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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39: 18세기 교회의 난관과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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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193

[새로 보는 교회사 39] 18세기 교회의 난관과 수도회

 

 

근대국가의 탄생

 

역사의 시대구분은 관점과 분야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교회 역사 역시 시대구분을 역사이해의 한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1648년은 웨스트팔리아 조약이 맺어진 해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야기된 분쟁은 끝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종교적인 요인이 작용하였지만 군주들의 영토나 세력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30년 전쟁’으로 일컫는 이 전쟁에 유럽의 모든 국가가 휘말려들었다.

 

힘들고 긴 전쟁으로 사람들은 모두가 지쳐버렸고 더 이상 신앙이 분쟁의 불씨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648년, 국가간에 맺은 이 조약으로 유럽은 가톨릭 국가와 비가톨릭 국가로 나뉜다. 다시 말해서 가톨릭 국가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벨기에, 아일랜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남부지역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큰 식민지 나라들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루터측 신앙과 칼빈측 신앙이 섞여서 북유럽과 독일 북부지방의 국가들로 나뉜다.

 

30년 전쟁의 여파는 아주 다양했다. 유럽의 영토구분이 확정되었고, 아울러 각 나라의 왕이나 독일지역의 제후들이 자기 영지 안에서 독립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근대국가 체제가 형성되어서 국제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렇듯 국가간에 세력균형을 위한 외교관계가 성립됨으로써 이제 유럽은 국가라는 단위체제가 확고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절대왕정 체제가 확고해진 배경은 바로 이런 정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긴 전쟁의 결과였다.

 

유럽의 이러한 변화는 교회관에도 상당히 큰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말해서 종교가 국가에 예속된다는 ‘국가의 종교’라는 개념이다. 태양왕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1642-1715년)는 프랑스를 유럽의 맹주로 만들었으며 절대왕정의 틀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한 나라에는 한 사람의 왕과 하나의 법과 하나의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종교 역시 국가 안에서 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절대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종교적 동등권을 인정한 ‘낭트 칙령’(1598년)을 1685년에 폐지하여 칼빈파의 삶의 근거를 없애버렸다. 이러한 종교적 불관용 정책으로 칼빈파들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 자유롭게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가톨릭 교회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강화하고 18년 동안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던 사람은 두 명의 추기경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칼빈파를 박해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를 중요시했고 종교문제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30년 전쟁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이 생길 때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프로테스탄트 국가나 제후들과 손을 잡았다.

 

 

근대국가주의와 교회

 

30년 전쟁 이후 국가권력이 확립되고 절대왕권을 강력히 추진한 프랑스의 영향이 전 유럽에 확산되면서 교회는 국가권력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영향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자가 영지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마음대로 하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교황청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교황선거에 간섭하고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경향이 가장 강한 곳이 프랑스였고 그것을 ‘갈리카니즘’이라고 한다.

 

갈리아(프랑스) 교회의 자유라고 말하는 주의로서, 프랑스 왕은 교회회의를 독자적으로 소집하고 교황대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한편, 교황칙서의 유효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프랑스 교회에 강요하고 서명하게 하는가 하면, 반로마적이고 국가교회주의적인 경향을 강요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일치성에 큰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국가교회주의로 교회의 많은 일에 국가의 간섭이 따랐다. 성직 임명에서부터 수도원의 설립과 해체까지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상수도생활은 경시하거나 해체시키고, 병원이나 자선 · 교육 같은 활동 수도원은 인정하고 보조를 해주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러한 로마의 영향력 배제는 교회 안에서도 강력해졌다.

 

 

주교주의(Episcopalism)

 

국가들이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는 와중에 주교들이 자기 교구에서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로마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그들의 자립권을 내세운 것이다. 주교주의는 나라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실제는 교황은 로마의 주교일 뿐이며 각 교구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사도의 후계자인 교구장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독일교회를 큰 위험에 빠뜨린 페브로니우스(Febronius)가 유명하다.

 

트리어 교구의 보좌주교였던 니콜라오는 페브로니우스라는 가명으로 1763년에 “교회 상태와 로마 교황의 합법적인 권한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 주교주의의 경향을 종합하고 있는데, 교황의 권한은 제한적이고 교회의 권한은 국가가 가지며 모든 결정의 주체는 공의회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신앙문제도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교주의의 논리는 신속하게 모든 나라에 퍼져나가면서 교회의 일치성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얀세니즘(Jansenism)

 

얀세니즘은 은총에 관한 문제로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역할’에 관한 이론적인 논쟁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얀센(Jansen)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명제로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필요한 행동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칼빈의 예정설에 가까운, 은총론에 관한 이설이다. 이론에 관한 논쟁이지만 프랑스의 국가주의 교회와 주교주의와 연합이 되어 파벌을 형성함으로써 교회 전반에 걸쳐 크게 영향을 미친 학설이다.

