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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41-42: 프랑스 대혁명과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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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5 ㅣ No.195

[새로 보는 교회사 41] 프랑스 대혁명과 가톨릭 교회 (1)

 

 

프랑스는 ‘교회의 맏딸’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 중심 역할을 했다. 프랑크 왕국이나 샤를 대제의 유럽 통일과 종교 서 정책은 가톨릭의 중세시대를 열었고, 수많은 학자와 성인들을 배출했으며, 많은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이러한 역할은 19세기 중반 이후까지 계속된다. 프랑스 교회는 세계 선교에도 열성이어서 아시아 지방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는데, 우리 나라 역시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회 초창기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교회가 한때 큰 위기를 겪으면서 자칫 표면상 사라질 뻔한 적이 있다.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이 신앙을 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교회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극단으로까지 몰린 이유는 계몽주의 사고방식과 국가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절대왕정 아래서 안일하게 생활하던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일어난 쇄신을 위한 시련이 아니었을까 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교회의 모든 면에서 변화를 가져오면서 수도생활의 변화도 가져왔다. 즉 프랑스 교회의 오래 된 폐단으로 교회일치의 걸림돌이라고 할 있는 국가 교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갈리카니즘’과 독선적인 신심을 주장하여 보편교회의 특성을 해친 ‘얀세니즘’이 대혁명으로 치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교회가 어떤 시련을 겪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혁명의 시작

 

혁명은 프랑스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일어났다. 프랑스는 대외적인 전쟁과 전쟁 지원에 따른 낭비 그리고 왕실의 과소비로 국가 부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무능한 루이 16세가 국정을 맡고 있었다. 이때에 불가능한 경제회복을 위하여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혁명의 물꼬를 트게 된다. 왕실은 이 삼부회의를 통해서 국가가 직면한 경제 위기 따위를 극복하려고 하였지만, 제삼 신분인 평민들은 구체제를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왕정이 아닌 민주체제를 염원하였으며 신분 차별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사회구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이 반교회적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주 단순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혁명이 시작될 때 프랑스 교회는 교회의 신분 차별 타파와 함께 교회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한 개혁을 추구했고, 평민들을 지지하고 도와줌으로써 혁명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성직자 대표 선거 때 선출된 대표자들의 70% 이상이 본당신부로, 귀족 출신의 고위 성직자는 30%가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의회가 열리기 전에 진정서를 내 국가가 지켜야 하는 원칙과 교회가 가져야 하는 정신을 강조하면서 프랑스 교회의 폐단인 귀족 중심의 교회를 개혁하도록 주장하고 교회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축소하도록 건의하였다.

 

의회는 1789년 5월 4일 모든 대표가 참가한 성체거동으로 시작하여 장엄미사를 봉헌하면서 개막되었다. 이때 성직자 대표는 이미 고위 성직자와 본당신부들이 나뉜 것처럼 보여서 마치 4개 부분의 대표가 모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투표방식에 대한 이견은 혁명을 촉발시켰으니, 귀족측에서는 신분별 투표를 주장하였고 평민들은 전체투표를 주장하였다. 이때 본당신부들은 평민들의 방법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왕은 강압적으로 신분별 회의를 명령하였고 평민들과 과반수 이상의 성직자들은 왕의 강압에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강경태도를 취하였다. 이때 파리에서 나온 팸플릿은 성직자들이 혁명을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혁명의 초기과정과 교회

 

프랑스 혁명이 주창한 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위대한 역사의 발전이었고, 법에 따른 통치를 요구하는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폭력으로 출발해서 수많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잘못이 분명히 있다. 성직자들은 정당한 요구와 교회 쇄신을 수용한 것이지 폭력을 수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직자 대표들이 오래 비워둘 수 없는 본당으로 하나 둘 떠나면서 결국 교회는 과격한 혁명 지도자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속성상 폭력은 갈수록 과격해지게 되어 있다. 혁명이 과격해지면서 교회는 점점 더 파괴되어 갔다.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이 무력으로 탈취당한 뒤 혁명은 시작되었다. 8월 4일에는 봉건법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교회는 중세부터 누려온 면책특권이나 면세특권이 폐지되었고 성직자들도 일개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 폐지는 성직자들의 진정서에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교회적인 결정은 아니었고 당연히 교회도 반대하지 않았다.

