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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본당순례: 신앙의 정맥이 흐르는 생림선교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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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22 ㅣ No.1011

[본당순례] 신앙의 정맥이 흐르는 생림선교본당

 

 

성전 입구에 오이가 담긴 노란 바구니가 놓여 있다. 오이 농사를 짓는 신자가 상품이 안 되는 못생긴 오이를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갖다 놓았다.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이 돌아간 뒤에 바구니는 비었다. 농사꾼에게 굽은 오이는 아픈 자식이고 가져가는 사람은 그 생명을 거두는 마음이리라,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생림선교성당 신자들의 인정이 이 못난 오이에서 묻어난다.

 

 

미사의 목마름

 

성전에 들어서면 주보성인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액자가 첫눈에 들어온다. 십자고상 위로는 천장을 통해 들어온 채광이 예수님을 훤하게 비추고 제대 바닥은 아직도 붉은 카펫이다. 좌우 창은 벽체 위와 아래로 배치해 아래의 좁은 창으로는 땅, 위 창은 하늘만 보이게 하여 기도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는 차단해 놓았고 좌우 벽면에 14처는 모티브만 묘사했다. 미사 시간 20분 전, 올 신자는 거의 다 온 모양이다. 사제는 성전에 들러 미사 전 상황을 전반적으로 훑어보고 사무장과 마지막 점검을 한다. 수녀와 복사가 없는 시골 본당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장면이다. 신자들은 생활의 중심을 미사 시간에 맞추어 놓았다. 그래서인지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미사 시간을 앞당겼다. 공소 시절에 한 달에 한 번씩 영성체를 모시다가 그런 기쁨을 매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1900년경 밀양성당을 모 본당으로 봉림공소로 설립, 1948년 수해로 유실되어 이기훈 공소회장의 자택을 임시공소로 사용하였다. 1980년 밀양성당에서 진영성당으로 관할 변경이 되면서 현 부지를 매입해 봉림공소로 축성식을 한 뒤 2004년 생림공소로 개명하였다. 2009년 사제관 축복식을 주례한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신자들이 매일 영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안해 인근 한림공소와 통합하여 생림선교본당으로 승격했다. 이리하여 70년 가까운 공소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모 본당에서 분리되어 전통과 자원을 지원받아 탄생한 성당에 비해 생림선교본당은 처음부터 공소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공소끼리 합치다 보니 미사 예절을 제대로 배운 신자가 없었고 두 공소의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혼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미사가 화합의 축이 되었다고 한다.

 

 

선교할 대상이 없습니다, 주님!

 

농경지가 산업단지로 지정되면서 푸른 들녘이 회색 콘크리트로 바뀌고 거대한 축사가 군데군데 들어서다 보니 1년에 수백 명씩 이곳을 떠난다. 이런 환경에서 선교하기란 매우 어렵다. 신자들은 기도하면서 방법을 모색해 보지만, 사람이 없다. 유아와 유치부, 초등부는 물론이고 중등부의 발길이 사라진 지도 오래다.

 

그리하여 냉담자를 돌아오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신자들은 자신의 매무새부터 다잡았다. 성당 다니면서 왜 저러나 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각자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표정 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김유도 마티아는 27세에 세례를 받아 공소 생활만 50년, 본당으로 승격한 기간까지 합치면 근 60년을 여기서 보냈다. 때로는 동아줄로 주님과 탄탄하게 연결되었다가 어느새 삭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영욕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이 신앙인으로서 가장 편안하다며 그 이유를 곁에 있는 신자들을 꼽았다. 박선자 율리아나의 부친은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공소 회장직만 30여 년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사제가 주무실 방에 군불을 넣어 따뜻하게 데워 놓던 추억을 떠올렸다. 최미자 베레나는 한림초등학교를 다닐 때 바로 옆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 메아리가 고여 있다가 결혼 후 촉발해 세례를 받았다. 이후로 눈이 밝아지고 마음도 가벼워졌다며 그 고마움을 신자들의 기도로 돌렸다. 지난해에는 남편도 세례를 받았다. 김영두 스테파노 사목회장은 시종일관 신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다가 이렇게 화합이 잘 되는 이유는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권오승 미카엘 부회장, 김형우 요한 총무, 손부미 아녜스 교육분과장, 손병임 루시아 여성부회장도 자리를 같이했다. 최근에 손병임 루시아의 아들이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해 엘리트의 면모를 갖추고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았으며, 새 생명도 태어났다. 손병임의 아들딸과 손자 네 명이 이 본당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없지만 언제나 있게 해 주시는 주님, 신자들은 이 신비를 굳게 믿었다. 故 이강해 스테파노 신부, 박상흠 다미아노 베오나떼 꼬미나또 신부, 베네딕토 수도회 김기룡 스테파노 수사, 박능호 분도 수사, 권은총 마태오 수사를 비롯해 연령회장의 딸 김정향 미셀 수녀가 생림선교본당 출신이다.

 

 

성당에 숨이 들어오다

 

한림은 세조가 단종을 유배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도리와 학문에 매진한 김계희 한림학사의 선비 정신에서 기반하였다면, 생림은 안양천을 따라 농사를 지으며 습득한 생명존중과 자연을 기반으로 생태를 중시해 왔다. 양태현 그레고리오 주임 신부는 이들의 차이점을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여기서 파생한 문화로 해석,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게 안배해 섬겼다. 그 온기가 닿아서인지 신자들은 스스로 빗장을 열었다. 코드가 맞았다. 그리고 나아갔다. 그 걸음이 경쾌하다. 순교자 성월에는 승합차를 타고 명례성지에서 김경희 수녀의 ‘순교자님들의 믿음을 본받아!’ 특강을 듣고 음악회와 순교자의 밤 행사에도 다녀왔다. 사제는 더운 여름에도 긴 수단을 입고 외출을 했다. ‘신부님이 수단을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슬쩍 흘린 어느 신자의 한마디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림공소에 베트남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이 오기 시작했다. 성당에 숨이 들어온다. 시설부장이 손수 제작한 그네의자에는 햇살이 그득하다.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조정자 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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