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47-48(끝): 20세기의 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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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5 ㅣ No.201

[새로 보는 교회사 47] 20세기의 수도생활 (1)

 

 

교회의 변화

 

20세기를 맞이하게 된 교회는 정치적 사회적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교회 내부도 이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그 첫번째 표시는 바로 교황의 영토 상실이었다. 781년에 시작된 교황령이 약 천년 뒤인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됨으로써 끝이 났던 것이다. 교황령은 어떤 때에는 교회의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혜택을 주었지만, 또 어떤 때는 영토를 다스리는 세속군주의 위치와 재력으로 말미암아 영적 교회의 지도자인 교황의 위치를 손상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19세기에 이탈리아 민족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황청은 영지를 유지하려고 끝까지 노력했고 외국 군대인 프랑스 군에 의해 유지되다가 프랑스 군이 본국으로 소환되자 교황령은 완전히 정복되고 말았다. 수세기 동안에 교황의 이중적인 업무가 되고 영적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데 큰 부담이 된 세속의 일이 끝난 것이다. 이제 교회는 세속에서 일어나는 반교회적인 경향에 대응하기 시작하고 더욱 영적인 교회를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많은 사람이 평을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영토가 없는 작은 국가이지만 바티칸이 국가로 인정되어 주권을 회복함으로써 교황령의 원래 목적이었던 교회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변화는 교황령의 영지가 점점 작아지면서 교황권의 권위회복과 교회가 로마 중심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14세기부터 교황 권위를 부정하기 시작하여 공의회주의가 탄생하고 18세기의 국가교회주의, 주교주의, 관할권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교황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지역화되는 경향을 낳았다. 그러나 19세기의 격변을 겪으면서 교황중심의 가톨릭 교회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정점이 바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였고 여기서 교황의 무류지권이 선포된 것이다. 이제 교황은 공의회나 어떤 국가의 동의 없이 혼자서 중대한 교리를 교황좌에서 선포할 때 틀릴 수 없는 권한이 있음을 선포하였다. 반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의회는 결국 1870년에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 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로마는 교회의 모든 사람의 중심이 되었다. 이전까지 없었던 감정의 중심이었고 교회행정과 더불어 주교들의 로마 예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황직의 위상의 증대로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이 낸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회칙은 당시 사회의 노동문제에 큰 반응을 일으켰다. 교회의 일치는 1917년에 만들어진 교회법전으로 명시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중앙집권은 교황들이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게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재주의자들의 국가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교회를 방어하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에 교회는 내외적으로 커다한 시련을 겪게 된다. 교리와 성서에 위협을 가져온 모더니즘과 사회와 인간생활의 비그리스도교화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세속화 등이 가속되고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관심이 교회에서 멀어져 가는 어려운 상황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안에서 복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하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 속에서 말없이 살아가는 수도자, 그리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복음을 실현하는 평신도 단체들이 생겨났다. 세상이 급변하여 생겨나는 필요에 부응하는 수도생활의 변화가 20세기에 생겨났다. 전쟁을 겪고 난 국가의 태도 변화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박해 등도 20세기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세기의 수도생활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야카 북(Jaca Book)’의 제10권 “20세기의 교회”에서 담메르츠(Dammertz) 베네딕도회 원장이 정리한 20세기의 수도생활을 구성해 보고자 한다.

 

 

기존 수도생활의 변모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옛 수도원들이 지속적으로 재건되었다. 예기치 않은 재건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버려진 수도원, 풀이 무성한 수도원이 재건되고 새로운 회가 창설되었다. 대부분의 수도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체계가 갖추어졌고 회마다 사명과 생활형태를 안정시켜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20년부터 1960년까지 거의 모든 수도회가 지원자 홍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한다. 지원자가 넘쳐나는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외적 요인이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제불황으로 실업과 교육의 기회가 부족했던 것 등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한 요인도 작용했다고 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련기 동안에 수도원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순수하게 종교적인 동기로 수도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그들 수도회가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봉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새로운 나라들이 생기고 국경의 변화가 많았다. 수도회는 새로운 국가 안에서 적응해야 하였고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반교회적인 법이 삭제되는 더 나은 경우도 생기면서 국가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국가와의 법적 관계를 규정하고 교회 내에서 새 교회법이 나옴으로써 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규정하였다. 사목과 영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전반적으로 수도회에 관한 명확한 규정을 내린 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결과도 나타났다. 수도생활에 관한 규정이 아주 자세하고 개별 수도회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도회 규정에 대한 반성을 거듭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여러 종류의 수도생활 형태가 평균화되고 비슷비슷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법과 상충되는 모든 규정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레오 13세 교황부터 강하게 작용했다. 교황은 교황청 인가 수도회는 로마와 아주 강한 연관을 가지기를 원했다. 예를 들면 1893년에 레오 교황은 14개 베네딕도 규칙 수도회를 로마에 모아 총원장을 세우고 각 수도원을 감독하고 방문할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각수도원은 독자적인 법과 자율을 가지게 하였다.

