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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중국 - 공산치하의 신학교는 여전히 가톨릭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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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206

[만민에게 복음을 - 중국] 공산치하의 신학교는 여전히 가톨릭적인가?


1981년, 대신학교 3학년 때 나는 한국외방선교회 회원으로서 마음속에 중국 선교의 길을 꿈꾸었다. 그해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중국교회가 문을 열었다. 10여 년의 악몽 같은 문화혁명(이하 문혁)이라는 터널을 벗어나 교회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들이 감옥에서 나와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지만 돌아온 신자에 비해 사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학교에서 사제가 배출되려면 아직도 6-7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때(1982-1990년 사이)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신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10년간의 문혁을 거치면서 교회의 모든 공식문서와 전례서는 불에 탔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당했다. 신학교의 성당이나 교실은 집단농장의 식당이나 창고로 쓰였고, 신학서적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당시의 열악한 신학교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부분의 외국인 교수 신부들은 추방당했고 중국인 신부들은 노동개조에 보내지거나 인민재판으로 희생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교회를 다시 세우려 할 때의 막막함과 빈약한 상태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한 신부는 이렇게 물어왔다.

감옥에 갇혀있던 사제들이 풀려나 교회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박해로 전국의 교회가 초토화되는 중에도 생명이 보장되는 감옥에서 사제들이 명맥을 유지하며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안배가 아닐까.

하지만 신학교 교수진이 문제였다. 배운 것이 없으니 무엇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노사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신학교 교재를 만들었다. 대부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내용이었다. 1965년에 공의회가 막을 내리고 다음 해에 문혁이 시작되었으니 보편교회가 그동안 어떤 쇄신을 하며 성장해 왔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였다.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철필로 긁고 등사판에 밀어 교재를 만들었다.

문혁기간 중 성경은 최악의 불온문서였으니 전국을 다 뒤져도 겨우 몇백 권뿐이었다. 당시 신부들은 성경을 만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상해 신학교에 중국어 신구약 합본 성경이 두 권 있었는데 돌려보는 순서가 칠판에 빼곡히 적혀 있었고 신학생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홍콩 교우에게 몰래 선물 받은 ‘나만의 성경’을 날마다 안고 잔 친구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노사제들은 판에 박힌 윤리 도덕 의무를 강조하고 공의회이전의 문답식 교리를 가르치다가 호통을 치고 훈계하는 데 강의시간을 다 소비하자 젊은 신학생들은 불만이 많았다. 20대 젊은 신학생과 70-80대 노인 사제의 만남이니 세대 간 갈등도 컸다. 그나마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교실 보수며 연탄 나르기, 물 길어오기 등 잡일에 하루가 다 갔다. 그때 신학교에 들어간 이들이 신부, 주교가 되어 지금 중국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중국 성인 시성식이라는 악재

사제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중국교회는 점차 활기를 띄게 되었고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교리와 교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교회는 점차 지역교회의 특성을 띠며 보편교회와 보조를 맞추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젊은 사제 300여 명이 신학교를 통해 양성되었고, 당시 신학생수는 700여 명이었다.

그러나 2000년 새 밀레니엄과 희년으로 온 세계가 희망에 부풀어있던 그해 또다시 어려움이 찾아왔다. 교황청이 공산당 창립기념일인 10월 1일에 중국 성인 120위의 시성식을 강행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중국 정부에 대한 도전처럼 인식될 악재였다. 이후 중국 정부는 나름대로 유지되어 오던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신학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먼저 외국 교수진의 입국을 불허했고 신학교 신부들의 외유 학술활동과 교류, 유학도 막아버렸다. 나는 상해 한인본당 신부직은 떠났지만 다행히 종교국의 요청으로 신학교 강의를 하게 되어 지금은 5개 신학교를 학기마다 순회하며 가르친다. 나는 외국인 신부라 신학교 강의는 사실 불법이다. 하지만 가장 합법적으로 가장 불법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 셈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중국에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더니….

중국 천주교회는 문혁을 거치면서 이른바 지하교회와 애국교회로 분열되었다. 피상적으로 지하교회는 교황청 소속이고 애국교회는 공산당 소속으로 알고 있다. 내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신자들은 묻는다. “그 신학생들이 신부가 되면 공산당 신부가 되나요?” 나를 염려해서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비난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헷갈린다. 때로는 두 느낌을 모두 받는다.

