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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13: 전쟁이 남긴 상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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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19 ㅣ No.1181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3) 전쟁이 남긴 상처들


적대감으로 분열된 민족… 반공 외쳤던 가톨릭 신자들

 

 

-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 대표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눈물을 머금고 남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해 3월,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은 굳어지고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이 무렵 휴전 논의가 시작되고 2년여의 세월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에 들어간다.

 

 

전쟁 피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남북 모두 성과가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휴전을 반기는 이는 없었다. 교회의 입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강공책을 써야 한다. 빨리 중공을 쳐부수고 압록강을 지켜야 한다.… 우리에게는 통일이 가까이 왔다.”(「천주교회보」 1951.6) 하지만 언젠가는 끝내야 할 전쟁이었다.

 

전쟁의 광기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과 폐허만 남았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유엔군과 남한은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해 약 150만 명이, 공산 진영은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해 약 25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할 따름이다.(「한국 전쟁 피해 통계집」) 당시 남북한 인구가 3000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인적 피해다.

 

- 1895년 비에모 신부가 건립한 되재성당은 한국전쟁으로 전소, 2009년 복원됐다.

 

 

교회의 피해도 심각했다. 남북한에서 150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공산군에 의해 희생됐다. 특히, 북한 가톨릭교회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북한 공산당은 교회 재산 약탈과 성직자 학살을 이어갔고, 살아남은 성직자들도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대부분 처형됐다. 1945년 당시 주교 3명, 사제 80여 명, 수도자 180여 명, 신자 5만 7000여 명이었던 북한 가톨릭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됐다.

 

남한 지역 교회의 피해는 전선을 축으로 한 격전지 인근 지대가 가장 심했다. 경상도에 있는 31개 본당 중 21개 본당 관할 지역이 공산군에게 점령당했고, 군인들의 교전으로 11개 성당이 소실됐다. 전주지목구의 경우 수류성당과 고산본당 석장리공소, 되재성당과 순창본당 오룡촌공소가 전소했다. 38선 이남 지역에서만 34개의 교회 건물이 전소 또는 파괴됐다.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회고록에서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 주교가 나타나서 벽돌만 서 있는 성당 건물을 돌아볼 때면 더러 남아 있던 교우들이 달려와서 주교님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허다했다. 알고 보면 이번 전쟁으로 모두가 크건 작건 간에 피해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분열과 증오로 적이 된 형제들

 

전쟁으로 인한 유형의 피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심성이 황폐화한 것이다. 무수한 인명이 학살되고, 납치되고, 전장에서 쓰러져 갔다. 전국 곳곳에 전쟁 유가족들과 거리를 헤매고 있는 고아들과 장애인이 된 상이군경들이 우글거렸다.

 

절망에 빠진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그들은 “전지전능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 어찌하여 이런 비극을 미리 막아 주지 않았는가” 하며 원성을 쏟아냈다. 반면, 무서운 전쟁을 겪고 새롭게 신앙의 눈을 뜨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는 전쟁터에서 재물, 명예, 쾌락, 부귀영화들은 모두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사진은 1953년 6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휴전 반대 시위. 출처=국가기록원.

 

“인간들의 생명이 그토록 어처구니없이 끝나는 것을 보니 잘 살고 오래 살려는 욕망은 모두 뜬구름 같은 것, 삶과 죽음은 오로지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뜻에 달린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나를 벗어나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를 찾아오는 발걸음들이 부쩍 늘어났던 것이다.”(「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중)

 

무엇보다 전쟁으로 남북한의 동족 의식이 사라진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빈자리에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가 쌓여갔다. 분단 이데올로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거치며 남측 주민들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됐고 북한 주민은 동족이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을 교회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바라보던 교회에도 강력한 반공 의식이 자라났다. 1953년 6월 21일 부산 시내 신자들이 멸공통일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때 장면(요한 세례자) 총리는 “가톨릭 신자들은 원수인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 공산주의 뿌리가 이 나라에서,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에서 근절되도록 열심히 천주께 빌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신론 세력이 물리적으로 소멸할 때까지 용서와 화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공산군의 조건 없는 회개만이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교회의 이러한 행보는 휴전 30여 년이 지나서야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북한 선교에 관심을 두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북한선교위원회가 설치되며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된다.

 

 

가족을 죽인 원수지만… 적군 향한 ‘연민’ 노래한 구상 시인

 

누군가는 원수를 척결의 대상으로, 누군가는 그 원수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구상(요한 세례자, 1919∼2004, 사진)시인도 한국전쟁으로 사제인 형과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고향인 원산에서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반인민적 반동시’를 쓴다는 이유로 공산당에게 반동분자로 찍혀 남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배교를 강요한 공산군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형 구대준 신부는 총살당하고 어머니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휴전 이후 시인은 명절만 되면 북녘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을 쳤다.

 

“어머니/ 신부 형이 공산당에 납치된 뒤는/ 대녀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한가위, 제2연)

 

가족을 살해한 공산군이 뼈에 사무치게 미울 법도 했지만, 시인은 공산군들이 묻힌 경기도 파주 적군 묘지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미움을 삭이고 연민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일지 모른다.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초토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끝 부분)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19일, 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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