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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20-22: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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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1 ㅣ No.444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0)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1123년) (상)


둘째 천년기 벽두에 교회 동 서로 갈라져

 

 

수도원 모형을 축복하는 교황 레오 9세. 가톨릭대사전 자료사진.

 

 

둘째 천년기 공의회의 특징

 

첫 천년기에 있었던 8번의 세계 공의회들을 '제국 공의회' 혹은 '동방 공의회'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황제(로마 황제 혹은 비잔틴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했고, 공의회 개최지가 동방 교회 관할 지역인 데다 참석 주교 역시 압도적 다수가 동방 교회 주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천년기에 열린 나머지 13번의 세계 공의회들은 모두 '서방 공의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개최지가 서방일 뿐 아니라 참석 주교 역시 거의 전부가 서방 주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1054년에 있었던 동ㆍ서방 교회의 대분열과 관련이 있습니다.

 

흔히 동서 대이교(大離敎), 동방 이교(東方離敎)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다양한 가운데서도 일치를 유지했던 하나인 그리스도교를 오늘날 로마 가톨릭 혹은 라틴 교회라고 부르는 서방 교회와 정교회라고 부르는 동방 교회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천년기에 열린 세계 공의회들은 이 동서 대이교 이후에 열렸기에, 지역으로나 참석 주교로나 온통 서방 중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홉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탐색하기에 앞서 동서 대이교 과정을 조금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서 대이교

 

첫 천년기의 마지막 세계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69~870)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면서 니콜라오 1세 교황을 파문한 '포티우스 이교'(867)를 단죄하고 교황 수위권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포티우스는 몇 년 후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합니다. 그리고는 879~88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을 포함해 수백 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다시 공의회를 엽니다. 포티우스는 여기서 교황을 파문한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청하지요. 공의회는 포티우스의 참회를 수용하면서 포티우스를 단죄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결정을 무효화해 줄 것을 교황 요한 8세에게 요청합니다. 요한 8세 교황은 이 결정을 받아들입니다만 포티우스를 단죄한 선임 교황들의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습니다. 포티우스 이교는 교황 수위권을 비롯해 성직자 독신, '필리오케' 문제 같은 교리와 규율에 있어서 동ㆍ서방 교회가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로 인한 골이 깊어가고 있음을 보여준 한 사례였습니다.

 

교황 수위권의 경우 동방이 로마의 수위권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황들은 수위권을 마치 황제가 제국 전체에 대해 전권을 갖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반면에 동방 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제왕적 권위가 아니라 다른 4개 총대주교좌와 동등하지만 우선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형제로서 동등하지만 맏형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지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한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서방 교회가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필리오케)"를 첨가한 것과 관련해 동방 교회가 문제를 삼은 것은 단순히 '필리오케'를 임의로 첨가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 서방은 삼위의 일치를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하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동방에서는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아울러 성부가 성자와 성령의 유일한 원천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은 589년 제2차 톨레도 지역 공의회에서였습니다. 이후 이 관행이 서방 교회 전역으로 확산돼 나갔고 교황은 1014~1015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이를 공식화했습니다. 하지만 동방에서 볼 때는 서방 교회가 일방적으로 신경의 조항을 첨가했을 뿐 아니라 필리오케라는 조항이 첨가됨으로써 성령의 유일한 원천이 성부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 둘이라는 인식을 준다는 점에서 반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찰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또 다른 결정적 계기가 왔습니다. 레오 9세(재위 1049~1054)가 교황으로, 미카엘 체룰라리우스(재위 1043~1058)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있을 때였습니다. 레오 9세는 교황권의 강화와 함께 사제 독신 준수, 성직 매매 근절 등 교회 개혁에 힘을 쏟은 교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다니며 교회회의를 열고 쇄신을 강조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주장하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도 있었습니다.

 

서방 교회와 달리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고 토요일에 단식을 지키지 않으며, 미사 때에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지도 않는 동방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 대한 교황의 쇄신책이 '침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반감을 갖고 있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그 대응 조치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활동하는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고 수도원을 몰수했습니다. 대립이 격해졌지요.

