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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교구: 북간도 천주교회의 요람, 팔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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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403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북간도 천주교회의 요람, 팔도구

 

 

팔도구八道溝를 가리켜 천주교의 요람이라 운운하는 것은 괜한 말치레가 아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펴낸 『길림 조선족』이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명동(용정시龍井市 지신진智新鎭 명동촌明東村, 윤동주 시인의 고향)을 연변교육의 요람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팔도는 연변 조선인 천주교의 요람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팔도라면 곧 천주교를 생각하게 되고 천주교라면 팔도를 꼽게 된다.’ 사실 연변지역 어느 본당에 가서든지 원로 교우들이나 총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열에 아홉은 팔도구에 신앙의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윗대가 팔도구에 살았거나 혹은 팔도구 출신 교우를 통하여 영세를 받았다고 했다. 팔도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한때 팔도구는 용정시에 속한 진鎭(읍,면 소재지 정도)이었다가 인구가 줄어 최근에는 조양천진朝陽川鎭에 속한 촌村이 되었고 연길시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다 그놈의 한국바람 때문이란다. 동포들이 떠난 빈자리를 한족들이 메워가고 있지만,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네 시골 마을이다. 팔도구는 들이 넓고 물이 좋다. 우리 겨레가 죽고 못 사는 벼농사에는 안성맞춤인 셈인데 이 땅에 처음으로 물을 끌어 논을 푼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1903년 용정龍井 교우 12가족이 조양하朝陽河를 거슬러 올라와 이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눌러앉았다. 이들 중에 김계일金桂日 요한이 앞장서서 공소를 지었고, 북관의 12사도 중 한 명인 조여천趙汝天 마르티노가 학교를 설립하여 신앙공동체의 기반을 다졌다.

 

1910년 조양하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된다. 1910년 9월 26일 뮈텔 주교는 갓 신품을 받은 최문식 베드로(崔文植, 1881-1952) 신부를 간도로 보냈고, 그는 조양하(팔도구) 본당 초대 신부가 된다. 최 신부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성전 건립이었다. 신자들은 가락지며 패물을 팔아 공사비를 모았다. 최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벽돌을 구워가며 건평 600평방미터에 종각까지 있는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도 지었다. 공동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19일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 팔도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마적떼가 팔도구를 습격하여 최 신부와 십여 명의 교우가 마적 떼에게 납치되었던 것이다. 납치된 교우들은 일찍 풀려났지만, 최 신부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죽을 고생을 하였다. 마적들은 최 신부의 왼쪽 귓바퀴를 뚫어 노끈을 꿰고 개처럼 끌고 다녔다고 한다. 결국 강흥권姜興權 로렌죠 회장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몸값을 마련하였고, 납치 7개월 만인 1920년 2월에 최 신부는 팔도구로 돌아왔다.

 

1920년은 항일독립군들이 북간도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해이다.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도문圖們 인근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고, 그해 10월에는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첩을 거두었다. 독립군 연합부대에는 천주교 신자로 이루어진 의민단義民團이란 항일무장단체도 있었다. 1919년 말 왕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이 단체는 200여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그 중 100여명이 청산리에서 싸웠다. 물론 팔도구 본당에도 의민단에 가입한 교우들이 많았다. 그 중 회장을 지냈던 김종담金宗淡은 의민단 팔도구지부장 겸 군수관을 맡아 항일투쟁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때 항일투쟁에 나섰던 이들은 청산리 대첩 이후에 일제가 대대적으로 벌인 항일독립군 소탕작전인 경신대토벌庚申大討伐에서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역사의 시련이 휩쓸고 갔지만 팔도구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교우촌이라는 이미지를 잃지 않았다. 이때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피하려고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북간도로 이주하던 시대였다. 삼남三南과 관동關東과 관서關西에서 많은 교우들이 팔도구로 모여들었다. 조선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동네라서 팔도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다. 연변 지도를 펼쳐 보면 팔도구 인근에 두도구頭道溝,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 칠도구七道溝란 지명이 보인다. 용정의 옛 이름은 육도구六道溝였다. 이곳에 온 교우들은 팔도구를 이상향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마을이 대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라 외부로부터 시달림이 적은 반면에 농토가 넓고 비옥하여 농사짓기가 편했으며, 성당이 있어서 신앙생활에 지장이 없고, 조선 사람만 모여 살았기 때문에 풍속이 유순했기 때문이다.

