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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세기 말 전라도 신앙공동체와 천주교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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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09 ㅣ No.1163

18세기 말 전라도 신앙공동체와 천주교 서적

 

 

국문초록

 

전라도에는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유항검과 윤지충에 의해 전주와 진산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당시 전라도의 신자들은 다른 지역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적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지식과 교리를 익혔으며, 이를 토대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확대시켰다.

 

전라도 신자들은 서울과 충청도 신자들이 보았던 많은 교회 서적들을 읽었다. 그러나 기록상 《천주실의》, 《칠극》, <십계>, <조만과(早晩課)>, 《서학범(西學凡)》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십계>는 전라도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십계>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였고 전교활동도 펼쳤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하늘의 영복(永福)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신자들의 이러한 믿음은 이 시기 신자수를 증가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신자들은 <십계>를 통해 배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자들을 순교로 이끌었다.

 

<십계>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일상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십계>(4~10계)는 신자들이 현세에서 착한 사람, 효성이 지극한 자식, 충성스런 국민, 인격을 갖춘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쳤고, 신자들은 이러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Ⅰ. 머리말

 

1811년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문서를 통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설립했다는 자부심이 잘 드러나 있다[普天下聖敎初入之地 不由司鐸傳敎 只憑文書訪道 惟有我東國]. 여기서 ‘문서’란 17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천주교 서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한문으로 작성한 서학서(西學書)는 조선에 천주교회가 설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 서적은 교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신자들은 천주교 서적을 토대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도, 1명의 성직자가 4,000명 이상의 신자들을 교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 서적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 보급된 교리서와 기도서는, 한문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입교하여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빠른 시간 내에 급속히 증가할 수 있었다.1)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료-1] 요즈음 듣자하니 호우(湖右) 일대는 거의 집집마다 소장하거나 전하면서 암송하고 있으며, 언문으로 번역하거나 베껴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관장이 이를 금하여도 안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도리어 본받는 법으로 삼고 있다고 하니, 실로 하루 빨리 이들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를 것입니다.2)

 

[자료-1]은 홍낙안이 1788년 1월에 제출한 책문(策文) 내용의 일부이다. 이에 따르면 충청도 지역에는 1788년 이전에 이미 많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었고, 나아가 한글로 번역 필사되어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책을 보고 천주교를 익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보았던 천주교 서적은 충청감사로 재직하던 박종악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편지에는 1791년에 신자들이 관에 바치거나 압수한 서적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목록에 <천주십계>, 《만물진원》, 《성세추요》, <인진주(認眞主)>3), 《문답》, 《성사문답》, 《성교일과》, 《성경일과》4), 《여미사규정》, 《성년광익》, 《칠극》, 《이십오언(二十五言)》 등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충청도의 신자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성경을 익히고, 묵상과 기도를 하며, 성사와 전례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 중 <천주십계>, 《성경일과》, 《일과》5), 《여미사규정》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하층의 신자들도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 공부와 기도 · 전례생활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6)

 

신자들이 보유한 책자는 1801년에 압수되어 불태워진 서목(書目)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표1]).

 

 

 

[표1]에 의하면, 신자들은 1801년 이전에 성경, 전례서, 성사서, 기도서, 묵상서, 성인전, 교리서, 첨례서 등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보았고, 그중에는 상당한 양의 한글 서적8)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교회 설립기의 신자들은 이상의 서적들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배웠고, 그 내용을 체화(體化)하여 신앙을 지켜가는 가운데 순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겠다.

 

서적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지식과 교리를 익힌 것은 전라도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는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유항검과 윤지충에 의해 전주와 진산에 형성되었다.9) 그런데 이 시기 전라도의 신자들은 서울 및 충청도 신자들과 교류하고 있었고, 유관검은 1801년 당시 100권에 가까운 천주교 서적을 관에 바치고 있다.10) 이러한 사실은 전라도 신자들 역시 [표1]에서 언급한 서적들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자료상 이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서명은 《천주실의》, 《칠극》, <십계>, <조만과(早晩課)>, 《서학범(西學凡)》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주교 서적은 교회의 설립기에 신자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유지시킨 동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책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도서는 기도생활, 교리서는 교리 지식, 전례서와 묵상서는 전례생활과 묵상생활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신자들의 삶과 천주교 서적과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윤지충이 《성교절요》, 《천주실의》, 《영언여작》, 《성경직해》, 《교요서론》 등을 제사 폐지의 논거로 삼았다거나,11) 윤지충의 효 사상이 《천주실의》와 《성세추요》의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가 있다.12) 그리고 유관검은 《서학범》을 통해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당시의 신자들이 《성경직해광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연구도 있다.13)

 

이러한 연구들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배경을 밝혀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신자들이 읽었던 서적의 종류를 고려할 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신자들과 천주교 서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초기 전라도 신자들과 천주교 서적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기 전라도 신앙공동체’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의 일단을 밝혀보고자 한다.