 

그런데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노르만족이 침입했고, 레오 9세는 비잔틴 황제의 도움을 받는 대신에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일으켜 막으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맙니다. 어쨌거나 노르만족을 막기 위해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조가 필요했고, 교황은 훔베르토 추기경 등을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합니다.

 

훔베르토 추기경은 외교에 능숙하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깔보는 듯한 태도에 총대주교와 그 지지자들은 교황 사절을 거부했고, 훔베르토 추기경은 성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남기고 떠납니다. 1054년 7월 16일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교회회의를 소집해 그해 7월 24일 파문서를 쓴 훔베르토 추기경과 그 추종자들을 역시 파문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서 대이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훔베르토 추기경은 동방 교회 전체를 파문한 것이 아니라 체룰라리우스를 파문했을 뿐이고,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 역시 훔베르토 추기경을 파문했지 교황을 파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파문이 취소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서 골이 깊어갔고, 13세기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약탈하고 파괴함으로써 마침내 파국을 맞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26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1)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1123년) (중)


주교 서임권 지킨 보름스 협약 공식 확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카노사 성 소유주 토스카나 백작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1123)는 그 전년도에 열린 보름스 협약을 교회가 공식 승인하고자 소집한 공의회입니다. 보름스 협약은 한마디로 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을 일단락지은 협약입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또한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에 이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69~870)에서도 세속 권력이 성직자 임명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규정했지만 이후에도 이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첫 천년기 후반 유럽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로마 교회, 정통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한 카를 대제(혹은 샤를 마뉴, 재위 766~814) 때에 통일 유럽을 이뤄 전성기를 누렸던 프랑크 왕국은 9세기 중엽 왕국이 동ㆍ서ㆍ중 프랑크 셋으로 나뉘면서 황제 권력도 약화됩니다. 지방 제후(귀족)들이 부상하면서 주교들은 제후들과 결탁하기도 하고 제후들에게 놀아나기도 하지요. 로마 또한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면서 교황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생깁니다. 귀족들은 마음에 맞지 않은 교황을 몰아내고 대립 교황을 세우는 일까지 벌어지지요. 평신도(귀족, 국왕)에 의한 성직 서임과 성직 매매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여기저기서 생겨납니다.

 

하지만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쇄신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10세기 초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된 개혁입니다. 클뤼니 개혁은 11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꽃을 피웁니다.

 

한편 10세기 중엽 동프랑크 왕국 영토였던 독일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지닌 강력한 군주가 나타납니다. 오토 1세(재위 936~973)였습니다. 그는 독일 여러 제후국가(공국)들을 평정함은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 평정합니다. 962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2세를 내세워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옛 로마제국의 뒤를 잇고 또 그리스도교를 통치 지주로 삼아 정교 일치의 통일 제국을 이룬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오토 1세는 제국의 황제이자 교권의 수호자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지방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들에게 봉토와 함께 세속 영주들이 갖는 속권들을 부여했습니다.

 

오토 1세의 이런 정책은 하인리히 3세(재위 1039~1056) 때에 오면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주교들을 임명하면서 영적 권한의 상징인 주교 반지와 주교 지팡이를 주고 복종 서약까지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들 다툼으로 한꺼번에 교황이 세 명이나 생기는 등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세 교황을 다 폐위시키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주교를 새 교황으로 임명합니다.

 

강화된 황제권은 교회를 귀족 제후들의 등쌀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했지만 또한 교회 자체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권으로부터 교권을 수호하면서 교회 개혁을 이루려는 교황들이 있었습니다. 교황 레오 9세(재위 1049~1054)와 니콜라오 2세(재위 1059~1061)가 그런 교황이었습니다. 특히 니콜라오 2세는 착좌하자마자 교황 선거법을 제정해 추기경들로만 교황을 선출하도록 합니다. 로마의 귀족 평신도들이 교황을 선출하고 멋대로 다루려는 것을 막기 위한 획기적 조치였습니다.

