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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강원감영과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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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9 ㅣ No.1145

강원감영과 순교자들*

 

 

국문초록

 

강원도의 첫 순교자 김강이(시몬)는 1815년 강원도 울진에서 체포되어 강원감영이 있는 원주로 압송되어 8개월 옥중 생활 끝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자손들에게 이어져 조카는 김사건(안드레아)은 1839년에, 둘째 아들 김양범(빈첸시오)과 손자 김선행(필립보)은 1867년에 순교하였다. 그리고 최해성(요한)은 원주 부론 서지 교우촌 회장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1월 말에 체포되어 강원감영에 갇혔고, 갖은 고통과 심문을 받은 후 그해 7월 말에 순교하였다. 그의 고모 최 비르짓다는 조카를 면회하러 왔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또한 병인박해(1866~1873)에 강원도에서 체포되어 서울 등지에서 순교한 이들이 많지만, 강원감영에서 문초를 받은 기록이 있는 박 요셉의 신앙과 순교 사실을 살펴보았다. 

 

강원감영이 있는 원주에서 순교한 세 분의 복자와 순교자는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모셨고 교회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였다. 신앙을 지키려고 가난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은 교우촌을 이루어 함께 신앙을 실천하였고,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애긍시사와 자선사업 등 애덕실천에 적극적이었다. 박해로 인해 짧게는 2개월, 길게는 8개월 옥에 갇히게 되어 온갖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를 참고 견뎌냈으며 의연하고 솔직하게 신앙 고백을 하였다. 결국 김강이(시몬)는 1815년 11월 5일, 최해성(요한)은 1839년 7월 29일, 최 비르짓다는 1839년 11월 3일 밤 순교하였다. 이들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

 

 

Ⅰ. 서론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해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통합적으로 추진하였고, 2004년 7월 5일 시복 조사 법정을 개정하였다. 원주에서 순교한 김강이(金鋼伊, 시몬) · 최해성(崔海成, 요한) · 최 비르짓다는 원주교구에 의해 시복시성 추진대상자에 올려져 124위에 포함되었다. 103위 성인들 중 기해박해 순교자들은 서울에서 순교하였지만, 124위 순교자들 중 기해박해 순교자들은 대부분 지방(대구 · 전주 · 원주)에서 순교한 이들이다. 124위 순교자들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諡福)1) 되었다.

 

시복식은 하느님 나라에 계시는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현재 삶의 자리에서 영웅적 덕행 실천과 순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 복자(福者)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덕의 방향을 제시하고, 신자들의 삶을 거룩하게 정화하며, 그리스도에게 더욱 일치하도록 가르치는 산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2)

 

을해박해(1815)부터 기해박해(1939년)와 병인박해(1866~1873)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이 옥에 갇히고 심문을 당하고 순교한 강원감영과 순교자들에 관한 종합적 연구는 없었다. 시복된 지 4년이 지난 지금 124위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이 식어져 가고 있다. 시복식은 우리를 위한 것인데,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 행사로만 기억되어선 안된다. 이제 원주교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124위 순교자들, 특히 원주에서 순교한 세 분의 복자와 병인박해에 원주에 갇혔다가 서울에서 순교한 순교자가 제시한 성덕의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는 지, 그분들처럼 영웅적인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 분 복자와 순교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분들이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을해박해와 복자 김강이(시몬)


1. 복자 김강이

 

1801년 신유박해시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탄압의 근거가 되어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가난한 삶을 살면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1814년 전국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고,3) 이러한 상황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지방 관리에 의해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충청남도 서산지방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생’이라고 불렸던 김강이는, 의연하고 용감한 성격에 상당히 많이 재산도 갖고 있었다.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가 오기 전에 신자인 김종악을 찾아가 천주교 신앙을 배웠다. 그는 즉시 많은 재산과 집안 하인들을 포기하고 동생 김창귀(金昌貴, 타대오) 가족과 함께 고향과 가까운 친지들을 떠나 전북 완주군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게 되어 더욱 믿음이 강해졌고, 여러 차례 주문모 신부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801년 박해 때 포졸들은 고산지방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알려진 그를 체포하려고 그의 인상 특징을 적은 것을 가지고 1년 이상 추적하였다. 포졸들의 수색을 피해 숨어 다니느라 겪어야 했던 궁핍과 고난 등은 이루 다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남편의 행방을 묻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1년 후에야 돈을 주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때 그는 포졸들의 수색을 더 잘 피하기 위해 행상인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발자취들을 숨겨주었다. 박해를 피해 다니는 중에서도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몇몇 사람을 입교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박해가 진정되자, 이렇게 장사하면서는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행상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경북 청송군 진보의 머루산으로 이주하였다. 입교시킨 신입 교우 몇몇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 거기에서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열성은 인근에 사는 안중재 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치 못하여 여러 차례 이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강원도 울진으로4) 가서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도 교우촌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마침 경상도에 박해가 일어나자,5) 전에 그의 집 하인이었던 한 신자가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가까운 안동진영에 그를 밀고하였다. 이에 그는 1815년 4월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옥(獄)에 갇혀 있던 많은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포졸들이 그의 집에서 상당한 재산을 약탈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관장(官長)에게6) 요청했다. 이에 관장은 동정심에서였는지 아니면 관가의 재산을 아끼려고 했는지 몰라도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약탈당한 거의 모든 재산을 돌려받아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어 얼마동안 그들의 굶주림을 덜어주었다. 그는 여러 번 문초를 당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안동부사는 그해 5월 그를 동생과 함께 그가 살던 울진이 강원도였기에,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江原監營)으로7) 이송하였다.

 

원주 감영에 도착한 그는 인근지역에서 체포되어 온 6∼7명 신자들(김윤집 · 김윤삼 · 안중재 · 안운득 · 김복심 등)을 보았다. 이들이 원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옥에8) 갇혔고, 법정에 처음으로 끌려 나갔다. 그의 동생 김창귀는 형벌을 감내할 수 없어 배교한 후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배교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온갖 회유와 모든 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고 솔직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때 보여준 그의 인내와 항구함은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관례에 따라 사형결정 판결문에 서명하게 되었다. 전 강원관찰사 조홍진이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사학죄인 김강이...... 사학의 우두머리인 김종악을 찾아가 그가 구술하는 밀지를 받았으며,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사학 서적을 전했고, 여러 해 외우고 익혀 온 몸이 빠져 물들었으니 해당 법조문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김창귀는 옛 습관을 고치지 않고 십계를 강론하고 외운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므로 아울러 자백을 받은 뒤에 전례에 따라 옥에 가두었습니다. 김윤집· 김윤삼 등은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사학 서적을 전해 익혔지만 능통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안중재는 비록 김강이에게 유혹을 받았을 지라도 끝까지 노쇠했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았고, 안운득과 김복심은 체포될 때 이미 의심할 만한 일이 없었으며 원통하다고 말했지만 역시 근거로 삼을만한 단서가 있었는데, 사학 무리를 다스리는 옥사는 지극히 엄중해야 하므로 김윤집·김윤삼과 함께 엄히 가두었습니다. 이 밖에 물들거나 이어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압수한 책자는 모두 72건이므로 우선 보관해 두고 회답을 기다려 불사를 생각입니다. 아울러 해당 관서에 명하여 아뢰어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9) 하였다.