 

 

Ⅱ. 교회 서적의 전라도 보급

 

기록상 전라도 신자 중에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한 사람은 윤지충이었다.14) 전라감사 정민시의 보고에 따르면, ‘윤지충은 서울에 머물던 1784년 겨울에 명례동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방문했고, 김범우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고향집으로 돌아와 두 책을 베낀 다음 돌려주었다’고 하였다.15)

 

윤지충은 1783년 봄에 실시된 생원시에 합격했다.16) 그는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고종 사촌인 정약전ㆍ정약용 형제와 1782년 가을에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15일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 시험을 준비하였다. 윤지충이 언제 성균관에 입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84년 겨울에 서울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1784년에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17)

 

윤지충이 서울에 머물던 1784년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와 이벽과 함께 천주교를 알리던 시기였고, 정약전 형제도 4월에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그로부터 《천주실의》와 《칠극》 등을 빌려보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서울에 머물던 윤지충도 정씨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자신들이 아는 신자들을 소개받게 되면서 김범우의 집도 방문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윤지충이 입수한 《천주실의》와 《칠극》은 같은 마을에 살던 동생 윤지헌과 외종사촌인 권상연에게 전해졌다. 윤지헌은 ‘1784년 윤지충이 서울에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온 후 자신에게 배울 것을 권했다’고 했고,18) 권상연은 ‘윤지충이 서울에서 두 책을 가져온 직후에 얻어 보았다’고 진술했다.19) 이것으로 보아 《천주실의》와 《칠극》은 윤지충을 통해 그의 지인들에게 알려졌고, 그러면서 천주교가 어떤 종교라는 것이 진산 지역의 유학자들에게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실의》와 《칠극》에 이어 등장하는 책이 <십계>였다. 홍주 출신의 한덕운은 1790년 10월경에 진산의 윤지충 집에 가서 <십계>를 배웠고,20) 무장의 최여겸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를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21) 윤지충은 《천주실의》와 《칠극》뿐만 아니라, <십계>도 구해 전교와 교육에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 윤지충이 <십계>를 접한 것은 1784년 겨울 김범우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윤지충은 이 때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보게 되는데, “그 절목(節目)에 있는 ‘십계’와 ‘칠극’의 내용이 매우 간략하고 따르기 쉬웠다”고 하였다.22) 문맥상 ‘십계’가 절목 중에 있는 책은 《천주실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천주실의》에는 ‘십계명’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렇다면 윤지충은 왜 《천주실의》의 조목 중에 ‘십계’가 있다고 진술했을까? 혹시 다른 책을 착각한 것이 아닐까?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와 비슷한 호교서로 1637년에 수정 간행된 루지에리 신부의 《천주성교실록》이 있다. 《천주성교실록》은 《천주실의》와 비슷한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천주실록》으로 약칭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윤지충이 두 책을 착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16장으로 구성된 《천주성교실록》의 12~14장이 ‘십계’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23) ‘책의 조목에 십계가 있다’는 윤지충의 진술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추정에 불과하며, 윤지충이 보았다는 책은 그의 진술대로 《천주실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십계’ 부분은 7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십계’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 즈음 윤지충이 <십계>를 보고 소지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십계>는 독립적으로 간행된 책은 아니다. 십계명과 관련된 책으로 조선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1642년에 디아즈(Diaz, 陽瑪諾, 1574∼1659) 신부가 북경에서 간행한 《천주성교십계직전(天主聖敎十誡直詮)》이다. 그러나 윤지충이 보유한 <십계>는 분량이나 도입 시점을 고려할 때, 디아즈 신부의 저서는 아닌 듯하다.24)

 

그렇다면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십계>는 어떤 책일까? 당시 조선에 도입된 서적 중에 십계명을 수록하고 있는 책은 기도서인 《성교일과》와 《수진일과》, 교리서인 《성교절요》와 《교요서론》 등이다. 이중 기도서에 수록된 십계명은 10개의 계명만 쓰여 있는 반면, 교리서에 수록된 십계명은 각 계명 별로 죄가 되는 구체적인 조목까지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교리서 중에서는 《교요서론》보다 《성교절요》의 내용이 좀 더 자세하다.25)

 

이러한 사실과 후술하는 신자들의 진술 내용을 비교해 볼 때, 당시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십계>는 《성교절요》에 수록된 내용을 따로 필사한 책자일 가능성이 크다.

 

<십계>는 진산뿐만 아니라, 전주 공동체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우집은 1795년에 유관검에게 <십계>를 배웠다고 했고,26) 유항검의 친척으로 그의 집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김제의 한정흠과 유항검의 종인 김천애도 ‘십계는 버리기 곤란하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유항검 형제를 통해 <십계>를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27)

 

이우집은 <십계>뿐만 아니라 <조만과>도 강습하였다.28) <조만과>는 아침과 저녁에 바치는 기도로, 《성찰기략》과 《천주십계》29)에는 ‘조만과’를 바치지 않는 것을 제1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조만과>는 당시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조만과>도 독립적으로 간행된 책자는 아니다. 기도서인 《성교일과》나 《수진일과》에 수록된 ‘조만과’를 필사하여 <십계>처럼 책자로 묶은 것이다.30) 이 시기 신자들은 ‘성인전’이나 ‘묵상서’처럼 필요한 기도문을 따로 필사하여 소지하고 있었다.31)

 

마지막으로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서적으로 《서학범》이 있다. 유관검은 “일찍이 ‘서학범’을 보니 그 중에 문과(文科), 도과(道科), 의과(醫科), 이과(理科)의 설이 있었고, 각 과마다 선생이 있어 인재를 교육하여 공학(公學)에 올리고, 그 재주의 여부를 보아서 조정에 올리면, 재능에 따라 벼슬을 준다고 되어 있다.”고 진술하였다.32)

 

《서학범》은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중국 선교사 알레니(Aleni, 艾儒略, 1852-1649) 신부의 저술로, 유럽의 교육 과정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의 대강을 수록한 책이다. 이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문과(文科, rhetorica), 이과(理科, philosophia), 의과(醫科, medicina), 법과(法科, leges), 교과(敎科, canones), 도과(道科, theologia) 등 여섯 과목을 가르치며, 교육 과정은 소학 과정, 중학 과정, 대학 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소학 과정인 문과를 수료하면 평가를 거쳐 중학 과정인 이과에 진학하고, 이과를 수료한 다음에는 역시 평가를 거쳐 대학 과정으로 올라갈 수 있다. 대학 과정은 의학 · 법학 · 교학 · 도학 등 네 개의 전공 과목으로 나뉘는데, 학생들은 각 자가 하나의 과를 선택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대학 과정을 마친 다음,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시험을 거쳐 합격자만 의료인이 될 수 있고, 법학[治科]을 전공한 사람은 공부를 마치고 엄격한 시험을 통과하면 국가에서 직무를 부여한다. 그리고 교학과 도학을 전공한 사람은 교구나 수도회에서 일정한 소임을 담당하였다.33)

