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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아르헨티나 - 쓰레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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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202

[만민에게 복음을 - 아르헨티나] 쓰레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


저는 1976년에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와서, 2년 뒤에 수녀회에 입회했습니다. 첫 서원을 하고, 1982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14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작은 도시 트렐레우(Trelew)의 가난한 동네에서 벗이요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길을, 그리고 작은 복음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이 이어지는 남쪽지역에서 원주민 마뿌치 부족과 생활하면서 이들의 인권회복과 원주민 고유의 문화 되찾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이들 안에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문화, 풍습, 언어, 그리고 다른 종교를 초월해서 인류공동체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웃들의 믿음과 희망, 그리고 이들의 순수함과 사랑 안에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고통과 가난, 부정부패, 억압된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삶에서 오늘도 쉬지 않고 계속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던 뜻깊은 순간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35년을

2000년,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아주 가난한 지역인 비자 이따띠(Villa Itati)로 옮겨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이곳에는 5만여 명이 살고 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우범지역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가난과 폭력, 마약 등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지역으로 경찰이 24시간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동네에는 상하수도 시설도 없고 전기나 쓰레기 배출 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있지 않습니다. 좁은 동네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풍경은, 시커먼 하수도 물속에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거리는 질퍽한 진흙탕으로 변하고 동네에
서 가장 낮은 지역은 늘 펌프로 물을 퍼내야만 합니다. 하지만 펌프가 자주 고장이 나 몇 날, 몇 주일씩 물에 잠겨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중상류층사람들은 이 지역을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이웃들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자라며, 비인간적인 대우는 물론이고 때로는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쓰레기를 주워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낮과 밤, 새벽 할 것 없이 수시로 시내에 나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이 가족의 미래와 생계가 달린 아주 중요하고도 소중한 일입니다. 온 가족이 마차를 타고 쓰레기를 주으러 가기도 합니다.

이곳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엄마 배 속에서부터) 부모를 따라 시내의 큰 쓰레기통 속에 들어가 쓰레기와 뒤범벅이 되면서 종이, 플라스틱, 철 등을 골라내는 일을 합니다. 운이 좋은 날에는 도시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을 줍기도 하는데 그 음식으로 온 가족이 배를 채우곤 합니다.


‘종이 줍는 이들의 협동조합’

제가 이곳에 도착한 2000년, 아르헨티나에 경제위기가 닥쳐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직업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이들은 마차를 끌고 종이 줍는 일을 시작했고, 그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웃들은 개인적으로 쓰레기 더미에서 주은 물건을 팔아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시정부나 경찰은 마차를 끌고 쓰레기 줍는 것을 위법이라며 자주 이들의 생계수단인 말을 빼앗곤 했는데 이런 날에는 먹을 것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비 오는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IMF 경제위기 속에서 고물상들이 일주일에 두세 번만 문을 열거나, 물건들을 제한해서 팔 수밖에 없기에 하루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저는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모임을 갖고 이 어려움과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바로 ‘종이 줍는 이들의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좀 더 진실한 삶, 행복한 삶을 나누고 키워가자며 함께 꿈을 꾸면서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협동조합은 각자 자기가 살길만 찾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길을 찾고,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정신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개인이 쓰레기를 줍고, 고물상에 팔던 방식에서, 개인이 주운 쓰레기를 모두 모아 공장에 직접 팔고 그 이익을 똑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 식사는 공동식당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면서 몇 달 동안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며 시작한 움직임은 점차 협동조합의 꼴을 갖추어갔습니다. 쓰레기 줍는 이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는 협동조합, 몇몇 가구의 작은 움직임은 이제 212가구가 모인 큰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많은 청소년들이 마약, 폭력, 범죄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동네에 공부방, 직업훈련소, 어린이 급식소, 청소년들이 모여서 건전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어린이 급식소에서는 동네 청소년들이 직접 어른들과 함께 요리와 뒷정리를 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존감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생선잔치와 햄버거

어느 날 협동조합의 한 회원이 쓰레기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생선을 잔뜩 주워와 비싼 ‘생선잔치’가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생선잔치를 보면서, 도시민들이 유통기한이 지난 생선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에 가난한 이웃에게 전해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좀 더 나눌 수 있을 것이고, 찾아보면 배고프고 허기진 이웃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음을 알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떤 날은 우리 공부방의 후안이라는 어린이가 친구들에게 이런 자랑을 했습니다. “나, 어제저녁 우리 누나랑 동생이랑 햄버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뻔했다.”

우리는 후안에게 물었습니다. “후안, 가족들과 함께 맥도날드에 갔었어?”

그러자 후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어제 저녁에 아빠와 함께 마차를 타고 쓰레기를 주으러 시내로 들어갔는데, 마침 맥도날드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이었나 봐. 맥도날드에서 버린 쓰레기 뭉치 안에 먹다 남은 햄버거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 자리에서 실컷 먹고, 집에 가져와 먹고, 사촌들과 이웃들한테도 나눠줬어.”

이렇게 말하는 후안의 얼굴에서 우리 동네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봅니다. 하지만 버려진 음식으로 배고픔을 덜고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우리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쓰고 버리는 일을 쉽사리 하고, 부유함의 울타리 안에 갇혀 주변을 살피지 못한 채 꼭 움켜쥐고 살아가는 이들, 특히 우리 배고픈 어린이들의 사연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 앞에서 사랑의 나눔이 절실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래도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건이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 되고,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을 보면 오늘도 기적의 나눔의 빵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어려운 가운데 희망과 믿음으로 사랑을 계속 살고 있는 우리 이웃과 함께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쓰레기 안에서 사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며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난한 이웃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들과 함께 사시는 예수님은 저에게 뚜렷한 복음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복음을 전한다기보다 이웃과 함께 자매형제로 살면서 이 가난한 이웃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확인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고통과 사랑, 기쁨을 나눌 때 실현된다는 것을 놀라운 마음과 눈길로 관상합니다.

35년 동안 전교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길을 걷는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새삼 느끼고 감사드리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제게 다가오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이웃들을 통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즐겁고 기쁜 순간에는 물론이고, 한계에 부딪히거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따뜻하고 온화한 사랑 안에서 부드럽게 감싸주심을 마음 깊이 느낍니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면서, 인류공동체 안에 조금 더 빨리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고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오늘도 살아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3-6 참조).

* 이영향 체칠리아 - 아르헨티나 관구에서 마리아의전교자프란치스코회 수녀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이영향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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