 

9월 29일에는 교회의 국가 부채 부담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국민이나 가톨릭 교회의 신자는 서로 다른 이름의 같은 존재라는 논리 아래, 국가의 어려운 재정회복을 위해서 전례에 필요한 것을 남기고 국가 부채를 위해서 값이 나가는 보화를 내놓는, 자발적인 참여이고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1월 2일에는 교회의 유지와 미래를 위한 준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의 전재산을 국유화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재산을 빼앗기면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체제 역시 파괴되기 시작한다. 교회 재산을 팔아서 국가재정에 보탬을 준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몇몇 부르조아만 혜택을 받았고, 그러기에 국가재정에는 보탬이 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계몽군주의 국가교회주의의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가톨릭적인 국왕이라고 자처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요셉 2세 황제도 수도원을 폐쇄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직자 시민헌장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표현한 17개 조항의 인권선언이 1789년 8월 26일에 있었다.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재판제도가 탄생되면서 성직자 기본법이라고 하는 성직자 시민헌장이 발표되었다.

 

혁명 초기에 성직자들은 국민의회 안에서 평민들과 친구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나 종교문제위원회가 결성되고 활동을 시작하자 위원회의 이념이 성직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국가 부흥을 위해서 교회도 재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첫 작업은 1790년 2월 13일에 확정된 수도서원의 파기였다. 국가와 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모든 수도원은 폐쇄하다는 내용이었다. 교육이나 병원에 종사하는 수도원을 빼놓은 모든 수도원이 폐쇄되었다. 이 결정을 내린 배경을 알려면 종교위원회의 주축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위원회의 주역은 변호사 마르티노, 교회법 학자로 갈리카니즘의 정신을 가진 얀세니스타인 카뮈,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인 에티엔이었다. 가톨릭 정신을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헌장은 1790년 7월 12일에 인준되었다. 이 헌장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채 시민권력이 교회를 조직했으며 프랑스 교회에서 교황청의 권위를 전면 부정했다. 따라서 이 헌장을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고 박해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을 세 부분으로 대별해 보자.

 

1. 교회조직 : 대교구를 18개에서 10개로, 교구를 1백 35개에서 83개로, 본당도 인구 6천 명을 기준으로 하여 통폐합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교회의 명예직이나 참사회원 제도를 없앴다.

 

2. 직책 임명 : 이제까지는 주교는 왕이 후보를 지명하고 교황이 인준을 했고, 본당신부는 주교가 임명하였다, 헌장은 두 직책 다 선거에 따르기로 하였다. 즉 각 지역에서 열흘의 임금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는 사람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주교와 본당신부를 뽑는다는 것이다. 교황청의 인준은 거부되었고, 반대로 선출된 후보는 국가와 시민헌장에 충성과 봉사서약을 하게 했다. 또한 선거인단에는 재산에 따라 자격을 주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 프로테스탄트 신자, 무신론자 등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올바른 사목자가 나올 수 없었고, 선거 자체가 가톨릭 교회론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르게 헌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뽑힐 수가 없었다. 이래서 뽑힌 본당신부와 실제로 신자들이 따르는 본당신부가 양분되는 결과가 생겼다.

 

3. 직무의 보수와 임지의 거주 의무 : 교회 재산이 없으므로 국가가 성직자의 보수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직무에 임명된 이들은 임지에 거주할 것을 명시했다. 이때까지 임지 거주 의무가 고위급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잘된 것이다.