 

《서학범》은 1623년에 초간되었고, 1629년에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간행한 《천학초함(天學初函)》에 수록되었다. 《천학초함》은 1784~1785년에 이벽(李蘗)이 가지고 있었는데,34) 이것으로 보아 《서학범》은 일찍부터 양반 신자들 사이에 읽혀졌고, 그 과정에서 전라도의 유관검에게도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서학범》에 실린 서양의 교육제도는 알레니의 또 다른 저술인 《직방외기》에도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35) 그리고 《직방외기》는 권일신이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그런데 유항검은 권일신을 통해 입교했으므로,37) 《직방외기》는 권일신을 통해 유항검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유항검이 《직방외기》를 보았다면, 그의 동생인 유관검도 《직방외기》를 읽었을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유관검은 《서학범》과 《직방외기》를 통해 서양의 교육 제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학범》에 대한 유관검의 이해가 정확했는지는 의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학범》은 유럽의 교육 과정과 4개 과(科)의 대학 과정을 마친 사람의 진로에 대해 소개한 책이다. 이에 따르면 졸업생들은 의료인이 되고, 관리가 되고, 종교인으로 활동하는데, 이 중 의료인과 관리는 특별히 시험을 거쳐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국가의 관리가 되는 것은 법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며, 의학을 전공한 사람은 반드시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관검은 ‘인재를 교육하여 공학에 올리고, 그 재주의 여부를 보아 조정에 올리면, 재능에 따라 벼슬을 준다’고 했고, 이우집은 ‘과목을 개설하여 인재를 선발하고, 기술을 헤아려 의관을 뽑을 것이다.’라는 말을 유관검에게 들었다고 했다.38) 아울러 유관검은 《서학범》을 소개하며 문과, 도과, 의과, 이과를 언급했는데, 그의 말에는 소학, 중학, 대학 과정이 섞여 있고, 대학 과정인 법학과 교학은 빠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유관검의 《서학범》에 대한 이해는 한계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서학범》의 내용을 소개하며 “재능에 따라 벼슬을 준다.”고 인식한 것은, ‘체계적인 교육제도에 따른 공정한 관리임용’이라는 바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39)

 

이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항검의 아들인 유중철이 《칠극》과 《성경직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유중철은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났을 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그리고 1797년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이순이와 혼인한 후 동정부부로 살았다.

 

정덕(貞德)과 관련해서 《칠극》에는 “정결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부부가 도리에 맞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키는 부부의 정결이 가장 낮은 등급이고, 중간 등급은 홀아비와 과부가 정조를 지키는 것이며, 가장 높은 등급은 동정의 몸을 지키는 정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결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보답도 동정을 지킨 사람들의 몫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40)

 

《성경직해》에도 ‘(동정과 관련해서) 신자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고, 동신(童身)의 정덕을 지킨 사람을 상(上), 홀아비와 과부의 정덕을 지킨 사람을 그 다음, 부부의 정덕을 지킨 자를 마지막 등급으로 위치지우고, 동신의 정덕은 금이고, 홀아비와 과부의 정덕은 은이며, 부부의 정덕은 동이라는 성현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41) 이것으로 보아 유중철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데에는 두 책의 내용이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42)

 

한편 유항검이 천주교 서적을 얻게 된 경로를 보면, 1791년에 이종사촌인 윤지충에게 천주교 서적을 빌려 보았고, 양근의 권철신 집에 가서 천주교 서적과 성상(聖像)을 보았으며, 황사영의 집에서 최필공 · 최필제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강론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유항검은 진산, 양근, 서울 신자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필요한 서적을 구해 보았음을 알 수 있다.43)

 

유관검은 윤지충, 이존창, 최창현에게 천주교 서적을 빌려보았고, 윤유일, 권일신, 권상연, 민도(閔燾)에게서 책을 베껴왔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의 현계흠과 강완숙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44) 이러한 사실에서 유관검의 교류 범위도 그의 형과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산, 양근, 서울, 충청도 신자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서적을 빌려보거나 베낌으로서 필요한 서적을 구비했던 것이다. 특히 1790년 봄에 청주 사는 민도로부터 수권의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다45)는 것은, 유관검이 청주 지역까지 교류 범위를 확대했음을 말해준다.46)

 

윤지헌 역시 현계흠, 정약종, 강완숙 등 서울에 거주하는 신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윤지헌도 서울로부터 필요한 서적을 구해 보거나 필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윤지헌의 심문 내용에는 “너의 집에서 베껴 나온 것이 서울과 지방에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유항검 형제가 소장한 물건 태반이 너의 물건”47)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윤지헌은 천주교 서적의 보급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항검 형제가 소장한 물건이 윤지헌과 관련이 있다면, 1801년에 유관검이 100권에 가까운 천주교 서적을 관에 바쳤다는 사실도 윤지헌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전라도의 경우 윤지헌이 중심이 된 고산 공동체48)에서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전주의 유항검 형제에게 보내면, 유항검 형제가 이 필사본을 전교와 교육에 활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전라도의 전주와 고산 공동체는 개별적인 공동체이면서도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18세기 말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천주교 서적으로는 《천주실의》, 《칠극》, <십계>, <조만과>, 《서학범》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라도 신자들의 활동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은 충청도와 서울 신자들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서적을 공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유항검이 1786년에 이승훈이 임명한 평신도 신부의 한 명이었고,49) 평신도 성직제도(가성직제도)의 위법성을 제기50)할 만큼 교리 지식이 풍부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회 서적을 많이 읽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윤지충이 《성교절요》, 《천주실의》, 《영언여작》, 《성경직해》, 《교요서론》 등을 제사 폐지의 논거로 삼았다거나, 윤지충이 《천주실의》와 《성세추요》의 영향을 받았고, 《성경직해광익》이 당시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Ⅲ. 전라도 신자의 신앙과 교회 서적 - <십계>

