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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43-44: 수도생활의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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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5 ㅣ No.197

[새로 보는 교회사 43] 수도생활의 재건 (1)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 교회에 커다란 혼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에는 결정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 폭력은 프랑스가 점령한 위성국가에서도 행해져,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은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역설적으로 보자면 수도생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하나의 시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추방당한 수도자들은 비록 공동체는 없어졌지만 개인으로는 수도생활의 이상에 더욱 열성을 가지게 되었고, 숨어 일하면서 교회와 수도원의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또 수도생활이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는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수도생활은 오히려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과 교회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을 등장시킨다. 나폴레옹은 온 유럽에 혁명의 기운을 전파하는 동시에 혼란과 불안정한 프랑스를 나름대로 안정시킨 사람이다. 특히 프랑스 교회를 정비하여 제자리를 찾게 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교회 정신에 충실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통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1799년 11월 9일) 프랑스는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혁명정부는 1797년 8월, 잇달은 반란을 무마하기 위해서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락하였다가 9월에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번에는 성직자들에게 ‘왕정에 대한 영원한 증오’를 선서하라고 강요하였다. 이 같은 상황이 또다시 큰 박해를 가져왔으니, 프랑스뿐 아니라 프랑스가 점령한 위성국가의 성직자들에게까지 이를 강요하였다. 벨기에에서는 성직자 9천여 명을 검거하려고 하자 교우들이 그들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3백 명쯤은 체포되어 구이아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이 가운데 절반은 배 안에서 죽었다. 이렇게 계속되는 쿠데타로 정세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를 원하던 때에 바로 나폴레옹이 등장하였다. 불안한 상황에서 교회 박해는 국가를 분열시키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이 분열을 나폴레옹은 1801년 로마와 정교조약을 맺음으로써 마무리지었다.

 

나폴레옹은 농업정책이나 과세정책들로 대중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정교조약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도 교회에 대한 박해로 반란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 열심한 프랑스 국민들과 화해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국제 외교관계에서도 로마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가톨릭은 프랑스 국민의 종교로 인정받고 자유롭게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조약을 적용하는 세부법령으로 교회를 국가 통치의 또 다른 조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으니,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도사제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생각이다.

 

그가 펼치는 정책 속에는 수도사제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국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수도회는 다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해외 선교를 하는 수도회는 우대를 하였다. “나는 당신들을 여러 나라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보냅니다. 당신들의 수도복은 상업목적이나 정치목적을 숨기고 당신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새로운 교회사, 마리에티 출판사, 제4권, 309쪽). 이렇게 라자로회와 외방전교회와 성령의 사제회들은 처음부터 수도회로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대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남자 수도회에 대해서는 불신을 나타내며 통제를 많이 하였다. 반면 여자 수도회에 대해서는 크게 불신하지 않았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병원이나 자선 그리고 교육에 종사하는 유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여자 수도회는 나폴레옹 치하에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814년에 정부에서 집계한 숫자만도 1,776개의 공동체에 12,415명의 수녀가 있었다.

 

1801년 이후 프랑스 교회는 국가가 통제하였다. 주교들은 일정한 보수를 받았으며 임지를 떠날 때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구 행정도 정부에서 엄격히 관리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절대 권력 아래서 교회가 되찾은 것도 있으니, 혁명기간에 빼앗긴 교회 건물들이다. 일반인들이 점거하고 있던 건물이 교회의 전례를 위해 복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분리된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숨어 지내거나 외국으로 추방되었던 사제들, 혁명정부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사제들, 세속화한 사제들이 돌아와 하나의 교회 안에서 뭉쳐지는 기회가 된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폭력적인 외부상황에서 생긴 이러한 분열을 모은다는 것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주교들은 교황사절 카파라와 나폴레옹의 협의로 결혼한 사제들의 장애까지도 풀어주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비어있는 본당을 채울 성직자는 여전히 부족하였다. 이 시점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해 새로운 정신의 신학교가 세워졌다.

