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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3-4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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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18 ㅣ No.477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43)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상)

새로운 사상들 만연에 교회, 교황권 지키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열린 위원회 회의 모습.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186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는 회칙 「얼마나 큰 배려」(Quanta Cura)를 통해 당시 사상이나 주장 가운데 오류가 있다고 본 80가지를 발표합니다. '오류표' 혹은 '오류 목록'이라 부르는 이 80가지는 세속주의, 합리주의, 민족주의, 개인주의, 자연주의 같은 근대 사조들과 자유라는 이름 하에 정치ㆍ사회ㆍ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에서 빚어지는 오류들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끝나고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유럽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과학 발전과 계몽주의로 인한 근대 사상의 물결이 유럽을 출렁이게 했고, 이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연주의는 기계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 또는 범신론을 낳았습니다. 이성주의는 모든 것을 인간 이성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계시의 하느님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 가둬 버렸습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조는 신앙을 개인의 자유로 돌리면서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낳았습니다.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이런 흐름에서 태동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유럽 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성직계급인 제1신분과 왕실 및 귀족 계급인 제2신분이 누리던 특권은 사라졌습니다. 군주와 귀족 계급 대신에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통한 의회정치가 자리잡았습니다. 절대군주와 국민의회가 팽팽히 대립하거나 손을 잡았고,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위상은 추락해 갔습니다.
 
프랑스 혁명 세력인 국민의회는 '성직자 공민 헌법'을 통해 교구를 행정 구역에 따라 재편하고 주교를 투표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불복하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수도원을 해산하고 동정서원을 못하게 했으며 혼인성사를 폐지하고 이혼을 자유화했습니다. 교회 재산과 교황령까지 몰수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복장까지 금지시켰습니다. 혁명의 이 여파는 다른 나라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와 함께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교황이나 교황청 간섭을 받지 않는 민족 교회 혹은 국가 교회 체제가 생겨났습니다.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교황 권위보다 지역 교회 독자성을 우위에 두는 사상(갈리아주의), 개별 주교는 교황보다 못하지만 전체로서 주교단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회를 대표하는 신자단과 교회 최고기관인 공의회가 교황의 군주적 체제를 대신해야 한다는 사상(페브로니우스주의)이 교회의 한쪽을 파고들었습니다.
 
이에 맞서 교황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젊은 신부들과 평신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교황이 없는 가톨릭교회는 있을 수 없다면서 교황 중심의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내세웠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런 상황에서 오류표를 통해 당시 교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위험스러운 80가지 명제를 목록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오류표 발표일이 교황이 10년 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발표한 바로 그날이었다는 사실은 근대 사상의 위험에서부터 교회를 보호해 가톨릭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교황 의중을 엿보게 해줍니다.
 
그런데 교황 비오 9세는 오류표를 발표하기 이틀 전에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경신성사성) 모임에 참석한 추기경 21명에게 공의회를 소집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추기경들의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반대한다거나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는 답변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이 찬성을 표시했습니다. 20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해서 태동하게 됐습니다.
 

공의회 준비
 
교황은 이듬해인 1865년 3월 공의회 준비를 위해 교황청에 있는 추기경 5명으로 이뤄진 중앙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4월에는 주교 30~40명에게 공의회 계획과 관련해 자문을 구하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벨기에 영국 주교들까지 포함됐습니다. 이들도 전반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사상이나 주장들, 교회를 세속 국가 권력과 똑같이 보려는 그릇된 경향을 단죄하고 교회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권위와 교황 무류성에 대해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추기경들로 이뤄진 중앙준비위원회는 산하에 신앙교리, 교회와 국가 관계, 동방교회와 선교, 교회 규율, 수도회 등을 분담할 5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위원회에 의제와 관련한 초안을 마련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소위원회들은 당시 로마에 닥친 정치적 위기 상황으로 1867년 여름까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통일을 외치며 교황령인 로마를 침략하려는 이탈리아 공화국에 맞서 로마를 보호하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고 1866년에는 프로이센(독일 북부에 있던 왕국)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는 등 로마가 정치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교황 또한 공의회 개최 문제를 놓고 숙고를 거듭했습니다.
 
프랑스 군이 이탈리아 공화국 군대의 침략을 물리치고 로마가 다시 안정을 찾으면서 1867년 6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 1800주년을 기념하고자 세계 각지에서 500명의 주교가 로마로 왔습니다. 교황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주교들에게 공의회 개최 계획을 발표합니다.
 
다시 1년 후 교황 비오 9세는 공의회 소집 칙서 「영원하신 아버지」를 통해 1869년 12월 8일 로마 바티칸 바실리카(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교황은 이 칙서를 명의 주교(보좌 주교)를 포함한 모든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에게 발송했고, 이어 정교회 총주교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대표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의회에서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대표한다는 명시적 규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그러나 이전 공의회들과 달리 세속 군주들에게는 초청장을 발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의 5개 소위원회들은 의제로 다룰 초안 준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앙교리소위원회는 교황 무류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놓고 오래 연구했습니다. 찬반 양론이 엇갈렸습니다만 로마에서 발행되는 가톨릭 잡지 「라 치빌타 카톨리카」는 1869년 2월 모든 가톨릭신자들이 다가오는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이 정의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전에 다룰 내용과 방향까지 언론을 통해 노출돼 버린 것이었습니다.
 
