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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37-38: 새로운 형태의 여자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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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191

[새로 보는 교회사 37] 새로운 형태의 여자 수도회 (1)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여자 수도회의 쇄신을 위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 동안 중세사회의 관습과 사회혼란으로 생성된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 폐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수녀원의 봉쇄생활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장상들이 너무 젊은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었다.

 

1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교회 역시 일치해 가면서 쇄신의 길이 열리게 된다. 공의회는 기존의 수도회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수녀들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보장할 수 없는 시골보다는 도시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봉쇄구역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마흔 살 이전이나 대서원을 한 지 팔 년이 되지 않은 수녀는 장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린 소녀가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주교나 그 대리인이 심사한 뒤에 첫서원을 하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만들었다. 여성 수도생활은 기존 수도회의 쇄신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탄생하면서 크게 바뀐다.

 

 

환경의 변화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이 다양해지고 여성의 소임도 필요해졌다.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중세 때처럼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문예부흥시대를 거치면서 여성관이 많이 변했고 여성의 사회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경건한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무렵이다. 여성 수도자들은 대부분 관상수도생활을 했지만 환자방문이나 병원 등에서 봉사하는 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사도직에 대한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교육과 선교 그리고 자선활동에 여성들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도 봉쇄구역이나 남편이라는 보호막 없이도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성의 삶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난 것이다. 시대의 새로운 요구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가 탄생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우르술라(Ursula)회

 

새로운 여자 수도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르술라(Ursula)회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우르술라회 창립자는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470-1540년)이다. 성녀 자신은 어떤 단체나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전연 가지지 않았지만 성녀의 활동으로 새로운 수도단체가 생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메리치 성녀가 활동한 지역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로나 사이에 있는 브레시아(Brescia) 지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벌인 전쟁의 여파가 심각하게 남아있던 곳이다. 사회기강은 무너졌고 성병인 매독이 젊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우르술라회는 바로 이때 소녀들을 이 병에서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

 

메리치 성녀는 과부와 친구들과 함께 매독에 걸렸거나 다른 병에 걸린 여자들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드나들고 있었다. 메리치 성녀 일행은 환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가정도 방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정을 방문하고는 더 어린 소녀들이 물질적으로나 윤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는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532년경부터 메리치 성녀는 친구와 함께 매독이 나은 아가씨들과 어린 소녀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집을 마련하기가 무섭게 초만원을 이뤄 이 수용시설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소녀들이 자기 집에 그대로 살면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방법으로, 동정녀 선생들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결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메리치 성녀가 하는 이 일을 함께하면서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처녀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1535년에 ‘성녀 우르술라의 동정녀회’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1536년에 브레시아의 주교가 인가하고 1544년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수녀회 설립을 인가하였다. 이 새로운 수녀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동을 한다. 하나는 한 장소에서 봉사하는 일과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동정생활을 하는 형태였다.

 

메리치 성녀의 이러한 생각은, 초대 공동체의 하느님께 바쳐진 삶의 형태라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성녀가 봉쇄수도생활을 가볍게 여겨서라기보다는 바로 그 시대 그 장소가 요구하는 영적이며 사도적인 소임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다른 수도회 역시 그 당시의 사회적이며 교회의 요청에 따라 세워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르술라회 역시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여성의 소임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형식의 수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녀는 이런 사도적 삶을 살기 위해서 복음삼덕을 강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먼저 순결을 강조하는데, 동정으로 산다는 것은 그 높으신 분의 각시가 됨을 뜻한다는 것이다. 성녀는 동정성을 바로 완덕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사랑이 부족하거나 질투, 태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신랑에 대한 충성의 부족 등 어떤 결함도 다 동정성을 거스리는 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창립 초기부터 동정성은 입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본요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회하기 위해서는 동정성이 증명되어야만 하였다.

 

순명 역시 성스런 삶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다. 순명은 하느님의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영혼의 빛과 같은 덕이라고 하였다. 또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법과 그리고 수도회의 장상과 가정의 부모한테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심지어 일상사조차 하느님 뜻의 표현이므로 순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것이 바로 가난이다. 특히 정신적인 관점에서 강조되었다. 가난을 따르는 데는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재산을 전적으로 포기하도록 형식으로 요구하지도 않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이웃을 돕기 위해서는 오히려 재산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스스로 일을 하며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가난의 정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메리치 성녀의 영성과 삶의 특징은 사랑이다. 밤에는 신랑인 하느님과 일치하는 긴 시간의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낮에는 소녀들을 교육하고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생활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수도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던 소녀들이 우르술라회로 몰려들었고 나아가 이들이 가정의 소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가정환경이 타락한 많은 가정들을 개선할 수 있었다.

