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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태국 - 불교의 나라 태국의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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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217

[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 태국] 불교의 나라 태국의 가톨릭교회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 가톨릭교회는 2011년 현재 방콕과 타레농상(ThareNonseng) 2개의 대교구를 포함해 10개의 교구, 494개의 본당과 775명의 사제, 1,684명의 수도자로 구성되어 있다. 신자 수는 35만 명으로 전체 인구에서 약 0.54%를 차지하고 있다.

사제로서 태국에 복음을 최초로 전한 이는1554년 포르투갈 군함을 타고 당시 시암 왕조의 수도 아유타야에 도착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신부와 세바스티안(Sebastian de Cantu) 신부이다. 이후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천주교 신앙의 불모지에서 현지인들과 태국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중국계 · 포르투갈계 이민자와 무역상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시암 왕조 시절인 1662년 8월,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은 시암 지역을 대교구로 지정하였고, 1673년 레이노(Laneau)신부가 시암의 초대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시암 왕인 프라나라이(Phra-Narai)는 가톨릭 선교활동에 호감을 갖고, 성당과 선교사 숙소와 신학원을 지을 수 있도록 토지를 제공하는 등 가톨릭 복음전파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많은 지원을 하였다. 또한 시암 왕국 내에서 선교활동의 자유를 주었고, 천주교를 믿는 백성들에게 주일에는 노동을 면제시켜 주는 등 혜택을 베풀었다.

그러나 복음전파의 길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과격한 무신론자와 버마의 무자비한 침략세력에 의해 주교와 선교사들이 투옥되는 등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아야 했다. 박해시절에는 신자 수가 1만 2천 명에서 1천 명 수준으로 감소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박해에 굴하지 않고, 태국 천주교회의 복음전파 노력은 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국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멀리 한반도에b복음을 전파하는 기지로도 활용되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b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년)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시암 대교구의 부주교를 지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려고 애쓰다가b1835년 10월 국경지대인 만주에서 사망하게 된다(「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김대건 신부의 편지모음 참조).

1834년 쿠베지(Courvezy)b주교가 대교구장으로 임명되고, 박해가 약해짐에 따라 신자 수가 6,590명, 신부 수는 18명(11명의 유럽계 신부, 7명의 현지 신부)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태국의 몽쿠트(Mongkut) 왕, 출라롱콘(Chulalongkorn) 왕과 대교구장이 호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19세기 중엽 이후 상당 기간 평화를 유지하고 교회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신자 수가 2만 3천 명에 이르렀으며, 55개의 본당이 운영되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의 공산화 등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피난민이 많이 생겨나자 긴급구호 활동 등을 위해 가톨릭 긴급피난 구호 사무소가 태국에 설치되었다. 1984년에는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태국을 방문하였고, 1989년 10월 태국에서 유명한 송콘 성지의 순교자 7명을 포함한 10명의 태국 순교자들이 시복되었다.


태국의 가톨릭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태국 천주교 주교회의(CBCT)가 설립되어 새로운 교회구조가 형성되었고 이후 사도직 단체들과 갖가지 신심운동들이 시작되었으며, 1975년부터 몇몇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팀으로 각 교구의 본당에 파견되어 우리나라의 사목협의회와 같은 ‘본당평의회’를 발족시켜 운영함으로써 태국 가톨릭교회의 교세확장에 활력소가 되었다.

1990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교황청 전교회의 도움으로 태국에 전교회를 설립하여 사제와 수도자를 양성하고, 주변국가인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파견하여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2000년 대희년을 맞은 태국 가톨릭교회는 ‘복음화 10년’을 선포하여, 방콕 대교구는 방콕 근교 반푸완에 대규모의 수련원을 만들어 사제양성과 평신도 수련에 나섰으며, 다른 교구나 수도회들도 같은 목적으로 많은 센터를 설립하여 ‘사랑으로 일치된 하느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따르며 선언하기’라는 10년 목표의 사목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태국 국민들이 가정을 갖는 일을 늦추고 있으며, 독신자 수가 늘고 있고, 자녀 수 감소로 가정의 규모가 작아지고,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결손 가정이 늘어나고, 교회혼을 하지 않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부부도 많아짐에 따라, 태국교회는 2004년 가정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이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가정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강화하는 ‘가정교회’가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 구실을 하며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태국교회는 현재 미차이 킷분추 미카엘 추기경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 현재 방콕 대교구장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크리엔삭 코비타바니즈 대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교구에 젊은 주교들이 배치되어 혈기왕성한 태국 가톨릭교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수정된 법령에서 가톨릭 재산(부동산)을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성당이나 시설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생겨 선교활동에 장애가 되고 있다. 또한 불교계의 끈질긴 불교 국교화 로비가 향후 태국 가톨릭교회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태국의 가톨릭 한인공동체

최초의 태국 내 가톨릭 한인공동체는 1977년 방콕 루암루디에 위치한 성 리디머(Holy Redeemer) 성당에서 매주 주일미사에 참석하던 한국인 여섯 가족이 3개월에 한 번씩 성 리디머 성당의 갓 바오(God Bao)신부를 초청하여, 저녁식사를 겸한 친교모임을 갖는 정도였다고 한다. 방콕은 항공기들의 허브 공항 역할을 하다 보니 다른 목적지로 가다가 들르는 사제들이 종종 있어서 잠시지만 이들의 도움을 심심치 않게 받았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사목한 경험이 있던 메리놀외방선교회 반기엘모 신부가 방콕으로 발령받아 1984년부터 매주 미사를 집전해 주면서 활기찬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또한 구 안토니오(성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 신부가 한국에서 8년간 수도회 생활을 마치고 방콕에 오게 되어 한인공동체는 한국말을 잘하는 두 명의 사제들과 함께 더욱 활기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97년에는 펫부리 로드에 위치한 돈보스코 기술학교 안에 있는 성당으로 이전하여 한국어 미사를 반기엘모 신부가 집전하면서 한인공동체는 이제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기엘모 신부는 자신의 소임을 하며 한인공동체를 동시에 맡아 지도하기에는 너무 벅차 이제 한국 신부를 초청해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사제를 파견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당시 주교회의 산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이던 군종교구의 정명조 주교가 부산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여 1998년부터 사제를 파견하였으며, 현재 다섯 번째 사제가 한인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태국 가톨릭교회와 교류가 전무하던 한인공동체는 2003년 방콕 세나투스 직속의 레지오 마리애를 창단한 뒤 많은 교류가 시작되어 태국 가톨릭교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성가대 등 많은 단체들이 초대받고 있으며, 여러 차례 수해를 겪은 태국 가톨릭교회에 도움을 주었고 독립적인 성당 건립에 많은 지원을 약속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 신용규 아타나시오 - 태국 방콕 한인성당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신용규 아타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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