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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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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07 ㅣ No.210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상) 그는 왜 보수적 신학자가 되었나

무신론ㆍ세속주의에 맞서 가톨릭 진리 수호



- '천재적 신학자'로 불리는 교황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으로 가톨릭 교의와 정통성을 수호했다.


이달 말로 제265대 교황직에서 사임하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한마디로 평하면 '진리의 수호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범람하는 세기말적 사상과 교설(巧說)에 맞서 가톨릭 정통성을 수호했다. 교황 재임 8년 동안에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풍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지난했던 그의 영적 투쟁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그가 지금까지 헤쳐온 풍랑은 동시대 그리스도인들과 후임 교황에게 여전히 계속되는 도전이 될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언젠가 "교황으로 선출(2005년)됐을 때 기요틴 도끼날이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요틴(guillotine)은 프랑스혁명 당시 등장한 사형기구 단두대이다.

교황직의 중압감을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도끼날'에 비유할 만도 했다. 그는 콘클라베가 열리기 며칠 전 78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만 해도 설레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은퇴계획을 늘어놓았다. 은퇴 나이도 한참 지난 터였다. 그런 마당에 12억 가톨릭교회 수장(首長)이라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도끼날은 아니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의 평전을 쓴 미국 가톨릭 내셔널지의 바티칸 통신원 존 알렌은 "그를 만날 때마다 수줍음과 넘치는 기지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교황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교황이) 끊임없이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고 마치 스타처럼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하고 기자에게 반문한 적이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만 봐도 그는 군중 앞에서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하는 스타형이라기보다는 책에 파묻혀 진지한 눈빛으로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풍이다. 실제 그는 교황 피선 직후 다른 건 몰라도 수 십 년 손때 묻은 책과 책장으로 가득한 연구실(서재)만은 통째로 교황청으로 옮겼다.


광신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충격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다. 그가 교황에 선출됐을 때 유럽 언론들이 '철갑 추기경' '신의 로트와일러(독일산 맹견)' 같은 우스꽝스런 별명을 붙여 그를 소개했을 정도다. 1981년부터 24년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톨릭 교의와 전통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에 한 치 양보 없이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와 싸웠다면, 그는 세속주의 및 도덕적 상대주의와 성전(聖戰)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무기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보수적 시각을 견지한 것은 아니다. 본, 뮌스터, 튀빙겐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그는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로 통했다. 교의신학과 기초신학을 가르치는 강의실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솔직성과 관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바티칸 책임자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칼 라너와 함께 공의회에 쇄신의 바람을 불어넣은 핵심적 인물이다. 당시 독어권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의 신학 자문역으로 공의회에 참석한 그는 회의장 분위기가 현실에 안주 내지는 과거 회귀 쪽으로 기울자 교리ㆍ교의ㆍ전례 분야에서 번뜩이는 논리로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그를 '공의회 파괴자'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신학자들은 문서 초안을 작성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주교들 토론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는 회기 내내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신학사상과 교회문제에 대한 시각은 급격히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 유럽 대학가를 휩쓴 네오 마르크시즘 열풍과 공의회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급진적 주장 때문이다. 그는 교편을 잡고 있던 튀빙겐대학 신학과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신약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따위의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던 시절이다. 그는 그 혼돈 속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사회와 교회에 파고드는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목격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내적으로도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열광한 나머지 전체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 르콩트는 저서 「마지막 유럽 교황, 베네딕토 16세」에서 "분명히 그는 미화된 중세적 과거에 집착하는 '시대에 뒤진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공의회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아쉬워하는 '순진한 근대주의자들'과도 거리를 두는 데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진리의 수호' 측면에서 봐야 그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성장 환경과 신학사상의 텃밭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이다. 지리적으로 유럽 중앙에 위치한 바이에른은 16세기 종교개혁 바람이 대륙을 뒤흔들 때 그 바람을 막아낸 유일한 게르만 지방이다. 바이에른은 가톨릭 전통과 색채가 매우 강한데다 주민들 성향도 독립적이다. 그런 지방에서 태어나 공부하고 성소를 결정했기에 가톨릭 진리 수호에 대한 집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다"

더구나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로 칭송받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신학 노선을 따랐다. 그는 1996년 "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다. 만일 무인도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성경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두 권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우구스티노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가는 대스승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그의 영적 투쟁은 로마-그리스의 이교도 문화와 싸워가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사유를 철학적 틀 속에 정립한 아우구스티노의 그것과 닮았다.

