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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45-46: 19세기의 선교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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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5 ㅣ No.199

[새로 보는 교회사 45] 19세기의 선교열풍 (1)

 

 

19세기 수도원 부흥의 다른 한 측면은 바로 선교열풍이다.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선교열은 가톨릭 국가에서 크게 일어나 많은 선교 수도단체들이 이 시기에 생겨나는데, 선교라는 이름이 붙은 단체는 거의 대부분이 19세기 중엽 이후에 창설되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별히 이 시기에 해외선교가 확산된 것은 유럽의 정치 ·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유럽의 격변기라고 하는 당시 상황이 가톨릭 선교에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상황이 현실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의 정치상황

 

1848년은 유럽에서 혁명의 기운이 가장 보편적으로 일어난 때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와는 달리 혁명운동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연발생으로 터져나와 정부형태를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입헌정치와 정치자유, 민족통일들을 요구하며 일어난 혁명은 추진력 부족으로 혁명세력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보수세력의 강화를 가져왔다. 혁명의 성과라면 제한적이기는 하나 입헌정부가 탄생하였고 민족의 통일과 독립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과 민족이라는 현실 위주의 테두리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은 여러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그것은 지금도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있다.

 

1860년 이전에는 영국과 프랑스만이 국민국가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십년 뒤 유럽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같은 대국과 약소민족국가로 뚜렷이 구별된다. 유럽 민족주의 운동은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강력한 국가 구성을 위한 것으로, 처음에는 반정부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처음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같은 말을 쓰고 공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종의 기원이 같고 같은 종교를 가지며 마래에 대한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한 정부의 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민족주의를 먼저 부르짖었다.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사상가인 마치니(1805-1872년)는, 사람은 가족과 하느님과 민족에 대한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과 가족을 배신할 수 없듯이 민족도 배반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로 미루어 선교사들이 해외선교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민족통일운동은 결국 전쟁을 불러오는데, 크리미아 전쟁(1854-1856년), 덴마크 전쟁(1864년),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1859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1871년)들이 그것이다. 비록 유럽 안에서 일어난 싸움이지만 이 전쟁은 그들이 점령한 식민지로 이어져 식민지 지역 선교사들을 자극하고 이들 선교사들은 식민지 경쟁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신제국주의

 

유럽은 국민국가로 자리잡는 1870년 이후 신대륙으로 대거 진출한다. 새로운 땅을 탐험하고 무역을 하면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1900년까지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경쟁을 신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제국주의가 결코 새로운 형태는 아니다. 다만 유럽이 경쟁적으로 팽창한 이 시기의 제국주의가 좀더 극적이었음을 말한다.

 

철도 선박 따위의 교통발달과 두드러지게 향상된 생산기술로 경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이에 따른 시장 확대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산업가들과 금융가들은 원료를 공급하고 생산품의 소비시장으로 새로운 식민지를 찾도록 정부를 부추겼다. 그리하여 유럽의 각 나라들은 아시아 아프리카로 손길을 뻗치면서 독점시장을 가지기 위해서 경쟁을 한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식민지 지배자들은 점령지에서 수탈만을 일삼았으니, 이러한 야만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부족의 특성이나 지역을 고려하지 않고 점령지를 한 구역으로 묶어놓은 까닭에 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어 지금도 내전이 그치지 않고 있는 아프리카는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살기 힘든 지역이 되었다. 또한 식민지를 자신들의 또 다른 땅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쟁이나 협상으로 지배국이 바뀌면 그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역시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부 바뀌곤 하였다.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나서 각 나라가 차지한 지역에 유럽 국가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결정하였다. 즉 지배국은 식민지 지역에서 나라나 종교, 종파와 수도회를 가려지 않고 보호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결정으로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선언문과 현실은 아주 달랐다. 영국 등 개신교 국가가 지배한 지역의 가톨릭 선교사는 관청에서부터 괄시를 심하게 받았으며, 같은 가톨릭 국가 안에서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 많은 차별을 하였다. 결국 정부는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선교사를 이용하였고, 선교회 역시 선교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식민지 관청을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제국주의의 아프리카 식민지 형성은 먼저 탐험가들이 들어가고 이어 상인이 따르고 군대와 선교사가 뒤쫓아갔다는 식의 평을 듣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후반, 이렇게 유럽인들이 각 대륙으로 퍼져나갈 때 군인 상인 선교사만이 움직인 것은 아니다. 탐험가 과학자 의사 자선가도 있었지만, 또한 유럽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새로운 땅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 이민의 반은 미국으로 편중되어 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오세니아주 등지로도 흩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해상교통이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많이 생긴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자국의 이민자들을 도와주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1880년에 밀라노에서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위해서 ‘예수 성심의 선교사회’를 만들어 이민지역 사람들한테 사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신심을 돌보았다. 지금 한인교포를 위해서 한국인 사제가 파견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선교열풍의 시작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성이 불붙기 시작한 것은 탐험으로 새로운 세계가 유럽에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의 실상이, 사람들의 삶이 여러 탐험가의 보고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선교사이면서 탐험가로 알려진 리빙스턴은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대륙을 횡단한 그는 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탐험가의 목적은 선교라고 할 수 없다. 과학적인 탐험에 경제 정치적 목적이 더해지기는 하지만, 유럽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아프리카 사람들의 문화적인 후진성과 경제적인 빈곤 따위가 감상적으로 전해지면서 유럽 사람들에게 선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동시에 1869년 완성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여행이 훨씬 쉬워진 까닭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선교사에게 뱃삯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것도 선교여행을 용이하게 해주는 큰 혜택이라고 하겠다.

