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3일 (수)
(녹)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2-3: 제1차 니케아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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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3-13 ㅣ No.419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상)


삼위일체 교리 바로 세운 첫 번째 공의회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모습.

 

 

배경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셋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교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초기부터 이를 둘러싼 숱한 논쟁이 제기됐고, 많은 이설이 생겨났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박해를 받아온 그리스도교가 신앙 자유를 얻은 직후인 4세기 초반에도 이와 관련한 논쟁이 다시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논쟁 발화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였고 불씨를 당긴 사람은 사제 아리우스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진짜 신은 하나여야 한다는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단일성을 철저하게 고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아들 곧 성자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리우스에게 성자는 참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성자는 피조물의 으뜸이지 하느님과 똑같은 본질을 지닌 완전하고 절대적 신일 수 없습니다. 성부만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아리우스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은 그의 독창적 사상이라기보다는 이미 3세기에 동방 교회에서 널리 확산된 '그리스도 종속설' 또는 '성자 종속설'의 연장선 상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곧 성자는 성부와 똑같지 않고 성부에게 종속돼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더 극단화한 것이 아리우스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상당수 성직자와 평신도가 호응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난다는 반대 또한 만만찮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일찍부터 총대주교좌가 있던 그리스도교 5대 중심 교회 가운데 하나이자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만큼 지지자들과 반대자들간 대립과 다툼도 심각했습니다.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데르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318년 교회회의를 열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밖에서도 지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아리우스를 다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이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다시 교회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파문합니다. 323년이었습니다.

 

아리우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파문 제재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아리우스는 이집트에서뿐 아니라 다른 동방 교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 분열과 대립이 극심해졌습니다.

 

교회 내의 이런 분열이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칙서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로이 고백하고 실천할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박해로 지하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준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또한 로마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불거져 나온 교회 내 분열이 제국의 평화에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겨 이 분열을 해결하고자 나섰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스페인 코르도바 주교 호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호시우스 주교는 중재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안의 중요성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자신의 여름 왕궁이 있는 니케아로 소집하지요. 325년이었습니다. 황제는 회의 장소로 자신의 왕궁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회의에 참석하러 오는 주교들에게 제국의 역참을 이용하도록 하는 등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과정

 

니케아 공의회는 회의 내용이나 과정에 관한 공식 기록이나 문서가 없어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참석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전해지는 기록들을 토대로 하면 공의회는 5월 20일에 시작됐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수와 관련해서는 20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과 250명이 넘는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성 아타나시우스는 나중에 공의회 참석자가 318명이라고 밝힙니다. 318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종들을 가리키는 숫자(창세 14,14)로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참석 주교들은 동방(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온 주교들이 대다수였고, 서방(로마와 그 서쪽에 있는 교회들)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한 코르도바 주교 호시우스를 포함해 열 손가락에도 꼽히지 않을 정도로 소수였습니다. 로마 주교인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위 314~335)는 연로해서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사제 비투스와 빈첸시우스를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는 박해 때 고문을 받아 양손 근육이 마비된 주교도 있었고 한쪽 눈을 잃은 주교도 있었다고 합니다.

 

회의가 열렸고 황제는 명예의장으로서 개회 인사를 했습니다.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화해와 평화를 막는 장애물을 없애고 모두가 일치해서 신앙 안에서 화해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회의는 의장인 교황을 대리해서 호시우스 주교와 다른 이들이 주재했습니다.

 

참석 주교들은 아리우스 논쟁의 불씨가 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문제와 부활대축일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논제로 삼아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격론이 벌어지고 분위기가 심상찮게 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화해를 요청하는 등 적극 개입했다고 합니다. 약 한 달 간의 열띤 논쟁 끝에 마침내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데르가 이끄는 정통파 주교들이 이겼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하느님으로서 하나의 본체 또는 본질(동일 본질)을 지닌다는 내용의 니케아 신경이 채택됐습니다. 325년 6월 19일이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0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 제1차 니케아 공의회 (하)


부활대축일 날짜 통일, 교회 법규 정리

 

 

콘스탄티누스 대제.

 

 

325년 니케아에 모인 주교들이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지 않다고 주장한 아리우스파에 맞서서 채택한 신경, 니케아 신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 저희는 믿나이다 // 전능하신 아버지 /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의 외아들 / 성부의 본체에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 빛에서 나신 빛 /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 성부와 한 본체로서 /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 저희 구원을 위하여 / 하늘에서 내려 오시고 / 육신을 취하시어 / 사람이 되셨으며 / 수난하고 / 사흗날에 부활하셨음을 믿나이다 // (또한) 하늘에 올라 /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 오시리라 믿나이다 / 또한 성령을 믿나이다."

 

오늘날 교우들이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때에 강론 후 바치는 '신앙고백'과 많이 비슷하지요. 니케아에 모인 교부(敎父)들은 이 신경을 채택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여기서 교부란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을 가리킵니다.