 

교회 쇄신과 개혁이 필요하던 시기에 자유와 평등의 정신으로 고질적인 병폐를 개혁하고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 헌장의 기본정신은 가톨릭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교회가 프랑스라는 국가에 예속된 조직이 되고 교회의 일치는 깨어지고 주교의 본당신부 사목 감시기능이 사라지는 것을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시의 비오 6세 교황과 루이 16세 왕은 빠르게 대처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침을 기다리는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로마의 결정은 너무나 늦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교회에 관한 사항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성직자 시민헌장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으로 나뉘고 이에 대한 논쟁이 일자 위원회는 빠른 시간 안에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반대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기 위한 서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성직자 시민헌장에 대한 반대는 교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반대하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이를 반대하는 이들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경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니 서명은 모든 성직자의 의무이고 서명을 안하는 것은 곧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었다. 선서의 내용은 “나는 나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돌보며 국가와 법과 왕에게 충성하고 또한 내 모든 힘을 다하여 국민의회에서 의결되고 왕이 인준한 헌장을 지킬 것을 선서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로마는 해가 바뀐 1791년 3월 10일에 “Quot aliquantum”이라는 칙서를 통해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1) 헌장은 권력의 오용으로, 국민의회가 교리와 교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시행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다. 2)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단죄했다.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법의 규제를 받으며 사회와 신앙의 유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조건없는 자유와 평등은 방종이다. 3) 헌장이 요구하는 교구의 통폐합 선거에 따른 직무 임명, 교회의 재산 압류, 수도회 폐쇄와 수도서원 금지들을 모두 단죄한다.

 

어쨌든 혁명 지도자들이 개혁을 가속화하고 더욱더 과격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황의 칙서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서명파와 비서명파로 교회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늦게나마 비서명파 성직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지침이 되기는 하였다. [경향잡지, 1997년 5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42] 프랑스 대혁명과 가톨릭 교회 (2)

 

 

분리된 교회

 

1790년 12월 26일 루이 16세가 ‘성직자 시민헌장’에 대한 사제들의 서명을 의무화함으로써 성직자들은 8일 안에 서명을 해야 했다. 1791년 1월 4일까지 서명한 주교들은 1백 59명 가운데 7명뿐이었고 성직자 대표위원들은 3분의 1이 서명을 하였다. 이렇게 성직자 시민헌장에 서명한 성직자는 전체 성직자 가운데 약 52.9%라고 하는데, 이 통계는 오랜 기간 남아있는 명단을 가지고 추정하는 것일 뿐더러 서명한 성직자가 많은 지방과 적은 지방으로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든 교구에 적용될 수는 없는 통계이다.

 

쇼뱅의 “프랑스 혁명에서 성직자들의 시련”이라는 책을 보면 사제들이 성직자 시민헌장에 서명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복음이 세상의 권력에도 순명하기를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서명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 권력을 혼란하게 하며 성직자들의 항의로 국가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물질적 희생을 피하기 위하여 핑계정신을 가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넷째, 종교의 남용을 뿌리뽑기 위해서이다. 다섯째, 헌장이 교회의 불합리한 계약들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자를 버릴 수 없으며, 국가에 충성하거나 혁명에 전적으로 가담하기 위해서는 이 헌장에 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서명한 사제들 가운데는 혁명과 무관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본당신부가 57%의 비율로 가장 많이 서명을 하였고, 신학교 교수 신부는 가장 적은 7%가 서명했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명 결과에 따라서 교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선거가 있었다. 먼저 교구장직에 있던 주교는 모두 네 명이었으나 이미 탈레랑(Talleyrand) 주교는 사임했기 때문에 80개 교구에서 교구장 선거를 하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선거인단은 그 지방의 1%에 해당하는 재산가들로 구성되었고 그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가톨릭 신자의 열세 속에서 주교직에 합당한 이보다는 야심가들이 교구장에 당선되었다.

 

교구장 선출은 대체로 수월하게 끝났으나 본당신부 선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성직자 시민헌장’에 서명한 사제가 많은 곳에서는 후보자가 많았기 때문에 쉽게 교체될 수 있었으나 비서명 사제가 많은 곳은 그렇지 못했던 까닭이다. 또한 본당신부에 선출되었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직무를 포기함으로써 성직 사회에서 밀려난 사제나 수도회에서 쫓겨난 자들로 대체하든지 비서명 사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현상까지 생겼다.