 

이 새로운 교황선거법에 따라 두 번째로 교황이 된 인물이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입니다. 이미 부제 때부터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해온 그는 교황이 되자 △ 성직매매 금지 △ 평신도(국왕이나 제후)의 성직자 서임 금지 △ 사제 독신 및 윤리 생활 강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 역점을 두고 개혁의 불을 지핍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의 으뜸인 교황은 주교들 일에 당연히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후나 국왕에게 윤리적 문제가 있을 때는 폐위할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것도 분명히 했습니다. 교황 앞에서는 제후나 국왕이라 하더라도 평신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레고리오 7세의 지론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명한 '카노사 굴욕' 사건이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평신도의 성직자 서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주교 선출에 개입합니다. 그레고리오 7세에게서 강력한 경고를 받자 하인리히 4세는 교회회의를 열어 주교들을 선동해 오히려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지요. 그렇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해 파문이라는 초강경 수를 놓습니다. 결국 힘 겨루기에서 진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초 교황이 머무는 이탈리아 카노사로 가서 참회복을 입고 성문 앞에서 3일 동안 기다린 끝에 사면을 받습니다. 이것이 '카노사 굴욕'으로 알려진 사건이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교황권과 속권의 대립이 아니라 성직자 서임이라는 교회 고유한 권리에 대한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교권을 확립한 사건이었고, 교회 개혁의 강도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강력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권과 세속 권력과의 마찰과 다툼은 계속됐고, 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 문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현명한 타협안이 나왔습니다. 당시 주교는 지역 교회의 책임자라는 영적 권한과 함께 지방 영주(또는 제후)에 해당하는 세속 권력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영적 종교적 권한은 교회가 부여하고 세속적 권한은 세속 권력이 부여한다는 대안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직자단인 주교좌성당 참사들이 주교를 선출하면 관구장 주교가 승인하고 주교로 축성합니다. 여기에 황제는 원칙적으로 개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다만 후보가 여럿일 경우에는 황제가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주교 선출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주교의 세속적 지위에 대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에게 영주에 해당하는 세속적 지위와 특권을 부여하고 재산과 토지도 하사했습니다. 반대로 주교는 영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교황 갈리스토 2세(재위 1119~1124)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재위 1106~1125)는 1122년 9월 23일 독일 보름스에서 협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름스 협약 혹은 보름스 정교조약입니다.

 

보름스 협약으로 성직 서임권 문제를 일단락 지은 교황 갈리스토 2세는 선임 교황들이 추진한 교회 개혁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교회는 전임 교황들인 파스칼 2세(재위 1099~1118)와 젤라시우스 2세(재위 1118~1119) 때에 대립 교황이 3명이나 나오는 등 어수선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보름스 협약을 재확인하는 한편 혼란스러운 교회를 재정비하고 개혁을 도모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천년기의 첫 번째이자 가톨릭교회 역사상 아홉 번째 세계 공의회인 1123년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7월 3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2)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1123년) (하)


교회 권위 회복하고 쇄신과 개혁도 함께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린 로마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옛 성전은 화재로 없어지고 지금 모습은 후대에 재건된 것이다.

 

 

공의회 개최와 결과

 

1123년 3월 18일 로마의 성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갈리스토 2세(재위 1119~1124)가 소집한 공의회가 열립니다.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였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요한 사도, 두 요한 성인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오늘날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라고도 부르는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대성전 곧 바실리카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성전입니다. 교회 전례력에서 유일하게 축일(11월 9일)로 기념하고 있지요.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당시 교황들의 대관식과 착좌식이 거행되곤 했던 라테라노 대성전이 이제 서방 교회 전 지역에서 온 주교와 대수도원장들로 북적였습니다. 참가자들은 대주교와 주교를 합쳐서 300명이 넘었고, 대수도원장도 6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남아 있는 공식 의사록이 없어서 회의 진행 방식이나 논의 과정, 투표 과정 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공의회는 사순 제3주일인 3월 18일에 시작됐고, 마지막 회의가 4월 6일에 열렸다고 하니 회의 기간은 보름 남짓으로 짧았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약 6개월 전에 교황이 황제와 합의한 보름스 협약을 공의회를 통해 공식 비준해 공포하고, 교회생활 개혁과 쇄신에 관한 사항들을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보름스 협약 내용은 그대로 승인됐고, 교회생활과 관련한 22개(혹은 25개) 조항의 법규가 발표됐습니다. 이 법규들은 대부분이 이전 공의회 또는 교회회의들에서 제정했던 것들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의회 기간 중인 3월 28일 콘스탄츠의 콘라드(? ~976) 주교가 시성되고, 함부르크-브레멘 대교구장 아달베로 대주교가 권위와 책임과 친교의 상징인 팔리움을 받았습니다. 또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잉글랜드 교회에서 누가 더 서열이 높은지에 관해 서로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단지 현안만 논의한 자리가 아니라 전체 교회의 현안과 직접 상관이 없는 토론까지 벌인 비교적 자유로운 자리였음을 알려줍니다.

