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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40: 18세기의 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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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194

[새로 보는 교회사 40] 18세기의 수도생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세계사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와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심성도 크게 바꿔놓았다. 혁명의 와중에는 반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지하에 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바로 이 혁명의 시기에 여덟 군데의 수도원이 해체되었고, 4백 50곳 이상이 폐쇄되었다. 남아 있는 수도원도 겨우 명맥만 잇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시토회 같은 경우는 1768년에는 6백 군데였는데 혁명의 다음해인 1790년에는 3백 군데로 줄었고, 한 공동체의 인원도 일곱 명쯤이면 괜찮다고 할 정도였으니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교회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19세기에 접어들어, 나폴레옹 이후 복고 왕정시대를 맞게 되자 사람들 마음에 종교심이 생기면서 교회가 재건되고 새로운 수도회가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게 되는 18세기의 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수도생활의 쇠퇴

 

이제까지 수도생활의 쇄신과 쇠퇴 또는 발전과 후퇴가 수도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도원이 쇠퇴하는 원인으로는 우선 안전문제가 따랐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수도원을 간섭하거나 사회의 재난(전쟁 · 기아)들이 수도원을 쇠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사회현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생활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7세기에 끊임없이 일어난 전쟁들은 수도생활을 활성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이 오래된 수도원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교회 내적인 원인과 교회 외적인 요인들 - 정치체제 · 사상 · 경제 - 이 함께 작용하여 수도생활은 크게 도전받는다.

 

그 첫 번째로 예수회에 대한 선호를 들 수 있다. 예수회의 활동적이고 가히 도전적인 수도생활은 관상적이고 정적인 수도생활을 기피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또한 17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 초반까지 거의 모든 수도회가 예수회와 논쟁을 벌인 것도 전체 수도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모든 가톨릭 국가에서 예수회가 쫓겨나는 한편 교황령 안에서도 1773년 예수회가 해체되는 사건으로 논쟁은 끝이 났다.

 

이 사건은 당시 절대왕정 사회에서 계몽군주들이 수도회를 편의에 따라 폐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군주들은 교회를 통치수단으로 삼아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나 수도회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관상수도생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소의 감소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도 새로운 수도원이 창설되어서 활성화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18세기에는 모든 수도회가 침체되어 있었고 성소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모든 나라의 모든 남녀 수도회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17세기부터 시작된 이런 성소 부족은 프랑스 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1765년의 프랑스 성직자 회의에서 왕에게 ‘수도원실태조사위원회’를 건의하고, 여섯 명의 주교와 여섯 명의 행정관이 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한 적이 있는데, 한 수도원에 열 명 미만의 수도자가 있는 곳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위원회는 수도원을 합치기도 하고 인원이 적은 수도원은 폐쇄시키고 아홉 명 이상은 있어야 수도원이 존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768년에는 서원할 수 있는 나이도 정하여, 남자는 21세, 여자는 18세 이상 되어야 첫서원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La Pique et la Croix. Centurion p. 33).

 

이렇듯 성소 감소로 공동체의 인원이 적어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공동체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입이 적어지는 한편 공동체가 노인화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런 현상은 요즘도 그러하지만, 19세기 말경에 창설된 수도회들이 활동을 거의 할 수 없는 노인들만이 남는 현상이 생겼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비관적이게 되고, 이러한 이들은 당시 사회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절대왕정

 

유럽의 절대왕정은 긴 세기를 거쳐서 형성된 제도이다. 지방분권적인 중세 봉건시대를 거치면서 왕들과 제후들의 권력투쟁, 속세권력과 교회권력이 부딪치면서 드디어 왕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국가에서는 가톨릭 교회를 국가종교로 안정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왕의 절대권력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고, 동시에 왕은 교회를 국가통치를 위한 조직의 한 부분으로 보호하고 육성했다. 말하자면 왕은 교회를 위해 모든 이단의 위험과 교회를 반대하는 서적이 배포되는 것을 막아주는 따위의 일을 했다. 또한 교회법을 국가법으로 인정해 주었다. 수도자들의 서원을 국가가 인정해 주어서 사회에서도 수도자들은 재산상속에서 빠지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 왕좌와 제대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절대왕정과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특권을 누렸다. 막대한 부동산이나 재산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 역시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국가 권력이 강요하는 의무였다. 동시에 교회는 성스런 장소로서 면책을 받는 곳이었다. 죄인이 교회에 숨어들면 국가의 경찰력이 침범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교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특권도 누렸다.

 

절대왕정이 교회에 이러한 특권을 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교회는 왕의 권력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을 국가가 통제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국가가 교회를 도와주는 형태였지만 18세기에 와서는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일이 더 많아진 것이다.

 

이러한 절대왕권이 국가를 위하여 교회를 통제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모범적으로 실시한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1765-1790년)이다. 그를 가리켜 ‘신성 로마 제국의 대성당지기’라고 할 정도로 그는 절대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통치의 수단으로 썼다. 그의 이러한 교회에 관한 정책을 일컬어 ‘요셉주의’라고 한다.