 

선거가 끝난 뒤에 서명을 거부한 성직자들은 살던 곳을 떠나 은둔이나 망명의 길을 가야 하는 기로에 섰다. 서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기로에 선 사람들은 공식적인 후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교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큰 용기를 발휘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면서 자연히 신자도 둘로 갈라졌다. 성직자 시민헌장에 서명을 하지 않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서명한 사제가 길을 가다가 신자들한테 심한 야유를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 비유하여 닭 울음 소리를 내면서 달걀 세례까지 퍼붓기도 하였다.

 

교구에는 두 명의 주교가 본당에는 두 명의 본당신부가 존재하고 있으니 신자들도 양편으로 갈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하면서 싸우고 서로 비방하는 노래나 팸플릿이 나돌았으니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때 신자 또는 시민 대중이 교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하겠다.

 

 

비서명 교회에 대한 박해

 

국민의회 시대가 끝나고 1791년 10월 프랑스는 입법의회로 바뀌었다. 이 입법의회는 국민의회와는 아주 달랐다. 입법의원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론자들이었고, 신앙인이라기보다는 무신론자들로서 교회에 대한 적개심마저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입법의회에는 열 명의 주교와 열일곱 명의 신부도 참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상황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입법의회는 점점 정치적으로 과격해지고 왕을 처형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는 과정에 폭력을 사용하듯이 교회에 대한 박해도 점점 강도가 높아졌다. 1791년 11월 29일에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교회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성직자 시민헌장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 정부의 강경책에 항의하는 지방이 몇 군데 생겨났다. 시골 사람들은 합심해서 옛 본당신부를 옹호하고 정부에 항의도 하였으나 이런 와중에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상황은 또다시 악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외국에까지 알려지고 혁명을 확산시키려는 이상론자들의 열의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1792년 4월 28일에 시작된 전쟁에서 프랑스가 연패하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프랑스는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서명을 거부하는 사제는 힘을 모아야 하는 전쟁시기에 국민을 분리시키고 조국을 배반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구체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바로 그즈음 국외 탈출에 실패한 루이 16세가 8월 10일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8월 14일에는 새로운 형태의 서명을 강요하기 시작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에 충성하고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자유와 평등을 지키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한다.” 이것은 곧 혁명의 과업이 모든 것 위에 존재한다는 것에 서명하라는 것인데, 먼젓번 서명이 직무를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면 이제는 모든 사제와 수도자들까지도 여기에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서명을 피하기 위해서 본당의 직무를 포기한 사람들도 이번에는 서명을 강요당했는데 여기서도 교회는 두 파로 갈라졌다. 서명하는 이유는 첫째, 생활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서 둘째, 추방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셋째, 사목생활을 계속 보장받기 위해서 넷째, 교회가 혁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8월 18일에는 수도 형태와 관계없이 모든 수도생활을 금지시키고,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의 고유한 옷차림을 금지시켰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의회는 9월 3일에 수도서원은 자연법과 시민권리헌장에 위배된다고 선언을 하였다. 그 뒤 프랑스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혁명이 확산되어 갈 때 혁명 이상론자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은 수도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의회는 비서명 사제들한테는 8월 26일까지 프랑스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이미 잡혀온 사람들은 구이아나 섬으로 이주시킬 것을 결의한다. 하지만 재판이나 법으로 처리하기 이전에 과격해진 민중은 무차별 대량학살을 하는데 이때 혁명정부는 이를 묵인한다. 9월 2일 밤 성 제르망 대수도원과 같은 수도원에서부터 이러한 학살이 시작되었는데, 가르멜 수도원에서는 1백 50명 가운데 1백 20명이 집단 살해되었다. 이때 살해된 성직자 수도자의 수만도 1백 11명이었다.

 

이러한 집단 살해는 밤에 이루어졌다. 도망쳐서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다. 이 9월의 대학살은 귀족이나 혁명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정치인이 해당되었지만 성직자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교회는 1926년에 이들 가운데 1백 21명을 복자위에 올렸다. 바로 이 공포정치 시대에 희생된 수는 정확히 산출할 수 없지만 미국인 그리어에 따르면 성직자는 1천 1백 5명, 귀족 1천 4백 3명 그리고 반혁명 죄목으로 죽은 사람은 대략 1만 4천 4백 92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재판기록 없이 죽은 사람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고 보아야 한다.