 

"'(성자께서) 아니 계시던 때가 있었다'거나 '태어나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천주 성자께서 무에서 나셨다거나 다른 본질 또는 본체에서 생겨나셨다거나 창조되셨다고 하거나 바뀌거나 변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이 교회는 단죄한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구절은 아리우스 지지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니케아 공의회 교부들이 아리우스파 주장을 단호히 배격했을 뿐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단죄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신경이 채택됐을 때 서명을 거부한 주교는 둘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제 아리우스와 함께 교회에서 제명되고 추방됐습니다. 황제는 니케아 신경을 로마 제국의 법으로 공표합니다.

 

이제 핵심 쟁점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됐습니다.

 

 

부활대축일 날짜

 

제1차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당시 로마 주교이자 교황이었던 성 실베스테르 1세.

 

 

공의회 교부들은 이어서 부활대축일 날짜를 정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했습니다. 당시 동방에 속하는 아시아 여러 교회들은 유다인들의 과월절 전날인 니산달 14일을 부활절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로마를 중심으로 한 다른 대다수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인 과월절 다음 주일로 지냈지요. 그러다 보니 혼란이 생겼고, 논란이 이어지면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부활대축일 날짜 지정과 관련해 세 가지를 주교들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체가 통일된 부활대축일 날짜를 정하고, 구세주를 처형한 유다인의 관습을 따르지 말며, 주일에 부활대축일을 기념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논의한 결과 주교들은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 주일을 부활축일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해마다 그 날짜를 정해 통보하는 일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 맡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부활대축일 날짜가 정해지게 된 것입니다.

 

 

기타 결정 사항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어렵사리 모인 이 기회를 이용해 교회 조직과 규율 등 실질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논의했습니다. 주교들이 논의한 사항들은 교회 '법규' 또는 '규정'으로 이해되는 카논(Canon)으로 정리됐습니다. 그 법규가 전부 얼마나 되는지는 공식 문서가 없어 상당 기간 논란이 있었지만 5세기 이후로 20개 조항이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한 법규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조항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지역 교회들에서 실행돼 오던 것을 재확인하고 정리해 보편교회에 확대 적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요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제로 또는 의학적 사유로 거세한 경우가 아닌 자발적으로 거세한 남자는 성직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성직을 유지할 수도 없다(제1조) △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너무 빨리 사제직을 수여하지 않는다(제2조) △ 성직자는 어머니나 누이, 이모 등 확실한 가족이 아닌 여성과는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제3조)

 

△ 주교 선출은 지역의 모든 주교들이 서면으로 동의를 표시해야 하며, 주교 서품은 적어도 3명의 주교에 의해 거행돼야 한다(4조) △ 주교가 성직자나 평신도에게 내린 파문 제재는 법적 구속력을 지니며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역 주교들은 연간 두 차례 회의를 열어 심사한다(5조)

 

△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총대주교좌의 권위를 부여한다(6조) △ 예루살렘 주교에게 일정한 명예 권리를 인정한다(7조)

 

△ 부적격자가 받은 사제품은 무효다(9조) △ 사제품을 받은 배교자는 성직에서 배제된다(10조) △ 파문된 자라도 죽을 위험이 있을 때는 사면해 줘야 한다(13조) △ 예비신자 때 배교한 자는 다시 입교하려면 3년 참회 기간을 거쳐야 한다(14조)

 

△ 주교, 사제, 부제는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한다(15조) △ 모든 성직자는 자기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며 주교들은 다른 교구에 속한 성직자를 자기 교구 성직자로 서품하지 못한다(16조) △ 성직자들은 이자를 쳐서 받아서는 안 된다(17조) △ 주일과 부활시기에는 기도할 때에 서서 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의결한 후 주교들은 마침 재위 20주년에 즈음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축하연에 참석하고 선물을 한 아름씩 안고 돌아갔습니다. 회의는 8월 25일에 끝났습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의 신적 본성을 놓고 다투던 싸움은 일단락됐습니다. 그뿐 아니라 보편 교회 차원에서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던 법규들도 정비됐습니다. 성직자들 자격 및 품위에 관한 사안, 배교자들에 관한 문제,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 문제 및 주교들의 관할권 문제 등이 일차 정비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니케아에서 처음 열렸다고 해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라고 부르는 이 공의회가 세계공의회의 효시가 된 첫 번째 세계 공의회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7일, 이창훈 기자]

 

※ 이 연재물은 다음 자료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 후베르트 예딘 지음, 최석우 옮김, 「세계공의회사」 (분도출판사)

△ 클라우스 샤츠 지음, 이종한 옮김,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 노만 P. 탄너 지음, 김영식ㆍ최용감 옮김,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가톨릭출판사)

△ 강대인,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경향잡지」 2007년 1월~2009년 12월 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A. 프란츤 지음, 최석우 옮김, 「세계 교회사(개정증보판)」(분도출판사)

△ 「The New Catholic Encyclopedia」

△ Ed. by J. Neuner, SJ and J Dupuis SJ, 「The Christian Faith in the Doctirin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London, Collins Liturgical Publications)

△ 「New Catholic Encyclopedia」 1st and 2nd e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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