 

앞서 말했듯이 나폴레옹은 교회를 자신의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교회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교리교재를 통일시켰는데, 거기에는 황제에게 사랑과 존경과 충성과 순명을 바치고 제국의 수호를 위해서 노력하고 황제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내용 따위가 첨가되어 있었다. 주교들은 황제를 찬양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벌여야 했다. 이러한 권력의 도구화로 교회는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행정조직과 같은 뼈대만 남고 다른 모든 활동을 못하게 된 것이다.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성당 밖의 모든 활동은 배제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를 일반인과 같이 여겼던 나폴레옹은 훗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성직자들에게는 로마가 중심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나라를 가진 사람들로서 일치점을 가질 수 없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또한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기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그가 한 첫 행동은 1809년 5월 17일, 교황청을 옮기는 대신 자신의 형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에 교황령을 예속시켜 교황령을 없앤 것이다. 이에 비오 7세 교황이 그를 파문시키자 나폴레옹은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제로 프랑스로 이주시켜 버린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두 번째 결혼을 반대하는 추기경들을 직위 해제한 뒤 여러 도시로 분산 이주시킨다. 이 와중에 교황은 사보나에 감금되었다가 1812년에는 파리 근처의 퐁텐불루 성으로 옮긴다. 이렇게 무력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가던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1814년 5월 24일에는 유럽연합군에게 패해 폐위된다. 나폴레옹이 물러남으로써 프랑스 교회는 비로소 국가에 종속된 단체라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수도생활의 부흥

 

프랑스 혁명 기간에는 오래된 대수도원들이 큰 피해를 보았으니 나폴레옹과 교회의 조약에도 수도생활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입법의회가 인간의 천부적 권리에 위배된다고 선언하면서 수도생활 자체를 거부하는 그 순간, 바로 그 바닥에서부터 수도생활은 살아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즈음 파리에서 해체된 예수회 출신 클로리비에르의 피코 신부가 두 개의 남녀 수도회를 비밀리에 창설하는 것이다. 여자 수도회인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딸 회는 1789년 박해 속에서도 수녀들이 254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수도회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1773년에는 해체된 예수회의 재건이 거론되었고, 1814년 8월 7일 비오 7세 교황은 이냐시오 성인 축일에 로마에서 칙서를 통해 가톨릭 교회 안에 예수회의 재건을 알렸다. 그리고 교황령 안에 있는 주요 재산을 예수회에 돌려줌으로써 예수회 회원은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수가 1820년에 2천 명이었고 1850년에는 6천 명에 이르게 된다.

 

1799년에 교황이 된 비오 7세는 베네딕토회 출신이다. 교황의 적극적인 권유와 주변의 도움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몇 개의 베네딕토회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옛 수도회 재건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점차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수많은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수도생활의 봄을 맞는 동기는 바로 여러 형태의 구체적인 활동 사도직과 선교열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더욱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자 수도원의 봉쇄구역이 무너지면서 아주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새로운 수도 형태는 공동체 생활 없이 또 종신서원 없이 세상 안에 살면서 수도생활을 지향하는 재속 수도생활로, 이는 교회 안에 커다란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렇게 19세기에 이르러 수도생활이 활기를 찾고 신앙이 되살아나는 원인에는 정치 경제 사상 사회적인 원인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본다. 그중에서 신앙의 부활을 부추긴 원인 하나를 먼저 보자.

 

19세기를 말할 때 보통 짧은 시간에 많은 사건이 아주 빠르고 복잡하게 진행된 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이 시대를 움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의(主義)들 - 보수주의 자유주의 국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개인주의 낭만주의 - 이 나타나 사회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부활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열강의 보수주의와 같은 평화와 유럽 안정을 희구하고 전통을 찾으려는 정치운동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인문주의 시대부터 시작된 인간 이성의 강조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반발을 가져왔고 신앙을 찾게 하는 계가가 되었다.

