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15: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09 ㅣ No.1715

[평양의 순교자들] (15) 서운석 신부


순교 각오하고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

 

 

최항준(마티아) 신부와 서운석(보니파시오) 신부는 공산 치하 북녘땅 평양대목구에서 마지막으로 사제품을 받은 수품 동기다. 1948년 10월 10일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지하 임시 성전에서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을 때부터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터였기에 이들의 사제서품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뜨거웠던 서품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사제 서품식에 대한 자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10ㆍ20 평양수복 당시 국군, 유엔군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 제7대 평양교구장 서리 조지 캐롤 몬시뇰과 강현홍ㆍ장선흥 신부가 당시 평양 기림리 주교관에서 발굴한 사제 수품 기념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이들의 뜨거웠던 하느님 사랑과 순교 신앙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 째가 서운석 신부이다.

 

 

순교자만 넷 배출한 신앙의 집안

 

서운석 신부는 1922년 5월 14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외동(현재는 동외동 폐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서 신부와 함께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포함돼 시복 대상자에 오른 서정요(프란치스코), 어머니는 여규식(마리아)이었다. 슬하 4남 3녀 중 첫째로 시복 추진 대상자인 서원석(요셉,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수녀는 아버지와 함께 피랍됐고, 둘째 서의석(아퀴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수녀는 폐결핵으로 병사했으며, 여섯째 서경석(마르코) 역시 피랍돼 시복 추진 대상자가 됐고, 7남매 중 넷째이자 형제 중 장남인 서운석 신부가 순교, 일가족 4명이 시복 대상자에 올랐다. 아버지의 숙부가 바로 의주본당을 설립했던 서병익(바오로, 1881∼1948) 신부이고, 서운석 신부의 막내 또한 서우석(요한, 1934∼1978) 신부이고 보면, 일가에서 사제만 3명, 수도자만 2명을 배출한 신앙의 집안이었다.

 

그는 순안초등학교와 평양 성모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과정)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도 신심이 깊어 동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예의가 바르고 용모가 단정하며 깔끔한 성품이어서 소신학교 때는 예절부장을 맡았다. 동기였던 최항준 신학생이 성적이나 발표력에서 뛰어나 두각을 보였던 데 비해 말이 없고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이어서 여러모로 대비가 됐다.

 

서운석 부제는 1948년 10월 10일 관후리 성당 지하 임시성전에서 최항준 부제와 함께 홍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뒤 서 신부는 관후리본당 보좌로 임명돼 김필현 신부를 보좌했다.

 

서 신부는 1949년 6월 10일 김필현 신부가 체포된 뒤 홀로 본당을 지키며 양 떼를 돌봤다. 그러나 6개월 뒤인 12월 6일 저녁에 정치보위부원들이 성당에 들어서자 서 신부는 마침내 ‘(순교의) 때가 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날마다 바치던 저녁기도를 생략한 뒤 성체강복을 했다. 이어 “목자는 떠나도 순교 선혈로 이뤄진 여러분의 신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성체를 나눠준 서 신부는 체포될 준비를 했다. 신자들은 서 신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제관으로 데려갔지만, 신자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서 신부는 스스로 사제관을 나섰고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갔다. 평양시 인민위원회로 연행된 서 신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잡혀 온 대신리본당 주임 박용옥 신부와 함께 신축 중이던 관후리성당 양도를 요구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보위부원들은 그날 밤 12시 무렵에 풀어줬지만, 이튿날 새벽 3시께 관후리성당 사제관에서 다시 체포됐고, 그날 이후 관후리 주교좌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은 공산 당국에 모두 몰수됐다.

 

서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됐다가 1950년 10월 20일 국 군과 유엔군의 평양 수복 직전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운석 신부는

 

■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 1948년 덕원신학교(대신학교) 졸업

■ 1948년 10월 10일 평양 관후리성당 임시 성전에서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주례로 사제 수품

■ 1949년 12월 7일 박용옥 신부와 함께 관후리성당 사제관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피랍돼 행방불명

■ 소임 : 관후리주교좌본당 보좌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9일, 오세택 기자,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2,00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