 

우르술라회는 이렇게 가정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호하고 또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브레시아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명문가의 과부들을 각 지역의 책임자로 세웠다. 성녀는 위원회와 함께 각 지역의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남자 교육자와 보호자와 여자 교육생과는 아주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놓았다. 구역의 책임자들은 과부들이었지만 동정녀 선생들은 영적 지도를 담당했다. 처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규칙을 가르치는 일은 동정녀 선생들이 하였다. 또한 나이 지긋한 남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필요에 따른 논의를 함께하고 경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상담을 했으며 가정에서 사는 젊은 동정녀들을 보호하는 일도 하였다.

 

처음에 이들은 다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가난과 순명과 영원한 동정을 지키며 살겠다고만 하였지 어떤 서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가정에 살고 있었지만 진정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천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봉사하기 위해서 동정으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동정녀 선생들은 보름마다 소녀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더욱이 축일 때는 꼭 방문을 함으로써 올바로 살아가도록 지도를 하였다.

 

우르술라회는 소녀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사도적 사업과 동정으로 봉헌된 삶을 사는 두 가지 형태를 가졌는데, 창립자가 죽고 난 후에 봉헌된 동정의 삶에 대해서는 큰 반대가 따랐고 심지어 이단으로 의심받기까지 하였다. 본당신부들의 불신이 있었고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반대였다. 이러한 주변의 편견에 대해서 옹호하는 책자를 내는 한편, 새 총장 로드로네(Lodrone) 수녀는 아무런 표시 없이 평상복으로 사는 회원에게 가죽띠라도 매게 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자 메리치 성녀의 이상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과 변화해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바깥에서는 공격을 받고 안에서는 분열이 일었다. 1544년에 수도회 인가칙령이 났지만 혼란이 계속되자 새 총장 수녀가 반대자들을 몰아내고 가죽띠를 착용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수도원의 형태를 띠게 된다.

 

1566년, 밀라노에 부임한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우르술라회를 창설하고 ‘밀라노 우르술라회의 규칙’을 만들었다. 우르술라회가 세워지던 당시의 밀라노는 우르술라회가 창립될 당시의 브레시아와 상황이 비슷하였다. 성 가롤로는 동정녀들의 우르술라회와 과부들의 안나회 두 회를 창설하여 사회에서 사도적인 일을 하게 하였다. 1580년에 성 가롤로가 사목감사 일로 브레시아에 갔을 때, 어렸던 동정녀들이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으로써 장상의 일이 과부들한테서 이들 동정녀들한테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의 재속수도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15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여성들의 사도적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자적인 모임은 메리치 성녀가 활동한 초기의 활동정신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한 집에 모여 살기도 하였고 처음엔 모여 사는 사람이 적었지만 해가 거듭하면서 숫자가 불어났다. 결국 이제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수도생활이, 복음삼덕을 따르고 회개와 기도의 삶을 살지만 장엄한 서원을 하지 않고 간단한 서원만 하고 여러 가지 사도직 활동을 위해서는 쉽게 봉쇄구역을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수도형태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우르술라회는 세 가지 형태의 수도생활을 확산시켰다. 즉 재속단체나 교구소속 단체로서 재속회 같은 것이 그 하나이고, 수도회로 분류되는 단체생활을 하며 간단한 서원을 하는 형태가 그 두 번째이며, 세 번째 형태로서 아주 전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장엄서원을 하는 수도형태였다. [경향잡지, 1997년 1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8] 새로운 형태의 여자 수도회 (2)

 

 

트리엔트 공의회를 전후하여 새로운 수도회가 많이 창설된다. 새로운 수도회가 창설되는 배경에는 마르틴 루터의 출현이 무관하지는 않으나, 그것보다는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사회의 인문주의가 교회 안에도 자극을 주어 많은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개인의 성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관없이 발생한 작은 단체들이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적극적인 미사 참여와 기도, 영적 독서, 영적 대화를 주도한다. 새로운 단체들의 활동은 동시에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신심활동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형태로 새로운 수도회 창설을 가져왔다.