 

낭만주의의 출현으로 인간의 감정과 본능도 인간의 이성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문학과 예술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자연을 찬미하고 논리적 사고보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미를 추구하고 인간의 연민 사랑과 함께 신비로운 것을 찾게 되면서 자연히 하느님께로 눈을 돌리고 신앙을 찾게 됨으로써 이성의 위험에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인간의 내적 표현을 찾는 과정에서 증세의 정신세계를 존경과 향수를 가지고 돌이켜보면서 예술에서도 고딕 양식이 부활하였다. 낭만주의 감정의 강조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공경하는 신심으로 나타났다. 이성교를 창시하고 절대 존재교를 만든 프랑스에서 이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고 닮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7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44] 수도생활의 재건 (2)

 

 

19세기에는 새로운 수도회가 아주 많아 청설되는데,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수도회가 생겨난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으니, 18세기말 무렵 시작된 유럽의 산업혁명이 커다란 이유라고 하겠다. 자선을 기본으로 하는 수도회를 말하기 전에 산업혁명이 낳은 사회상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결국 우리 나라도 산업혁명을 거친 나라라고 본다면 그 사회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산업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인구증가나 농업의 구조변경 따위를 들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상품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기계화하면서 공장제도가 생긴 것이다. 농촌의 전통적인 생활형태가 이제는 생산공장을 매개로 한 공장도시의 탄생으로 도시생활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기술발달과 향상된 생산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그 혜택이 미쳤다면 사회문제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농촌 실업자가 대거 도시로 몰려드는 반면, 자본가나 공장주들은 노동자의 복지나 삶에는 무관심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자신들의 재산 불리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수많은 불쌍한 노동자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산업혁명의 첫째 문제는 도시화였다. 공장주들은 공장을 지으면서 도시의 기능을 고려한 급수, 하수도, 쓰레기, 치안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 오염 투성이와 각종 범죄 속에서 살아야 했다. 두 번째는 이로 인한 가정생활의 파탄이다. 주택은 날림으로 짓고 그마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 방에 모든 식구가 모여 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 아이는 많이 생기고 부모는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먹고 사는 일로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성도 제대로 없는 아이들이 집 나온 개처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도 바로 이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임금과 실업 문제가 따랐다. 일할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으니 자연히 공장주들은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구할 수가 있었다. 성인 남자의 벌이가 고작 자기 입만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실직을 했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가족은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공장주들은 비숙련공이 할 수 있는 곳에는 임금이 싼 어린이를 선호해 6세 어린이를 고용하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노동시간이 하루 14시간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환경이 아주 나쁜 곳에서 긴 시간 힘들게 일하면서도 휴일이 없었으니 실업 이외는 쉴 수가 없었다. 쉬는 날에는 급료가 없었고, 일거리가 없으면 임금은 주지 않아도 노동자를 도와줄 아무런 법적 체제가 없었다. 공장주와 노동자의 자유계약으로 약자인 노동자의 근무조건은 더욱 나빠지고 강자인 공장주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공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유럽으로 확대되면서 도시 근로자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뜻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사회주의라는 새 운동이 태동한다.

 

 

사회주의 운동

 

사회주의는 이렇게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자본가의 개인주의와 지나친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삶의 근저인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태어나는 배경에는 유럽 문화의 정신적인 주체인 그리스도교적인 덕행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희생과 봉사 그리고 형제애를 가르치며, 가진 것을 나누기를 강조하는 성서의 내용, 이러한 사상을 중세부터 교회는 실천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고 수도회 역시 이를 의무화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자선은 드러난 상황에 대한 실천이었지,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와 같은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었다.

 

처음 사회주의가 태동했을 때 이를 일명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영국의 오웬, 프랑스의 생시몽 같은 이들은 노동자의 비참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공산촌 따위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작 교회를 긴장시킨 것은 마르크시즘의 출현이다. 마르크스도 출발은 같은 환경이지만, 유물론적이고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그것이 사회운동이나 정치문제로 확대되는 등 파장이 컸기 때문에 교회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19세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침을 교황 레오 13세가 만들었다. 1891년 5월 15일에 반포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이제까지 불확실했던 문제들에 대해 답하면서 당시로서는 아주 진보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유재산의 사회성을 지적하고, 무정부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배척하는 한편, 발전을 위한 국가의 제한적인 개입을 인정하고,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해 노동할 의무가 있고 동시에 자본가는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순수 노동이 아니라 노동의 인간성을 지적하였다. 계급투쟁을 거부하나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보장을 위해 조합을 만들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의 법적 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고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가 탄생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노동자의 권리와 위치가 오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수도회의 창설

 

