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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숭공학교와 명동성당 강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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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13 ㅣ No.1178

[이땅에 빛을] 숭공학교와 명동성당 강론대

 

 

조선 제일의 성당에 걸 맞는 강론대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한국교회사의 심장이다. 명동성당에 설치되었던 강론대에는 프랑스, 일본, 독일인과 그리고 한국인과 가톨릭 정신이 섞여 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와 독일 선교사, 일본 침략자는 모두 각각 한국 국민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세 나라는 직접 조우한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1914.7.-1918.11)에 휩쓸려 들어갔다. 일본이 중국 내 독일 식민지와 중국에서의 우월권을 도모하며 연합국에 참여하자 한국 땅에 있는 프랑스는 갑자기 일본의 아군이 되고 독일은 적성국이 되었다. 1915년 상황은 굉장히 엄중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독일 수사들은 각각 전쟁에 징집되어 서로 싸우는 편이 되었다. 이때 징집된 선교사들 중에는 전사자도 있고, 또 일본의 포로가 된 독일 수사들도 있었다.

 

여기에 변수는 프랑스와 독일을 묶어 놓은 가톨릭이라는 공동체 정신이었다. 이 측면에서 압박자는 일본으로서 더하고 덜함은 있었으나 프랑스, 독일 모두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다. 여기서 한국은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능동적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묘한 환경 속에서 가톨릭 정신의 승리를 보이는 걸작이 태어났다. 1915년에 제작된, 당대 한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명동성당에 걸 맞는 강론대이다.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숭공학교에서 10년 생 느티나무를 가지고 꼬박 2년에 걸쳐 만든 선물이다.

 

그 강론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해체되어 자리를 이동했다. 1977년 원래 오른쪽 남자석의 세 번째 기둥 위, 나선형 오름 계단에 부착되었던 닫집(천개)은 현재 주교좌 상부에 걸렸다. 해체된 강대 부분은 독서대와 목조제단으로 조립되어 백동 수도원 자리에 세워진 혜화동 성당으로 옮겨졌다. 나선형 오름 계단 일부는 현재 왜관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 강론대에는 독일인, 한국인, 프랑스인의 우애와 기술이 녹아있다. 정복, 전쟁 등으로도 서로 갈라지지 않는 가톨릭 우정을 거룩한 예술품, 그 속에 스민 역사까지 아는 사람들은 목제 수공품에서 체온을 느낀다.

 

 

명동성당과 베네딕도 성당

 

1915년 3월 11일 아침 뮈텔 주교는 대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가 새로 생긴 강론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참으로 뛰어난 목공 작품이었다. 완벽했다. 한 달 뒤, 하르트만 수사와 호이스 수사, 학생 6명이 천개를 부착하고 강론대를 완성했다. 명동성당 주임 푸와넬(Poisnel, 1855-1925, 朴道行) 신부의 고향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성당 강론대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 선물을 받고 수도원을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푸와넬 신부 환갑 선물로 중앙제대 가까운 곳에 놓을 주례석을 하나 주문했다.

 

뮈텔 주교의 초청을 받고 서울에 도착한 사우어(Sauer, 1877-1950, 辛上院) 신부는 1909년 2월 28일 첫 주일을 맞았다. 사우어 신부는 주교좌 성당에서 주임 신부가 남신도편과 여신도편 한가운데 통로에 서서 강론을 하고, 신자들은 마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경청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강론대가 없었다. 강론대는 성당을 축성한 후 17년 뒤 베네딕도회 목공소에서 만들어졌다. 명동성당과 베네딕도회의 인연은 이뿐 아니라, 이 강론대에 훨씬 앞서 성당을 지을 때 베네딕도 성인께 기구를 청한 일도 있었다. 미래를 위한 도로내기였다고 할까?

 

종현(鍾峴)은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자리한 명례방이 있는 언덕이다. 당시에는 전 이조판서 윤정현의 집이 있었다. 블랑(Blanc, 1844-1890, 白圭三) 주교는 1882년부터 이 집을 시작으로 김 가밀로를 내세워 성당 터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푸와넬 신부가 맡아 한불수호조약(1886년) 이후 필요 대지 구입을 끝냈고, 1888년부터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조선 조정이 도성 안에 성당이 우뚝 솟아오를 걸 알고 이를 저지하려고 토지소유권을 억류했다. 이 당이 임금들의 화상(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의 주맥이므로 영희전을 내려다보는 곳에 건물을 세울 수 없다는 풍수지리적 이유였다. 또 선교사들이 산 땅은 국유지여서 개인과 체결한 계약서는 무효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환지(換地)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싸움이 계속되자, 1889년 블랑 주교는 베네딕도 성인께 특별한 가호를 청원하며, 일이 잘 처리되면 대성당에 성인의 석상과 제대를 설치하겠다고 서원했다.