 

교회법에 의한 규정의 피해 하나는 규정 중에 성서나 공의회문헌이나 교부들이나 영적 신비적인 교훈서를 인용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수도회의 목적과 규모, 서원 규정과 입회와 탈퇴 등만 규정하게 한 것이다. 작은 영적 지도서를 허용한다 할지라도 생활규정으로 끝나는 수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각 수도회는 조직과 정리가 비슷하게 되어 정신이 쇠퇴하여 갔다.

 

수도원에 입회하는 젊은이들은 모두 같은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이상적인 수도생활을 수련기에 요구받으며 인내와 순명과 희생과 겸손과 포기 그리고 개인 쇄신에 대한 장상의 신뢰를 요구받음으로써 변화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제 면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던 체제가 되어주었다.

 

사회와 교회의 발전과 더불어 수도생활에 대한 반성도 없지 않았다. 전례운동과 성서에 대한 신심이 수도자들 사이에 생김으로써 수도생활 지침이 너무 세심하였고 여지들인 경우에는 더 심해 매일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아주 작은 일까지 간섭하며 개인의 책임에는 조그마한 공간만 남김으로써 지침서가 부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성서에 근거한 수도생활의 필요성을 세속화의 가속과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에서도 느끼게 되었다.

 

국가의 박해를 받거나 사회 분위기가 봉쇄 수도생활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혐오하게 되고 무관심과 거부와 적대감을 받을 때 수도자들은 그런 분위기를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많은 수도자들이 조직에서 강제로 밀려나고 혼자서 세상의 상황에 부딪쳐 독자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위로부터 지도만 받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성소의 시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공동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사회에 봉사하는 수도회는 많이 창설되었다. 세계가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청소년 교육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수도회와 선교를 위한 수도회가 그러한 것이다. 이탈리아를 예를 들어보면 19세기에는 183개의 새로운 수도회가 창설되고 1900년대에서 1950년 사이에 다시 152개의 새로운 수도회가 창설되었다고 한다. 그 숫자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Guidocci의 교회사, 525면). 이들 새로운 공동체의 주된 목표는 사목적인 것이었다. 곧 환자 돌보기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어린아이들을 위한 자선 그리고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창설한 특색이 있는 수도회는 알베리오네(G. Alberione, 1884-1971년)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이다. 총체적으로 바오로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새로운 회는 바로 새로운 시대의 사목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 언론과 통신과 영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곧 출판사업과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매스 미디어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도회들의 창설이 바로 그것이다.

 