국가와 교회 관계도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만 해당 소위원회가 마련한 초안은 지나치게 과거 중세기적 개념에 치우쳐 있어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소위원회들의 준비 작업은 공의회가 개막하던 1869년 말까지도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정식 개막에 앞서 준비위원회를 통해 의제를 미리 준비하는 일은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1869년 가을이 되면서 주교들이 로마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18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44 · 끝)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하)

가톨릭 신앙도 교회권도 더욱 확고히


1870년 7월 18일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제4차 공개회의 모습.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를 공포한 이 회의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공의회 개막과 진행 과정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정대로 1869년 12월 8일 로마 바티칸 바실리카 곧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개회합니다. 공의회 참석 대상 교부 1050명 가운데 774명이 개회식에 참석했습니다. 이탈리아 주교가 200명이 넘은 것을 비롯해 유럽 주교들이 약 3분의 2를 차지했지만,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도 주교들이 참석했습니다. 세계 각 대륙 주교들이 참석한 것은 공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의회가 예정된 날짜에 정확히 개회한 것도 이례적이었습니다. 교통 수단의 발달로 그만큼 이동이 쉬워진 것입니다.
 
◇ 회의 진행 규칙 : 개회식에 앞서 시스티나 경당에서 회의 진행 규정이 발표됐습니다. 교황을 대리해서 공의회를 진행할 의장대리로 추기경 5명이 임명됐습니다. 회의는 전체회의와 공개회의로 구분됐습니다.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안을 주교들이 검토한 후 전체회의에서 찬성, 반대 혹은 조건부 찬성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수정이 필요할 때는 대리위원회를 통해 수정한 후 다시 전체회의에 회부한 후 마지막으로는 교황이 주재하는 공개회의에서 찬반 표결을 통해 확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정을 담당할 대리위원회는 신앙, 규율, 수도회, 동방전례 등 4개 위원회로 이뤄졌습니다.
 
공의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결정하는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었지만 주교들이 제안을 받아들여 의제로 채택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소청심사위원회를 별도로 두었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결정 사항이 된 교황 무류성이 바로 이 소청심사위원회를 통해 의제로 채택됐다는 사실입니다.
 
◇ 공의회 진행 과정 : 추기경들로 이뤄진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는 사전 작업을 통해 모두 51가지 안건을 마련했는데 그 가운데 6가지 안건이 공의회에 제출됐습니다. 주교들, 공석인 주교좌, 성직자 생활과 규율, 보편교회에서 사용할 교리서 준비, 신앙과 이성, 교회에 관한 안건들이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첫 공개회의인 개회식 후 4개 대리위원회와 소청심사위원회 등 다섯개 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데 거의 한 달을 보냈습니다. 12월 28일에야 신앙과 이성에 관한 안건으로 신앙교리위원회가 마련한 가톨릭 신앙에 관한 헌장 초안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초안은 장황하고 군더더기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신앙 담당 대리위원회와 전체회의를 오가며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습니다. 제17차 전체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최종 수정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안은 세 번째 공개회의에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으로 통과됐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헌장은 제1장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제2장 계시, 제3장 신앙, 제4장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을 제시하면서 이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파문한다는 내용의 법규를 싣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부인하면서 인간 자연 이성의 힘으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는 당시 자연주의, 이성주의를 단죄한 것입니다.
 
공의회에 제출된 다른 안건들과 관련해서는, 초안에는 없는 교황 무류성을 안건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교들 사이에서는 적극 찬성, 소극적 지지, 반대 등으로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무류성을 안건으로 바라는 주교들은 500명이 넘는 교부들의 요청 서명을 받아 교황에게 제출했고, 교황은 이를 소청심사위원회에 넘겼습니다. 소청심사위원회는 25대 1의 압도적 찬성으로 안건에 포함시키기로 했고, 교회에 관한 안건 초안에 무류성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공의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통과시킨 다음에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을 규정한 교회에 관한 헌장 수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합니다. 열띤 토론과 거듭된 수정 끝에 시험 투표에서 찬성 451명, 반대 88명, 조건부 찬성 62명으로 통과시킵니다. 이어 제4차 공개회의에서 교부들은 찬성 533 반대 2로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을 규정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영원하신 목자」를 통과시킵니다. 반대표를 던진 주교 2명은 교황앞에서 "교황 성하, 이제 저는 믿습니다"하고 승복했습니다.
 
「영원하신 목자」는 수위권과 관련, '품급(주교, 신부, 부제)과 전례(각 지역의 고유한 전례)를 불문하고 모든 목자들과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교황에게 예속돼 있고 순명할 의무가 있다'면서 이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사안에도 해당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무류성 부분에서는 '로마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전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교리를 자신의 사도적 최고 권위를 가지고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가 발표된 다음날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를 보호하고 있던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로마가 위태로워졌습니다. 공의회는 9월 1일 교부 120명이 모여 제89차 전체회의를 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일주일 후 이탈리아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했고, 9월 20일 로마가 함락되고 교황령이 붕괴됐습니다. 교황은 공의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공의회는 다시 열리지 못했습니다.
 

공의회 결과와 의의

교황 무류성에 반대의사를 표시했던 주교들은 자기 교구로 돌아가서 대부분이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일부 지식인들이 반기를 들고 '구 가톨릭교회'를 세워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인간 이성만을 강조하여 계시의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주의적 이신론(理神論)과 반대로 신앙만을 내세우고 인간 이성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신앙주의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 헌장 「영원한 목자」를 통해서는 공의회우위설에서 비롯하는 갈리아주의나 페브로니우스주의 같은 오류들을 제어하고 교황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교황들은 세속적으로는 교황령까지 잃게 돼 통치 기반이 사라졌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확고하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제 세속 군주가 아니라 교회와 세계의 영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됩니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25일, 이창훈 기자]

※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제1부를 마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다음호부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집중 조명하는 제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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