떤 아버지이신가? 루카복음 15장에 결국 같은 내용을 각기 다른 이야기를 통해 세 번 씩이나 거듭 강조해서 그려 주신 모습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사진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온 종일 들판을 헤매다가 찾으면 너무나 기뻐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아는 사람들을 다 초청해 놓고 함께 기뻐하는 목동.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다가 그 중 한 닢을 잃고서는 등불을 켜들고 방안을 온통 쓸며 구석구석 찾아다니다가 찾아내고서는 역시 이웃과 친지들을 초대해 기쁨을 나누는 여인.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의 요청에 의해 그 몫을 미리 분배해 주었다가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로 그 재산을 다 들어먹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창자가 뒤집어지는 연민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달려가 얼싸 안고 옛날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는 아버지. 이런 그림들도 실상 아버지 하느님의 실체 앞에서는 태양 앞의 촛불에 불과하지만, 말의 한계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비교적 올바로 전해주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하얀 것은 검은 배경에 놓고 보아야 그 흰 색깔이 제대로 드러난다. 밤의 짙은 어둠을 겪은 사람일수록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더욱 찬란하게 나타난다. 진리는 허위를 배경으로 볼 때 그 진면목이 더 잘 나타난다. 인간의 심장으로 배를 채우고 그 피를 마셔야 갈증이 풀리는 껫짤코아틀. 날개달린 뱀의 무시무시한 그 모습. 그런 모습을 배경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신의 모습은 정확히 반대다. 선교사들이 멕시코에 들어가고 본토인 가운데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 중의 하나인 후안 디에고에게, 1531년 12월 9일과 12일에 나타나신 성모님을 통해 참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된 멕시코인들은, 그 뒤 밀물처럼 신앙의 문으로 밀려 들어와 어떤 선교사는 혼자서 일생 동안 백만 명에게 세례를 주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갈증을 푸는 뱀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이 제물이 되는 신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인하는 참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다.

[쌍백합, 제17호, 2007년 가을호,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천주교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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