 

형조에서 “김강이는 해당 법조문을 시행함이 합당하니, 감사에게 명해서 결안을 받아 보고한 뒤에 처리토록 하고, 김창귀는 이보다 가벼운 법조문에 합치되는 것 같으며, 김윤집 · 김윤삼 · 안중재 · 안운득 · 김복심은 아울러 감사에게 명해서 경중에 따라 조사해서 석방하고, 압수한 사학 서적은 즉시 불사르라는 뜻으로 일체 분부하소서.”라고 하니, (순조) 임금이 윤허하였다.10)

 

당시 강원관찰사 남이익은11) 사학죄인 김강이 등을 조사한 뒤에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사학죄인 김강이는 전례에 따라 결안을 받았고, 김창귀는 장(杖) 1백에 유 삼천 리로 보성군에 정배하였으며, 김윤집 등은 경중에 따라 조사한 뒤에 석방했습니다.”라고12) 하였다. 그러나 사형에 대한 임금의 회신이 도착했을 때, 그는 형벌로 인한 상처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질(痢疾)까지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형집행은 연기되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815년 11월 5일(양 12월 5일) 옥에 갇힌 지 8개월 만에 옥사하였다. 그때 나이는 50여 세였다.13)

 

영원한 불멸의 보화를 알게 되면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 나선 것처럼 (마태 4,20) 그는 즉시 삶을 완전히 바꾸어 지상의 재화를 아낌없이 버리고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주문모 신부와 함께 하면서 성사를 받아 그의 신앙이 더욱 강화되었고,14)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애덕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결과 작은 교우촌이 생겨났다. 압수되어 불태워진 책이 모두 72건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기도서와 교리서 등을 필사하여 널리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신실한 믿음살이가 지상에서부터 빛의 삶을 일군 것이다. 고문으로 심약해져 배교한 동생을 보면서도 그는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끝까지 천상의 보화를 증거하였다. 그는 서산에서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인 후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해 전라도 고산으로, 경상도 진보 머루산으로, 강원도 울진으로 떠났다가, 마침내 원주에서 하늘로 떠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강원도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신앙은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이어져 둘째 아들과 손자, 그리고 조카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다블뤼(Daveluy) 주교는 “김강이가 순교한 후 그의 유덕(遺德)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하던 이 지역 한 가운데서 일시적으로 발했던 섬광이요 짧은 빛에 불과했지만, 그가 여러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영향을 주었는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거기서도 당신의 영광을 보셨는지 누가 알겠는가?”라고15) 하였다.

 

 

2. 조카 복자 김사건(안드레아)과 둘째 아들 김양범(빈첸시오), 손자 김선행(필립보)

 

김강이의 순교 신앙은 그의 자식과 친척들에게 이어졌다. 동생 김창귀는 형과 함께 입교하면서 재산을 버리고 산속으로 이주하였기에, 남아있는 재산이 변변치 않았다. 동생 김창귀의 아들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 1794~1839)은 선천적으로 교만하고 과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받은 신앙 교육의 영향으로 온순하고 겸손하며 자애로운 사람이 되었다. 김창귀가 보성으로 유배 갈 때 김사건(7살)은 어린 나이를 이유로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건은 아버지의 유배지에 가서 부친을 위로해 드리는 등 효도를 다했다. 김사건은 상주 앵무동(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에서 1827년(정해) 6월에 체포되어 상주진영으로 갔다가 대구감영에 수감되었다.16) 그는 배교를 강요하며 가한 혹독한 고문인 뭉둥이로 찌르는 형벌과 주리 등을 당하였지만, 믿음이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신앙을 굳게 하였다. 12년간 계속 수감되어 있다가 1839년 4월 사형 선고 소식을 듣자, “마침내 우리는 우리 생애를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겠군요. 어떻게 그것을 그분께 감사드려야 할까요?”라고 말하였다.17) 그해 4월 14일 대구에서 이재행(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과 함께 46세의 나이로 참수로 순교하였다.18)

 

김강이의 둘째 아들 김양범(빈첸시오)은 11살 때 부친이 순교하였다. 어린 시절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장성해서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재산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1859년 경신박해(庚申迫害, 1859.12~1860.8)를 당해 재산을 모두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관가에서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후 충남 홍주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와 당진시 합덕읍 신리 사이의 마을)로 이주해 교우촌에서 지내면서 선교사의 복사를19) 하였다. 그런데 1867년 가을(9월, 10월)에 먼저 김양범(빈첸시오)의 장남 김선행(필립보)이 수원 포졸에게 체포되어 수원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해 9월에 김양범(빈첸시오)이 며느리를 만나기 위해 갔는데, 이를 본 배교자가 그를 신고하였다. 그는 포졸이 오자 피하지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순교하기 위해 자수하였다. 수원 유수부(留守府)로 압송되어 매를 많이 맞고 그는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20)

 

이처럼 김강이는 강원도 울진에서 잠시 살다가 1815년에 체포되어 원주로 이송된 후 8개월 옥살이를 하다가 그해 11월에 순교하였고, 둘째 아들 김양범과 손자 김선행은 수원에서 1867년에 순교하였다. 이렇게 3대가 순교한 것이다.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동생 김창귀는 혹독한 고문에 의하여 배교한 후 귀양을 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신앙은 그의 아들 김사건에게 이어졌고, 김사건은 1839년에 대구에서 순교하였으며, 2014년 시복되었다. 그리고 김양범(빈첸시오)은 시복운동 중에 있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있다.

 

 

Ⅲ. 기해박해와 복자 최해성(요한) · 최 비르짓다


1. 복자 최해성(요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 겸 교수인 르그레주아(Legrégeois) 신부는 최양업 신부에게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만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1839년에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崔海成, 요한, 1811~1839)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최해성이 원주에서 살았기에 서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기해박해 당시 현석문(玄錫文, 가를로, 1799~1846) 등이 수집한 《기해일기》에 빠졌던 것이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그의 행적에 대한 구술 내용을 적은 종이를 발견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 아들과 친구들로부터 증언을 들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21) 또한 최해성에 관한 기록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관찬 기록인 《승정원일기》 등에 있다.