그는 1981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돼 바티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가톨릭교회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급진적 주장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우고, 교황 무류성에 대한 의혹과 맞서 싸운 게 대표적 예다. [평화신문, 2013년 2월 24일, 김원철 기자]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중)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작은 배'

세상 풍파 온몸으로 이겨낸 우리의 목자



- 한 남성이 2월 24일 성 베드로광장에서 "존경하는 교황님, 우리는 당신이 보고싶을 겁니다"라고 쓴 이탈리아어 손팻말을 들고 교황이 마지막으로 주재하는 삼종기도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CNS]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교의(敎義)의 풍파를 경험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가 난무하고 얼마나 많은 사상이 유행했습니까? 그리스도교 사상이라는 작은 배는 몇 번이고 풍랑에 요동치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표류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 심지어 무종교주의로 내던져졌으며, 집단주의에서 급진적 개인주의로, 무신론에서 모호한 종교적 신비주의로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참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척도가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유행이나 첨단 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2005년 4월 18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추기경단 수석이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 선출기원 장엄미사 강론에서 이같이 말하고 "교회는 이설과 사상의 격랑에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미사 후 교황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 115명과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회의) 장소인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튿날 제265대 교황이 되어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 정통성 흔드는 격랑에 맞서

이날 강론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생애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 단서다. 그가 1981년 신앙교리성에 들어가서부터 줄곧 몰두한 일은 '작은 배'(그리스도교 사상)가 격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8년 남짓 베드로의 후계자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다.

신학적 오류와 싸우고, 교설(巧說)을 배격하는 동안 적지 않은 비난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교회는 그분(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신학자들의 실험장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계승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가 언급한 '교의의 풍파' 가운데 가장 거센 풍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이었을 것이다. 해방신학은 남미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과 민중의 고난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세우려는 변혁적 신학사상이다. 1970, 80년대에 남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공의회 정신을 강조하면서 사회변혁의 열정을 분출했다.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가 전면에 서고, 적지 않은 진보 성향의 주교들이 지지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복음이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며 훈령을 통해 거듭 경고했다. 특히 라칭거 추기경은 일부 사제들이 반정부군에 합류하거나 교도권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마르크스 혁명의 시초라고 판단했다. 보프 신부와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 진영과 반(反)해방신학 진영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경고와 반론제기, 심문과 대화, 제재와 반발이 20년 넘게 이어졌다.

해방신학은 1980년대 말 동구 공산권 붕괴 이후 대중성을 상실했지만, 그 신학적 영감과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그는 숱한 비난을 무릅쓰고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운 데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저희는 해방신학 문제를 다루면서 주교님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국적으로 종교를 정치화하는 위험이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종교를 정치적 당파성의 세계로 내몰아가고, 고유한 종교성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이었습니다."(대담집 「이 땅의 소금」 118쪽)

그는 또 "(신앙교리성에 들어올 때) 로마 직무 가운데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은 상당 부분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 사제서품, 사제 독신제, 동성애, 낙태 등과 관련해 쏟아지는 급진적 주장에 맞서는 것도 그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이었다. 그리스도교 정통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는 신학적 오류에 대항하는 동안 그는 서구사회에서 도스토옙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중세시대 이단 심문관 이미지가 굳어져 갔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과 행동이 여과 없이 교회로 유입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관련자들과 대화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제재와 경고, 파문으로 대응했으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여성 사제서품 문제만 하더라도 교황청은 「논 포수무스(Non Possumus) 등 교령과 사목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불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서구교회 일각에서 "우리는 교회법을 어겼지만 수품은 유효하다"며 서품을 강행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여성 사제서품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님이 교회의 틀을 열두 사도로 하셨고, 그 후계자로는 주교와 원로, 즉 사제가 있다. 교회의 이 틀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에 따르는 것이 순명이며 오늘날 상황에서는 매우 힘든 순명의 행위이다"(대담집 「세상의 빛」 230쪽)라고 말했다.


"공의회 정신을 철저히 해석하라"

교황직 수행에 따르는 피로감은 일반 사람이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교회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 진보인 양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교황직 수행은 과거에 비해 몇 배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교황은 2009년 아프리카 사목방문 중에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만이 에이즈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분명한 길"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언론은 거두절미하고 '콘돔사용 금지'만을 부각시켜 바티칸의 에이즈 정책이 비현실적이라고 혹평했다. 교황은 나중에 "그때 정말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아프리카에서 가톨릭교회야말로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에이즈 예방과 교육활동을 하고, 도와주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기관이다. 나는 '그저 콘돔만 나눠주는 것은 성을 통속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근본적 해결은 오직 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여론의 독재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신앙과 세속주의가 충돌할 경우 '천재적 신학자' 특유의 논리를 전개하며 밀고 나간다. '철갑 추기경'이란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또한 정제되지 않은 진보적 목소리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철저히 해석하고 나면 보수ㆍ진보 양방향의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 정신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앙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3일, 김원철 기자]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하) 그는 세속주의와 싸웠다

'이성의 오만'에 맞서 새로운 복음화에 매진



- 2월 28일 교황직에 서 물러나기 직전 카스텔 간돌포에 도착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환영객들에게 인사한 후 돌아서고 있다. [CNS]


몇 년 전 국내에서도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현대사회의 무신론자들 책이 한바탕 바람을 일으켰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공격적 무신론을 요약하면, 인간 이성으로 신을 설명하지 못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 망상에서 창조된 것이고, 인류 분열의 근원이기에 빨리 버려야 새로운 시대의 지식인이라도 되는 양 논리를 전개한다.