 

이 가운데 당시 교회를 개혁하고 활동하던 남자 수도회의 동반자로 창설된 여자 수도회가 바로 새로운 여자 수도회가 창설되는 바탕이 된다. 이들은 창설자의 이상을 실현하고 사회문제에 여성 사도직으로써 이에 응답한다. 관상적이고 봉쇄생활을 하는 여자 수도회가 남자 수도회와 같이 창립된 경우는 중세 때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자 수도회의 활동에 여성의 참여가 필요하여 발생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성 바오로의 천사회

 

1530년에 밀라노에서 창설된 성 바오로의 천사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였지만, 사도직 활동을 위해서 봉쇄구역을 떠나 사회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여자 수도회였다. 수도회의 창설자는 토렐리라는 귀족부인이나,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 진정한 창설자는 성 안토니오 자카리아이다.

 

안토니오 자카리아 성인은 1502년에 태어나 의사가 되었다. 고향인 크레모나에서 환자들의 질병을 고쳐주던 중 영혼의 질병에 관심을 갖고 신학자들의 책을 탐독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크게 매료된 그는 젊은이들에게 강론을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정신을 설교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는 바오로의 개종을 말하면서 바오로의 선교여행을 흉내내었다. 이때 도미니코회의 유명한 설교가 바티스타를 만나 사제가 되어 새로운 수도회 창설을 권유받았다. 스물여섯에 사제가 되어 첫 미사를 드릴 때의 일화는 그의 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첫 미사를 하느님과 친교만으로 모든 성가와 외적 예절을 거부하고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아주 조용하게 드렸다.

 

사제가 되어서도 설교를 하면서 병원과 감옥을 방문하던 그는 새로운 수도회 창설에 중요한 인물인, 구아스탈라의 백작부인 루도비카 토렐리를 만난다. 루도비카 토렐리는, 성 안토니오 자카리아의 설교로 회개하고 영적인 삶에 맛을 들였다. 이름도 영적 지도자의 정신적 지주인 사도 바오로의 이름인 바울라로 바꾸었다. 안토니오 자카리아는 밀라노에서 1530년에 귀족들의 도움으로 바르나바회를 창설하였다.

 

1535년에 바오로 3세가 수도회를 인준하였고 성 바르나바 수도원에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바르나비티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은 전례와 성사와 성체흠숭으로 사람들의 신심을 북돋워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성사 경시 풍조를 푸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이들 사제들과 같이 활동하게 된 여자 수도회가 바로 성 바오로의 천사회이다. 이들 남녀 수도자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사도직 활동을 하였다. 젊은이를 교육시키고 고아와 환자를 돌보면서 아울러 회개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새로운 활동에는 항상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어서 반대자들의 의심과 공격으로 교회재판에 회부되기도 한다. 재판은 1537년에 끝이나 의심은 풀렸지만, 봉쇄구역을 정하고 밀라노 지역 귀족 집안 처녀들 교육과 상류층의 부인들 사목에 주력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고 본당과 선교사업을 하고 있다.

 

 

성모 방문 수도회

 

성모 방문 수도회의 창설자는 샹탈(Giovanna Francesca de Chantal) 남작 부인이다. 영적 지도자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년)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을 창설하였는데, 이 수도회는 천주의 모친을 본받아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다. 처음에는 수도복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의 집과 환자 가정을 찾아보는 일을 하였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하느님의 사랑은 봉쇄생활이나 사제생활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엄격하고 철저한 규범보다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인간적인 연민에 기초한 신심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덕행과 함께 웃음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그리스도교적인 인문주의를 실천했다.

 

이러한 정신으로 출발한 성모 방문 수도회는 옛 형태의 수도원 사이에 논쟁의 효시가 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사회의 보통 여자들이 입은 옷과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여자들을 모아 영적 생활을 하며 공동체를 떠나 환자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엄격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처녀들이나 나이 많은 여자들도 기초적인 신심수련을 하면서 주위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인은 외적으로 세상과 멀리하고 아주 엄격한 가난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내적인 금욕을 요구하였다. 가족과 떨어지지 않는 대신에 이웃을 향한 전적인 헌신을 함으로써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프란치스코 주교와는 달리 리옹의 주교 디오니시오는 수도생활에 대해 보수적이고 새로운 형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관계로 교황청의 인가와 엄격한 봉쇄생활과 그리고 장엄서원의 수도생활을 고집했다. 결국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프란치스코 주교는 옛 형태의 수도생활을 선택하고 수녀들도 기꺼이 주교에게 순명하였다.