 

최해성의 집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먼 친척(16촌)이었고, 복자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1815)은 그의 외삼촌이다.22) 1801년 박해에 조부가 귀양을 가게 되자 온 집안이 조부를 따라서 유배지까지 갔고, 1801년 박해에 조부가 귀양을 가게 되자 온 집안이 조부를 따라서 유배지까지 갔고,23) 최해성은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양박’이로 불리며 성품이 총명하고 온순한 그는 신앙 교육의 영향으로 올곧게 자랐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형제들이나 이웃들과 나무랄 데 없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기에, 조숙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장성한 그는 주위 정세로 보아 외교인들 한가운데 살면서는 천주교를 합당하게 실천할 수가 없기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 서지 마을로24) 이사하였다. 서지로 오게 된 것은 이 마을에 그의 외가 친척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25)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유배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잘하기 위해 더 궁벽한 시골로 이주한 것만 보아도 그의 믿음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서지에서 그는 작은 교우촌을 이루어 교리를 가르치며 착한 표양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영혼의 일만을 생각하면서 자주 신자들을 권면했다. 그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심화시켰고, 자신도 순교의 기회를 얻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극도로 비참한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항구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애긍 시사와 자선 사업 등을 실천하였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다하였다. 자기 마을에 사목방문을 온 선교사 신부에게26)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선교사는 그의 이 모든 덕행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감동하였고, 그를 교우촌 회장으로27) 임명하였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후 성령 칠은(지혜, 깨달음, 일깨움, 지식, 용기, 효경, 경외)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다. 이 은사 중에서 특별히 받은 은혜는 용기와 깨달음일 것이다. 용기는 신앙생활 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심을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주는 힘이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순교로써 자신을 살아있는 희생의 제물로 하느님께 바칠 의욕이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는 전통적인 가르침처럼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히 일치하는 방법이고, 모범인 그 분을 제일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1월 말 사악한 외교인이 서지 교우촌을 고발하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최해성은 부모와 가족과 신자들을 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충북 제천의 큰 고을인 제천시 백운면 꽃당이(화당리, 花堂里)로 피신시켰다. 포졸들은 신자들의 흔적을 쫓아 그 마을까지 갔다.28) 그들은 신자들이 그곳에 있음을 확신했으나 어느 집에 있는지 몰랐기에 좋지 않은 평판을 받을까봐 마을을 배회하면서 탐문하였다. 그때 그들은 부주의한 노인에게서 교회 서적 한 권을 빼앗았다.29) 이때 공포에 사로잡혀 사건에 연루될까 하는 두려움에 자기 자신은 밀고만 하면 안전해질 것이라 생각한 예비신자가 제천현감을 찾아가 자수하였다. 현감은 즉시 죄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포졸 6〜7명을 보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앗고 상당수의 신자들을 결박했다. 이때 이 마을의 명문 가문인 남씨(南氏)에게 그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 관례는 양반에게 마을의 치안을 맡긴다는 구실로 포졸들이 통보없이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30) 이에 남씨는 포졸들을 붙잡아 결박하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였다. 남씨의 하인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포졸들을 붙잡아 결박했고, 붙잡힌 신자들을 풀어주었다. 남씨는 포졸들을 자신의 사랑채와 마주 보고 있던 나무에 매달아 놓은 다음 호된 매질을 하며 이 일의 주동자들이 누구인지 말하도록 했다. 그러나 체포를 면한 형리가 현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현감은 다른 포졸들을 급파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모두 이미 달아나거나 침범할 수 없는 집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몇몇 신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나치게 서둘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여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신자들은, 며칠 동안 잠복해 있던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제천현감에게, 이어 청주목사에게, 마침내 충청관찰사31) 앞에까지 끌려갔다. 몇몇은 여러 달 동안 오래 구금되었다가 풀려났고, 배교하고 풀려난 이들도 있었다.

 

이때 최해성은 가족들을 꽃당이에 피신시킨 다음 교회서적들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가던 중 포졸들과 마주쳤다. 포졸들은 그를 쇠 채찍을 휘두르며 체포하였는데, 천하장사인 그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는 포졸들에게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던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의식을 잃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주목하였다. 그러자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으로 잡혀가는 길목인데도 느닷없이 힘과 활기가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최해성이 24년 전 강원감영에 끌려온 김강이(시몬)처럼 감영의 판관(判官)32) 앞에 섰을 때, 판관이 “네가 사교(邪敎)를 따른다는 것이 사실이냐?”라고 물었다. 그는 “저는 사교를 모릅니다. 다만 천주교를 실천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족과 이웃들이 숨어있는 곳을 밀고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혹독하게 매질을 당했다. 이에 그는 “저는 저의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천주교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며칠이 지나 상처가 낫자 판관이 부드럽게 말했다. “만일 네가 네 종교를 배반한다면 너는 네 국왕께 충실한 백성이 되는 것이고, 네 재산도 모두 돌려주겠다. 그러나 배교를 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고문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제게 원주 지방을 다 주신다고 해도 저는 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원주 고을의 격언이 되어 외교인 아이들이 언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고백이 그만큼 진실한 것이며, 사소한 것을 위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대답에 그는 100대가 넘은 신장(訊杖)을 맞고 옥에 다시 갇혔다. 그 후 부활대축일 이튿날 월요일에 핀관이 “끝내 네가 죽기를 바라는 게구나”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죽는 걸 두려워하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에게 똑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기를 위해서 정의(正義, justice)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의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넘치는 성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자비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에 핀관이 크게 분노하여 곤장 등의 가공할 만한 형벌을 명하면서 말했다. “너의 종교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치도록 하마.”라고 하였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이렇게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된다는 말이냐?”라고 묻자, “저는 하느님 나라에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너는 죽으면 죽었지 배교하지 않겠다는 거구나”라고 하면서 고문을 가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희생적인 자세가 그리스도의 자세를 닮은 것이다. 순교하는 것이 그분과의 일치이며, 하느님께 대한 봉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형벌을 기쁘게 참아내는 모습을 보던 판관은 “참으로 천하장사로다.”라고 하였다.

 

옥으로 다시 보내졌다가 곧 관찰사(觀察使)33) 앞으로 끌려 나왔다. 거기서 몽둥이 매질과 곤장과 팔 다리에 주리를 트는 형벌을 당하면서 밀고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이는 그에게 헛수고일 뿐이었다. 관찰사는 그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해 보라고 했고, 이에 그는 기쁘게 설명하였다. 다시 고문이 가해졌고, 그의 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오직 예수 마리아의 도우심만을 청할 생각뿐이었다. 이틀 후 심문이 되풀이 되었고, 그는 밤새 매를 맞았다. 결국 그는 21차례의 문초와 18번의 고문을 당하였다.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당하였는지 살과 가죽이 헤어져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뼈가 으스러졌다. 문초 중에 당한 형벌 외에도 형리(刑吏)들에게 온갖 폭행을 당하였다. 하루는 그가 옥리(獄吏)에게 칼(枷)을 좀 들어달라고 청하고는 그 속에 들끓는 머릿니(주발충, 蛀髮蟲)를 잡아낸 다음 다시 칼을 채워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옥리는 잠시나마 그 무거운 칼을 벗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니오, 내가 지고 있는 것은 관장(mandarin)의 명령이니 나는 그것을 지고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를 밖으로 끌어내 그의 발에 족쇄를 채우고 반나절 동안이나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옥리 하나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주고 먹을 것을 조금 주었다. 한참만에야 의식이 돌아온 그는 그를 위로하러 와 주셨던 하느님과 성모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렸고, 어서 당신들 곁으로 불러달라고 청하였다. 이틀 뒤 법정으로 끌려가 두 팔이 등 뒤로 단단히 결박된 채 반나절을 매달려 있었다. 겨우 숨이 붙어 있어 보일 정도였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판관은 그를 죽도록 마구 치라고 하였다. 거의 반시간 동안 그를 때린 다음 옥으로 끌고 갔다. 그야말로 온 몸이 너덜너덜 찢겨나간 시체와 같았다. 그가 기운을 되찾도록 이십여 일을 놔두었다가 다시 끌고 나가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가 “제가 제 육신에 잠시 목숨을 부지하려고 제 영혼을 영원히 죽일 수는 없습니다. 임금과 정의를 위해 죽기로 결심했던 신하가 배반을 한다면 그는 불충실한 반역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크나크신 하느님을 신봉하던 제가 어떻게 고문이 무섭다고 이제 와서 부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격분한 판관은 매질을 배가하라고 명령했다. 다리뼈 두 개가 부러져 두세 치(寸, 약 3.03cm) 되는 뼛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몸에는 더 이상 몽둥이를 댈 곳이 없었다. 등뼈가 열려서 그 속의 내장이 밖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양반으로서의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오직 구세주의 수난만을 생각하며 그분의 사랑을 사랑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갚을 생각뿐이었다.

