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2015-1116.....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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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11-15 ㅣ No.1912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홀수 해

1마카베오 1,10-15.41-43.54-57.62-64      루카 18,35-43

2015. 11. 16. 이태원

주제 : 세상과 타협한다는 것의 의미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타협(妥協)은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사전에는 두 편이 서로 좋도록 협의하여 조정함이라고 풀이하는 낱말인데, 양쪽 모두에게 좋다는 것은 한쪽에게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이게 정말로 좋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타협이라는 말이 혹시라도 진실과 정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살이에만 적용되는 일이라면, 우리의 판단도 똑같아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삶은 타협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누이에게도 좋고 매부에게도 좋다는 말의 의미도 이러한 것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 타협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고, 그 한계를 넘는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면 정말로 좋은 의미가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로 들은 마카베오서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 타협이라는 말의 한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독서에 나오는 ,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는 말에는 어떤 맹점이 있겠습니까? 이런 차이를 생각할 줄 모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우리가 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 사이에 있을 법한 차이점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세상의 한계라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그런 한계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훗날 우리가 살 것을 바라는 하느님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니, 분명한 차이점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살던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일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한 때 보았던 사람이니 그에게 생겼던 답답함이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도와 기적으로 그 사람은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할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살 수도 있습니다만,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일에 초대할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세상에 사람으로서는 잘 하는 일이겠지만, 신앙인으로서 드러내야할 세상을 이끄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드러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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