 

 

주요 결정사항

 

보름스 협약을 재확인한 것 외에 공의회에서 결정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 성직 매매를 금하며 △ 주교로 축성되기 전에 교회법에 따라 합법적인 주교 선출이 이뤄져야 하고 △ 부제 사제 주교로 단계적 서품이 이뤄져야 하며 △ 차부제(부제품 바로 직전의 품계, 현재는 없어짐) 이상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결혼하거나 동거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 성직자는 새로운 사목 직무를 맡기 전에 반드시 주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 대립 교황 그레고리오 8세(1118~1121)가 단죄받은 후에 서품한 성직자들의 서품은 무효이며 △ 교회 재산에 대한 전권은 주교가 갖고 있으며 평신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며 △ 교회에 바치는 봉헌물을 착복하는 평신도들이나 교회를 성채처럼 요새화하는 이들에게는 파문 제재를 가하고 △ 수도원장을 포함해서 수도자들은 일반 신자들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거나 일반인들을 위한 장엄미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요.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 가운데는 이처럼 성직자 수도자 생활 및 교회 재산과 관련한 규정들 외에 특별히 두 가지를 더 주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군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슬람 세력에 짓밟힌 성지 팔레스티나를 회복하고 역시 이슬람 세력에 시달리는 동로마 제국을 돕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공식으로 선언한 교황은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였습니다. 그는 1095년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면서 성지 회복이라는 좋은 뜻으로 참가하는 이들에게 대사를 부여했지요.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를 재확인하면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대사를 허용하고 그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휴전'(Treuga Dei)에 관한 규정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라고도 하는 이 규정은 특정 시기에는 전쟁을 금지하고 휴전한다는 규정입니다. 이를 위반하는 이에게는 성사 금지와 같은 중벌이 내려졌습니다. 11세기 초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행되면서 그리스도교 지역 전체로 확대된 신의 휴전에 관한 규정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통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또 대림시기 시작부터 주님 공현 축일까지 그리고 성령강림 대축일부터 8일 동안 전쟁을 금하도록 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면서 신의 휴전도 함께 선언했지요.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 규정을 재확인하면서 어기는 이들에 대한 처벌도 명문화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 전체가 그리스도교 세계였기에 가능한 규정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이 밖에도 로마 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을 약탈하는 이들에게는 파문 제재의 벌을 가하며, 위조 화폐를 만드는 이나 유통 시키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이들로 여겨 격리해야 한다는 규정도 마련했습니다.

 

 

의의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외형적으로는 두 번째 천년기 들어 열린 첫 번째 세계 공의회라는 점, 이전 공의회들과는 달리 황제가 소집하고 관여한 공의회가 아니라 교황이 직접 소집하고 주재한 공의회라는 점, 그리고 동방이 아니라 서방 교회에서 서방 주교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린 최초의 세계 공의회라는 점에서 앞서 열린 첫 천년기의 8차례 세계 공의회와 차이가 있습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황제나 제후 같은 세속 권력에 맞서 교회 권위를 회복하고 교회 개혁과 쇄신을 이룩한 공의회로 기록됩니다. 공의회는 보름스 협약을 재확인하고 비준함으로써 성직자 서임에 관한 교회 고유의 권한을 회복했습니다. 또 성직자 생활과 규율 등에 관한 다양한 규정들은, 이전 공의회나 교회회의 결정들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돼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때에 꽃을 피운 교회 개혁의 틀을 확고히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의 휴전'에 관한 조항은 국가간 또는 제후(영주)간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서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교회의 공식 조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 역시 클레르몽 교회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훗날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신의 휴전' 규정을 공식으로 선포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7월 10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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