20세기의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 형태는 바로 샤를 드 푸코(Foucauld, 1858-1916년)의 정신에 따라 출발했다. 푸코의 삶의 여정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는 어릴 때 양친을 여의고 신앙을 잃었다.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의 진압군 부대로 아프리카에 들어가 이슬람 신자들의 열심한 생활을 보았다. 그때부터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 머물면서 그의 영성이 준비된다. 곧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비천한 목수로서 오랜 기간을 묵묵히 묶여 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와 타만라셋에 정착해 이슬람 신자들과 어울려 살게 된다. 서로의 종교에 관한 대화없이 형제적 삶을 살다가 피살되었다. 생전에 이 정신대로 사는 공동체를 구상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가 죽은 뒤에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1933년에 발루메(Voillaume)가 다른 몇 명과 함께 사하라 사막 주변에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만들었다. 1968년에 교황청의 인가를 받은 작은 형제회는 3명에서 5명의 인원이 그리스도 메시지와는 별개의 세상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세상에서 그냥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형태를 취하였다. 주변의 생활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고 주변의 생업에 종사하며 살면서 복음 전파를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었다.필자도 세 명의 작은 자매회 수녀가 사는 집에 설날 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안경공장에 다니는 자매들의 집은 그 동네의 보통 한옥이었고 화장실이 재래식이어서 빠질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떡국에 무김치, 배추김치만 있었지만 그 자매들과 둥근 밥상에 앉아 두 그릇이나 먹고 왔던 기억이 있다. 무척 살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경공장에 다니며 기도생활과 자매들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가난을 복음의 실천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형제회는 1960년경 68개의 공동체에 232명이 살았는데 그중 64명이 사제였다. 자매회는 1939년에 시작되어 1947년에 주교 인가를 받고 1964년에 교황 인가를 받았다. 이때 990명의 수녀들이 212개의 공동체를 구성했다고 한다. 푸코의 정신으로 살면서 가난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조금도 차별없이 먹고 살아간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적인 삶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가난 속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푸코의 정신을 따르는 다른 공동체도 생겨났다. “빈자들의 성모 형제회”는 사막에서 기도하고 희생하는 관상생활에 예수를 모델로 하였고, “복음의 작은 형제회”는 복음적인 기쁨의 삶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목적을 덧붙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또 하나 수도생활의 새로운 형태는 바로 평신도 재속단체이다. 아주 다양하고 많은 재속단체가 나타나서 세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업에 열중하면서 복음적인 삶을 추구하고 세상을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와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말미암은 수도생활의 쇄신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이어가겠다. [경향잡지, 1997년 11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48(끝)] 20세기의 수도생활 (2)

 

 

연재를 끝내며 이 글을 읽어오신 분들께 먼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작한 지 꼭 4년이 되었습니다. 계속한다고 해도 새로운 관점의 교회사가 되어야 하겠기에 부족하지만 끝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 동안 생각한 역사는 수도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수도회들의 역사가 아니라 세속의 변화와 함께 살아온 교회 안에서 그 시대적인 흐름에서 생겨난 수도생활에 관한 역사였습니다. 수도회가 시대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고 그리고 역할에 충실했던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수도회를 다 조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쪼록 내일의 세상과 교회를 위해 또다시 모든 수도회가 분발하실 것을 희망하며 많은 발전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필자 -

 

 

재속단체

 

20세기에 들어와서 사도직을 더 잘 수행하려고 생겨난, 완덕을 향한 일종의 다른 형태의 수도회가 재속단체이다. 이전부터 신심단체 형태로 있어오던 조직이 인준을 받아 활동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주교의 인준으로 창설되었다가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오푸스 데이(Opus Dei)가 1947년 교회법적 인준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 수도회가 되었다. 오푸스 데이는 1928년 발라구에르 신부에게서 창설되었다. 그 회원들은 사제 모임도 있고 평신도 모임도 있었지만 항상 회원의 다수는 평신도가 되게 하였다. 정규 회원들은 신학 공부를 마쳐야 했고 그리고 다른 학문적인 직업을 가져야 했으며 복음정신으로 살 것을 선언해야만 했다. 특별 회원으로 결혼한 사람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이었다. 모든 회원은 직업을 가지고 가정과 노동계와 사회 속에 파고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오푸스 데이의 일원임을 나타내지 않고 그룹으로도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저마다 그들 단체의 의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였고 나름의 특별한 엘리트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체는 공동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면 1952년 팜플로나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고 대부분의 교수들을 회원으로 구성하여 스페인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 단체는 즉시 50개국 이상으로 확산되었고 지식 세계뿐만 아니라 정계, 경제계, 문화계에도 발을 넓혔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한 모임과 조직을 선호함으로써 주변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1930년에는 같은 정신으로 여자 단체도 만들었으며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오푸스 데이가 인준된 뒤 13개의 재속단체가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으며, 이후 지방 교구장의 인준을 받은 숫자가 많이 늘어나 공식적으로 인준받지 못한 재속단체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완덕 추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교지방의 수도회

 

