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강론자료

연중 10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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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6-03 ㅣ No.361

연중 제 10 주일 (가해)

 

          호세아 6,3-6      로마 4,18-25       마태오 9,9-13

     2002. 6. 9.

 

주제 : 하느님의 마음, 사람의 마음

 

세상 일 가운데는 모를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을 이야기하라면 ‘사람의 마음’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고가 담긴 소리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물속의 깊이’를 표현하는 열길(2.4m*10또는 3m*10)은 ‘사람 속’을 이야기하는 한 치(3.3cm)의 700배 혹은 900배가 넘는 길이입니다.  자기 생명에 관련되고 가깝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덜 중요한 것은 그 우선순위를 바꿔가면서 간섭하고 덤비는 사람의 자세, 흔히 생각하는 기준과는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갖는 한계는 그래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신자여러분, 한 주간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자리에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자세로 오셨는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과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껏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안에 담겨있을 마음의 움직임을 알 수는 없습니다. 이론은 그렇습니다만 아주 잠깐씩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고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챈다고 말하고 행동을 짐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10 주일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맞았던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그리고 부활시기를 모두 지내고 교회의 전례는 연중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하거나 눈에 띌만한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늘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지내고 맞이하는 연중시기가 우리 신앙생활에 드러날 만한 커다란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어떤 중요성으로 대하는지 잠시 생각할 필요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열심히 수행하던 마태오라는 사람을 그 일상생활에서 차원이 다른 생활로 불러내는 예수님의 부르심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稅吏)였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세리는 결코 권장할 만한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군대의 힘을 등에 업고 점령자들을 위하여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낮춰보던 사람들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강제력을 동원하여 거둬들인 세금의 일부를 로마정부에 납부하고 나머지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던 세금장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생활에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현실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은 로마정부에 바쳐야 할 액수보다 더 많이 세금을 거둬들여서 거기에서 자기 몫을 챙기는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동족에게 늘 원망의 대상이었고 타도(打倒)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예수님이 그와 같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세관장 ‘마태오’를 제자로 선택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뜻이야 우리가 알기는 힘들겠지만 이런 행동이 반대를 부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동족들에게서 멸시를 받는 세리를 제자로 부른다는 것은 분명 예상외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는 참된 스승이 될 수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던 ‘선택 받은 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대신 제자들을 향하여 반박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우리 동족의 배반자 세리들과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을 따라다니는 너희도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소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같은 일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이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사람들의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나와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내가 움직이는 것과 다른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나와 틀린 사람’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잘못 사용하는 말과 삶의 태도가 내 인생의 폭을 좁게 만드는 것이고 나 혼자만 옳다고 하는 주장을 넘어 스스로의 삶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자세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딱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고 그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우기는 잘못을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표현은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바리사이파와 같은 모습은 내 안에도 있고 여전히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내가 현재 드러내는 행동은 다 옳은 것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호세아 예언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세상을 꽉 채운 아침안개와 이슬을 붙잡고 거기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 몇몇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아둔한 사람들 몇몇이 만들어내는 행동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결과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눈앞의 일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800년 앞서 호세아 예언자도 ‘동물을 잡아 바치고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우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선언’은 한편으로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소리입니다. 오죽이나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고 제 멋대로 행동했다면 하느님은 예언자를 시켜 사람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달라고 부탁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인정하는 올바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그 기준을 아는 일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귀중함을 아는 것은 좋은데 나만 생각하고 그것만을 주장한다면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올바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자세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행동을 하기에 앞서서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40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를 바라보는 모습은 분명합니다.  사람의 기준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2002년을 지내는 이 순간, 내가 알아들어야 할 하느님의 뜻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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