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박빈숙 루치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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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1 ㅣ No.1716

[시복 대상자 약전] 박빈숙 루치아 수녀



원산 수녀원
1919년 10월 14일 생, 평남 순안
세례명 : 안젤라
첫서원 : 1943년 6월 22일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9월 24일, 평남 순안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11일, 평남 순안

 

 

박빈숙 루치아(朴淋淑, 1919-1950) 수녀는 1919년 10월 14일 평안남도 순안에서 삼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안젤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박 루치아 수녀는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다. 동정심이 많아 가난한 이와 어려운 이를 잘 도왔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용모도 아름다워 첫눈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늘 신앙을 이야기하는 아이로 마을에서 유명했고 마을 사람들은 수녀의 아름다움과 총명을 찬탄했다. 수녀는 사리 판단이 분명하고 당찬 여성으로 성장했다.

박빈숙 루치아 수녀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에 입회했다. 원산 수녀원에서 서원한 두 고모, 박정덕 골롬바(朴靜德, 1906-1983) 수녀와 박한덕 올리바(朴閑德, 1917??) 수녀의 영향이 컸다. 박 골롬바 수녀는 1948년 5월부터 원산 수녀원 부원장을 역임했고 이듬해 원산 수녀원이 해산 당했을 때 한국인 수녀들을 책임진 인물이다. 박 루치아 수녀는 청원자 시절에 음악교사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했으며 1942년 1월 15일에 루치아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 착복을 했으나 첫서원이 연기되었다. 박 골롬바 수녀가 마음이 조급해진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서원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고귀한 순교의 화관을 받느냐란다. 인내심을 가지렴!” 박 루치아 수녀는 1943년 6월 22일 첫 서원을 했으며, 고모의 말대로 7년 후에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해방 이후 순교의 화관을 받을 날이 점점 다가오는 듯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로 진공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8월 10일부터 북한에 진주하기 시작했는데 몇 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네 마음에 드는 것은 모두 훔치고 강탈했다. 수녀들은 폭행과 능욕에 기진맥진한 부녀자들을 보살폈다. 수녀들 역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겨 수입원이라고는 여성복 재단과 음악 교습뿐이었다. 박 루치아 수녀도 재능을 살려 궁핍한 수녀원 살림을 꾸리는 데 성심껏 동참했을 것이다. 1949년 초 박 루치아 수녀는 김봉식 마오로(金鳳植, 1913-1950) 신부가 돌보던 이천 본당에 설립할 분원 책임자로 내정되었다. 박 루치아 수녀는 제삼례 후밀리타스(諸三禮, 1920-2010) 수녀와 원산에서 남쪽으로 오십 킬로미터 떨어진 삼팔선 인근의 산골마을 이천에서 두 달 가량 보냈다. 늦어도 그해 5월에는 분원을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원산 수녀원이 폐쇄되어 무산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수녀들이 체포되어 원산 임시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인 수녀들은 곧바로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한국인 수녀들은 5월 16일에 출감했다. 교화소에서 출감하면서 한국인 수녀들은 수도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 입어야 했다. 박 골롬바 수녀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저항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이를 악물었고 우리의 서원에 충실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우리의 마음과 오성이 우리를 수녀로 만든 것이지, 봉쇄 구역과 수도복이 우리를 수녀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박빈숙 루치아 수녀는 동료 수녀들과 함께 평양으로 옮겨 갔으나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작은 고모인 박 올리바 수녀와 함께 고향 순안으로 돌아갔다. 박 루치아 수녀는 늘 하던 대로 일주일에 세 번 아이들을 모아 교리와 성가를 가르쳤다. 별도 공간이 없어서 마을 공회당을 사용했는데 한동안은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긴박했고 삼팔선을 넘어 월남하는 일이 힘들고 위험해졌다. 1950년 2월 박 골롬바 수녀는 월남을 결심하여 서울로 떠났고 나머지 수녀들도 차례대로 월남하도록 지시했다. 박 골롬바 수녀는 자신의 월남 사실이 알려지면 필시 동생과 조카가 화를 당할 것이라 염려하여 다음 차례로 두 수녀를 선정하여 즉시 월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박 올리바 수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박 루치아 수녀는 “월남하다가 어떤 일이 생겨 작은 고모의 말과 제 말이 엇갈려 공연히 다른 수녀님들까지 월남할 기회를 놓치면 큰 낭패이니 그대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하고 극구 사양했다. 그리하여 다른 수녀들은 모두 무사히 월남했으나 두 수녀는 북한에 남았다.

박빈숙 루치아 수녀는 1950년 9월 24일에 체포되어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 박 루치아 수녀와 육촌지간인 이가 고발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지난날 아주 가난하여 수녀의 집안 덕을 보며 살던 이였는데 정치보위부 고위 간부가 되어 그 짓을 저질렀다. 박 올리바 수녀는 체포되지 않고 박 루치아 수녀만 체포되었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남달리 외모가 수려하여 사람들 눈에 띄었고 더욱이 불의를 보고도 참고 넘어가지 못하는 성미라 공산당원이 되어 설치는 친척들에게 늘 회개하라 충고했으므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증언자들은 입을 모은다. 1950년 10월 연합군이 평양으로 진격했다. 연합군이 평양에 가까워지자 인민군들은 수감자들을 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10월 10일 경에 순안의 산모퉁이로 끌고 가는 수감자 대열에 낀 수녀를 본 사람이 있는데 수감자들이 산모퉁이를 돌아갔을 때 많은 총성이 울렸는데 그때 수녀가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10월 11일에 살해당했다는 증언이 유력하므로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회에서는 박 루치아 수녀의 선종일을 10월 11일로 기억한다. 박빈숙 루치아 수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실했고 자신의 소명을 완수했고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

자료 출처 -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원산수녀원사(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Living Benedictine Values. Short Biographies of fourteen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Sr. Mailda Handl, 1977)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여름호(Vol.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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