 

1801년 이전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천주교 서적은 《천주실의》, 《칠극》, <십계>, <조만과>, 《서학범》이었다. 물론 전라도 신자들이 이 다섯 가지 서적만 보았다는 것은 아니다. 기록상 다섯 가지 서명만 확인된다는 것이다.

 

박해시기 전라도 신자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이들이 남긴 공초 기록이다. 그러나 기록을 남긴 사람의 수가 적고, 내용도 특정한 사건에 많은 부분이 할애된 측면이 있다. 즉 1791년에 체포된 윤지충은 조상 제사 거부 문제, 1801년에 체포된 유항검 형제는 대박청래(大舶請來) 문제가 부각되면서 심문 내용의 많은 부분이 이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지만 신자들의 진술을 정리해 보면, 여러 신자들과 관련된 책으로 <십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한 열 가지 계명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교리였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전체의 ⅔가 <십계>를 송습할 정도로 십계명을 배우고 실천하였다.51)

 

전라도 신자들의 진술에서도 <십계>와 관련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먼저 윤지충은 자신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의 정당성을 피력했는데, 그의 논리는 《성교절요》에 수록된 <천주십계>52) 1계명에 있는 두 가지 죄목(자료-2)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53)

 

[자료-2] ① 조상과 죽은 자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영험한 감응이 있다고 믿어서, 그들에게 복을 구하고 도움을 빌거나, 또는 그들의 권능을 믿어서 음식을 진설하거나, 또는 그들이 와서 먹기를 청하면 죄가 된다.

 

② 조상과 죽은 자의 영혼이 목패 위에 있다고 믿어서, 이런 뜻으로 여러 가지 이단 글자를 새긴 패를 세우거나, 글자가 없이 백패를 세우거나, 이런 것들과 여러 가지 사악한 패와 비석을 향해서 울거나, 진심으로든 거짓으로든 절을 하면 죄가 된다.

 

다음으로 윤지충의 진술 중에는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흠숭(欽崇)하는 뜻이 못된다.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다.”는 내용이 있다.54)

 

이와 관련하여 <십계>의 1계를 설명하는 조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차라리 부모와 나의 생명, 그리고 세간의 모든 물건들을 잃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을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나의 명을 지키기 위해 집, 형제, 자매, 부모, 처자, 전지(田地)를 버리는 것은 반드시 천당의 영원한 삶으로 보답을 받는다고 하셨다.”55)

 

이 조목은 신자들이 왜 천주의 명령을 준수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버릴지언정 천주로부터 죄를 얻을 수 없다’는 윤지충의 신념은 바로 이러한 <십계>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윤지충은 심문 중에 신자들에 대해 진술할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망령되게 증언하지 말고, 남을 해치지 말라는 천주의 가르침이 계율 가운데 있으니, 타인을 끌어들일 수 없다(天主之敎 不妄證不傷人在於誡中 則尤不可援引他人)56)”며 거부하였다. 여기서 윤지충이 언급한 계(誡)는 십계명 중 제8계에 해당하는 ‘망령된 증언을 말라(毋妄證)’의 내용이다. <십계>의 8계 조목에는 ‘망증(妄證)’과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전하고, 남의 장단점을 비방하며, 남의 좋지 못한 일을 드러내고, 거짓된 말로써 남의 명성을 상하게 하고, 남을 헐뜻는 말로써 다른 사람의 일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유죄”57)로 규정하고 있다.

 

유관검도 <십계>를 읽고 실천했다. 유관검은 이우집에게 <십계>를 배울 것을 권유하면서, 십계명을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吾人當行之事)”이라고 설명했다.58) 이 말은 <십계>의 첫머리에 나온다. 즉 “천주십계는 천지의 큰 주인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선을 명하고, 사람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악을 금지한 것이다”59)라는 설명이 있다.

 

유관검이 <십계>로 이우집을 가르친 것은, 십계명을 신자라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실천 강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관검이 신입교우에게 십계명을 가르친 것은, 유관검만의 방식이 아니라 당시에 통용되던 조선 교회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60)

 

이와 함께 유관검이 1790년에 청주에 사는 민도로부터 얻어 본 책도 <십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관검의 진술에 의하면, “1790년 봄에 과거를 보려고 상경하다가, 여객에서 민도를 만나 ··· 몇 권의 책자를 얻어보게 되었다. 그 학문에서는 ‘천주를 존숭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었는데, ··· 그 책을 소매에 넣고 돌아와 자연히 미혹되었다. 그 후에 또 윤지충에게서 그 경문을 얻어 보게 되었다.”61)고 하였다.

