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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만민에게 복음을: 필리핀 -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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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201

[만민에게 복음을 - 필리핀]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됐어”


이야기 하나 - 시츄파용

여성과 청소년 사목에 관심이 많은 내가 시츄파용(Sitio Payong)을 처음 방문한 것은 내가 일하는 본당의 여성과 아동 보호센터의 사회복지사들과 함께였다. 시츄파용은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가장 가깝지만 본당의 8개 미션 지역 가운데 가장 먼 곳으로 물과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시골마을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선교사로서 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겁이 나기도 했다. 첫 방문 때 동행한 사회복지사는 마지못해 “멋진 곳”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 대부분은 시츄파용을 정말 좋아했어. 너도 분명 이곳을 사랑하게 될 거야.”


전기와 물이 없고 언젠가 철거될 운명, 그럼에도 감사하는 사람들

200여 가구가 사는 시츄파용은 필리핀의 보험공단(GSIS)이 소유한 땅이다. 이미 마을의 3분의 2가 철거되었고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의 터전도 언제 철거당할지 모른다. 주민들이 시츄파용에서 떠나길 원하는 GSIS는 이미 전기와 물을 끊어버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선풍기는 꿈도 꿀 수 없다. 한편 이곳에서는 물통을 옮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마을 입구에 주변 부자동네에서 설치한 수도가 있기 때문이다. 물은 한 통당 3페소(1페소=약 26원)를 내야 한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고 물과 전기의 수급이 어려운 열악한 상황, 게다가 지방에 자신의 집이 있는 주민도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수도 마닐라에서 가깝기에 지방보다 교육과 일자리에서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민들은 지금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마을 입구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로 15분 가야 하는 도시에서 배터리를 충전해 전기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사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래서인지 시츄파용의 주민들은 성당 행사와 발릭한독(Balik Handok : ‘하느님께 받은 것을 다시 되돌려드린다.’는 의미로 우리나라의 교무금과 비슷하다.)이라는 운동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미션 지역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삶과 성공을 위해 달려온 나에게 그들의 마음은 때론 낯설다. 어쩌면 이런 그들의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 둘 - 한국어 수업

필리핀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는 물음이다. 그다음은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에 대한 것이다. ‘슈퍼주니어’와 ‘투애니원’ 덕분에 이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고, 지난해 필리핀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동이’ 덕분에 나는 그들에게 “동이의 사촌”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한류열풍과 한국에 대한 기대가 한몫을 한 것이다.

시츄파용의 청소년들은 슈퍼주니어의 멤버 이름을 줄줄 외고, 뜻도 모르는 투애니원의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거나 춤을 추면서 부른다. 가끔 내가 모르는 한국 아이돌 가수와 노래를 물어 나를 당황하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필리핀 말인 타갈로그어로 “Hindi ko alam ksai matanda ako(나이가 많아서 잘 모르겠어요).”라며 웃는다.

미션 지역을 방문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나는 밝은 미소로 “Magandang umaga po(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응답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인사하는 것을 신기해하며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된다.

몇몇 청소년들은 나를 한국말로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어 알파벳으로 적힌 한국노래 가사를 가져와 뜻을 물어보기도 한다. 한국에 꼭 가볼거라며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독학으로 공부한 한국어 실력을 뽐내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미션지역을 방문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더 많이 알 수 있고 한국어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 또한 아이들한테서 타갈로그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는 시간

첫 번째 한국어 수업은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많은 시츄파용에서 시작했다. 내가 영어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알려주면 아이들은 나에게 타갈로그어 표현을 알려준다. 때론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보다 내가 타갈로그어를 배우는 속도가 더 느려서 놀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실수한다고 창피할 것은 없다. 한바탕 크게 웃고 다시 물으면 된다.

아이들과 언어공부를 하는 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본당사무실을 통해 다른 미션 지역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아 지금은 3곳의 미션 지역에서 언어수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필리핀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한 발 한 발 가까워지고 있다.

한 번은 한국어를 가르쳐달라는 안드레아라는 소녀의 부탁으로 페리아라는 미션 지역을 방문했다. 안드레아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주민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국어 수업에 아이들을 초대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역의 지도자 한 분이 아이들을 불러온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 도와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은 금세 열 명으로 늘어났고,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의자를 한두 개씩 가져왔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수업은 길거리에서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서, 한국어 수업을 하면서 영어를 배우려고, 독학으로 공부한 한국어를 좀 더 배우고 싶어서, 외국인과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왔다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이유로 모인 우리는 한 공간에서 함께했다. 필리핀의 가난한 동네 길거리에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내가 알고 있는 한국어를, 그들이 알고 있는 타갈로그어를 서로 알려주는 나눔의 장이었다. 그리고 언어수업은 동네 주민들까지 함께하는 자리로 확대되었다.


경험하지 않고 이해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로서 나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있다. 아직은 타갈로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미션 지역에서 일어나는 여성과 아동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작업에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위해 직접 일할 수 있을 날을 기약하면서 그들과 함께하면서 삶을 공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비록 그 일이 시츄파용의 주민들에게 전기와 물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닐지라도 하루하루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하느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것처럼….

‘이 정도면 필리핀에 적응이 된 거겠지.’ 하고 방심하는 순간 또 다른 도전과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두 가지 모순된 마음상태가 공존하고 있지만,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선교라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살아간다.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리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맞아.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됐어.”

* 노혜인 안나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로 2년 전 필리핀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노혜인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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