 

이때 우리 나라는 박해기간이었으나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에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다른 지역은 이미 문이 개방된 상태였으니, 아시아에서 중국은 1858년에 천진조약으로 1862년 안남지방이, 일본은 1858년에 외국인에게 자유를 주었고 내국인에게는 1872년에 종교자유가 주어졌다. 우리 나라는 1886년에 선교활동의 법적 금지가 풀렸다. 각국에서 종교자유가 생기자 선교사들은 즉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군대의 힘에 눌려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종교에 대해서도 자발적인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배자의 힘을 빌려서 하는 선교활동은 지배국가와 종교를 동일하게 여기도록 하였고 독립이 되었을 때는 지배국의 그 종교도 빛을 잃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전세계를 향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유럽 국가의 식민지 경쟁의 일환이기도 하였지만, 19세기 후반 교회의 변화와 신자들의 호응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회의 활동

 

설교열풍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선교사가 수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수도생활의 쇄신은 해를 달리하면서 수도자의 확산을 가져왔다. 관상생활이든 자선수도 단체든 모든 기존의 수도회원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특별히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선교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선교활동은 중세 때부터 수도자들의 몫이었다. 삶의 태도와 모범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깊은 신앙심이 고집스런 민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들의 선교활동도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 시기에 선교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늘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선교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는 17세기 초엽에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가 유일하였다. 이 전교회는 다른 단체가 생기기 전에 한국의 선교를 담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후 1848년 성령회를 시작으로 전교나 포교라는 이름의 선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특징을 굳이 말한다면 전교회의 명칭이 유럽이나 선교 대상지의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이나 교구에서 설립한 전교회까지 합치면 굉장히 많은 수가 된다. 그중에서 몇만 예를 들어보겠다.

 

1850년에 밀라노 외방 선교회가 창설되고, 쥴 슈발리에가 프랑스 이수둔에서 1854년 창설한 예수 성심 전교회는 우리 나라에도 진출해 있다. 1856년에 리옹의 아프리카 전교회, 베로나의 아프리카 전교회(1867년), 1875년에는 신언회가 창설되어 1984년에 우리 나라에 진출하였으며, 로마에서는 선교지 사제를 위한 베드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져있어서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을 이름으로 붙인 전교회가 많이 창설된다.

 

이러한 선교열풍에는 모든 가톨릭 나라가 참여하였지만 1900년대까지는 3분의 2가 프랑스인이었고, 1946년경에 와서는 전체의 30%를 차지하게 된다. 프랑스의 선교열풍은 프랑스의 후원체제와 홍보체제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으며, 또한 정부에서 적극 협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선교단체를 만들었다. 개신교는 서로 형식이 달랐기 때문에 단체를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해외 선교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가톨릭 선교사가 있는 지역에 들어가 가톨릭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비방을 했다는 말도 있다.