상해 신학교의 동료 교수신부나 신학생들을 대할 때 참 안쓰럽다. 문혁의 뼈아픈 시기를 거쳤는데도 아직 종교의 자유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한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신학생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존재는 비록 보잘것없지만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애국교회를 어머니이신 가톨릭(보편)교회와 연계시켜 다 같은 그리스도의 한 포도나무임을 잊지 않게 하는 몫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애국교회가 보편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공산치하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중국교회의 사제나 신학생들 역시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교회의 뿌리에 닿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신학교는 한 지역교회의 핵심이다. 아직은 교단에서 진리의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지만 여기서 배출되는 사제들이 바뀌면 신자들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공산당이 주도하는 지금의 천주교회의 모습도 조금씩 바뀔 것이라는 희망에 오늘도 신학교 교단에 선다. 신학생 하나 잘 키워 신부가 되면 몇백 명의 신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지 않겠는가?


공산치하의 신학교가 처한 상황

공산치하에서 신학교의 신부들과 신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아직도 살얼음판을 건너는 느낌이다. 종교국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간섭하고 통제할지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양심의 척도에 따라 행동하고 분별해야 하는 종교에 대해 종교국은 언제나 세속적 척도인 채찍과 당근으로 체벌하고 유혹하려 든다.

나는 중국 천주교회가 처한 이런 상황을 가장 염려한다. 하지만 중국 신학교 교수들과 신학생들의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은 점차로 확고해지고 중국교회는 분명 세계 가톨릭교회의 일원이지 떨어져 나간 별똥 같은 교회가 아님을 강하게 의식하고 표명하고 있다.

2년 전에 쉬자쟝 (石家庄) 신학교의 새 원장을 종교국에서 파견한 적이 있다. 교회 인물도 아니었고 신학교와 협의도 하지 않은 말 그대로 강압적인 인사명령이었다. 신학교 측이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종교국은 밀어붙였다.

그때 신학생들이 나섰다. 아침부터 사오십 명의 신학생들(내 반 학생들 포함)이 하얀 장백의를 입고 현 정부청사 앞에 모여 침묵시위를 벌였다. 땡볕에서 하루 종일 부동자세로 서있었는데 화장실에 가거나 간단한 점심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해가 지고 돌아와 다음 날 다시 출정(?)하려고 할 때 종교국에서 자신들의 결정을 취소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신학교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승리에 대해 나는 토를 달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업시간에 학생 전원을 일으켜 세우고 혼자서 박수를 쳐주는 것이었다. 한 외국인 신부의 말 못하는 심정을 박수 속에서 느꼈는지 그들도 나를 따라 박수를 치며 기뻐하였다.

하지만 ‘7·7사건’처럼 나쁜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 올해 상해에서 마 주교 서품식이 열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종교국은 불법 주교를 강제로 참석시키려 했고 이에 강한 불만의 표현으로 상해 신학교 교수들과 신학생, 수녀들이 서품식에 대거 불참한 것이다. 이후 종교국은 가혹한 보복을 가했다. 원장신부가 강제로 교체되었고, 새 학기 개학은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신부, 수녀들은 강제 세뇌교육에 보내졌다. 아직도 상해 신학교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상해 신학교를 바라보는 산 정상에 중국 최대의 성모성지 셔산성당이 있다. 2007년 중국교회에 대한 교황님의 특별 사목서한에서 ‘셔산 성모님’으로 전 세계에 선포된 곳이다.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들어 올리고 아기 예수님은 서쪽을 향해 두 팔을 펴서 축복하시는 모습의 성상은 동양적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성모자상에서 최근 3년간 10월이 되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기 예수님상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위 사진).

왜 검은 연기일까?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흔들리며 솟구쳐 오르는 검은 연기는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잘못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것은 아닐까?” “앞으로 중국교회가 더 견뎌내야 할 십자가가 남아서일까?” 삼삼오오 모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런 말을 주고받는 신학생들의 모습이 순진해 보인다.

오늘도 신학교 마당을 굽어보고 계시는 셔산 성모님의 얼굴은 밝아 보인다. 아마도 중국교회의 희망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리라.

* 김병수 대건안드레아 - 한국외방선교회 신부. 1999년 대만 보인대학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6년 중국 화동사범대에서 중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해, 북경, 쉬자쟝 신학교 등지에서 비교종교학, 중국철학범주론, 토착화와 해석 등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김병수 대건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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