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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 가깝고도 가까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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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214

[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 일본]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 가깝고도 가까운 교회


“신부님, 카라 아세요?” “몰라요.” “소녀시대는요?” “몰라요.” “아니, 그것도 모르세요. 그러고도 한국 사람이세요?” “그래도 강남스타일은 알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며 이곳 일본에서 산 지 어느새 19년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한류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는 보수세력이나 우익세력, 식민지 시대의 굴욕이 지금도 남아, 단지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묘한 수모를 겪으며 지내온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변에 있는 유적지들을 방문하면서,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전해준 많은 유산에 자긍심을 느끼며 그 설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또한 양심적인 정치인들과 지성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의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영향이 각 분야에 미친다면 한일관계는 더욱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교회는 ‘순교자의 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가들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1862년 시성된 ‘26 순교성인’과 1987년에 시성된 ‘성 토마스 니시와 15 순교성인’, 1867년과 2008년 시복된 ‘일본 205 순교복자’, ‘베드로 기베와 187 순교복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259년의 박해시대를 버틴 ‘순교자의 교회’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와 그의 동료들이 가고시마에 상륙한 것으로 시작된 일본교회는, 서양의 문물을 이용하여 전국통일을 꿈꾼 당시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보호 아래 점진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혼노지의 난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쓰러지며 극변하게 됩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정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수하에는 많은 ‘키리스탄 다이묘(그리스도교 신자 영주)’가 있어 비교적 선교활동도 순조롭게 되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587년 규슈를 평정한 그가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선포하고 일본은 신의 나라이므로 키리스탄 선교를 금지한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교사 추방령은 그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에도(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이어가며 1614년 키리스탄 금교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숨어 지내면서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베풀며 위로하고 격려하였으며, 교우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를 보호하고자 번갈아가면서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막부의 혹독한 감시 아래에서도 키리스탄들은 잠복조직 제도를 만들고, 초카타라 부르는 전체 조직의 총지도자가 기도와 교리를 전승하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1년간의 교회 전례력을 소지하여 신앙생활을 지도합니다. 이후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폐지할 때까지 259년이라는 혹독한 박해(순교)시대를 버티며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일본교회에서 배운다

이렇게 혹독한 박해를 견디며 굳건히 신앙을 지켜온 일본교회이지만 그 역사에 비해서 현재의 교세가 놀랄 만큼 약한 것은 너무나 아쉬운 점입니다. 아마도 에도 막부 이래의 금교정책과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까지 일본 정부가 취한 반그리스도교 정책이 지금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며, 일본인들의 독특한 종교적인 심성과 전통을 버리는 것을 극히 어려워하는 기질 탓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250여 년의 박해시대를 지내며 카쿠레 키리스탄(잠복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신앙의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해도 본래의 가톨릭의 가르침이 상당히 변용되어 버린 것, 재선교 이후 외국인 선교사가 일본의 문화나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이른바 번역 문화의 하나로서 그리스도교를 알리기에 급급하여 토착화에 실패한 것, 재정적으로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 등이 그리스도교가 외국의 종교라는 이미지를 불식할 수 없었고, 정착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400년 전 40만을 넘는 신자수를 보유하던 일본교회가 오늘날에도 44만 5천 명(16개 교구에 797개 본당, 사제 1,475명, 수도자 5,766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수가 증가하기는커녕 정체 또는 감소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자들로 가득 찬 미사전례,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주일학교나 구역모임 같은 교회활동은 너무나 미약한 실정입니다. 특히 지방에 있는 본당을 가보면 주일에도 10여 명이 참석하는 미사를 흔히 볼 수 있고, 1년 내내 영세자가 10명도 안 되는 본당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일본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면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을 비롯한 그리스도교계의 미션스쿨(854개)이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부모들은 신자 비신자의 구별 없이 자녀들이 그리스도교계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희망하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진 신자 문인들의 작품 활동이나 지성인들의 영향, 이에 따라 언젠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결혼식이 전통혼례(신도 법식)를 넘어 50% 이상이라는 점도, 그리스도교가 사회 안에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또한 일본교회는 내적인 면에서 비교적 충실하다고 봅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성당에서 홀로 청소하고 빨래하며 전례를 준비하고, 성실하고 겸손하게 사목활동을 하는 사제들, 한 사람의 예비신자를 놓고 진지하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들입니다.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치밀한 교회의 조직적인 운영, 계획적이며 합리적인 행사 진행 또한 언젠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2년 전 발생한 쓰나미와 원전 피해로 고생하는 동북지방의 자원봉사에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여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 외국인 노동자들을 포함한 이주자들을 위해서 각 나라 언어로 미사를 집전하며, 그들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 등은 참으로 놀랄 만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해는 일본의 ‘26 순교성인’이 시성된 지 150주년, 요코하마에 천주당이 건립되어 복음선교가 재개된 지 150주년을 맞이한 해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황님은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 옛날 “큰 소리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날이 꼭 온다.”고 믿으며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오늘을 맞이한 일본교회가, 이러한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재확인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여, 더 많은 일본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며, 더 일본다운 교회로 도약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정유철 베네딕토 - 일본 나고야 교구 소속 신부. 일본 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하고 2004년부터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있는 성심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정유철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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