 

성모 방문 수도회는 162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을 다른 방법으로 계속했다. 그것은 봉쇄생활을 하는 수녀들과 함께 과부들을 받아들이고, 남편이 있는 사람도 며칠 동안 피정을 위해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사람을 방문하는 일을 계속했다. 어쨌든 성모 방문 수도회는 사랑의 외적 표현과 봉쇄구역 밖에서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방문하는 새로운 정신을 보여주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 회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빈첸시오 성인의 활동과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수도회이다.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전파를 위해 남자들의 선교회를 세우고(1625년) 여자들의 활동을 위해서는 애덕의 부인회(1617년)를 창설하였다. 성인의 활동은 프랑스 교회에 큰 활력이 되었다. 이러한 때에 여자 수도회를 창설하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루이즈 드 마리악(1591-1660년)이다. 돈 많은 과부가 거지와 환자들을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상류사회에서 볼 때는 아주 큰일이었다. ‘애덕의 부인회’는 귀족부인들의 단체로서 몹시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직접 가지 않고 하녀들을 대신 보냈는데, 이것이 소외감을 조장하자 거지들을 돌보는 일은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들이 하게 하였다. 이때 이 처녀들을 책임지게 된 마리악 부인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이들한테는 공동체적인 삶을 살면서 사적인 서원을 하기도 하면서 원만하게 활동을 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상황에서 법적으로 수도생활과 평신도 사도적 활동을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이들을 세속 옷을 입고 자신의 일을 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면서 공동체로 수도자적인 삶을 사는 단체로 정착시켰다. 1646년에 파리의 곤디 대주교가 인정하고 지역주교가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그 시점에서 그들의 활동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부터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들을 필요로 하는 본당에서 살았지만 수도자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어쨌든 새로운 사도직 활동과 이웃 자선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수도회는 다시 옛 형태의 수도생활로 돌아갔다. 우르술라회도 성모 방문 수도회도 옛 수도회 형태로 돌아가야 하였고, 영국 부인회도 교황청의 인준을 받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딸 회는 이제 곧 나타나는, 특별한 사도직 활동을 위해 창설되는 다양한 수도회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1655년에는 같은 선교회의 사제한테 지도를 받도록 레츠 추가경이 인준하였다. 1668년에는 클레멘스 9세 교황이 새로운 창설을 승인하여 오늘날까지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다.

 

 

동정 성모회

 

예수회의 규정을 적용하고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회의 반대자들의 박해를 함께 겪은 수도회가 바로 동정 성모회이다. 또 다른 이름은 영국 부인회라고도 한다. 그것은 초기 회원이 영국에서 피난 나온 영국 귀족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자신의 결혼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1534년에 영국교회의 우두머리는 왕 자신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하였다. 모든 사람들을 수장령에 서명하게 했으며 반대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곳이 수도원이었다. 재산은 몰수당했고 수도자들은 쫓겨나고 결혼을 강요당했다.

 

1609년, 메리 워드는 피안드르 지방에 영국 귀족들을 위한 학교와 양로원을 운영하기 위한 수녀회를 창설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피안드르 지방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창설자가 활동지역을 넓히기 위해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면서 신앙교육을 위한 제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점점 교회가 필요로 하는 여자들의 활동을 다 수용함으로써 젊은이 교육, 고아 돌보기, 본당활동, 병원활동들로 활동범위가 늘어났다.

 

창설자인 워드는 사도직 활동을 사랑의 실현으로 보았기 때문에 봉쇄구역에서도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도생활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예수회의 규정을 따르고 예수회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예수회 반대자들의 박해를 자초했다.

 

1703년에 클레멘스 11세가 동정 성모회 수도회칙에 대한 81개의 규정을 인정하고 전체적인 회칙은 1935년에 인정하였다. 1968년에는 현대에 맞게 개정한 새 회칙을 인정받고 지금도 4천 명 남짓한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7년 2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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