비오 11세 교황은 1926년 회칙을 통해서 방인 사제와 교리교사의 양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남녀 방인 수도 공동체를 만들도록 당부하였다. 교황은 선교사들에게 자신들의 공동체에 방인들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선교지방의 선교 방편으로 관상 수도원을 많이 창설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방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회칙이 나온 뒤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방인 수녀회가 많이 나타나고 빠르게 발전하였지만 아프리카 지역은 큰 어려움이 있었다. 곧 아프리카에서는 독신생활 자체가 문화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종족의 유지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로마에 있을 때 아프리카에서 온 신부에게 들은 얘기로는 신자 집안에서도 신부가 되려면 아기를 낳아두고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더 심했다. 곧 여자는 시집 보낼 때 남자에게서 지참금을 받는 부족의 재산이기 때문에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소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독립된 방인 수도회는 생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여자들의 수도생활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비오 11세 교황이 회칙으로 관상 수도원을 창설할 것을 요구했지만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목을 도와줄 사람들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큰 발전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선교지방의 방인교회도 발전이 가속화되고 수도회도 모든 영역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비오 12세의 개혁

 

현대에 들어오면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로마 중심의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였고 국제적인 관계를 통해서 가톨릭 교회 생활의 통일을 꾀하게 되었다.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가 생기고 기존의 수도회도 쇄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쇄신을 주도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수도생활로 변모를 꾀했던 분이 비오 12세 교황이었다. 그는 새 시대에 맞는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어져 온 전통에 충실하고 시대에 적응할 용기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쇄신을 주도하려고 1950년 처음으로 수도자들의 국제회의를 로마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서는 수도자들의 생활습관 그리고 그들의 교육과 형성, 사도직 수행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2년 뒤에는 수도회 장상회의를 가졌고 1957년에는 제2차 수도자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회의로 수도회들은 함께 생각하는 과정을 겪었고 많은 나라에서도 남녀 수도회 장상회의체가 결성되었다. 1957년 남자 수도 장상회의가, 1965년에는 여자 수도 장상연합회가 로마에 본부를 두고 결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은 로마 중앙에서 조정하고 교황청이 쇄신을 주도해 나갔으며 개별 수도회의 독자적인 영역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공의회 이후에는 달라지게 된다. 어쨌던 비오 12세 교황은 관상 수도회를 강조하고 봉쇄 구역을 강조하면서도 활동을 위해 수도회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동시에 수도생활 지원자들의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수녀들의 교육도 강조하여 1955년 로마에 수녀들의 신학 공부를 위해서 ‘레지나 문디(Regina mundi)’를 창설하고,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 수녀들이 각 수녀회의 많은 일에 책임을 맡을 준비를 하게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수도회

 

공의회는 교회의 모든 문제를 재고하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고 미래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생활의 쇄신과 변화는 비오 12세 교황부터 시작되고 많은 공의회 준비 과정에서부터 거론이 되었지만 크게 달라질 상황이 없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의 보편적인 성소 안에서 수도생활을 규정하고 쇄신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징적인 것은 먼저 전통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그리고 현재에 적합한 형식을 가지고 시대의 징표에 따라 새로운 형태를 개발해 가는 정신이 표출되었다.

 

따라서 공의회는 각 수도 공동체에 쇄신의 책임과 의무를 맡겼다. 총원장에게 2~3년 내에 각 수도회의 회칙을 만들 권한을 주었다. 이것은 각 수도회의 특징을 살리려는 것으로 성청은 자발적으로 교회법적인 통제를 거두었다. 그리고 실험단계를 넓혀 15년 간 유예기간을 두었다. 이와 같은 지방화는 각 수도회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다양화는 교회의 실질적인 이익으로 여겨졌다. 곧 수도회는 창설자의 원래 의도와 정신을 찾아야만 했고 건전한 고유전통을 찾아 유산으로 보존하고 각 회원들이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규칙에 법적인 요소와 목적과 조직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근원과 수도생활의 신학과 교회적인 관계, 각 수도회에 전해지는 유산을 다 포함시키라는 것이었다. 정신적인 요소와 법적인 요소가 규칙 안에 함께 표현되어야만 했다. 이 같은 결정은 과거 수도생활이 거의 비슷하게 되어버린 결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였다.