 

여기서 유관검이 천주교의 종지라고 여긴 ‘천주를 존숭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은, <십계>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즉 <십계>에는 열 번째 계명까지 설명한 후 “이상의 십계는 결국 천주를 만물보다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愛人如己)는 두 가지로 귀결된다.”고 하였다.62) 유관검은 전주에서 문초를 받을 때도, “천주교의 종지는 ‘愛人如己’에 있다.”는 말을 하였다.63) 아울러 유관검이 윤지충으로부터 같은 경문을 얻어 보았다는 것은 윤지충 역시 <십계>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윤지헌도 <십계>의 가르침 속에서 생활한 사례가 있다. 즉 그가 정약종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을 때, 주 신부는 ‘술을 끊지 못한 그를 십계명을 범한 것’이라며 엄하게 책망하였다.64) 이처럼 주문모 신부가 십계명을 들어 윤지헌을 책망한 것은, 윤지헌을 비롯한 신자들의 삶이 십계명의 테두리 안에 규정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항검의 며느리인 이순이는 두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信) · 망(望) · 애(愛) 삼덕(三德)’을 강조하였다. 즉 삼덕은 모든 덕의 주인으로, 신 · 망 · 애 삼덕에 진실하면 다른 덕은 자연히 따라온다고 하였다.65) 그런데 <십계> 제1계명의 마지막 조목에 “신 · 망 · 애 삼덕을 발하지 않으면 유죄”라고 하였고,66) 《교요서론》에 실려 있는 <십계명>의 제1계에도 ‘천주를 흠숭하는 것은 신 · 망 · 애 삼덕으로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고, 삼덕에 충실하지 못하면 1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67) 이것으로 보아 이순이도 십계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68) 다만 이순이가 《성교절요》와 《교요서론》 등의 교회 서적을 보고, 또 십계명을 알고 실천했던 것은 1797년 유중철과 혼인하기 전, 서울에 거주할 때의 일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십계>와 관련해서 <십계>의 ‘봉송자(奉誦者)는 대부분 무식한 상인(常人) 신도’라는 견해가 있다.69) 그러나 <십계>의 성격과 상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친 주체들을 고려할 때, <십계>의 봉송자를 신분으로 구별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십계>는 유관검의 말처럼 신자라면 누구나 준수해야할 규범이기 때문이다. 실제 <십계>에도 어떠한 등급의 사람이든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엄수하라고 쓰여 있다.70)

 

전라도 신자들의 신문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으로 ‘천당과 지옥’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관검은 “요사스럽고 허망한 말을 지나치게 믿어서, 천당은 정해진 날에 오를 수 있다고 여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헤아리기 어려운 죄과에 빠졌다.”71)고 했다. 그리고 “사람을 권하여 입교시키는 것은 승천(昇天)하는 큰 공이 되니,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힘을 다해 권유해서 바라는 것은 승천에 있다.”72)고도 했다. 이 말은 유관검이 천당에 오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천주교를 믿고, 전교 활동에 종사했음을 말해준다.

 

윤지헌도 “천당지옥은 그 이치가 반드시 끝이 있음을 이르는 것이므로, 스스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였다.73) 즉 사람은 죽은 다음에 반드시 천당에 오르거나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비록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하지만 천당에 오르기 위해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것이다.

 

한정흠의 결안에도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폐지하는 일을 일찍 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천당지옥(을 믿어) 죽음을 보기를 삶처럼 여기며 그릇된 도리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다.”74)는 내용이 있다. 한정흠 역시 내세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현재의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여겸도 “악한 자들은 벌을 받고, 선한 자들에게 약속된 보상 때문에 천주교를 믿었다.”75)고 하면서 사후의 심판을 신앙의 근거로 내세웠다.76) 그리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세(此世)를 꿈 같이 여기고, 영세(永世)를 본향으로 알고” 남은 삶을 살 것을 부탁하고 있다.77)

 

이것으로 보아 ‘천당지옥론’ 즉 내세에 대한 믿음은 유관검, 윤지헌, 한정흠, 최여겸 등 전라도 신자들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에 한정흠 · 김천애 · 최여겸은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겨 두려워하지 않았고(視死如歸),’ 김천애는 ‘형벌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刑戮是榮).’78)

 

천당지옥에 대해서는 《천주실의》79)와 《교요서론》80) 등 여러 천주교 서적에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천당지옥’에 대한 개념은 《천주실의》와 《교요서론》을 읽은 전라도의 양반 신자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주십계를 설명하는 <십계>의 첫머리에도, “(십계를) 지키는 자는 모두 승천하여 무궁한 복을 누리고, (십계를) 범한 자는 지옥에 떨어져서 무궁한 괴로움을 받게 된다.”81)는 말이 있다.

 

이 시기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십계명을 송습하고, 천당의 영복(永福)과 지옥의 영고(永苦)에 대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십계명의 준수와 천당 지옥을 연계한 <십계>의 내용은 신자들에게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게 하는 충분한 동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는 ‘십계명은 버리기 어렵다’고 진술한 후 각자의 고향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82)

 

천주교의 종지(宗旨)는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고, 나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유관검은 ‘애인여기(愛人如己)’하라는 천주교의 종지에 따라, 현우(賢愚),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입교시켜 선(善)을 행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활동을 천당에 갈 수 있는 대공(大功)이라고 믿었다. 즉 전교는 행선(行善)과 애인(愛人)의 실천이며, 그 결과 승천(昇天)하여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윤유일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조선 교회는 1,000명의 신자를 보유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직전인 1794년에는 4,000명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에는 10,000명까지 늘어났다. 이 시기 교세의 증가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유관검과 같은 논리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즉 전체 신자의 ⅔가 십계를 송습하는 상황에서, <십계>에 대한 교육은 유관검의 논리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전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교세가 증가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천국의 영복(永福)과 지옥의 영고(永苦)에 대한 확신, 배교하면 천주께 죄를 얻어 천당에 갈 수 없다는 두려움의 작용으로, 순교자를 배출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즉 <십계>에는 ‘관아에서 봉교(奉敎) 여부를 심문할 때, 말하기를 거부하고 봉교 사실을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 ‘천주강생, 천당지옥, 성경의 말씀 등 마땅히 믿어야 할 바를 의심하는 것’을 유죄로 규정함으로써,83) ‘신자는 배교하지 않는다(신자 ≠ 배교)’라는 공식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박해가 격화되어 신자들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을 때, 신자들은 이 공식에 따라 순교의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유관검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성대가 될 것이고, 천주교는 임금을 섬기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데,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이 세상을 태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84) 즉 신자들도 현세의 삶이 태평성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에서 ‘대박청래와 《서학범》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교회에서는 현세를 역려(逆旅), 인생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와 함께 <십계>는 신자들이 현세에서 착한 사람, 효성이 지극한 자식, 충성스런 국민, 인격을 갖춘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신자들도 이를 위해 계명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85)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십계>는 신자들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18세기 말 전라도 신자들이 보았던 교회 서적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라도에는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유항검과 윤지충에 의해 전주와 진산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당시 전라도의 신자들은 상호 간에, 또는 서울, 양근, 충청도의 신자들과 교류하며 교회 서적을 얻어 보았고, 다른 지역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적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지식과 교리를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확대시켜 나갔다.

