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거짓이 진실을 말하는 나라, 태양 아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3 ㅣ No.940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거짓이 진실을 말하는 나라, ‘태양 아래’

 

 

다큐멘터리 / 2015.04.27. / 92분 / 전체관람가 / 감독 비탈리 만스키

 

 

‘거짓’과 ‘연출’이 ‘진실’을 보여준다. 진실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거짓과 연출임을 알거나, 그 거짓과 연출의 행간에서 진실을 발견했을 때이다.

 

북한주민의 모습을 담은 뉴스,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제는 더 이상 충격적이기도, 새롭지도 않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보여주든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역시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같은 민족이고 이웃이란 사실이다.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아닌, 오직 그 시선으로 러시아 거장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만든 북한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를 한번 보자.

 

이 작품의 끄트머리에서 감독이 아이에게 묻는다. “소년단 입단 후 스스로의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니?”라고. 촬영을 위해 학교로, 거리로, 체육관으로, 무용연습실로, 운동장으로, 거대한 기념탑으로 옮겨다닌 여덟 살 소녀 이진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린다.

 

그 모습에 당황하고 안쓰러워, 혹시라도 질문이 어려워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독은 이렇게 바꾸어 다시 말한다. “좋은 것 생각해 봐.” 돌아온 대답은 “그런 거 잘 모릅니다.”였다. ‘모른다’는 말이 ‘없다’는 뜻이라는 사실은 이어진 “그럼 아는 시(詩) 있으면 외워봐.”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린 아이가 소년단 입단 선서문을 무표정하게 소리 높여 외운다. “나는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위대한 김정일 대원수님께서 빛내주시며….”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북한의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순수한 동심, 아름다운 꿈, 해맑은 눈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독재와 사상으로 그것을 빼앗고, 가로막아도 가슴 한 구석에 살아있음을 한 소녀의 눈물과 무표정이 말해주었다. 때론 이렇게 수십 권의 책, 수백 명의 증언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그것도 과장과 거짓의 의도를 가진 작품이 역설적으로 ‘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태양 아래>가 그렇다.

 

이 작품에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삐딱하게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제작 배경과 과정, 목적이 말해준다. 우리가 촬영한 것도, 우리가 지원을 한 것도 아니다. 북한과 러시아 공동제작이고, 감독인 비탈리 만스키는 전작인 <더 북> <베크니 오곤>의 국제영화제 호평이 말해주듯 지신의 작품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더구나 북한 측에서 ‘가장 평범한 가족의 행복한 일상’을 보여주겠다면서 각본을 직접 써서 건네주었고, 촬영을 직접 도왔다. 그러니 억지 선입견은 갖지 말자. 아니 가지지 않아도 된다. <태양 아래>는 겉과 속을 동시에 드러낸, 나열된 문장과 진미의 눈물처럼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히는 작품이니까.

 

<태양 아래>의 외형적 문장들은 여느 북한 영상물처럼, 제목처럼 ‘위대한 태양’으로 떠받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우상화와 그것을 따르고 찬양하는 북한 주민들, 특히 ‘연출’된 진미와 그의 가족들의 행복을 보여준다. 감독도 처음에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찍고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조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태양 아래>는 메이킹필름처럼 조금씩, 몰래몰래, 말없이 제작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속’을 행간에 담았다.

 

촬영에 동원된 학생들, 지하철 플랫폼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 창밖에 걸린 낡은 내복, 고장 난 무궤도전차를 밀고 가는 행렬, 강연 중에 졸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 김일성과 김정은 동상 앞에 바친 꽃송이들을 쓰레기 취급하듯 마구 수레에 담는 여자. 이런 표정과 풍경이 또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 ‘속’은 북한이 이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를 자랑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준비한 진미 가족의 행복한 일상’에서도 감출 수가 없었다. 단단히 사전 교육을 받았지만 진미에게 촬영은 너무나 힘들어 보였고, 북한 관계자가 “집에서 하던 대로 해라.”는 말에 이상해 하고, 어색해 했다. 부모의 바뀐 직업, 처음 보는 넓은 아파트와 자기 방, 음식, 느닷없는 광명성절, 태양절, 소년단 입단식에서의 ‘주인공’ 역할, 그 모든 것에 표정도, 감정도 점점 잃어간다. 연습한 연기가 아닌, 그 표정과 감정이 바로 그의 ‘속’이다.

 

그것을 카메라가 침묵의 영상으로 잡아내듯, 진미 역시 소리 없는 눈물로 보여준다. 우리도 안다. <태양 아래>에서 북한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이 “평소 집에서 생활하던 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목소리 높여 조작이고, 연출이고, 거짓이라고 폭로하지 않아도, 진미가 촬영 때문에 호된 춤 연습에 힘이 들어 끝내는 눈물을 훌쩍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북한의 ‘지금’과 그곳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 굳이 비탈리 만스키처럼 진미에게 “너, 행복하니?”라고 물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눈물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진미와 반대로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어린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은 ‘거짓’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 행복이 우리에게는 연민과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큐멘터리는 ‘진실’이 생명이다. 그것을 포기할 때,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태양 아래>는 거짓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 속의 진실을 행간에 담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그것들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제3자의 눈’에 비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언제나 ‘이념’이다. 이념대립, 진영논리에 늘 존재한다. 이념은 둘, 셋일 수 있지만 진실은 하나다. 이념으로 가르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태양 아래>는 그 이념을 버리고 인간 속으로 들어갔다. 미국 언론인 파하드 만주는 《이기적 진실》이란 책에서 사실이라는 증거 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을 ‘진실스러움’이라고 말한다. 갈등이 깊은 사회일수록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진실스러움이 활개를 친다.

 

<태양 아래>는 이런 우리의 태도를 질책하려고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고, 내키지 않은 촬영을 하면서, 진미의 눈물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여덟 살, 평범한 북한의 한 어린이의 눈물에는 사상도, 정치적 의도도, 강요도, 계산도 없다. 우리가 기억하고, 닦아주어야 할 ‘진실’이 있을 뿐이다.

 

[평신도, 2016년 여름(계간 52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3,0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