 

이 무렵에 그는 가장 격렬한 유혹을 겪어 마음이 온통 동요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놓였다. 다행히도 아주 특별한 은총이 그에게 내려져, 그를 강화시키고 위로하였다. 이에 그는 인성(人性)의 외침 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으며, 그의 마음은 다시 평화와 기쁨을 찾았다. 마침내 마지막 고문이 한 번 더 가해졌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강원관찰사 홍치규(洪稚圭)는34) 임금에게 “최해성을 법대로 처단케 하소서.”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원주의 사학죄인 최해성은 사학에 깊이 빠진 죄가 있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의 요서 · 요언 조목에 이르기를 ‘무릇 요서 · 요언을 지어내거나 말로 전해서 대중을 미혹시킨 자는 참수에 처하되, 십악(十惡)을 범해서 사형시킬 자는 결단코 때를 기다리지 말라’고 했으니, 이 법조문을 시행하는 것은 어떨지요”라고 하였다. 이에 “전교를 받들어 그 법조문을 따라 시행하라.”라고35) 재가하였다.

 

사형선고를 받고 약 2개월을 기다린 그는 후임 관찰사 이광정(李光正, 1780~1850)이36) 부임한 후 1839년 7월 29일(양 9월 6일)37) 2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천국으로 개선하는 마당으로 내려갈 날이 밝아왔을 때, 사형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전부 먹었다. 그가 영광스럽게 최후의 형장으로38) 끌려 나갈 때, 그동안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형벌하던 옥리들과 백성들이 그를 뒤쫓아 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옥에 갇혀있던 이군선(李君先) 등 6명은 풀려났다.39)

 

이처럼 그는 조부가 신앙 때문에 유배를 갈 정도로 신앙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다. 더 가난한 산골 마을인 서지 교우촌에서 성사의 은총을 체험한 그는 철저한 기도 생활과 희생을 하며 이웃들에게 자선을 실천하였고, 회장으로서 신자들을 충실히 이끌었다. 순교의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순한 양처럼 체포되었다. 그는 감영의 옥에 8개월간 갇혀 있으면서 간교한 배교의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온갖 고문으로 뼈가 드러나고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할 수 있었다.

 

제 5대 교구장이며 순교자 기록을 남긴 다블뤼(Daveluy, 1818~1866) 주교는 《조선의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최 요한은 가장 훌륭한 순교자들 중 한 사람이고, 박(취득) 라우렌시오와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놀라운 의연함으로 무수히 많은 잔혹한 고문을 감내한 것으로 주목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순교사 비망기》에서 “우리는 이 불굴의 신앙 투사요,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웅이 감내해야 했던 혹독한 고문들의 지극히 적은 부분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박(취득) 라우렌시오를 비롯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을 겪었던 몇몇 교우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 하느님께서 이 교우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빛나게 하시고, 또 그의 비할 데 없는 영관을 더욱 장식하시려고 아주 각별한 도우심으로 모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그에게 목숨을 보존해 주셨음을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21차례 신문을 치렀고, 18번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했다. 이 모든 일이 교우들이 있는 장소로부터 꽤 멀어진 곳에서 일어났기에 그 당시 그의 일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어디서나 당신의 계획을 품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너무 비겁하여 그를 따르지 못한 몇몇 교우들에게 그가 치렀던 이 모든 싸움을 줄곧 목격하게 허락하시어, 그들이 옥에서 나왔을 때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전능으로 베푸신 모든 경이로운 일들과 이 불멸의 순교자의 지울 수 없는 승리를 알리게 하였다.”라고40) 증언하였다.

 

 

2. 복자 최 비르짓다

 

최 비르짓다(1783~1839)는 최해성(요한)의 고모이다.41) 1801년 박해 당시 신자가 아니었던 남편 유씨는 황사영(알렉시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고, 그녀는 남편을 따라 유배지에 가서 지냈다.42) 어느 날 남편이 죽을 위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대세를 줄 교우를 찾아 불러 올 수가 없었다. 이에 그녀는 영적인 친족 관계 사이의 혼인을 금하고 있는 교회법을43) 지키는 마음에서 ‘남편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면 평생을 오누이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직접 대세를 주었다. 결국 남편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에 남편의 장사를 지낸 후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게 되자, 오빠(최해성의 부친)의 집으로 왔다. 하루는 고기를 먹었는데, 나중에 그 날이 금육을 지켜야 하는 사순시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1839년 8월 최 비르짓다는 옥에 갇혀 있는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조카를 만나려고 원주 감영에 가서 옥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 판관이 그녀를 발견하고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옥에 갇혀있는 최 요한의 어머니이며, 아들을 보러 왔다.”라고 대답했다. 판관이 “그렇다면 너도 천주교인이 아니겠느냐?”라고 묻자, “예. 저도 신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판관이 “그렇다면 너는 배교하지 않는 한 아들도 볼 수 없고 나가지도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제가 아들을 보지 못할지 언정, 심지어 제가 죽을지 언정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하느님을 어떻게 부인한단 말입니까?”라고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판관은 “이 여자는 사악하다.”라고 하며,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판관은 그녀를 옥에 가두고 굶어 죽게 놔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그녀가 옥(獄)의 고통 속에서 넉 달을 지냈다. 4개월 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녀의 믿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녀에게 인간적으로는 한없는 슬픔을 주면서도 신앙적으로는 그녀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 준 것은 9월 조카 최해성의 순교였다.

 

판관은 11월 초에 “사흘 안으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라.”라고 명령하였다. 이 사흘은 그녀의 생명이 꺼지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옥리들은 밤사이에 옥에 들어가 그녀가 목에 차고 있던 칼을 조여 교살(絞殺)하였다. 그녀는 그해 11월 3일과 4일(음력)의 밤, 5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한 옥리의 어머니가 그 때 옥에 갇혀 있던 어떤 교우에게 “최 비르짓다는 분명 천국으로 갔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녀를 교살할 때 그녀의 몸에서 빛 한줄기가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전해 주었다.