 

비서명 성직자들은 국외로 탈출하든지 잡혀서 죽든지 아니면 지하에 숨어지내야 했다. 숨겨준 자도 처벌을 받기 때문에 숨어지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성직자를 보호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특히 방데 지방 사람들은 혁명이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농민이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는 사제들을 보호하고 혁명정부에 맞서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서명한 사제들이라 하여 자신의 원의대로 계속 사목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의 비그리스도교화

 

프랑스 혁명은 성직자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프랑스 혁명 시작에는 장엄미사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시기 3년이 지나기도 전에 교회는 박해를 받았다. 1792년 9월 22일 프랑스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공포정치 시대가 열리면서 옛 것을 모두 지우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도 새로운 종교로 대치되었다. 공포정치 시대가 열린 것은 교회에 대한 적개심이나 외국과 벌이는 전쟁 중에 교회를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거나, 혁명의 이론과 가톨릭주의가 투쟁한 결과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결국 당시 권력자들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온건한 지롱드파와 과격한 자코뱅파의 권력투쟁에서 자코뱅당이 승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이 공포정치를 하면서 교회 말살정책도 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처음에는 서명 교회가 제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으나 차츰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하다못해 전례음악까지 마음대로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달력을 고쳐 주일을 없애고, 열흘을 한 주간으로 하고 모든 명칭도 비그리스도교화하는 따위로 가톨릭 교회적인 요소를 전부 바꾸려고 하였다. 혁명정부는 노골적으로 서명 교회에 이혼과 사제의 결혼문제를 정당화하기를 요구하였다. 서명 교회는 이에 따라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은 교회 혼인이 아닌 시민혼인이 정당화되었다.

 

교회 관습 자체들 없애고자 하는 권력가들은 지속적으로 그 방법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제들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것이다. 1793년 11월 20일에 만든 법률에는 결혼한 사제는 비서명자까지도 유배형을 면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이때에도 최소한의 사목을 원했는지 결혼한 사제들이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겉으로만 결혼한 것처럼 꾸민 사람도 있었으니, 그 통계는 2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른다.

 

혁명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제직 포기를 강요하였다. 이런 강압에 응한 이도 있었다. 파리 대주교로 선출된 고벨은 파리 관공서에 자신의 주교 증명서 주교반지와 십자가 지팡이를 내어놓고 “이제 대중은 공적이고 국가적인 종교를 원하지 않고 오로지 자유와 평등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들의 원의에 따라 공식 종교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을 선서한다.”(메자르디의 “교회와 프랑스 혁명”에서 인용)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초기부터 그 시점까지 혁명정부에 적극 가담해 온 그레그리 주교는 사제직 포기에 대해서만은 용기있게 거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강압에 따랐지만 나폴레옹의 교회 정상화 시기에 40%는 잘못했음을 시인하고 용서를 청했다.

 

혁명정부는 가톨릭 교회를 대신할 종교까지 만들었으니, 바로 이성의 여신이 지배한다는 ‘이성교(理性敎)’였다. 1793년 11월 10일에는 이성교의 첫 행사가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이 세상을 지배하면 절대적 존재인 이성의 여신에 대한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성교는 다음에 실권을 잡는 로베스 피에르에 의하여 ‘절대 존재교’로 대체된다. 1794년 5월 8일에 시작된 절대 존재교는 절대 존재에 대한 믿음과 영혼의 불사불멸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공포시대를 거치면서도 교회는 살아남았다. 시골에 남아있던 사제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성사를 집행하며, 짚더미 우물 장농 속에 숨어다니면서 신자들에게 교회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도시에서는 막일꾼이나 여자로 변장을 하고 다니면서 교회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탈출한 사람들 역시 프랑스로 되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열성적으로 살면서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수도자들 역시 수도원은 폐쇄되었지만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수도회를 구분짓지 않고 서로 연락을 하면서 수도규칙을 지키며 살았다. 이들을 도와주는 보조자들은 채소 행상으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면서 이 모임 저 모임을 연락하는 일로 수도자들을 도와주었다. 교회가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지역과 도시의 이러한 생존 덕분에 나폴레옹은 교황청과 조약을 맺으면서 교회를 정상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6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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