 

1921년 7월 19일 북간도 지역이 원산 대목구 관할로 편입된다. 경성 대목구 소속 성직자들이 철수하고 원산 대목구 사목을 위임받은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선교사들이 북간도로 부임한다. 1921년 가을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페트루스 카니시우스 퀴겔겐(Petrus Canisius Kugelgen, 具傑根, 1884-1964) 신부가 팔도구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퀴겔겐 신부는 최문식 베드로 신부가 세운 조양학교를 확장하여 인근에 10여 개소의 분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학교는 조양 해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성당과 더불어 팔도구 마을을 지탱하는 두 축이 되었다. 팔도구 본당은 성장을 거듭하였다. 1923년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북간도에 사목방문을 왔을 때는 4천여 명의 신자들이 팔도구에 모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1924년에는 팔도구 본당이 성체거동을 거행했는데, 북간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5천여 명의 교우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이후 팔도구 본당의 성체강복은 매년 거행되었고 북간도 천주교회 내에서 이름을 떨쳤다. 1926년에는 대령동大嶺洞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팔도구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런 성공 뒤에는 레온하르트 베버(Leonhard Weber, 兪, 1890-1924)와 피우스 엠머링(Pius Emmerling, 嚴威明, 1886-1932) 신부의 희생적인 노고가 컸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있었다. 1933년 9월 24일에는 4백여 명의 마적 떼와 공산빨치산들이 성당을 습격한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신부들은 피신했으나,  교우들의 재산이 약탈되고 12가구가 전소되었다.

 

1935년에는 기존 학교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면서, 팔도구는 다시 평화로움을 되찾았다. 조양 해성학교는 신자이든 아니든 모든 팔도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조선이든, 북간도이든 그 당시 베네딕도회에서 운영하는 모든 학교는 해성학교海星學校라는 이름이 붙었다. 1937년 연길 대목구 설정 직전까지 북간도에는 조선인을 위한 해성학교가 팔도구를 포함하여 9군데나 있었다. 1925년까지 해성학교 학생들은 모든 교과목을 조선어로 배웠다. 하지만 학제가 4년제에서 6년제 보통학교로 바뀐 뒤에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1942년에 가서 해성학교는 국립으로 바뀌었고, 성서와 조선역사 수업이 없어졌다. 북간도에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교육 사업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매도하던 공산당 측에서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위에서 말한 신부들은 그 본 직업이 전교 사업이며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홑몸으로 이역만리 타관 땅에 와서 동족도 아닌 타민족의 아동교육에 대하여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는 데 대하여서는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조양 해성학교는 특히 관악대가 유명하였다. 독일에서 들여온 악기로 구성된 해성학교 관악대는 대축일이나 혹은 교회 경축행사를 빛내어 주었으며, 단오나 추석에 열렸던 마을 운동회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이 악기들은 1934년경에 연길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수사들로 이루어진 관악대가 생겨서 각종 교회행사에 동원되었다.

 

간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40년이 되던 1936년 교세통계를 보면, 팔도구 본당 교우는 총 2,284명이고, 공소가 11개소, 각종 신심단체가 10개에 소속회원이 1,030명, 도리道理학교가 1개소에 학생이 66명, 조양 해성학교에는 교원이 6명에 학생이 285명이고, 그밖에 진료소가 1개소 있었다. 팔도구는 당시 연길 지목구내 14개 본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본당이었다. 본당의 괄목할만한 성장에는 역대 주임신부들과 보좌신부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연길 수녀원에서 파견되었던 수녀들의 협조도 큰 몫을 하였다. 수녀들은 1937년 6월에 팔도구에 수녀원과 진료소를 세웠고 해성학교와 해성학원(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간이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연길 수도원에서 파견된 엥엘마르 젤너(Engelmar Zellner, 1904-1945) 수사도 팔도구에 대장간을 차려 본당과 학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들었다.