 

이렇게 교회 규정을 철저히 지키며 굳은 신앙을 가졌던 그녀는 신앙을 증거할 기회가 왔을 때,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피하지 않고 곧바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로인해 옥에 갇혀 있는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조카를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였고, 고문을 당하며 약 4개월 동안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고 먼저 순교한 조카를 만나러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Ⅳ. 병인박해와 순교자들

 

병인박해(1866~1873) 당시 강원도 출신으로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혹은 강원도에서 체포되어 서울·수원·해미 등지에서 순교하거나 죽음을 당한 이들이 30여 명 있다. 이들 중에 교회 기록에는 순교자로 되어 있으나, 『포도청 등록』에는 신앙을 그만두었다고 한 이들도 있다.44) 이들이 강원도에서 체포된 경우 강원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등지로 이송되었는지, 아니면 체포되어 바로 서울 등지로 이송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다.

 

박해에 체포되어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에서 형벌을 받은 이로 분명하게 기록된 이는 박 요셉(경숙, 도연, 정숙)이다. 그는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 대숲(내정금)에 살면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7년 10월 원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영문(營門)의 마당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영형(營刑)을 7, 8차례나 받았다. 하지만 평상시에 순교하자고 다짐하고 간절히 준비하였기에,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약해진 그의 몸 좌우에서 군사들이 소리를 질러가며 형장(刑杖) 1차에 피가 버선을 적셨고 또 땅에 피가 스미어 젖기도 하였다. 이 모양을 2, 3개월 당하였다. 한 달이면 세 번씩 피에 젖은 버선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천주께 기도하여 순교하게 해달라고 엄형(嚴刑)을 많이 받았더니, 나의 보속이 더욱 즐겁고 순교가 정해진 일이 20여 일 남았으니 매우 즐겁다.”라고 하였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가족과 이웃을 막론하고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 그는 대대로 명의(名醫) 집안으로 서울과 지방에서 의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하였다. 이때 원주판관 정익영(鄭翼永)의 아들 정원화(鄭元和)가45) 병이 위중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약을 무수히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 중에 아는 아전(衙前)이 “옥중의 죄인 박 생원이 명의이오니 보게 하옵소서.”라고 청하자, 즉시 이방(吏房)으로 하여금 그를 옥에서 불러내어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그가 약을 써 즉시 정원화의 병이 나았다. 그 후에 판관이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낫게 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사형에서 감형을 청하였고, 그 결과 평안도 희천군(자강도 희천시)으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유배된 얼마 지나지 않아 1868년 1월 대왕대비 조씨의 회갑을 맞아 내린 대사령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46) 그해 4월에 그는 서울 문안에서 유다스 역할을 하던 이를 만났는데, 그전 친구로만 알고 반갑게 손을 잡으며 “다시 만나보니, 이는 천당에서 보나 진배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그가 남산을 보고 웃으면서 “이제야 서학꾼 괴수를 잡았다.”라고 하면서 그를 체포하였다. 좌포도청에 갇혀 있으면서 차꼬(족가, 足枷) 틀을 두드리며 흥을 내어 열심히 기도하였던 그는 그해 5월 9일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아내 윤 카타리나도 남편과 같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47)

 

 

Ⅴ. 결론

 

지난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식 강론 중에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교황의 말씀처럼 강원감영에서 순교한 세 분의 복자와 순교자들은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모셨고 교회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였다. 신앙을 지키려고 가난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은 교우촌을 이루어 함께 신앙을 실천하였고,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애긍시사와 자선사업 등 애덕 실천에 적극적이었다. 박해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되어 온갖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를 참고 견뎌냈으며 의연하고 솔직하게 신앙 고백을 하였다.

 

조선시대 감영은 한 강원도의 행정 책임과 시정의 성패를 책임지고 있던 관찰사가 근무하는 관아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충청 · 경상 · 전라감영보다는 적지만 강원감영(원주)에서도 1815년, 1839년, 1867년에 천주교인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형을 하였다. 강원감영의 첫 순교자 김강이의 순교(1815년)는 계속 이어져 최해성(1839년)과 최 비르짓다가 순교하였고, 병인박해(1867년) 당시에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이가 있었다. 세 분의 복자와 순교자가 짧게는 2개월, 길게는 8개월 갇혀있었고,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순교하였던 강원감영은 그분들이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하며,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한 곳이다. 그분들이 하느님께 약속받은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새로운 힘을 얻었던 곳이다. 이곳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마음 깊이 평화와 진리, 사랑의 영적 근원에 끌려 그곳으로 다가가게 해 주는 평화와 조화를 지닌 곳이다. 이곳은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성찰하며, 정의와 평화의 기회 및 장소로 주어진 곳으로 인간에 대한 폭력과 불의, 죽음의 문화가 저지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화해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완전한 새로움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심을 일깨우고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친교를 맺으며, 회개와 쇄신을 계속해야 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분의 복자와 병인박해 순교자 외에 강원감영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신앙을 증거한 이들이 있을 것인데,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

 

* 이 논문은 2018년 9월 14일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원주시와 천주교 원주교구가 주최한 ‘강원감영에 관한 역사문화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로 토론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의견을 종합

하여 보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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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각, 〈시복시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성과 신앙》 34, 수원가톨릭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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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복(諡福, Beatificatio)은 어떤 나라, 도시, 교구 또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 교황의 교령으로 한정적으로 하느님의 종을 공적인 공경 대상으로 승인하고 미사성제와 성무일도에서 기념하도록 하는 교황의 행위 일체를 말한다(최인각, 〈시복시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성과 신앙》 34, 수원가톨릭대, 2007, pp.13~14).

 

2)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시복시성절차 해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1, pp.34~35; 최인각, 위의 글, p.6 참조.

 

3) “영의정 김재찬이 차자를 올려 여러 도(道)의 기근과 여역(癘疫) 및 서울에 곡식이 다한 정상을 아뢰고, 8월의 감시(監試)를 9월로 물려 시행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순조실록》 권 18, 순조 15년(1815) 6월 26일 경진) ; “여러 도의 가을철 조련(秋操)을 정지했으니, 육도(六道)가 기근과 여역(癘疫)을 겪은 나머지이기 때문이었다.”(《순조실록》 권 18, 순조 15년 7월 14일 정유).

 

4) 조선시대에 강원도 소속이었던 울진군이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1962. 11. 21)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5) 경상감사 이존수가 아뢰기를, “신유년(1801)의 소탕 뒤에는 의당 사당(邪黨)의 여얼이 다시 번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대령(大嶺) 이남은 우리 동방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찍이 사악한 종자가 흘러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추악한 종류가 청송 · 영양 · 진보의 심산 벽촌에 숨어 들어와 저절로 서로 전하여 익히게 되어서 마을 전체가 그릇되어 버렸습니다. 청송의 죄인 최봉한은 정약종을 따라 배우고 주문모로부터 전해 받은 뒤에 사장(邪贓)을 수습하여 몰래 재를 넘어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는 유민(流民)을 유혹하여 모아 교주가 되었었는데, 잡혀와 감영의 옥에 갇혔다가 곧 죽었습니다. 그리고 죄인 안치룡 · 김약고배 · 고성대 · 고성운 · 서석봉 · 이선복 · 김진성 · 김악지 · 신광채 · 손두동, 女성열 · 윤덕과 영양의 죄인 김종한 · 이희영 · 김희성 · 김복수 · 김광복과 진보의 죄인 김시우 · 최윤금 · 김광억 · 김흥금 · 김험동, 김광억의 처 분금 및 그 아들 김종건, 김흥금의 아들 김장복 · 딸 김작단, 김험동의 아들 김갑득 · 딸 김시임과 김정임 등은 서로 전하여 익히게 되어서 빠져들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율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니, 그를 윤허하였다(《순조실록》 권 18, 순조 15년 6월 18일 임신).