 

전라도 신자들은 서울과 충청도의 신자들처럼 많은 교회 서적을 보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현재는 《천주실의》, 《칠극》, <십계>, <조만과>, 《서학범》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교회 서적은 신자들이 신자로서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십계>의 영향력이 컸다. 신자들은 십계명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였고, ‘애인여기(愛人如己)'라는 <십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전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하늘의 영복(永福)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이 시기 신자 수를 증가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신자들은 <십계>를 통해 배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자들을 순교로 이끈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십계>는 신자들의 현세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십계>(4~10계)는 신자들이 현세에서 착한 사람, 효성이 지극한 자식, 충성스런 국민, 인격을 갖춘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쳤고, 신자들은 이러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참고문헌


1. 자료

 

《성경직해》

《성교절요》

《성찰기략》

《순조실록》

《정조실록》

《십계진전(十誡眞詮)》

《천주성교십계직전》

《천주십계》

《사학징의》, 불함문화사 영인본, 1977.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5.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3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6.

마테오 리치 지음, 송영배 · 임금자 · 장정란 · 정인재 · 조광 · 최소자 옮김,《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빤또하 저, 박유리 역, 《칠극》, 일조각, 1998.

앙투안 다블뤼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이기경 편, 《벽위편》, 서광사 영인본, 1978.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줄리오 알레니 지음 · 천기철 옮김, 《직방외기》, 일조각, 2005.

페르비스트 지음,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한국사학, 2013.

 

2. 저서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이효림, 《중·한 성서 번역의 역사와 십계명 번역의 비교 연구》, 목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8. 12.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주명준, 《천주교의 전라도 전래》, 탐구당, 1998.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제1집》, 천주교 전동 교회, 1992.

 

3. 논문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김진소, <한국 천주교회의 소공동체 전통>,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김진소, <호남지역 신앙공동체의 특성>, 《신학전망》 147,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04.

김한규,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한국천주교회의 몇가지 문제>,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방상근, <‘수기’와 ‘노상추일기’를 통해 본 18세기말 충청도 교회>, 《한국 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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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상, <예수회 중국 활동의 선구적 성과인 『천주성교실록』에 대한 초보적 연구>, 《신학과 철학》 18,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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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하성래, <한국 천주교회의 한글 번역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하태진, <조선후기 이순이의 동정관 형성 과정>, 《전북사학》 37, 전북사학회, 2010.

 

………………………………………………………………………………………

 

1) 17세기 이래 조선에 도입된 천주교 서적에 대해서는, 배현숙의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배현숙,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한국교회사논문집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 <홍낙안대친책문>(1788. 1. 10), 《벽위편》(이기경 편, 서광사 영인본, 1978, 14쪽); 차기진, <내포지역의 복음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제1차 성 김대건 신부 생가 및 기념관 건립 기념 세미나 발표문, 2002, 101쪽.

 

3) 《성교천설(聖敎淺說)》의 첫째 권. 《성교천설》은 1권 <認眞主>, 2권 <識己性>, 3권 <明賞罰>, 4권 <感降生> 등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들이 천주를 인식하고 천주교로 귀의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성교천설》은 신사원이 예산 현감으로 재임(1785. 8~1789. 6)할 당시 예산 지역에 전파되어 있었다(《정조실록》 33권, 정조15년(1791) 11월 3일 자).

 

4)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다. 혹 《성교일과》의 오기일 수 있지만, 1801년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된 책 중에 《성경일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목의 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서명으로 볼 때 《성경직해》나 《성경광익》처럼 성경과 관련된 책이 아닐까 추정된다.

 

5) 《일과》 즉 《성교일과》는 한문본과 한글본이 다 있다. 

 

6)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방상근, <‘수기’와 ‘노상추일기’를 통해 본 18세기말 충청도 교회>, 《한국 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36~38쪽 참조.

 

7) 《사학징의》, 불함문화사 영인본, 1977, 379~386쪽.

 

8)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91~97쪽. 이외 <요화사서소화기>를 분석한 연구로는 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22~26쪽; 하성래, <한국 천주교회의 한글 번역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95~505쪽 등이 있다.

 

9)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제1집》(제1편), 천주교 전동 교회, 1992;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96~97 · 06~111쪽; 주명준, 《천주교의 전라도 전래》(Ⅲ장 · Ⅴ장), 탐구당, 1998.

 

10)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77쪽.

 

11) 조현범, <윤지충의 폐제분주 논거에 대한 일 고찰>, 《종교연구》 78-1, 한국종교학회, 2018.

 

12)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144 · 148쪽.