 

선교단체의 양적 팽창과 함께 절적 향상은 선교활동의 긍정적 요인이 된다. 그것은 선교사는 이제까지 남자-사제로 한정되었으나, 이제는 사제가 아닌 평수사, 선교사, 교육수사, 간호수사들의 숫자가 자꾸 늘어갔다. 선교에 효과를 더한 것은 남자 전교회와 일을 같이 하는 여자 전교 수녀회가 많이 생겨남으로써 용기있는 여성들이 학교 운영,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사와 함께 일을 하면서 구체적이고 내면적인 선교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19세기 말경에는 그 숫자가 약 4만 4천쯤으로 여자 선교 수녀들의 수는 곧 남자 수사의 수를 훨씬 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유머에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 세 가지 중에 여자 수도회 숫자가 들어간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그만큼 여자 수도회가 다양하게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복음적 삶을 실천하고 복음적 사랑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는 19세기 선교 열풍에 창설되어 남자 전교회를 도와주고 우리 나라에도 진출한 수녀회를 “오늘의 수도자들”이란 책을 통하여 알아보자.

 

선교 수도 공동체인 신언회를 설립한 얀센 복자가 1889년 신언회의 선교사업을 도울 목적으로 성령 선교 수녀회를 세운다. 1865년에는 성모 승천회 신부를 도와주기 위해서 성모 승천 봉헌자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의 신부와 수사가 1881년부터 파견되어 있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가 있다. 메리놀 수녀회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신부를 돕던 여섯 명의 여성 모임에서 출발하였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중국 현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수녀들의 섬세한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 창설된다.

 

지금은 이들 수녀회가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지만 19세기에는 종교박해로 치명자도 나왔으며, 기후와 풍토병과 문화와 관습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과 싸우면서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이때 남자 선교사가 할 수 없는 여성적인 활동을 수녀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향잡지, 1997년 9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46] 19세기의 선교열풍 (2)

 

 

선교활동의 후원

 

19세기에 선교열풍이 일어난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시대조건과 선교회의 양적 질적 팽창과 함께 신자 대중의 관심과 후원이 컸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선교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과 후원이 아직은 부족한 우리 나라에도 선교활동을 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있다. 한국교회 역시, 파푸아뉴기니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정부의 압박과 가난과 풍토병에 고생하면서도 우리가 받은 복음을 이방인들과 나누려고 고군분투하는 우리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후원단체를 결성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노력하지만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선교가 교회 본래 사명이라면 선교 후원은 신자 사명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선교사를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할 수 있고 또 후원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선교후원활동이 19세기 초엽에 시작되어 모든 나라로 확산되었다. 1850년에서 1924년까지 유럽에서 151개의 선교후원단체가 결성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이러한 선교후원단체는 교황청에서 관여하던 ‘성영애회’에서부터 국가 차원의 후원단체로 나눌 수 있다.

 

선교후원회(Propaganda Fide)가 1822년부터 1929년 사이에 모은 후원금이 금화 5억 6천 4백 4십 1만 6천 3백 11프랑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돈으로 어떻게 환산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 후원단체 모금액이라고 하니 전체로 따지자면 그 액수는 참으로 엄청날 것이다.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선교사들은 선교지역 현지에 고아원 양로원 병원 성당 등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의 액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선교를 향한 사람들의 실질적인 관심이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고, 아들 딸이 선교사로 간다고 했을 때는 선뜻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기쁘게 보냈고, 치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돈이 아닌 선교에 대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관심이 어떠했는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선교에 대한 열성은 선교 단체나 후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로 더욱 고무되었다. 정기적으로 펴내는 이 잡지는 선교지역의 소식과 선교사들의 편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우리 나라 선교사의 편지도 프랑스에서 발행된 잡지 “포교”에 여러 번 게재되었다. 이 잡지에는 신기하고 놀라운 새 세상의 이야기가 있고, 현지 사람과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실었다. 그러기에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신앙과 새로운 문화를 전해주어야 할 사명감에 불타곤 했다. 선교는 꼭 필요한 일이며 중요한 일로 신자들의 관심을 지속시키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것도 있었으니, 유럽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선교지에 대한 문화의 몰이해였다.