 

6) 다블뤼 주교는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858〜1859,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 신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과 Notes pour l'Histoir des Martyrs de Corée, 1859〜1860,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mandarin’(관리)으로 표기했다. 당시 안동에는 정 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1명, 종 5품의 판관(判官) 등이 있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경상도조 참조). 이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로 표기할 것이다.

 

7) 조선시대 강원감영은 태조 4년(1395년) 원주에 설치되어 1895년 폐지될 때까지 정3품의 대도부호사(大都護府使)가 관할하는 강릉대도호부, 정3품의 목사(牧使)가 관할하는 원주목,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관할하는 양양 · 삼척 · 회양 · 춘천 · 철원 도호부, 종4품 군수(郡守)가 관할하는 평해 · 통천 · 고성 · 간성 · 영월 · 정선 · 평창군, 종5품 현령(縣令)이 관할하는 울진 · 흡곡 · 금성현, 종6품 현감(縣監)이 관할하는 이천 · 평강 · 김화 · 낭천 · 홍천 · 안변 · 양구 · 인제 · 횡성 · 안협현을 관할하였던 강원도의 정치 · 문화 · 경제 등의 산실이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강원도조(江原道條); 원영환, 〈강원감영의 사적고찰〉, 《강원사학》 4, 강원사학회, 1988, p.44; 조승호, 〈강원감영의 행정체제와 시설의 변천〉, 《강원문화연구》 16, 강원도 강원문화연구소, 1997, p.81).

 

8) 옥의 위치는 강원감영 내 연못이 있는데, 연못 뒤쪽에 있었다. 연못에서 북문쪽으로 중영(中營)과 군기고(軍器庫)가 있고, 서문쪽으로 화약고가 있는데, 화약고와 중영 사이 위쪽에 있었다.

 

9) “江原前監司趙弘鎭 狀啟 以爲邪學罪人金鋼伊等更査次...... 金鋼伊委訪邪魁之金宗岳 受其口授之密旨 傳其迷人之邪書 幾年誦習 全身沈染 合施當律..... 安仲才 雖被鋼伊之誘綜以衰老而不從...... 現捉冊子 合爲七十二件 故姑爲藏置 待回啓燒火計料 竝令該曹稟處 刑曹啟言 金鋼伊 合施當律 令道臣捧結案狀聞後稟處.”(《일성록》, 순조 15년 10월 18일자). 조홍진(1743~1821)은 순조 13년(1813) 7월 강원관찰사로 임명받아 순조 15년(1815) 7월 동지중추부사로 떠날 때까지 관찰사 업무를 수행하였고, 형조판서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후임 강원감사 이정규(李廷奎, 1772~1813)는 순조 15년(1815) 7월 임명받아 3개월 활동하다가 그해 10월 갑자기 죽었다(박문성, 《역대 강원도 관찰사 인물고》, 원주문화원, 2017, pp.466~467).

 

10) “江原道邪學罪人金鋼伊 篤信訞言 口誦心悅 依例捧結案 金昌貴 觀於道啓 別以淺深合置惟輕之典 金允執等 別無濡染之跡 從輕重勘放 現捉邪書 卽爲燒火之意 分付 何如 判付啓 依允.”(《승정원일기》, 순조 15년 10월 18일자).

 

11) 남이익(南履翼, 1757~1833)은 순조 15년(1815) 10월 17일 강원 관찰사로 임명받아 순조 18년(1818) 10월 6일 사간원 대사간으로 떠날 때까지 관찰사 업무를 수행하였고, 형조판서 · 함경도 관찰사 · 사헌부 대사헌 · 한성부판윤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2) “江原監司南履翼 以邪學罪人金鋼伊等勘處 馳啟 狀啟 以爲邪學罪人金鋼伊 則依例捧結案 金昌貴則杖一百流三千里 定配於寶城郡 金允執等從輕重勘放.”(《일성록》, 순조 15년 11월 12일자).

 

13) 다블뤼. 《조선 순교사 비망기》, 조현범 역주,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3월호, pp.4~9, 4월호 pp.4~5;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 pp.76~78;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최석우 · 안응렬 역주, 분도출판사, 1980, pp.71~73; 유은희, 《이슬은 꿈이 되어》, 순교의 맥, 2012, pp.98~100 참조.

 

14) 교회법 제 4권 교회의 성화임무, 제 1편 성사에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신약의 성사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니 만큼 이로써 신앙이 표현되고 강화되며 또 하느님께 경배가 드려지고 사람들의 성화가 이루어지며 따라서 교회의 친교를 이룩하고 강화하며 드러내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표지이고 수단이다.”(《교회법전》 제 840조).

 

15) 다블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 p.78; 《조선 순교사 비망기》, 조현범 역주, p.5.

 

16) 경상감사 이학수가 장계하였고, 형조에서 “박보록 · 안사흥 · 김사건 · 박사의 등 4명의 죄수는 범한 죄를 용서할 수 없으며, 정황 자취가 의심할 것이 없으니, 예에 따라 감사에게 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결안을 받고 아뢴 뒤에 처리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 순조 27년 6월 7일 신사).

 

17) “형조에서 또 첨부하여 아뢰기를 상주사학죄인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면서 그 묘리를 깊이 얻었고, 죽더라도 한스러울 것이 없다고 하니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 헌종 5년 4월 12일 정축).

 

18) 다블뤼, 《조선 순교사 비망기》, 연숙진 역주,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년 4월호, pp.7~9; 5월호 pp. 4~6;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 pp.119~122.

 

19) 그가 모시던 신부는 이 지역에서 1852~1857년에 사목한 매스트르(Maistre) 신부 혹은 1861~1863년에 사목한 랑드르(Landre) 신부였을 것이다(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8, pp.263~264, 각주 3; 《조선교회관례집》(1887) 2장 4항 복사에 대해 “복사는 선교사에게 시중을 들기 위해 어디든지 그를 동행하는 신자다.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으로, 너무 젊지도(25세 이하), 너무 늙지도(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않아야 한다. 그는 한자를 알아야 하며, 지혜롭고 신중하며 교양있는 훌륭한 신자여야 한다. 선교사의 사도직무 초기, 신자들을 알게 하고, 통역과 설교를 하게 하고,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복사를 고용하는 일이 있는데, 이러한 직무들은 복사에게 권위를 주고 거만해지도록 할 만한 것들이다[…]복사의 일반적인 직무는 미사를 위하여 제대를 준비하고 미사에서 응답을 하고, 성사 집전을 위한 모든 준비(초, 제병 등)를 하며, 목록을 기입하는 것이다. 그에게 목록 작성 방법을 잘 가르쳐 주면, 선교사가 옮겨 적기에 아주 용이할 것이다. 복사는 늘 선교사의 옆방에서 자고, 식사 중에 그의 곁에 있는다. 한마디로 복사는 선교사에게 시중드는 이인 동시에 선교사의 삶의 증인이다.”고 하였다(《조선교회관례집》, 한윤식 · 박신영 역, 토비트, 2013, pp.77~78).