 

그는 행정관 카우니츠(Kaunitz)의 도움으로 몇 년 만에 왕국의 교회를 재정비하였다. 즉 왕국의 주교들과 교황청의 관계를 통제하고 교구의 지역을 재조정하고 본당 수를 결정하였으며, 행렬이나 순례를 금지시키기도 하고 전례를 개선한다며 마구 뜯어고쳤다.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기 위해 교구 신학교를 폐쇄하고 몇몇 도시의 신학교를 통합시켰다. 이 신학교들은 황제 직속이었으며 이곳에서 전국가의 성직자들을 배출시켰다.

 

요셉 2세 이전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 데레사 여왕이 국가를 통치할 때도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왕은 로마 교황청과 합의하여 모든 일을 추진했다, 요셉 2세는 로마나 주교들과 협의하지 않고 교회의 고유영역까지도 자신의 뜻대로 개혁하면서 자신은 가톨릭 신자로서 가장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으며 교회를 활기차게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요셉 2세만이 이러한 정책을 편 것은 아니다. 가톨릭 왕이 있는 절대왕정에서는 이런 일이 일반적이었으니, 교황의 칙서는 왕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요셉 2세의 교회개혁은 전반적인 교회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국가 교회가 반로마적이게 만들었으며 교회의 영적 가치가 무시되고 국가나 백성의 안녕은 절대왕정을 지키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요셉주의가 가장 크게 해를 입힌 것은 수도생활이다. 수도생활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당시의 계몽주의자들처럼 옛 전통의 수도생활에 적대감마저 가지게 된 것이다.

 

1781년 11월 29일에 황제는 칙서를 내려서 순수 관상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원의 폐쇄를 결정했다. 자선이나 교육, 영혼 구원을 위한 직접 활동을 하지 않으면 수도회는 필요없다는 논리였다. 카우니츠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불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회에 대한 탄압은 관상수도회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대로 활동적인 수도회도 필요에 따라 폐쇄시키고 재산을 국가에 예속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수도원을 폐쇄시키고 몰수한 재산은 교회나 자선 또는 교육 재정으로 유입시킨다고 했지만 실제는 한 부분만 썼으니, 결국 수도원을 폐쇄시키고 본당 수를 조정한 것은 재정적인 이유에서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수도원이나 교회가 폐쇄되면서 재정적인 것뿐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손실이 컸다. 수도자들이 하던 모든 학문과 과학 그리고 정신적인 유산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제 본당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 본당들은 국가 교회의 조직체로서 영적인 활동보다 국가의 말단 행정조직체로서 활동이 더 강화된 느낌을 주게 되었다.

 

절대왕정 아래서 교회가 특권을 누린 것은 사실이다. 국가의 힘을 빌려서 재산과 권력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권력과 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귀족 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이었지, 출신 성분이 낮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교회 역시 이러한 국가에 예속된 교회의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절대왕정과 결별하는 커다란 진통인 프랑스 대혁명을 겪고서야 19세기부터 교회와 수도생활은 새롭게 열정적으로 되살아난다.

 

 

18세기의 새로운 수도회

 

17세기에 성직자 양성과 사회활동을 위해서 새로운 수도회들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수도회들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쇄신과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해 큰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도 적었고 기존 수도원들의 수도생활 자체도 이미 말한 대로 쇠퇴해 있었다. 이런 쇠퇴의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주 복합적이었으니, 국가의 통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1669년에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지하고 기존의 수도원을 폐쇄시키기까지 했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예수회도 17세기에 들어와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은 로마에서까지 해체되었던 것이다(1773년).

 

이러한 상황에서도 수도생활의 쇄신과 교회를 위해서 새로운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회가 성 알풍소(Alphonsus Maria de Liguori, 1696-1737년)가 1732년에 세운 구속주회(Redemptoristae)이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알퐁소 성인은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726년에 사제가 되었고 1762년에 주교가 된 분이다. 그는 당시의 일반 시민들이 신앙없이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내적인 관계를 역설하는 설교를 하고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1749년에 베네딕도 14세가 인가를 한 이 수도회는 전적으로 선교를 지향하였다. 이방인의 선교가 아니라 교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였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이 수도회는 성 클레멘스 호프바우어(Clemente Hofbauer)의 영향으로 폴란드와 독일의 납부 지방과 오스트리아에 확산되어서 무신앙적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 밖에도 1720년에 창설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를 들 수 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신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일명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창설하였다. 또 다른 새로운 수도회는 중세적 관상수도생활을 쇄신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이다. 세속생활에서 회심한 아르만도(Armando)는 노르만디의 트라파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수도원을 개혁하게 된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시토회의 규정을 철저히 따르면서 완전한 금육과 침묵을 지키고 격한 노동으로 수도생활을 강조했다. 때에 따라서는 학문적인 활동도 완덕에 걸림돌이 된다고 금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형태가 프랑스뿐 아니라 여러 나라로 퍼지면서 옛 수도생활의 전통이 새롭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경향잡지, 1997년 4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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