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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부활 시기에 바친 생명, 김윤덕 복녀의 자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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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14 ㅣ No.1179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부활 시기에 바친 생명, 김윤덕 복녀의 자존 의식

 

 

박해 시대 신자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은 큰 축일이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해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이중배, 원경도 등 천주교인들이 정종호의 집에서 개를 잡고 술을 장만하여 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외우고 기도문을 노래하며 축하하다가 함께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지도자도 없이 산속으로 숨어든 신자들에게도 이날은 기쁜 날이었다. 1815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청송 노래산 교우촌의 교우들이 모여 힘차게 경문을 합송할 때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대축일이면 신자들이 모인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정보였다. 이처럼 주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천상길 가운데 하나였다.

 

 

무지몽매함에도 자존을 깨닫고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765?-1815)는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풍 지역의 안배에 사는 김 씨와 혼인하여 자녀를 낳은 뒤부터는 ‘순득이 엄마’로 불렸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고서 청송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리)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그러다가 1815년 2월 22일경,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끌려갔다.

 

김윤덕은 경주를 거쳐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으로 이송될 때까지 무엇 때문에 죽으려 드는지 여러 번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 하더라도, 조물주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답했다. 아는 것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그것도 산골 아낙네가 이처럼 원님에게 말대꾸한다는 것은 조선 신분 사회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충격적인 일이었다.

 

경상감사 이존수는 김윤덕을 비롯하여 청송, 영양, 진보에서 체포되어 경주진영과 안동진영을 거쳐 ‘골수’로 분류되어 감영으로 넘어온 이들을 신문하고 난 뒤 조정에 보고하기를 ‘비록 십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가운데 불과 몇 구절만을 외우는,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라고 하면서도 ‘이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 없는, 깊이 미혹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 시대 여성은 살림살이를 배우고, 자기 이름 쓰는 것과 친인척 족보, 왕의 이름 정도 알면 되었다. 어디에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런데 김윤덕은 자신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여느 사람과 똑같이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몸소 겪은 신앙생활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자존감이었다.

 

지위의 고하, 성별, 학식을 불문하고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이 깨달음은 인간 존중, 평등 의식으로 향하게 된다. 실제로 15년 뒤 기해박해로 체포된 김효임과 김효주 두 자매는 신문받는 동안 옷이 벗겨진 채 며칠간 남자 죄수들만 있는 옥방에 던져지기도 했다. 이후 자매는 관장에게 이 사실을 따져 물으며, 자신들이 비록 재판받는 죄수이지만 여성 죄수에 대한 예의범절을 지켜달라고 요구했고, 이는 시정되었다.

 

자존에 대한 깨달음은 넘치는 기쁨이었고 향후 수행하는 일의 에너지원이 되었다. 일찍이 정약종은 일반 농가의 딸이 임금과 결혼하면 임금이 일반 농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딸이 왕비가 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과 합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처럼 낮아지시는 게 아니고 사람이 천주와 같이 높아진다고 설파했다.

 

김윤덕과 같이 천주와 함께하는 고고한 세계를 접한 사람은 모진 고문이나 대가가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박해로 100년 세월을 점철하는 중에도 신자 수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한국 순교자들이 지칠 줄 모르고 신앙을 고백한 이유이다.

 

 

배교하고 나가다 김종한을 만난 김윤덕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주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더라도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증거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김윤덕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경주, 안동 두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 71명 가운데 신문 과정에서 죽거나 배교한 이를 빼고 33명이 이곳 감영으로 넘어왔는데, 그는 그들 가운데서도 장한 증거자였다.

 

경주진영에 있을 때 박춘성, 박 마오로, 김사일 등 자신의 조카와 친인척들이 옥사하는 것을 보면서도 신앙을 지킨 김윤덕이었지만, 감영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배교하고 감영 문을 나가려던 차에 마침 안동진영에서 이송되어 오던 김종한과 마주쳤다.

 

김종한은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로, 안동 우련 밭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체포되었다. 김종한은 모진 고문으로 상처 난 몸을 끌고 들어오면서 같은 동네 사람이 아닌데도 천주교 동지로서 김윤덕에게 몇 마디 건넸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지금 여기서 나가면 얼마나 더 살 것 같습니까?”라고 격려한 것이다.

 

이에 김윤덕은 그 짧은 대화에 힘입어 다시 감영으로 들어갔다. 은총이 어린 도움이었다. 포졸들은 그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전력을 다해 막았으나 소용없었고, 김윤덕은 마침내 관장 앞에 가서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라고 소리칠 수 있었다.

 

관장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 내쫓으려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관장은 끝내 화가 나서 김윤덕에게 매질을 가하도록 했다. 속은 것이 분하기도 하고 또 이미 그의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에 그걸 다시 끌어낼 의도였다. 심한 매질에 의식을 잃은 김윤덕은 옥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1815년 그의 나이 50세가량이었다. 부활 시기에 잡힌 김윤덕은 성령 강림 대축일 무렵에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주님께서 보상을 준비하시고

 

교회 재건기 신자들은 교회의 기둥뿌리를 붙들고 애쓰며 자기 존중과 소명 의식으로 거듭났고, 교회는 점점 조직화되어 갔다. 이제 조선 사회 골목에서도 박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신자들의 모범적 행동을 보면서 차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신자들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신자들을 동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천주교 관련 예규며 교리 등이 나라 곳곳에 알려졌다.

 

이때 유럽에서는 미사성제도 없이 애쓰는 조선 신자들에게 커다란 은총이 준비되고 있었다. 현재 김효임, 김효주는 103위 순교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이중배, 원경도, 김윤덕, 김종한은 124위와 함께 시복되었으며, 정종호는 하느님의 종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4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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