 

20) 《병인치명사적》 9, pp.17~18; 그런데 《병인치명사적》 21, pp.103~104와 《치명일기》 366, 375와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92에는 김양범 부자가 9월에 같이 잡혀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21) 최양업 신부가 소리웃에서 1856년 9월 13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쓴 편지, 《너는 주초놓고 나는 세우고》, 정진석 역, 바오로 딸, 1995, pp.123~125; 다블뤼 주교가 1859〜1860년에 쓴 《조선순교사 비망기》, pp.395~397, 438,442(《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제5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08, pp.211~225 참조);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pp.390~391, 474~477; 여진천, 〈하느님의 종 최해성(요한)에 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 흐름, 2010; 유은희, 《이슬은 길이 되어》, 순교의 맥, 2012,pp.145~148 참조. 원주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으로 2005년 9월 배론에서 열린 순교자현양대회에서 ‘순교자 최해성 순교극’(청전동 본당)이, 시복기념으로 2014년 9월 배론에서 열린 순교자현양대회에서 ‘원주교구 뜨락에 천사의 꽃이 피었네’라는 주제(김동선 극본, 연출)로 최해성 복자 순교극이 열렸다.

 

22) 다블뤼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복자 최여옥은 전주 최씨라고 하였다. 다블뤼의 기록에는 여옥(Ie ok), 아명은 진강(Tsin Kang)으로 나온다(조현범 역주, 2012년 10월호, pp.24~25), 《순조실록》 등 관찬기록에는 봉한으로 나온다.

 

23) 《사학징의》에 의하면 신유박해에 유배된 최씨 성을 가진 이들은 형조에서 유배시킨 최해두(崔海斗)-포항 흥해, 최기인(崔起仁)-강원 양양, 최인채(崔仁采)-황해 은율, 최윤신(崔允信)-충북 영동 황간; 각도에서 유배보낸 이는 충주에서 최길증(崔吉曾)-울주군 언양, 최종해(崔宗海)-황해 신천, 홍주 최맛재(崔唜才)-전남 화순 능주, 덕산 최취공(崔就公)-전북 군산 옥구, 천안 최두거(崔斗去)-경남 산청 단성, 전라도 무장 최수천(崔壽千)-횡성 등이다(《사학징의》, 本曹酌配罪人秩, 各道罪人酌配秩, pp.178~190 참조). 유배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강원도 횡성으로 최수천, 거주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홍주와 덕산에 살았던 최맛재와 최취공으로 볼 수 있다.

 

24) 《한국지명총람》 2(강원편), 1970, 한글학회, p.250. 서지(西芝)라는 말은 지초(芝草)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25) 문막 본당 박호영 신부의 족보(《密陽朴氏 寧海公派譜》(2000)에 박 신부의 5대 조모가 전주 최씨(戊子年, 1828 생)이고, 선종연도는 없으며, 구전으로는 5대 조부는 박 토마스, 조모는 최 루시아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병인치명사적》(1925)에 “박 스테파노가 최 필로메나는 죄인의 모친이오 158에 있는 박 요셉의 계수온데, 원주 서지서 사다가 김자경에게 잡혀 요셉내외와 한 가자로 동일 동야에 목매여 치명하였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사오며”(p.97)라고 하였다. 교회 기록과 정부기록(《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84, 《치명일기》 160, 《포도청등록》 무진 11월 초3일)에 최 필로메나의 남편은 박성윤(사도요한)이다. 세례명의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한 필요한 부분이다. 족보와 교회 기록에 따르면 전주 최씨와 최 필로메나는 동일 인물로, 서지에 살고 있었다.

 

26) 당시 선교사들 중 1835년 겨울에 입국하여 서울 · 경기 · 충청도를 사목하였던 모방(Maubant) 신부일 것이다. 원주 서남단에 위치한 부론면 서지 마을은 서쪽으로는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 여주시, 남쪽으로는 충북 충주시와 접해있다.

 

27)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고, 어린이 대세 · 혼인 · 장례 · 주일과 축일의 집회 ·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에 관한 규칙을 정해주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했다는 것은 교우촌이 신부로부터 임명된 회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방상근, 〈한국교회의 회장〉,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7 참조).

 

28) 서지에서 서지고개를 넘어 사기막을 거쳐 용암리에 도착하는데, 도보로 약 1시간 30분 소요된다. 운남리를 거쳐 시루봉(734m)과 십자봉(984.8m) 사이에 있는 배재를 넘으면 화당리에 도착한다.

 

29) 이때 체포된 이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참말이지 나도 교우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일은 하찮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졸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잡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그저 지나갔다. 그것을 배교하는 말로 생각하지 않았을 까 염려한 그는 오랫동안 후회와 고민의 원인이 되었다. 1840년에 연풍 이 암브로시오 집에 머물고 있던 큰 딸에게 갔던 그는 중병이 들었는데, 겸손하고 영웅적인 인내는 외교인과 신자들을 감탄시켰다. 1841년 1월 6일 66세의 나이로 선종 직후 육체에서 풍겨 나오던 역한 냄새가 그치고 몹시 빛나는 무지개 같은 현상이 일어나 시체가 있는 방위에 머물렀다고 한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 pp.27~28).

 

30) 백성의 교화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6세기에 시작된 향약은 양반 사족들의 자치권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향약을 매개로 각 지역 유력 사족들이 백성에 대한 재판권과 형벌권까지 행사했다.

 

31) 당시 충청관찰사는 조기영(趙冀永)으로 1837년 11월부터 1839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헌종실록》 권 4, 헌종 3년(1837) 11월 18일 임진, 헌종 5년 10월 25일 정해).

 

32)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juge’(판관)로 표기했는데, 리델 주교의 《한불자전》(1880), 국학자료원, 2000, p.352에 ‘juge’는 ‘판관’이라 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번역본에는 관장(官長)으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에는 영장(營將)으로 나온다. 관장에 대한 《한불자전》에 dignité이다.

당시 원주에는 원주목사를 겸하는 관찰사 1명, 관아의 행정 실무를 지휘 · 담당하고 관찰사를 도와 행정 및 군정에 참여하는 종 5품의 도사(都事)·판관(判官) 각 1명, 종 9품의 심약(審藥)·검률(檢律) 각 1명의 관원이 있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강원도조 참조). 판관에 직속된 이는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11명, 아전(衙前) 69명, 지인(知印) 28명, 사령(使令) 31명, 기생(妓生) 23명, 관노(官奴), 관비(官婢) 9명이다(《輿地圖書》 강원도 원주목 관직조; 《輿地圖書》 15 강원도Ⅰ, 김우철 역주, 흐름, 2009, p.71).

 

33)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Gouverneur’(監使)로 표기했다. 강원관찰사(종 2품)는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와 순찰사(巡察使), 원주목사(原州牧使)를 겸직하였다(《여지도서》 강원도 관찰영 관직 관찰사조).

