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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지식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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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4

지식과 신앙

 

 

지식이란 정신이 어떤 대상을 아는 작용 혹은 그 작용에 의하여 알려진 내용인데, 그 내용에 따라 상식과 전문 지식 그리고 지혜로 나뉜다. 먼저 상식(常識: common sense/sens commun)이란 정상적인 보통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려분별을 의미한다. 상식이란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중화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은 전문 지식과 구별된다. 전문 지식이란 원리적·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상식은 애매하고 부동적(浮動的)이며, 지식은 명석하고 확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지식과 상식 사이에 뚜렷한 금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식의 심화(深化)에 의한 지식도 있으며, 반대로 전문적인 지식으로서, 그것도 상당히 고도(高度)의 지식이 상식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식도 과거 학자들의 독창적인 연구와 고찰 결과 얻어진 것이 허다하다. 그리하여 여기서 얻어진 결과가 다시 상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기인(奇人)의 비상식적인 말이 오늘의 상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하고 괴이한 비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상식을 철학상의 원리로 주장한 것은 영국의 토머스 리드로 대표되는 스코틀랜드학파로서, 이 학파는 D.흄의 경험론적 입장을 비판하고 상식철학을 주장하여 상식을 진리·도덕·종교의 근원이라고 보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상식이든 전문 지식이든 이론적 지식은, 아무리 집적(集積)되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인생의 의미에 관해 해답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智慧: sapientia)이다. 지혜는 넓게는 사물의 도리나 인간 존재의 목적 그 자체에 관계되는 지(知)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거짓과 진실, 선과 악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기에 지혜는 모든 부분적인 지식을 통할하고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며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지식과 지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일반적인 지적 활동에서, 지식과 지혜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사상(事象), 특히 인간적 사상(事象)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는 참다운 지혜가 있을 수 없고, 또 반대로 지혜에 의하여 표시되는 구극(究極)의 목적에 대해서 수단으로서의 위치가 주어지지 않는 지식은 위험한 것이며, 참된 지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생활의 지혜'를 얻는데에는 지식이 필요조건이 되며, 윤리적으로 잘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이 독선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상식, 전문 지식, 혹은 지혜 등의 지식이 한 인간에게 강하게 수용될 때 그것은 신념이 된다. 신념이란 굳게 믿는 마음인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사상(事象)이나 명제(命題)·언설(言說) 등을 적절한 것으로서, 또는 진실한 것으로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심적(心的) 태도이다.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접촉하는 세계의 어떤 측면에 대한 감정, 지각, 인식, 평가, 동기, 행동경향 등의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자세를 <태도>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신념은 그 인지적인 요소 및 측면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세계 내 정신인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하여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지식은 학문적 연구에 따라 무한히 변하면서 진보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지식의 확실성은 항상 불완전한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충분히 검증(檢證)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하나의 가설(假說)로 인정되거나 주관적으로 완전하다고 긍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지적(知的)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심적 태도가 신념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한 신념은 다소간에 서로 관련을 가지고 전체로서의 체계를 이루나 그 구조에서는 개인차가 있어, 고도로 조직화되어 안정성 있는 신념체계의 소유자가 있는가 하면, 개개의 신념이 그다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개인에게 있어 모든 신념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중심적인 것에서부터 지엽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이다. 중심적인 것일수록 잘 변화하지 않으나 한번 변화하면 다른 신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키치에 의하면 신념에는 그 중요성 및 결합도에 따라 100%의 사회적 일치로 지지하는 근원적 신념, 개인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신념, 다소간 개인적 취미에 바탕을 두어 다른 신념과의 관련이 희박한 개별적 신념 등이 있다. 또한 신념은 객관적 사실 및 진실과의 일치에 있어 그 정도가 다양하여 때로는 객관적 현실을 과장하거나 왜곡 또는 일탈(逸脫)하는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편견(偏見: prejudice)을 들 수 있다. 편견이란 어떤 사물·현상 그리고 사실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견해에서 나오는 의견이다.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이나 사물, 또는 뜻밖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가지는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의견을 가리킨다. 보통 어느 사회나 집단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 대상, 특히 특수한 인종이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대해서 간직하는 나쁜 감정, 부정적인 평가, 적대적인 언동의 총체(總體)이다. 동시에 이는 논리적인 비판이나 구체적인 사실의 반증(反證)에 의해서도 바꾸기가 어려운 뿌리 깊은 비호의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편견에도 정도의 차가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편견은 사회 및 집단 내부에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나 다른 연장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배우고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편견이 아니다. 신앙은 그것이 전통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신앙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왜곡 혹은 일탈된 신념은 아니며 또한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취미에 바탕을 두어 다른 신념과의 관련이 희박한 개별적 신념도 아니다. 신앙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의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계시의 중계전달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앙은 일종의 특별한 전문 지식에 속하기는 하지만 전문지식과 상식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상식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상식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간다. 그래서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인이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상식에 벗어나는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행할 때 그것은 하나의 편견 혹은 자기 합리화일 경우가 많다. 신앙은 지혜와 아주 가깝다. 신앙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 지혜는 사물의 도리나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인간존재의 목적 그 자체에 관계되는 지(知)이며 다른 모든 상식이나 지식들을 통할하여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신앙은 자신의 필수 구성 조건으로 지혜를 꼭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신앙 역시 주관적으로 긍정할 뿐만 아니라 개방하고 수용하는 심적(心的) 태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신념이지만 단순히 지엽적인 신념이 아니라 근본을 이루는 중심적인 신념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중심적인 신념을 하느님을 향해 방향지우는 것이 바로 회개이며 그 결과가 신앙이다. 신앙은 지성뿐만 아니라 정의(情意)까지 기능적으로 통합하면서 실존적 상황에서 생사를 걸고 초월적 존재와 전인격적(全人格的)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신념은 합리적 경험의 범주에 그치는 사고형식을 갖는데 비해, 신앙은 지(知)·정(情)·의(意)의 경험 전체에 관련될 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까지도 관련된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격적 혹은 위격적인 신념이다. 신앙인은 인간이 되신 진리 혹은 사람이 되신 지혜를 사랑으로써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단순히 머리로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격적 혹은 위격적 진리를 가슴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상식, 지식, 지혜의 근원인 진리 자체가 이 세상에사람이 되어 오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신념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월간빛, 1999년 1월호, 박태범 라자로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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