 

다음날, 러시아 영사, 프랑스 영사, 푸와넬 주임 신부, 블랑 주교가 법무대신과 관료들과 함께 관련 서류를 검토하게 되었다. 여기서 푸와넬 신부는 조정에서 최근에 새로 써넣은 글씨를 발견해 냈다. 결국, 1890년 1월 설날(1월 21일)을 전후한 무렵에 토지문권이 교회에 반환되었다. 블랑 주교는 선종 직전에 이 문서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현재 명동성당 안 오른편 소제대 위에는 베네딕도 성인상이 모셔져 있다.

 

1892년 명동성당 신축공사 기공식이 열렸다. 뮈텔 주교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한 성당의 머릿돌을 축성하여 놓았다. 이 건물의 머릿돌을 놓을 때 주교는 당시까지 조선에서 활동했던 모든 주교와 선교사, 조선교회를 도운 은인들의 명단, 그리고 성당 건축에 자원봉사나 애긍으로 참여한 1천여 명의 조선인 신도들의 명단을 밀봉하여 함께 묻었다.

 

건축을 시작하자 신자들이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누구나 이 건축공사를 조선 조정이 천주교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증거로 보았다. 서울과 근방의 모든 건강한 남자 교우들은 섣달, 정월의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추위에 언 손을 신앙의 자부심으로 녹이며 참아냈다. 직접 일할 수 없는 이들은 자기 대신 일할 일꾼들을 사서 보냈다. 전국 팔도에서 교우들이 보낸 성금이 답지했다.

 

벽돌, 석재, 양회, 장목재 등 자재도 없을뿐더러, 양옥을 짓는 미장이나 목수도 없는 상황에서 건축공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자재 수급난과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공사가 여러 번 중단되고 설계가 변경되었다. 1893년 재정난, 1894년 청일전쟁(중국인 기술자 귀국), 그리고 반복되는 붕괴사고가 공사를 지연시켰다. 이런 와중에도 설계자이며 공사 감독인 코스트(Coste, 1842-1896, 高宜善) 신부는 벽돌을 스물아홉 종류나 제조하여 사용할 정도로 꼼꼼히 공사를 진척시켰다. 그러다가 1896년 외부공사 마무리 단계에서 코스트 신부가 선종했고, 당시 주임신부인 푸와넬 신부가 이어받아 공사를 마무리 했다. 착공한 지 12년만이었다.

 

명동성당은 길이 65m, 폭 20m, 높이 약 20m, 첨탑 39m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다. 뮈텔 주교는 지방 순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다시는 길을 잃을 위험이 없어졌다고 했다. 서울 도성에서 고딕식 성당의 종탑은 누구나에게 확실한 안내자가 되었다. 명동성당은 아직은 종교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시기에 불굴의 신앙과 인내의 승리를 앞당겨 보여주었다. 1898년 5월 29일에 거행된 축성식에는 영의정과 여러 대신들, 각국 공사를 비롯하여 3천 명이 넘게 참석했다. 대지 문제로 까다로운 언쟁을 벌였던 외부대신도 참석했다. 특히 천주교 박해의 장본인이던 흥선 대원군은 이 건물이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흥선 대원군은 축성식 직전에 세상을 떴다(1898년 2월 22일).

 

성당 내부에는 남녀용 두벌의 14처만 있었을 뿐 아무런 기물이 없었다. 세례반, 강론대, 성수반, 파이프 오르간을 마련해야 했다. 자금난으로 종탑에 종도 달지 못해 오랫동안 빈 종탑을 보아야 했는데, 이 사정을 알게 된 선교사들이 용돈을 갹출하고, 프랑스 대리공사 플랑시(de Plancy, 葛林德)와 비서관 부인 르페브르(Lefevre)의 기부금을 얻어 주교 몰래 종을 마련했다. 1898년 봄, 주교는 뜻밖에 도착한 종을 ‘사랑의 징표’로 마주했다. 이렇게 성당은 채워져 나갔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 숭공학교

 

강론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세운 숭공학교의 몫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는 한국에 진출 직후인 1910년, 초대한 사람조차 예상치 않았던 실업학교를 열었다. 독일식 도제제도를 적용한 실습 위주의 이 학교는 ‘기도하고(崇), 일하라(工)’는 의미로 숭공학교라 이름지었다. 이는 베네딕도회가 세운 두 학교, 즉 숭공학교(崇工學校)와 숭신학교(崇信學校)를 놓고 보면, 일하는 학교와 기도하는 학교로 짝을 이루기도 한다.

 

베네딕도회의 실업교육은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신식 물품들을 조달해 내는 주역들을 길러냈다. 숭공학교는 일제강점으로 또 다른 위기에 처한 가톨릭 교회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튼실한 신자를 양성해 내려 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방인사제 양성이 목표이기 때문에 교구가 형성되어 원활히 돌아가면서 그들의 소명은 그 안에 녹아들었다. 이 선교자들의 도전 정신이 용해된 넓은 그릇에 베네딕도회는 숭공학교를 시작으로 가톨릭 문화, 학술, 예술로 채워갔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0년 봄(Vol. 49),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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