독실한 신앙인에게 이들 주장은 하느님에게서 고삐 풀린 '이성의 오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주장에 열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하느님 없이도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 배제하는 풍조 확산

이런 무신론적 태도를 부추기는 것은 세속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이다. 세속주의는 초월적인 것을 세상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하느님이 배제된 사고방식을 부추긴다. 상대주의는 절대적 복음의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다른 세속적 가치와 동일시한다. 아무것도 궁극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러한 시대 조류와 교회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전에 신에게 고대했던 것을 모두 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과학적 지성 체계는 신앙 문제를 태곳적 일이나 신화적인 것, 또는 지나가 버린 문명에나 속하는 것으로 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 적어도 그리스도교는 과거 유물로 취급된다."(대담집 「신앙의 빛」 208쪽)

1995년 독일 칼스루에(Karlsruhe)에 있는 연방헌법재판소는 "공립학교 교실에 십자가를 거는 것은 종교 자유를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려 교황청 관계자들을 경악시켰다. '칼스루에 판결'이라 불리는 이 결정은 공적 영역에서 신을 철수시킨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또 유럽연합(EU)이 유럽 기본권 헌장을 만들 때, 초안에는 회원국이 공유하는 문화적ㆍ인문적ㆍ종교적 유산을 언급했으나 프랑스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결국 정신적ㆍ도덕적 유산만 언급해야 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교회 입장에서 이런 시대적 조류는 거대한 역풍(逆風)이다. 이 때문에 교황은 서구사회의 신앙 위기 원인이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영향이라고 보고, '새로운 봄'을 재촉하는 발언을 끊임없이 해왔다.

"고유한 역사 속에 내재하는 위대한 도덕적ㆍ종교적 힘을 스스로 절단해낸다는 것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문화의 자살 행위를 뜻한다. 신성불가침의 도덕적 가치를 거부하면 유럽의 양심은 자멸한다. 유럽이 존속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새롭게 인정해야 한다."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권위 있는 정신문명 체계였다. 그러나 과학혁명과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던 하느님을 변방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과학기술문명이 종교를 대신해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사회질서의 토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한 사상가의 격한 선언이 아니라 당대 사회상의 반영이었다.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도 르콩드는 「마지막 유럽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에서 "교황은 유럽사회가 하느님 때문에 불편해지는 걸 싫어한다면, 이는 세속주의ㆍ냉소주의ㆍ소비만능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주의에 물들어 쇠약해졌다는 뜻이라고 여긴다. 그에게 상대주의는 종교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 말했다.

교황이 임기 중 '새로운 복음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한 이유도 이런 시대 상황에 따른 것이다.

"우리 시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경청과 새로운 복음화의 시대가 돼야 한다.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하느님 말씀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만민을 향한 선교를 계속하고, 세속주의 확산으로 복음에 무관심해진 나라들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준다."(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주님을 향해 새롭게 돌아서라

교황은 교회 미래를 결코 장밋빛으로 전망하지 않는다. 이미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그리스도교는 소수 종교가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교회는 가까운 미래에 더 이상 단순히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삶의 형식이라는 지위를 잃을 것이다.… 교회는 앞으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거대 사회와 관계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소수인의 교회가 될 것이다. 신앙에 따라 사는 진짜 독실한 신도들로 이뤄진,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모임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대담집 「이 땅의 소금」 197ㆍ260쪽)

교황은 인간이 하느님에 매여 있는 끈을 끊어 버리고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 침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늘 새로운 시작을 창출한다고 말한다. 또 교회의 생명력에 기대를 건다.

"교회를 단순화시키면서 동시에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여는 데 도움을 주었던 진정한 개혁자들은 언제나 성인들이셨다. 베네딕토 성인을 생각해보라. 그분은 고대 말기에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안해 교회로 하여금 엄청난 변화의 길을 가도록 하셨다."(「이 땅의 소금」 309쪽)

교황은 새로운 복음화 연장선상에서 지난해 10월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신앙의 해는 온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해 새롭게 돌아서라는 초대이다. 또한 인류를 향한 간곡한 호소이다.

"오직 주 그리스도 안에서만 미래에 대한 확신과 참되고 영원한 사랑이 보장된다. 이 신앙의 해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은 관계가 더 굳건해지기를 바란다."(신앙의 해 선포 자의교서 「믿음의 문」 15항)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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