 

13)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164 · 179쪽; 김진소, <한국 천주교회의 소공동체 전통>,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김진소, <호남지역 신앙공동체의 특성>, 《신학전망》 147,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04;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참조.

 

14) 전주의 유항검도 윤지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천주교 서적을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5, 79쪽.

 

16) 윤지충은 공초에서 진사시에 합격했다고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별시(증광시)의 생원시(3등 39위)에 합격하고, 4월 11일(음)에 인정전에서 백패(白牌)를 받았다. 따라서 윤지충은 진사가 아니라 생원이었다.

 

17)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79 · 85 · 97쪽.

 

18) 《사학징의》, 238쪽.

 

19)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83쪽.

 

20)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224쪽.

 

21) 최여겸의 경우, ‘처음에 윤지충을 따라 천주교에 빠졌고, 나중에 이존창을 따라 독실하게 믿고 익혔다.’는 기록과 1801년에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 등이 ··· 십계는 버리기 곤란하며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한덕운과 마찬가지로 윤지충에게 ‘십계’를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는 최여겸이 25세(1788) 때 유항검 가족에게 천주교를 배웠다는 내용이 있지만, 1801년에 했던 최여겸의 진술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3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6, 155 · 165 · 175쪽).

 

22) 甲辰冬留京中 適往明禮洞中人金範佑家 家有二冊 一則天主實義 一則七克也 其節目則有十誡七克 甚約易遵(《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79쪽).

 

23) 1583년 루지에리(Ruggieri, 羅明堅) 신부는 십계명을 한문으로 번역한 《조전천주십계(祖傳天主十戒)》를 중국 조경에서 출판하였고, 1584년에 간행한 《신편서축국천주실록(新編西竺國天主實錄)》에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신편서축국천주실록》은 1637년에 서명을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으로 변경하여 출판되었는데, 16장으로 구성된 두 판본의 12~14장에는 ‘십계’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유승상, <예수회 중국 활동의 선구적 성과인 『천주성교실록』에 대한 초보적 연구>, 《신학과 철학》 18,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1, 50 · 55 · 67~68쪽).

 

24) 《천주성교십계직전》은 거의 400쪽이 될 정도로 분량이 많다. 따라서 《성교절요》와 《교요서론》에 십계명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굳이 분량이 많은 《천주성교십계직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신자들에게 배부했을 지는 의문이다. 아울러 이 책은 1642년에 초간되었지만, <1811년 서한>과 《성찰기략》(1864)에서 《십계직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도입된 것은 1798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간행한 중간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1798년에 중간된 판본과 이것을 한글로 번역한 600쪽 분량의 《십계진전(十誡眞詮)》이 소장되어 있다.

 

25) 한글본 《교요서론》의 10계명 말미에도, “계를 범하는 죄들을 기록하기는 《성교절요》라는 책과 다른 책에 자세하다.”고 써 있다(페르비스트 지음,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한국사학, 2013, 84쪽).

 

26) 《사학징의》, 246쪽.

 

27) 주21) 참조.

 

28) 《사학징의》, 246쪽.

 

29)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한글 필사본으로, 필사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일부 빠진 내용이 있지만, 이 책과 같은 내용의 한글 필사본이 동경대학교의 오구라 문고(小倉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오구라 문고의 《천주십계》는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가 1932년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에게 기증한 것이다. 나카무라 쇼지로는 쓰시마 출신의 조선어 통사(通事)로 1873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이 부산에 설치한 조선어 교육기관인 <草梁館 語學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10년에 퇴직한 이후에도 부산에 살다가 1932년에 사망했고, <어학소>에서 근무하던 1877년에 《천주십계》를 필사하였다(정승혜, <小倉文庫 所藏 나카무라쇼지로 資料의 국어학적 고찰>, 《일본문화연구》 26, 동아시아 일본학회, 2008, 105 · 108쪽; 정영아, <東大小倉文庫本 ‘聖敎’에 대하여>, 《일어일문학연구》 91, 2014, 276~277쪽). 나카무라 쇼지로가 1877년에 《천주십계》를 필사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조선 신자들이 사용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0) 이우집은 유관검에게 <조만과> 소책(小冊) 1권을 받았다고 했고, 이중복의 첩인 신조이는 한신애에게 <조만과> 소책 3권을 받았다고 했다(《사학징의》, 246 · 339쪽). 소책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기도서에서 <조만과>만을 따로 떼어 책자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윤봉문(요셉) 복자의 수택본인 26장 분량의 <조만과>(한글 필사본, 복사본)가 소장되어 있다. ‘십계명’은 ‘조과’를 구성하는 여러 기도문 가운데 하나인데, 이 수택본을 보면 십계명은 ‘천주십계’라고 외울 순서만 표시되어 있고, 십계명의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십계명은 이미 신자들이 외우고 있고, 또 별도로 필사하여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과>에는 내용을 생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31) 《사학징의》의 ‘妖畵邪書燒火記’(379~386쪽)를 보면, 신자들이 소지했던 개별 기도문으로 <조만과> 외에 <五傷經> · <매괴경> · <聖人列品禱文> · <천신도문> · <煉獄禱文> · <예수수난도문> 등이 있다.

 

32)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88~89쪽.

 

33) 《서학범》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원순, <조선후기 실학지성의 서양교육론>,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141~149쪽 참조.

 

34) 황사영 <백서> 47행.

 

35) 줄리오 알레니 지음 · 천기철 옮김, 《직방외기》, 일조각, 2005, 136~139쪽.

 

36)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30쪽.

 

37)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Ⅰ, 96~97쪽.

 

38)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84 · 89쪽.

 

39) 이러한 바람을 사회개혁을 지향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김진소, <호남지역 신앙공동체의 특성>, 26쪽).