 

팔도구를 거쳐 간 여러 선교사들 중에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는 레기날드 에그너(Reginald Egner, 王默道, 1906-1975) 신부이다. 이미 팔도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했던 에그너 신부는 1936년 말 주임신부로 부임하였고 1952년 8월 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팔도구에 있었다. 그는 열정에 넘치는 사목자였고,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 말로는 자신의 조선식 성을 따서 왕王자 형태로 해성학교를 새로 지어 놓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해성학교 신축 당시 에그너 신부가 보좌신부였던 사실과 건물 형태를 연결시켜 신자들이 그렇게 기억하는 듯하다. 하여간에 그의 삶이신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만은 사실이다. “왕 신부님께서는 늘 어깨에 거는 서양식 앞치마를 두르시고 낡은 성당 구석구석을 고치며 노동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원로 교우들이 회고하였다. 에그너 신부가 교우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의 보좌인 허창덕 치릴로(許昌德, 1919-1975) 신부와 함께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모진 핍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1947년 가을 두 신부는 이른바 청산대회淸算大會 에 끌려가서 갖은 수모를 당하였다. 그들은 지독하게 얻어맞은 다음 새끼줄로 목을 졸라맨 채로 온 동네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러고는 허무맹랑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반동분자로 몰리었다.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던 신부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모욕을 당하던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1946년 연길 수도원이 문을 닫게 되었고,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두만강 가 남평南坪으로 옮겨져 수용되었다. 하지만 몇몇 선교사들은 팔도구에 남아 있어, 그나마 팔도구에서는 신앙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1952년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추방된 후에도 유유정劉裕亭 베드로라는 한족 신부가 팔도구에 남게 되었는데, 비록 신앙생활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사제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우들은 많은 위안을 얻었다. 후일 유 신부와 팔도구 교우들이 주축이 되어 연변 천주교회를 다시 일으키게 되지만, 서슬 퍼런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는 핍박을 받아 견디며 엎드려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유서 깊은 팔도구 성당이 이때 파괴된다. 용정에서 홍위병紅衛兵이 떼로 몰려와 성당을 부수어 버렸다. 원로 교우들은 팔도구 성당이 길림성 내에서 천주교 성당으로는 유일하게 파괴되었다고 했다. 길림시에 있는 옛 주교좌 성당도 홍위병의 습격을 받았지만, 홍위병 한 명이 종탑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더 이상 성당에 손을 대지 못했다. 팔도구 성당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성당 지붕에 올라갔던 홍위병이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겁이 없어서인지 끝내 성당을 다 부수고 갔다고 했다. 팔도구 사람들의 영혼의 안식처였던 성당이 이념의 집단광기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1979년 등소평(鄧小平, 1904-1997) 주석이 중국 공산당 내 실권을 잡게 되면서 숨 막히던 상황이 끝이 났다. 중국 정부는 개혁 · 개방을 기치로 내걸면서 실용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고, 종교에 대하여 한결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팔도구 교우들은 유 신부와 함께 임시 성당을 짓고 신앙생활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한 동안 팔도구는 연변 전역에서 유일하게 미사가 봉헌되던 곳이었다. 팔도구에서 새로 움튼 신앙은 무럭무럭 자라났고 연변 전역으로 그 줄기를 뻗쳐나갔다. 현재 연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5명의 사제 중 3명이 팔도구 출신이고, 수도자들도 배출되어 중국에서 새로 시작한 수도공동체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 팔도구 출신인 왜관 수도원 이동호 플라치도(李東鎬, 1935-2006) 아빠스의 주선으로 오딜리아 연합회의 지원금을 받아 1992년에 옛 성당 터 위에 새로운 성당을 지었고, 2003년에는 팔도구 교우촌 건설 1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옛 성당과 마찬가지로 새로 지어진 성당은 마을의 상징물이 되었다. 마을 어디에서나 성당이 보이고, 마을 밖 세 갈래 길에서도 환하게 보인다. 아직도 팔도구 교우들은 이곳에 사는 것을 긍지로 여기며, 자신들이 이룩한 장구한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분도, 2008년 겨울호, 글 편집실,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전대식 프란치스코 기자(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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