 

선교에 대한 후원은 교황청에서도 조직적으로 하였으니, 17세기 초엽에 설립한 인류복음화성은 선교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조직적인 후원과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류복음화성의 주된 일은 선교지역 현지에 교구체계를 적시에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1850년에서 1900년 사이 50년 동안에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아프리카 검은 대륙, 즉 사하라 이남에 1850년에 2개밖에 없던 교구가 1900년에는 61개가 되었고, 중국은 16개에서 39개, 인도는 4개에서 27개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 와중에 순교자들의 피가 밑거름이 된 곳도 많았다. 한국의 박해는 1866년에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1886년에는 우간다에서 아프리카의 첫 순교성인들이 탄생하였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드디어 실현되어 가톨릭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바로 19세기에 불어닥친 선교열풍과 선교사들의 노고 덕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교활동의 문제점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문화요 정신이다. 그리스도교 문화를 이룬 유럽이 과학과 기술과 무기를 발달시키면서 세력을 확산해 갔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역시 세계의 다른 문화권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제에는 교회 내부적인 것도 있고 정치 사회적인 것도 있다. 여기서는 교회 내부 문제만을 거론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선교지에 복음을 전하면 지역교회가 형성되고, 유럽식 표현으로 원주민 주교가 나오고 원주민 사제가 같은 겨레를 사목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에 이 일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 이 일이 사실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사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선교사들은 모든 면에서 선교지 주민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방인사제를 양성은 하였으나 그들에게 책임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1847년 가베(Gabet) 신부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이론적으로 현지 중국인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그들이 활동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곳 사람들은 지혜가 부족하고 성품이 약하고 사제직의 품위와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의무를 지키는 능력이 부족하다.”(새 교회사, 마리애티 출판사, 1979, 5/II. p. 250)는 내용이 있다.

 

이는 가베 신부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교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나라의 최양업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은 더욱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편견은 신앙을 전파한 시기가 짧고 생각의 바탕이 다른 곳에서 나온 충돌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럽인 편에서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개신교 역시 대단히 편견이 심하여 선교지의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근시안적인 사고로 방인 사제 육성을 등한시하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당시 신학이나 영성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천국을 가는 개인 구원이 가장 중요하고 보니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형성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국을 가는 방법으로는 교우들은 성사만 열심히 받으면 되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성사 주는 일로 자신의 의무를 충분히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선교사들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중개하기에, 방인 사제는 일을 도와주는 귀한 존재이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언어와 관습 따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존재지만 여러 모로 부족한 사람들이어서 책임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절대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교회가 늦게 형성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선교체제에 문제가 있었던 까닭이다. 나라 사이에, 수도회 사이에 협력없이 다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고, 19세기 후반에는 한 지역을 한 국가나 수도회에 일임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나라나 수도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선교지에 대한 다툼을 없애고 책임감을 키워주고 선교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할 수는 있었지만 독점하는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수도회의 책임 아래 자신들의 업적을 느낄 수 있는 지역에 방인 사제나 교회 공동체 구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중국에 사절로 왔던 콘스탄티니 주교는 “선교사들이 마치 종교적 식민지를 형성하고 봉건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마치 방인 사제를 사도적 선교사인 자신들을 보조하는, 한 단계 낮은 사제로 여겼다.

 

이런 상황은 20세기 초엽까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1940년에 전주 지방을 책임 맡은 한 방인 사제는 대구에 있는 선교사에게 주일마다 보고를 하기 위해 다녀가야 했다고 한다.

 

지역교회 형성에 교황청의 생각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1622년 포교성성이 만들어지고 중국 안남지방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에게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방인 사제를 만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포교성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창설된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 역시 가능한 한 지역교회를 세운 뒤 자신들은 또 다른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이다.

 

1845년에 방인 사제교육에 관한 교령이 나왔지만 그 결과는 미미했다. 19세기 말까지 방인사제를 양성하는 모습은 아주 조심하거나 과감하게 진행시키는 양상을 띤다. 레오 13세와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과감하게 지역교회를 형성하고 방인 사제를 육성하도록 권하였다.

 

인류복음화성의 고문서고에 가서 인도나 중국 문서집을 뒤져보면 방인 사제에 관한 문서를 볼 수 있다. 특별히 이탈리아 나폴리에 기숙사를 짓고 교육하는 내용의 중국인 사제 양성에 관해서는 아주 방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중국인은 게으르고 교육이 잘 안되며 반항적이라고 보고하는 것을 본다.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자면 굴욕감을 느끼는 교육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교육받은 유방제 신부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사목생활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켜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돌아가서도 외국인 선교사들과 계속 마찰을 일으켜 문제 사제로 낙인찍힌 사실이 기록된 문서를 읽은 적이 있다.