 

40) 빤또하 저, 박유리 역, 《칠극》, 일조각, 1998, 353~354쪽.

 

41) 聖敎公會中人 有三等 守童身之貞者 上也 守鰥寡之貞者 次也 守配 之貞者 又其次 聖賢常譬童身于金 鰥寡于銀 配 于銅(三王來朝後 第2主日 箴, 《聖經直解》 卷2, 16장).

 

42) 유중철의 부인인 이순이가 동정을 지키는데 영향을 준 서학서에 대해서는, 하태진, <조선후기 이순이의 동정관 형성 과정>, 《전북사학》 37, 전북사학회, 2010 참조.

 

43) 《사학징의》, 228쪽.

 

44)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78쪽.

 

45) 《사학징의》, 231쪽.

 

46) 그의 집에서 동학(同學)한 사람 중에 청주에 사는 신경모도 있었다(《사학징의》, 231쪽).

 

47)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81쪽.

 

48) 진산사건 이후 윤지헌은 고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존창과 김유산 등도 이곳에서 함께 거주했었다.

 

49)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323쪽; 앙투안 다블뤼 저,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229쪽.

 

50) 《한국천주교회사》 상, 325쪽 각주 32) 참조.

 

51) 김한규,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한국천주교회의 몇가지 문제>,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78쪽.

 

52) 이하에서 언급되는 <십계>는 《성교절요》(肇慶府眞原堂 간행본, 1705)에 수록된 <천주십계>를 가리킨다.

 

53) 조현범, <윤지충의 폐제분주 논거에 대한 일 고찰>, 153~155쪽.

 

54)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81쪽.

 

55) 寧失落父母與本命 及世間諸物 不可得罪于天主 吾主曰凡爲守我命棄家或兄弟或姐妹或父母或妻孥或田地者 必受天堂常生之報矣.

 

56)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1집》, 82~83쪽.

 

57) 傳人是非 謗人長短 露人醜事 以讒言害人之名聲 以惡語損人之事 有罪.

 

58) 《사학징의》, 246쪽.

 

59) 是天地大主 命人所當爲之善 禁人所當戒之惡也.

 

60) 김유산이 홍산에서 이존창의 고노(雇奴)인 유순철에게 처음 배운 것이 <십계>라는 점, 정광수의 부인인 윤운혜가 장김치[醬沈菜]를 파는 최조이를 전교하기 위해 집으로 불러다가 처음 가르친 것이 <십계>라는 점 등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사학징의》, 242 · 213쪽).

 

61)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3집》, 228~229쪽.

 

62) 右十誡總歸二者愛天主萬物之上及愛人如己. 이 내용은 《직방외기》의 ‘유럽총설’(141~142쪽)에도 나온다.

 

63)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80쪽.

 

64) 《사학징의》, 16쪽.

 

65)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83쪽. 

 

66) 不發信望愛天主三德之情有罪.

 

67) 페르비스트 지음,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58~60쪽.

 

68) 《성교일과》나 《수진일과》에 수록된 삼덕송(三德誦) 중 신덕송(信德頌)을 보면, “하느님의 계명[十戒]을 준수하면 반드시 천당에 올라 무궁한 진복을 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 무한한 영고를 받을 것이다(遵守聖誡 必升天堂 享無窮眞福 否則必墮地獄 受無限永苦)”라는 내용이 있다. 즉 기도서를 통해서도 신망애 삼덕이 십계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9) 김한규,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한국천주교회의 몇가지 문제>, 79쪽; 배현숙, <17~8세기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26쪽.

 

70) 萬世萬民 不論何等 不拘貴賤 俱要嚴守.

 

71) 《사학징의》, 13쪽.

 

72)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80쪽.

 

73) 天堂地獄 謂其理之必有終 自陷於不畏國法之科是乎矣(《사학징의》, 15쪽).

 

74) 毁祠廢祭 猶恨未早 天堂地獄 視死如生 左道惑衆(《사학징의》, 169쪽).

 

75)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3집》, 167쪽.

 

76) 《천주실의》에도 상선벌악 내용이 있다. “천주의 인과응보에는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반드시 상주고, 악한 사람을 반드시 벌합니다. ··· 천주께서는 진실로 그가 일단 죽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착한 영혼을 택하여 상을 주고, 악한 영혼을 택하여 벌을 주십니다.”(마테오 리치 지음, 송영배 · 임금자 · 장정란 · 정인재 · 조광 · 최소자 옮김,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145쪽).

 

77) 순교자와 증거자들》, 74쪽.

 

78)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3집》, 155 · 163쪽.

 

79) 도리를 닦은 사람은 내세에 반드시 천당에 올라가서 무궁한 복락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서 끊임없는 재앙을 받는 일을 면하게 됩니다(《천주실의》, 122쪽).

 

80) 천당은 만복(萬福)과 만약(萬藥)이 있고, 지옥에는 만난(萬難)과 만고(萬苦)가 있다고 하면서 천당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페르비스트 지음,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51~54쪽).

 

81) 守者皆得昇天 享無窮之福 犯者皆下地獄 受無窮之苦矣.

 

82) 刑曹啓言 ··· 湖南之韓正欽 崔汝謙 奴千愛等譸張詿誤 篤信隷習 謂以難捨十戒 甘受一死 竝捧遲晩後 押送各該道 正法(《순조실록》 3권, 순조1년(1801) 7월 13일조).

 

83) 官司審問我是奉敎人否 而我推辭不明說爲奉敎者 有罪. 思疑天主妙情 或天主降生 或人之靈魂 或天堂地獄或聖事之跡 或聖經之言 與諸所當信之事 有罪.

 

84)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Ⅰ》, 79~80쪽.

 

85)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355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09&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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