 

베르사이유 가까이 있는 시토회의 한 여자 수도원은, 이 학설대로 엄격한 생활을 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교회는 선택받은 소수의 단체이고 성체는 완전히 쇄신된 성자들에게 내리는 상급이기 때문에 영성체에 매우 엄격하였다. 따라서 잦은 영성체를 주장하던 예수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는가 하면 로마 교회의 권위에 불복종함으로써, 이단이 아니면서도 교회의 일치를 크게 손상시켰다.

 

얀세니즘은 벨기에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널리 확산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해이해진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프로테스탄트를 몰아내고 국가 교회를 형성하자, 교회는 절대군주의 보호를 받는 유일한 종교가 되면서 특권을 지속해서 누릴 수 있었다. 한때는 종교개혁으로 자극을 받기도 하고 공의회를 통해 쇄신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교회가 쇄신되지는 못하였다.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지고 권력과 재물로 인해 교회생활이 해이해짐으로써 얀세니즘과 같이 극단적으로 엄격함을 강조하는 사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윤리적인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윤리문제에서 행동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동의가 중요하다는 논리가 나오면서, 인간의 약한 인성을 이해하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으나, 학자들이 모든 분야에 과하게 적용함으로써 모든 잘못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정당화로 신앙생활의 의무감을 버리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합리화하여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쾌락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얀세니즘의 여파는 끝이 날 줄 몰랐으니, 교회의 단죄를 받은 그들이 승복하지 않고 계속 교회 교도권과 투쟁을 하였다. 이 투쟁에 주교들과 정치가가 참여하고 파스칼과 같은 문필가가 참여함으로써,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만드는 오랜 투쟁이 교회의 전반적인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나라가 시끄러운 것을 원하지 않던 정부가 교황 칙서를 법으로 공포함으로써 끝나기는 하였지만, 그 여파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자기 중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에만 의존하고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 논쟁은 끝이 날 줄 몰랐던 것이다.

 

 

계몽주의

 

가톨릭 교회는 신앙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극복해야 될 난관이 많았다. 이전 시대의 갈등이 신앙을 전제로 한 문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신앙 자체에 대한 거부가 생겨난 것이다. 중세의 신앙일치는 말할 것도 없고 르네상스 시대나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신념이 바뀐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신앙은 거부되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전쟁이 끝나가면서 유럽에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바뀌기 시작했으니,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철학이 전통적인 개념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신앙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차츰 신앙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하는 사상으로 발전해 갔다. 이성주의, 자연주의, 물질주의, 범신주의 같은 것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세속화 경향은 종교나 윤리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 - 정치, 경제, 사회질서, 법 그리고 문화적인 면 - 에까지 확산되었다.

 

계몽주의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역시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중세의 낡은 전통을 깨고 인간이 이성적인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발전적인 사상으로, 미신 타파에도 크게 공헌했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종교들을 주장하고 신앙에 무관심을 표현하고 반교회적인 사상을 유포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조소하는 따위의 활동은 유럽의 신앙생활, 수도생활을 후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계몽주의는 교회 밖에서 생겨나 교회를 물들였다고 하기보다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발전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계몽주의 사상가 거의 대부분이 예수회 학교 출신이라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얀세니즘이 교회나 수도생활에 큰 해를 입힌 것은, 그들의 주장이나 생활태도뿐만 아니라 세기에 걸쳐서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무종교적인 경향에 대처할 여유를 없앴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에서 가장 활발하였는데, 당시 프랑스 교회는 갈라져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이 얀세니즘이나 갈리카니즘의 문제로 서로 갈라져 논쟁하는 일에 정신이 빠져 미처 계몽주의에 대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교회는 대혁명이라는 큰 사건을 겪고 교회가 완전히 쑥밭이 되고 난 뒤에야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다.

 

교회 역사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은 시대는 없다. 유다이즘을 극복하고 출발한 교회는 로마주의와 부딪쳐 큰 박해를 겪었고, 중세의 야만인들의 횡포를 겪어야 했으며, 교회의 신앙일치를 깨는 종교 반란을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교회는 부활을 거듭하여 새롭게 쇄신되어 살아나왔다. 수도생활 역시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해이해졌다가 다시 새로운 환경과 함께 수도생활의 쇄신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3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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