 

1893년에 이르자 인도에서는 숫자로는 방인 사제가 유럽 사제를 능가하지만,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가 되어서 지역교구 형성을 할 수가 없었다. 교황청은 완전한 지역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레베 신부는 1917년에 성성에 편지를 보내 중국에도 지역교회를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편견과 차별로 반로마적인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26년, 드디어 중국에 중국인 주교가 탄생한다. 더 이상 방인 사제는 보조역의 등급이 낮은 사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 변화였다. 또한 교황청은 방인 사제의 질적 시비를 없애기 위해 선교지 신학교를 1934년에 포교성성에서 관리하도록 한다. 1931년에는 포교성 사제 양성 기숙사를 로마의 자니콜로 언덕으로 확장하고 선교지방의 사제교육에 나선다. 바로 이 베드로 기숙사를 이용한 아프리카 아시아 사제들 가운데서 많은 주교가 탄생하였다. 기숙사 복도에는 이곳 출신 주교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는데, 한국인 주교들도 다수 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변화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였으니, 1926년에 중국인 주교가 나왔지만 지역교회 형성이 일반화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지역교회를 형성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정치상황과 선교지 문화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선교지에 군대와 함께 들어가서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아시아에서는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법적 지위를 조약의 조항으로 묶어 보장받게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맺어지는 이 조약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살 수 있게는 하였지만 실제 주민과 만날 때는 많은 어려움을 낳았다. 이 어려움을 선교사들은 항상 자국의 대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는 자신들의 나라인 유럽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방인 사제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 교회 역사 속에서도 대구지방의 김보록 선교사가 대구에서 추방되었을 때, 프랑스 대사가 본국과 교황청에 편지를 쓰고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등 문제를 국제화해 내무대신의 사과를 받고 당당하게 대구에 다시 들어온 적이 있다. 그는 선교사로서보다는 프랑스인으로서 받은 부당한 대우를 돌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는 자신들의 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지역유지가 될 수 있고 신분보장을 받고 하인까지 거느릴 수 있게 되었으나 방인 사제는 그러하지를 못하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본국에서는 수도회를 부수고 추방하면서도 선교지에서는 아주 극진히 보호하였으니, 자국의 이익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포교성성 고문서고에 있는 자료를 보면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러한 보호를 즐긴 사람들도 있다. 중국에 있던 한 선교사는 마치 귀족인 양 행차를 하면서 빨리 비키지 않는다고 주민을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방관리가 선교사들에게 불편을 주면 중앙정부는 대사의 항의를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하였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선교사와 식민지 관청이 조약보다 더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고 한다.

 

교황청은 이 같은 관계에 우려를 표명하고 순수하게 선교활동만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개입과 선교사들의 안일한 태도로 교황청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인 사제는 선교사의 배려 밑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인 유럽 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교사 중에는 지역문화도 존중해야 한다고 강변한 사람도 있지만, 단순하고 열심하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일반론적인 생각을 한 선교사들은 신앙을 전하는 것과 문화를,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과 똑같이 여긴 경향이 있었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열대지방에 가서 청바지와 브레지어를 보내달라고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습관들을 미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선교사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한 이런 혼돈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힘이 물러가고 식민통치가 끝났을 때 일시적으로 갑자기 유럽문화와 동일시된 그리스도교는 쇠퇴한다. 지역교회로 일찍 변화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교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제사문제라고 하겠다. 18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에 박해를 불러온 제사문제가 1936년에 바뀌어, 확실하게 신앙과 상반되지 않으면 지역의 관습이나 습관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는 훈령이 나온 것이다.

 

19세기 교회에 대해서는 한층 넓게 살펴볼 수도 있지만, 선교에 국한하여 교회상황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 선교는 신앙의 토착화나 경제적인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닌,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목숨을 걸고 선교지로 향했으며, 신자들은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세례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세기의 바로 이러한 선교열풍으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윤리적인 법과 규범이 전세계에 널리 퍼졌다고 할 수 있다. [경향잡지, 1997년 10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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