 

총원장에게는 협의 상황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세 가지 원칙적인 정보를 주었다. 곧 쇄신의 방향은 수도회의 전통과 창설자에 따를 것, 공의회 지침에 따를 것, 그리고 시대의 징표에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쇄신활동은 무엇보다도 영적이고 정신적인 일이기 때문에 결과를 얻거나 계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 수도회는 자신들의 전망을 더 강조했다. 자신들의 위치 설정과 교회와 세상에서의 사명 등을 더 확실히 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는 분명한 노선이 없는 개별 수도회에서는 모든 회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는 중간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전통에 그대로 남기를 원하는 이들이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이들이나 다같이 크게 실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수도회의 개혁회의에서 오늘날의 세상에서 수도회의 정신과 의미에서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논쟁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수도생활의 기초적인 가치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됨으로써 부작용도 발생했다. 논쟁의 주제는 인간학 발전에 기인하여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곧 서원 문제와 공동체 생활 그리고 세상과의 접촉 문제 등이었다. 결국에 가서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의 핵심은 다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이 났지만 한계를 넘고 수도회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나 미국의 작은 수도회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수도회를 푸코의 정신으로 사는 단체로 시험대에 올렸지만 정신적인 깊이가 적어 곧 해체되기도 하였다. 논쟁의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어 교황청이 다시 1971년에 사목서한을 통해 수도자들에게 자제할 것을 당부하게 되고 간섭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성청은 필요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수도회에게는 기대치 않았던 일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회는 1965~66년의 전체 회의에서 가난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여 서원자 사이에 사제와 평수사 차별을 폐지하는 개혁 문헌을 만들고 결정을 미룬 상태였다. 1974년 12월에서 1975년 3월 사이에 있은 전체 회의에서 다시 거론되어 차별을 없애고 모든 회원이 제4의 서원 곧 교황에 대한 순명을 대다수가 찬성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창설자의 사도적이고 사제적인 특성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 전환이라고 생각하여 투표를 전후하여 반대를 표시하고 결국 개정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거치면서 생긴 우울한 현상은 바로 사람들이 수도회를 떠나고 또 수도회로부터 방치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젊은이들의 입회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수도회들은 노쇠화하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이 맡았던 일들이 심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독일의 예를 들어보겠다. 독일에는 수도사제들의 수가 1915년의 2,015명에서 1932년에는 두 배인 4,024명으로 늘었고 점점 늘어나 제2차 세계대전 후 1971년까지는 6,825명의 수도사제가 있었다. 그러나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지다가 노령화되면서 이 시기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숫자가 줄었다. 지원자들의 숫자가 1961년부터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973년에는 가장 적은 129명에 달했다. 여자 수도자들의 경우 1915년에 64,249명이던 것이 1957년에는 93,260명으로 늘어났으나 1969년에서 1974년 5년 사이에 10,000명이 줄었다. 예수회의 경우 1914년에 16,894명이던 것이 가장 많을 때인 1965년에는 36,038명이었고 그 후 줄어들면서 1974년에는 29,436명이었다. 1965년과 1974년 사이에 지원자가 1,555에서 804명으로 줄었고 이 시기에 예수회원만 해도 1,530명이 관면을 받고 수도회를 떠났다.

 

여기서 숫자로 상세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수도회의 회원수가 유럽에서는 계속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숫자가 줄어든 원인은 여러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원자들의 눈으로 볼 때 공의회가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혼란을 준 것이 아닌지 또는 수도생활에 대한 확신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고 또한 사회의 삶의 개념이 바뀌고 혼인과 성적인 관심이 고조되고 사회 관행이 바뀌어 권위를 부정하고 이기적인 쾌락이 늘어난 것이 모든 산업화된 사회의 특징이라고 여길 수 있다. 1975년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유럽의 수도회의 문제는 바로 노령화이고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도 언제까지 성소자가 넘쳐날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할 때 지금 이 순간에 수도생활을 동경하는 분위기를 바꾸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지속적인 쇄신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마다 조금씩 사라져가는 유럽의 수도회가 언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시 크게 부흥할런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경향잡지, 1997년 12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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