교회는 모든 백성의 교회이다. 그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다. 교회는 어느 한쪽만을 편들지 않고 전체를 수용해야 하며 어느 한편도 추방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부자들에게는 원칙을 말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함께 살았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 바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수도자들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19세기 중엽에 많은 수도회가 새로이 창설되었다. 또 이전에 창설된 수도회들일지라도 이 사회문제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이 낳은 사회문제에 가장 특정적이고 큰 역할을 한 이가 살레시오회를 창립한 요한 보스코 성인이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활동과 때를 같이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청소년을 위해서, 소외된 이를 위해서, 환자들을 위한 수도회가 여기저기에서 창설되어 활동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새로운 수도회 창설은 다음에 말하게 될 선교 열풍과 함께, 구체적인 사회봉사를 위해서 그 어떤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도회 부흥기를 맞게 한다. 수도회의 확산은 또한 활동을 위해 여자 수도회의 봉쇄 규범을 완화시켰다. 이는 사회가 필요한 급박한 상황에서 공동생활이나 장엄 서원이나 수도복 없이 세속에 뛰어드는 수도회 형태를 낳는다. 모든 수도회가 나름대로 훌륭한 일을 하고 업적을 남겼으나 여기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한 요한 보스코 성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 보스코가 활동을 시작한 곳은 이탈리아의 토리노 시였다. 토리노는 지금도 피아트 자동차 회사가 있는 곳으로 이탈리아 공업화가 시작된 곳이다. 성인은 이곳에서 이탈리아 각지에서 모여든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불리는 성인의 생각은 당시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돌봐 삶의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투쟁이나 사회에 대한 개념은 다른 수도회나 사람한테 맡기고 자신은 가난하고 버려진 청소년들과 직접 만나려고 하였다. 여기서 스무 권이 넘게 쓰여진 성인의 전기나 성인의 활동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다만 요한 보스코 성인이 그 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요한 보스코는 1846년에 살레시오 성인을 주보로 한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를 처음 시작한다. 젊은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는 때에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마르크시즘에 대응하기 위한 기숙사였다. 자본주의의 노동자 착취라는 마르크시즘의 주장은 당시 젊은 노동자들에게는 진리처럼 들리던 때에 성인은 이 노동자들을 순수하게 사랑으로 대했다. 그들 중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가진 경우도 있어서 그들을 재생시킬 방법을 찾으면서, 성인의 이러한 사랑의 활동에 동참하는 성직자 평신자들이 늘어나고 수도회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협력자들의 열성으로 1852년 비오 9세 교황에게 수도회 인가 신청을 내고 1859년에 승인되어 살레시오회가 탄생한다. 일의 성격상 규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과 공동체 밖에서 생활하는 이들로 나뉘어 생활했지만 모두 살레시오회 수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1874년 최종 인가에서는 공동체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제삼회로 수도회와 연결되게 하였다. 그러나 제삼회의 활동이 순전히 재정적 도움으로 끝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버려진 청소년들을 위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자선활동을 하도록 성인은 권하였다.

 

소녀들을 위한 수녀회도 창설되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성덕과 일에 매료된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1837-1881년) 성녀를 통해서 살레시오회 정신과 활동을 여성들에게도 적용시킨 수녀회가 1872년에 시작하여 1878년에 정식인가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 남녀 수도회를 소개한 책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은 한국에서 청소년 교육관, 직업훈련소, 젊은 노동자 기숙사, 학생 기숙사, 야간학교, 노동청년회 지도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여자 수도회는 직장여성 기숙사, 결손 가정 소녀를 위한 나자렛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이 교육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 수도회를 “오늘의 수도자들”(1983, 분도출판사)에서 소개한 수도회를 몇 군데만 보자.

 

마리스타 교육 수도회는 교육을 통해 청소년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리옹 지방에서 시작되었고, 마리아 수도회는 비슷한 시기에 거의 같은 목적으로 보르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여자 수도회로서 1854년 남프랑스에서 창립된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는 산업혁명의 변화에서 젊은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 결핵요양소를 설립하였다. 또 1841년에 창립되어 양로원, 고아원, 미혼모를 위해 활동하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로마의 청소년을 위해 1879년에 활동을 시작한 성심의 프란치스코 수녀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도가 되기를 바라는 프라도 수녀회들이 있다. 세계적으로 산업혁명이 낳은 사회현상에 도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수도회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창설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8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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