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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 영성: 거룩한 말씀의 회 - 거룩한 말씀의 시녀로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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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222

[수도 영성] 거룩한 말씀의 회 - ‘거룩한 말씀의 시녀’로서 삶

 

 

거룩한 말씀의 회의 핵심 영성은 ‘말씀’과 ‘선교’이다. 그 영성은 자선, 가난 그리고 시녀의 삶으로 표현된다. 본 수녀회는 1964년 전 세계가 한자리에 모여 교회를 다시 진단하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열리고 있던 중에 태동하였다(그해 성령강림대축일에 창설). 독일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던 장화자 힐데가르트는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일념과 하느님 사랑의 깨달음,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 선교의 열정으로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여, 부산 동항동성당에서 수도회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방인 수도회 첫 여성 설립자가 되었다.

 

 

말씀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복음을 따르는 일의 또 다른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다. 창립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얻은 지혜와 영감을 마치 보이는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말씀을 끌어안고 말씀 안에 머무는 일은 온 정성과 온 힘을 쏟아 잡념 없이 오로지 말씀과 하나 되도록 힘쓰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른 새벽 홀로 감실 앞에 머무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도록 한다. 이는 성체현시와 조배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것은 죄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 우둔한 사람, 귀머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말씀을 듣는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께서 내 하느님이 되고, 나 개인은 하느님의 개인이 될 수 있으니, 하느님과 이런 돈독한 관계 형성 없이는 무슨 일을 해도 헛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체험이다. 이 체험은 은총이고 사랑이다. 말씀 안에 충실히 머물러 은총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선교하라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어디에도 어떤 장소에서도 전해야 한다. 초기 창립자에게는 복음을 들려주는 이가 없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이 선교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녀는 독일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는 중에도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교하는 열성을 가졌는데, 추상적으로 학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개인의 기도와 삶 안에서 체험되고 새로 발견되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에 지칠 줄 몰랐다.

 

그녀의 이런 열성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길을 오갈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에게, 방문한 병원의 환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 이런 선교사명은 수녀회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선교를 위하여 둘이나 셋, 그리고 여럿이 짝을 지어 파견된다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협력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므로, 특별히 ‘협력’을 강조한다. 이 협력은 각 자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선물의 결합으로 무상으로 주어지는 풍요로움이 된다.

 

자매 서로는 이 선물들을 고귀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파견될 때 자매는 서로 똑같은 동행의 자격으로 파견된다. 이런 관계는 함께하는 자매간의 시녀의 삶에서 존경과 사랑으로, 가난의 삶에서 겸손과 위로로, 자선의 삶에서 자매간 돈독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덕행을 건설해 나가고 있다.

 

 

영성의 열매는 ‘자선, 가난 그리고 시녀의 삶’으로 드러난다

 

거룩한 말씀의 회의 ‘말씀’과 ‘선교’ 영성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강생 안에서 낮음과 작음의 삶을 따르는 자선, 가난 그리고 시녀로 표현된다. 이러한 삶은 다시 말씀과 선교 영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창립자가 독일에서 입국하여 맨 처음으로 했던 일이 바로 자선이다.

 

‘자선’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선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며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선은 하느님의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고,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이고,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자선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길을 올바로 걷고 있다는 행위의 표현이다.

 

창립자가 초창기부터 열성적으로 해온 것은 하느님 없는 삶 안에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를 지은 수인들을 위한 교도소, 일생을 열심히 살았어도 생을 마감할 시점에서조차 하느님을 모르는 어르신들을 위한 양로원과 요양원, 물질적 가난과 병고에 시달려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홈케어(Home care) 등의 활동이다. 자선은 국내인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여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의 작은 생명을 존중히 여겨 환경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 하고 있다.

 

‘가난’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날 곳조차 없이 가난하게 이 세상에 오신 것에서 출발한다. 이렇듯 가난 자체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사를 이해하시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함께 호흡해 주셨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시고, 당신의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셨으며, 먼저 그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셨고, 자기 자신도 온전히 가난하셨던 분이시다.

 

가난을 통하여 주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는 가난을 통하여 주님께 갈 수 있다. 결식인들을 위하여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고 앓는 이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면서, 중국 오지 나환우촌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가난을 실천한다.

 

‘시녀’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성모님을 본받는다. 그래서 말씀의 딸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시녀인 동정녀이다. 시녀는 ‘종’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종의 형상으로 이 세상을 사셨다. 이 종은 주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주인의 뜻을 가려내어 주인의 일을 완전하게 행하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실행한다. 그뿐 아니라 종은 주인을 대신해서 박해를 스스로 받는다. 주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체포되시고, 비난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매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상에 못 박히시고, 온갖 고통 중에 돌아가셨다. 창립자는 이런 종의 정신으로 창립 당시 회의 이름을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라 하였다.

 

 

현대 세상에 살아있는 도전으로서 영성의 가치

 

영성과 삶의 이원화된 세상에서 개개인이 삶으로서 영성을 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격의 통일성, 헛된 말이 범람하는 세상 안에서 말의 진실성,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통합을 영성은 반영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종의 신분으로 자신의 삶을 증언하셨듯이, 능력과 업적과 성공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시녀’ 곧 ‘종’의 삶은 이웃과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해준다.

 

또한 참된 가난은 이 시대 생태영성에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도가 기도로 배워지듯 영성은 살아낼 때만 영성이 된다. 영성은 굳어진 지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고 변화하는 하느님의 움직임인 것이다.

 

* 윤일순 님파 -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 수도회 영성연구원의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글 윤일순 · 사진 거룩한 말씀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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