 

34) 사간원 대사간이었던 홍치규(洪穉圭, 1777~?)는 헌종 3년(1837) 6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헌종 5년(1839) 5월 동지중추부사로 떠날 때 까지 역임하였고, 1839년 10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박문성, 위의 책, p.475).

 

35) 이만채, 《벽위편》 권 7, 삼도치사(三道治邪)(김시준 역, 《천주교전교박해사》,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p.357). “又啓目粘連, 原州邪學罪人崔海成沈溺邪學罪, 大明律妖書妖言條云, 凡造妖書妖言, 傳言惑衆者斬, 犯十惡應死者, 決不待時, 右律施行, 何如? 判付內奉敎依右律施行爲良如敎”(《승정원일기》, 헌종 5년 7월 26일 기미). 십악은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가지의 큰 죄인데, 곧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 모반(謀叛), 악역(惡逆), 부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36) 이광정(李光正, 1780~1850)은 헌종 5년(1839) 5월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헌종 7년(1841) 2월 대호군으로 떠날 때 까지 역임하였고, 형조판서 · 한성부 판윤 · 호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박문성, 위의 책, p.476).

 

37) 최해성의 순교일이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 연숙진 역주, 《교회와 역사》, 2017, 10월호, p.10;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1839년 8월 29일(양 10월 6일)로 나온다(유소연 역, p.52).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사형판결일은 7월 26일로 나오고, 최양업 신부의 1856년 9월 13일자 서한에는 7월 29일(양 9월 6일)로 나온다. 최양업 신부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5집, p.209 각주 1 참조).

 

38) 현재 사형장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강원감영에서 원주천(原州川)을 건너 봉산동 1146-1에 있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천왕사지 경내에 서있던 당간지주(幢竿支柱, 원주시 유형문화재 49호)가 처음 순교지로 알려진 것은 역사적 근거를 대지 못한 채 “이 터는 신라초기 비마라 사지가 있었던 곳이나 그 후 강원감영이 설치되면서 사형터로 사용되었다.”라고 하였다(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인천교구 준비위원회, 《성지》Ⅱ, 성요셉출판사, 1980, p.235). 이 설은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가톨릭출판사, 1996)에도 실려 있는데,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고, 이때 뿌린 핏물이 내를 이루듯 흘려내려 돌을 적셨다. 당간 받침돌 가운데 부분에는 온통 붉은 빛이 서려 있는 데, 이는 순교자들의 피가 남긴 신앙고백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남문(南門)에서 원주천 쪽에 있는 장대(將臺)로 추정할 수 있다. 울산 병영성 장대에서 1868년 9월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가), 허인백(야고보) 등이, 부산 수영장대에서 복자 이정식(요한). 양재현(마르티노) 등 8분이 순교한 예가 있다. 이에 대해 이인재는 “지금의 중앙동 행정복지센터 앞 평원 사거리 부근에 북문거리가 있었다고 한다면, 현 태학교 사거리 아래 원주천 주차장 자리가 군사훈련도 하고 시장도 설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라고 판단되어 이 부근이 참수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하였다(이인재, 〈순교역사로 본 강원감영의 공간과 역할〉, 《강원감영에 관한 역사문화 심포지엄》, 2018, 원주시 · 원주교구, p.51).

 

39) 이만채, 《벽위편》 권 7, 三道治邪; 다를뤼 주교는 “이 모든 일이 교우들이 있는 장소로부터 꽤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기에 그 당시 그의 일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어디서나 당신의 계획을 품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너무 비겁하여 그를 따르지 못한 몇몇 교우들에게 그가 치렀던 이 모든 싸움을 줄곧 목격하게 허락하시어, 그들이 옥에서 나왔을 때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전능으로 베푸신 모든 경이로운 일들과 불멸의 순교자의 지울 수 없는 승리를 알리게 하셨다.”라고 하였다(《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5, p.225).

 

40) 다블뤼, 《조선의 주요 순교자 약전》, 유소연 역, p.52; 《조선순교사 비망기》, 연숙진 역주, p.10;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1874), p.195(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p.477).

 

41) 다블뤼, 《조선 순교사 비망기》, 연숙진 역주, 《교회와 역사》, 2017, 11월호, p.4~6; 유은희, 《이슬은 길이 되어》, pp.148~151 참조.

 

42) 1801년 박해에 각 도에서 유배를 보낸 죄인들 중에 홍주 출신 유공이(劉公伊)이 사서를 배워 익혔고 사서를 몰래 숨겨둔 죄로 경남 합천 초계(草溪)에, 덕산출신 유한징(兪漢徵)이 정산필에게 사학을 배운 죄로 강원도 통천(通川)에 유배되었다(《사학징의》, 〈各道罪人酌配秩〉(《역주 사학징의》 1, 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pp.262~273 참조).

 

43) 당시 교회법 규정은 《비오-베네딕도 법전》(1917년 법전)으로 불리는 교회법의 내용과 거의 같을 것이다. 제 768조, 세례에 의해서 세례받은 자와 신친(神親)을 맺는 것은 세례 수여자 및 대부모 뿐이다. 제 1079조, 혼인을 무효로 하는 영적 친족관계는 제 768조의 규정에 의하는 것 뿐이다. 1079조는 ‘무효장애세칙’들 중 혈족 장애와 관련된 조항으로, 당시에는 영적 친족 관계 또한 현세적인 혈족 장애와 동일시 판단하여 그 혼인을 무효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법전》(1983년 법전)에서 두 조항은 삭제되어 영적 친족관계 장애는 무효장애 세칙들 중에 더 이상 속하지 않게 되었다(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인 박석천 신부의 자문을 받았다).

 

44) 이원회, 〈병인박해 강원지역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춘천 · 원주교구출신 순교자연구》, 천주교 춘천교구, 스무숲 성당, 2016. 9월 참조.

 

45)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2월 22일 계축, 고종 5년(1868) 10월 23일 병인; 원주판관 정익영(1819~?)은 1865년 12월 22일부터 1869년 3월 24일까지 재임하였고, 예천군수 · 무주목사 · 황주목사 · 안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정원화(1849~?)는 1870년(고종 7) 급제, 함경도 암행어사, 1874년 홍문관수찬, 1875년 진위사(陳慰使) 서장관, 1877년 홍문관 교리, 1879년 동지사 서장관, 1882년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46)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회갑을 맞아 대사령이 내려졌다. “대사(大赦)를 내려 유배 간 사람이 돌아오고 귀양 간 사람이 풀려나게 하여 온 나라를 고무시킨다. 이달 1일 새벽 이전에 범한 각종 범죄 가운데 사형죄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그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주라.”라고 하였다(《고종실록》 권 5, 고종 5년(1868) 1월 1일 庚戌).

 

47)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84; 《박순집 증언록》, p.108, 110~111 ;《치명일기》 158, 159; 《병인치명사적》 23, p.109, 148, 150, 152. 박 요셉의 이름은 박경숙, 그의 아내는 윤씨로 보인다(《병인치명사적》 23, p.122), 횡성사람 박도연은 무진 윤사월에 잡혀...... 5월 9일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병인치명사적》 23, p.120). 여기서 박요셉, 박경숙, 박도연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5, 2018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여진천(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47021&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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